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생활
1994.2.6 일요일
메홍손에는 방콕 직행항로가 없어서
치앙마이에서 갈아타야 했다. 그렇게 도중에서 시간을 잡아 먹다보니 우리는 저녁 무렵에야 돈므앙 공항에 도착 했다. 방콕의 날씨는 미소야와는 확연히 달랐다. 공항 대합실을 나서자 후끈후끈한 열기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이선생의 거주지로 이동했다. 이선생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분은 출타 중이라 만날 수 없었다.
우리는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아 인근 호텔에 묵게 되었다. 나는 방은 하나만 예약 하겠다고 하니 그건 안된다고 해서 방 두개를 예약했다.
이튿 날에 이선생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한 사람도 아닌 네 식구를 책임진다는 것이 크게 부담이 되었겠지만 선생께서는 내색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선생이 구해 준 팻부리公寓(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이 아파트는 화교가 운영하는 고층 복도식 아파트였다.
객실이 굉장히 많았다. 모든 객실을 12제곱미터였다. 방 천장에는 선풍기 한대가 작동했다. 난생 처음 써보는 선풍기였다. 그러나 선풍기는 제구실을 못했다.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은 시원한 바람이 아니라 후끈후끈한 바람이었다. 방이 비좁고 숨이 막히니
집집마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았다.
우리가 살던 미소야는 열대와 아열대가 겹치는 지역이어서 살기가 좋았지만 방콕은 완전히 열대라 굉장히 무더웠다. 2월 달인데도 낮에는 30도를 웃돌고 밤에는 열대야가 계속 되었다. 태국에는 과일의 왕이라고 하는 두리안이라는 과일이 있다. 이 과일은 맛있지만 냄새가 고약했다. 어느 방에서 두리안을 사다가 터뜨리면 구린내가 진동했다.
이선생이 전하는 정보에 의하면
우리가 미소야를 탈출한 후 쿤사 집단에서는 여러 개의 체포조를 구성해 우리를 추적 중이라고 했다.
이선생께서는 상황이 좋지 않으니 될 수 있는 대로 외출을 자제해 달라고 했다.
우리 때문에 제일 피해를 입는 사람은 메홍손의 방선교사였다
쿤사집단은 방선교사가 우리의 탈출을 방조 했다고 판단한 쿤사는 체포조를 메홍손에 상주시켜 방선교사를 감시하고 협박하고 위협 했다. 그리고 문씨를 내놓지 않으면 끝장을 내겠다고 선언 했다. 세계 제일의 마약 집단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나는 방선교사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다. 쿤사집단에 의해 달리다굼
선교회는 거의 마비상태라고 했다.
신병철 목사님의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나는 목사님의 제안에 따라 장교장에게 편지를 썼디. 내용은 이번 일이 방선교사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번 탈출은 나의 독자적인 결정이었지 방선교사와는 무관 했다. 이선생께서는 발신지를 노출하지 않기 위하여 그 편지를 베트남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발송 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 편지가 미소야에 잘 도착이 되었던 것이다. 미소야에서는 베트남 날인이 찍힌 편지를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이제 나에 대한 체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비로소 메홍손에서 체포조를 철수 시켰던 것이다.
그 무렵 미국 스프링시에 사시는 박화자 집사님이 우리를 만나러 오셨다. 너 고모를 통해서 안 분이다. 평소에 편지로 많이 소통했기에 처음 만났는데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너는 그분을 고모라고 불렀다. 너의 고모는 나이도 많고 허리디스크로 몸이 뷸편하신 분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를 보러 오섰으니 감동을 많이 받았다. 이틀간 우리와 함께 살면서 더운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그렇게 땀에 젖어 살면서도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시던 너 고모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 너 고모가 우리에게 생활비로 주고간 돈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너 고모께서는 임종을 하시면서 나에게 전해 달라고 미국인 담임 목사님께 500불을 맡기셔서 내가 잘 받았다.평생 잊지 못할 분이시다.
태국의 날씨는 열대와 우기로 나뉘었다. 5월부터 10월이 우기이고 10월부터 4월이 건조기였다. 우리는 건조기의 푹푹 찌는 더위에 시달리다가 우기를 맞았다. 우기는 건조기보다 살기가 훨씬 좋았다. 우기에는 하루에 소나기가 몇번씩 쏟아졌다. 아무리 덥다가도 소나기가 한 번 내리면 더위를 식혀 주었다. 방콕은 흐린 날씨가 거의 없었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금방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우리의 이선생꺼서는 감당하기 버거워 했다. 그리하여 교민들에게 도움을 호소 해 내가 알게 모르게 교민들의 신세를 많이 졌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 졌다. 하루는 우리 네 식구가 일말의 기대를 걸고 미국 대사관을 찾았다. 마침 대사관 직원 중에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키가 작고 머리카락은 까맣고 얼굴색갈은 흑인과 황인종의 중간 새갈이이었다. 나는 그에게 찾아 온 사유를 얘기 했다. 그런데 내 말은 들어주지도 않고 이상한 말을 했다.
당신네 같은 사람들이 미국에 와 살겠다면
전세계 사람들이 댜 미국에 와서 살 것이라며 비꼬았다. 그때 당한 수모가 아직도 잊혀지지 얂는다. 백인 직원이 우리더러 한국 대사관에 기보라며 택시 정차장까지 안내 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주태국 대한민국 대사관에 오게되었다. 대사관 건물 지붕은 파란 색갈이었다. 건물 스타일도 영상에서 보아 왔던 청와대와 많이 닮아 있었다. 젊은 영사님이 우리와 상담했다. 나는 대사관에 들어서면서부터 감정이 북받쳐 흐느껐다.
평소에 이선생은 우리 문제로 대사관과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므로 영사께서는 우리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대사관에서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없어서 안타까워만 할 뿐이었다. 마지막에 영사께서는 자기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 했다.
- 어디서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봐서는 여기서 취직을 하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 합니다.
영사님의 말씀은 옳았다. 사실 법적이 아니더라도 상식적으로 우리는 귀국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방콕의 교민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사관을 나와 다시 아파트로 돌아 왔다. 이선생께서는 합법적인 귀국이 불가능하다면 밀입국이라도 모색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말만 들어도 고마웠다. 그 가운데 고국에서 우리 일가족을 위한 구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고무적인 소식을 접했다. 그 무렵 마침 대사와 영사가 새로 부임하면서 우리의 문제는 급물살을 탔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신임 대사에게 부임하면 문씨 일가족 문제를 우선 순위로 해결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 내가 그럴 가치가 있는 인물이서가 이니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당시는 해외에는 많은 탈북자들이 떠돌고 있던 시기였다. 정부에서는 그들의 귀국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했다. 그러나 여지껏 마땅한 돌파구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우리 문제가 이슈로 부각 된 것이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나 우리 문제를 방콕에 주재하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과 연계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부가 최초로 추진하는 시범이었다. 먄약 이 시범이 성공하면 해외에서
떠도는 탈북자들이 귀국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그라하여 정부에서는 각별한 관심을 갖고 이 일을 추진 했다.
우리를 담당한 분은 새로 부임한 이영호 영사님이었다. 패기와 열정이 넘치는 친절한 미남이었다.
이영사께서는 우리가정이 난민판정을 따내기 위하여 매일 동분서주 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고등난민 판무관으로 부터 1차 심사를 받게되었다. 판무관은 남녀 두명이었다. 두명 모두 분단의 아픔을 체험했던 독일인이었다.
심사는 여 판무관이 주관 했다.
그녀는 보기에 좀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다.
먼저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나는 이름을 대고 나이는 57세라고 했다.
몇년도 생인가고 묻기에 1938년 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남자 판무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에게 말 했다.
나도 1938년 생입니다. 나는 올해 55세인데 그쪽에서는 왜 57세라고 합니까. 통역이 그 이유를 설명해 주니 판무관은 신기하단 듯이 웃어 넘겼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나는 모든 서류를 도둑 마쳤으므로 판무관실에 제출할 증거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증거도 없이 나의 진술만으로
난민판정을 내린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1치 심사는 나의 진술을 여 판무관이 기록하는 것으로 끝났다.
얼마 지나서 나는 다시 이영사와 동행하여 2차 심사를 받았다. 1차 심사외 별반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판무관이 바라는 것은
나로부터 최소한의 근거자료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아무런 서류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사무실은 무거운 분위기였다. 이영사는 당사자인 나보다 더 긴장되고 초조해 했다. 판무관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물었다. 만약 난민으로 판정나면 정착을 희망하는 나라를 말씀해 주세요. 내게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렸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이라고 답은 해 주었다.
나는 난민판정은 물건너 간 것이라고 생각 했다.
사건이나 재판에 적용되는 육하 원칙이 있다.
당시 내게는 육하 원칙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도 없었다.
그리하여 법률적으로는 물론 상식적으로도 허망된 일이었다.
그러나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나는 동남아에서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겪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위기들이 대부분 기회가 되었다.
나는 방콕에서 다시 한 번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위기의 정점에서 기회가 왔고 축복이 쏟아진 것이다.
7월8일,
나는 방콕유엔난민고등판무관이 발급한 난민판정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