불교 역사를 보면.. 석가세존께서 법을 전하신 후..
세존의 눈높이로 법을 보려는 근본불교 시기가 있고..
제자들 눈높이로 법을 보려는 아비담마 시대가 있고..
중생의 눈높이로 법을 보려는 대승불교가 생겨..
동 아시아로 전해졌다.
동 아시아로 전해진 불교는 아비담마불교와 대승불교가 함께 전해졌는데..
동 아시아에서는 대승불교를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서연 : 대승불교는 보살불교라고도 하는데.. 왜 아비담마불교가 아닌 대승불교가 동아시아에서 주류가 되었나요?.
주나 : <경>을 보면 딱. 답이 나옵니다.^^.
<잡아함경>은 소박한 학술지처럼 딱딱하게 기술되어 있고, 전문적 불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요.
<대승경>은 논문이 아닌 문학작품처럼 표현하고, 용어도 그리 낯설지 않아요.^^
그리고 경의 목적도 <아함경>은 윤회하는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열반을 목표로 합니다.
그것이 인도인의 꿈이니까요.
그에 반해 우리 선조들은 세상을 온통 고통으로 여기지 않듯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무아[열반]를 꿈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보다는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삶을 바라지요.^^.
물론 행복한 삶이 여기서 불가능하다면 죽어서 영원한 행복을 꿈꾸지만..
완전한 사라짐인 무아보다 행복을 전하는 대승불교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겠지요.^^.
서연 : 그럼 불교의 핵심이랄 수 있는 무아는 한반도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나요?.
주나 : 우리 불교를 대승불교라 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무아라는 말 대신에 공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본 의미는 같을지라도 뉘앙스가 다르지요.
무아는 없다는 부정이 강한 반면에 공은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듯한 긍정이 강합니다.
하여 대승불교는 사회와 굉장히 친화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는데..
소수 권력이 전체 권력을 장악한 왕권이라는 시대에.. 불교라는 종교가 국민과 힘을 합치는 것처럼 보이는..
대승불교를 가만히 놔둘 것 같습니까?.
더군다나 한반도에 조선조가 들어서면서 불교는 척불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지요.
세상 종교 가운데 가장 엘리트적인 종교인 불교가 조선조의 불교 박해를 당해 무지몽매한 불교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스님이 똑똑해도 신자가 따라오지 못하면 그 절은 무지한 절이 됩니다.
그처럼 조선조는 무아나 공은 말할 것도 없고.. 보살이란 의미도 재대로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즉 대승불교의 보살행은 불가능해졌고.. 대신에 기복불교가..
참선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은 겨우 겨우 명맥만 이어올 뿐이었지요.
그러다 조선조를 멸망시킨 일본은 불교를 장려했습니다만.. 무아니 공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낮고..
21세기인 지금도 무아나 공이 불교의 중심이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서연 : 무아나 공이 없는 기복 불교는 미신 불교인가요?.
주나 : ㅇㅎㅎㅎ^^.. 그 말에 답하기 전에 미신이란 무엇인가요?.
미신(迷信, superstition)이란 과학적 관점에서 헛된 것으로 여겨지는 믿음이나 신앙이다.
마음이 무엇에 끌려서 잘못 믿는 것 또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는 것에 대한 맹신(盲信)을 의미한다. / 위키백과
위 설명대로라면..
기독교인이 믿는 유일신 존재나 그의 유일한 아들이 예수라고 믿을만한 과학적 근거가 있습니까?^^.
서연 : 없는데요..
주나 : 없지요. 그러면 기독교는 미신이 아닌가요?.
과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란 우상일 뿐이며, 기독교인은 맹신자요, 미신일 뿐입니다.
그리고 기복이란 그런 맹목적인 대상을 슈퍼 파워로 신앙하며 행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복 불교를 미신이라고 하려면 기독교는 미신 종교라고 해야만 합니다.
기독교나 불교나 다 같은 기복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미신을 믿는 종교라고 퍼뜨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6,70 년대 기독교 전도사나 몇몇 목사들입니다.
자기 종교를 과대선전하기 위해 적으로 보이는 상대 종교를 비하 선전하는 비겁한 수법이지요.
그런데 진짜 아이러니는 저런 무식한 방법이 사회에서 먹혔고.. 지금도 먹힌다는 겁니다.
제가 어릴 적 목사들은 불교를 미신 취급했어요. 상대적으로 기독교는 훌륭한 종교이고..
참 유치한 기독교적 발상이지만 지금도 먹히고 있어서..
절에서 한 음식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는 기독교인이 있지요.
식당에 가면 잘만 먹으면서.^^.
그러기에 여전히 저런 무지한 목사들이 있고.. 그 말을 믿는 기독교 신도들이 있어요.
저런 자들은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극우나 극좌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들입니다만.
서연 : 그래도 기독교인들은 돌로 만든 불상 같은 것에 복을 빌지는 않잖아요?.
주나 : 오늘 내용은 순진한 유치원 수준이 되고 있네요.ㅎㅎㅎ
십자가는 재질이 나무나 네온사인으로 돌이 아니라는 건가요?^^.
서연 : (...)
주나 : 기도 목적이 자기와 가족만이 부자, 당선, 합격, 출세, .. 이면 그것을 기복이라 합니다.
기복은 세상에 나와있는 모든 종교의 공통점이고 출발이 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거나, 대통령 당선을, 출세를, 무병장수를 바라는 것은 비판받을 이유가 전혀 없지요.
그것을 바라며.. 무당을 찾는 마음이나.. 십자가에 기도하는 마음이나.. 돌부처에 비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 종교는 성스러운 행동이고, 상대 종교는 미신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무지요 오만일 뿐이지요.
물론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려면 기복에서 끝나지 않고 타인을 자기처럼 여기며 그들과 함께 행복을 추구하려 합니다.
그러기에 종교라 하면 이기와 이타가 함께 있지요.
이천 년 전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나오는데.. 대승불교는 처음부터 이타행을 목적으로 합니다.
보살행은 바로 이타행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라 불리는 조선조 불교에는 보살행이 보이지 않아요.
일제 강점기에 그들의 탄압에 저항하여 독립군을 도왔던 스님과 신도들의 보살행은 거의 전하지도 않고 있구요.
더욱 두려운 것은 사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스님이나 신도가 있으면..
그들을 마치 뒤에서 수작을 부려 삥땅 하는 자들로 보는 눈초리입니다.
이런 풍토에서는 보살행이 자랄 수 없어요.
그러다 보니 이타행은 주춤하게 되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기도나 수행이 성행을 하게 됩니다.
서연 : 저도 보았어요. 무슨 봉사 단체다 하면서 자기들 주머니를 채웠다는 뉴스를..
주나 : 다시 말하지만 이기심은 우리 마음에 박혀 있다고 보아요.^^
그런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바꾸는 게 보살입니다.
비록 지금은 이타행을 하고 있다 해도 어느 순간 본능적인 이기심이 발동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봉사 단체로 잘하고 있던 곳이 순식간에 자기들 이익 단체로 변할 수 있어요.
그러기에 늘 자기를 경계하고.. 동료를 경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게 바로 보살 수행이라 할 수 있지요.().
이때 이타행의 근거가 되는 게 바로 무아인 '공'이라는 거고요.^^
공이란 내가 네가 될 수 있고, 네가 나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타가 곧 이기로 이어지는 원리지요.
서연 : 공이라..
보살은 '안으로는 깨침을 구하며 밖으로는 중생을 구한다'라고 들은 것 같은데요..
주나 : 그렇지요. 그 말을 바꾸면 '안으로 이기심을 멸하고 밖으로 보살행을 실천한다'가 되며..
보살은 사회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게 됩니다.
사회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게 보살행으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승불교다..
그런데 지금 우리 불교는 어떤 모습입니까.
대승불교라고 할 수 있나요?.
참고로..
법륜스님께서는
에너지가 왕성한 시절에는 보살행을 열심히 하고..
기력이 떨어지는 시절에는 수행을 하는 게 좋다고 하시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