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九章 사(死)의 유산(遺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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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은 서신을 와락 꾸겨버렸다.
- 외관영 영주, 석두 사(死).
놀라운 보고였다.
삼십육검 중 일인이며 무음검 석불의 형.
그런 사람이 죽었다. 적엽명에게.
그러나 한광은 놀라움보다도 아깝다는 감정이 더 컸다.
엄격히 말해서 석두는 십삼대 해남오지보다 항렬(行列)이 높
다.
허나 해남오지가 되면 각기 해남파 무인들을 수련시키는 수
련총(修練總), 모든 재화(財貨)를 관리하는 가물함(價物函),
해남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담하는 내관영(內關營), 해안
부터 그 너머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외관영(外關營), 장문인의
호법을 책임지는 추운단(秋雲團) 중 일각(一脚)을 총괄하는 직
위에 놓인다.
통령(統領).
해남오지를 일컫는 말이다.
직위는 사 년마다 교대되며 오 개 부처를 고루 견식한 이십
년 후에는 다섯 명중에 가장 뛰어난 수굴일지가 총관(總管)에
임명된다. 총관이 되지 못한 해남오지는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
간다.
총관은 천여 명에 이르는 문도들뿐만이 아니라 해남도의 안
과 밖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게 되는 것이다. 당장 지금 해남파
장문인직을 이어받는다 해도 아무 하자(瑕疵)가 없는.
해남파 장문인이 되기 위해서는 한가지 난관을 더 거쳐야 한
다.
이십 년 주기로 이어받는 총관 중 가장 뛰어난 총관이 되어
야만 한다. 무공, 인격, 명성, 발전 가능성 등에 대해서.
하파는 제일 먼저 외관영을 추천했다. 외관영을 장악하는 것
이 가장 시급하다면서.
- 가물함에 관한 일은 크게 변동될 소지가 없고, 또 제가 수
좌로 있으니 손 댈 필요가 없습니다. 내관영도 시급하지 않습
니다. 우화가 극성을 부리지만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
니다. 수련총은 해남문도들의 지지를 얻는다는 측면에서 꼭 장
악해야 할 곳이지만 그곳 역시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추운
단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잖아도 무적이라는 장문인. 그런
장문인을 호위하는 일에 변수(變數)가 생길 리 없습니다. 외관
영은 다릅니다. 해남도는 지리적 특성상 모든 일의 발단이 외
부로부터 시작됩니다. 살수도 외부에서 들어오고, 중원(中原)
에 대한 소문도 외부에서 들어오며, 해남파를 들썩이게 할 파
란(波瀾)도 외부에서 들어옵니다. 외관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선점해야 할 곳입니다. 마수광의 사건으로 확인되지 않았습니
까? 날다람쥐 같이 약삭빠르던 마수광의조차 초월이라는 말에
미끼를 덥석 물었고, 잔월검보를 회수하는 것은 물론 놈의 목
을 치는 것도 간단하다는 것을. 외관영을 완벽하게 장악하면
힘들게 싸울 일도, 골머리를 싸맬 일도 없습니다. 석두는 문제
삼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약점을 움켜쥐는 일이다. 약점이 있는 인간은 말 잘 듣는 강아
지처럼 꼬리를 치며 귀여움을 떨게 마련이고, 세상에 약점 없
는 인간은 없습니다. 석두를 장악하면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효
과도 있습니다. 남해삼십육검 중 일인이 자신의 동생이 아닌
남을 지지한다면 그 파장은……
안으로 황담색마와 종부권을 움켜쥐고, 밖으로 외관영을 움
직인다면 백 년 이래 제일의 기재라는 사촌 형, 건곤검 한혁을
제치고 장문인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하파의 생각.
한광은 하파가 권하는 대로 외관영부터 손을 댔다.
하파가 주절거린 말은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지만 어차피
두루 견식해야 하는 바에야.
"미련한 놈! 그 따위 놈에게 당하다니. 내가 석두를 잘못 본
모양이군."
한광은 무의식중에 거친 말을 씹어뱉듯이 내뱉었다.
"소공, 말씀을…… 지금은 애도(哀悼)를 표시할 때입니다."
하파가 간섭하고 나섰다.
해남오지가 된 다음부터 그의 간섭은 눈에 띄게 늘었다. 해
남 장문인이 되려면 마음을 숨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
였지만 귀찮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다.
해남도의 왕이 된 다음에도 말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게 무슨 왕이란 말인가.
쓸어버려야 한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인간들
은……
"공석인 외관영 영주는 부영주인 독검(毒劍) 장가태(張茄 )
가 맡게 됩니다. 비록 삼십육검에는 들지 못했지만……"
한광은 하파의 말을 더 듣지 않았다.
이미 외관영에는 흥미를 잃어버렸다.
독검 장가태는 강하지만 관심을 가질만한 인물이 아니다. 인
물이 못되는 사람에게 시간을 빼앗기는 것처럼 아까운 게 또
어디 있으랴.
한광은 작은 목함(木含)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큰 쥐 다섯 마리가 축 늘어진 채 꼼짝 않고 있었다.
놈들은 이틀을 굶었다.
이제 며칠만 더 굶기면 서로를 잡아먹을 게다. 종래는 마지
막 한 마리만 남게 될 것이고, 놈은 맹수와 다름없는 난폭함을
지니게 될 것이다. 목함 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물어뜯
는.
그런 상태에서 고양이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까?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을까? 아니면 '고양이 앞에 쥐'란 말처
럼 오금이 저린 채 속절없이 잡혀 먹힐까?
아직까지는 다섯 마리 모두 서로를 잡아먹을 생각이 없는 모
양이다.
'위선이야. 이 놈들도 어차피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후후! 위선을 벗어 던지고 본색을 드러내는
광경을 봐야 하는데……'
"소공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적엽명은 숨통만 간신히
붙어있어야 한다고."
"그럼 비가를 집적거릴 수 있는 사건이란 것이?"
"석영주는 불만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웅지(雄志)를 펼쳐야 할텐데. 대륙에서는 모두들 그렇게 하는
데. 해남도가 아니더라도 대륙에만 나갈 수 있다면. 십이세가
의 장남들이 한 번씩은 겪어야하는 심마(心魔)입니다."
"그래서?"
"해남파는 대륙으로의 진출을 금하고 있습니다. 무공은 지녔
으되 사용할 곳이 없으니. 내관영은 그나마 우화라도 있으니
분풀이를 할 곳이 있지만 다른 곳은…… 곪을 대로 곪았습니
다."
"언제까지 너스레를 떨 거야?"
"수굴일지가 되시려면 필히 아셔야 하는 문제입니다. 모두들
탈출구를 원하고 있습니다. 무공을 통쾌하게 펼칠 수 있는 탈
출구. 현실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잡기(雜技)에 몰두
하곤 합니다."
한광도 익히 아는 사정이었다.
해남파 무인들은 대륙으로 나가기를 원한다. 해남파와 어깨
를 나란히 하는 팔파일방의 무학을 견식하고 싶어한다.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는 소림사(少林寺)에는 스물 여섯 명이
펼치는 간가권(看家拳)이 있다고 들었다. 그 누구도 깨지 못한
무적의 권법이라지? 그런데 뭐야? 집을 지키는 권법?
소림과 더불어 무림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는 무당파(武當
派)에는 태극권(太極拳), 태극검(太極劍)이 있다. 첨연점수(沾
連 隨:상대방을 놓치지 않고 따라붙는 것)의 극치라서 왜 졌
는지도 모르게 지고만다는 무공.
음의 검법은 해남도에도 있다. 그 중 석가의 무음검은 미풍
조차 일지 않는다는 음음의 검법이다. 그러면서도 강(剛)과 유
(柔)가 깃들어 있다. 부드러움만으로는 진정한 무공을 성취하
지 못한다.
개방( )의 타구봉법(打狗棒法)? 하하! 우습다. 개를 때려
잡는 무공이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모두들 마찬가지다.
화산파(華山派)의 매화검법(梅花劍法), 곤륜파(崑崙派)의 운
룡대팔식(雲龍大八式), 공동파( 派)의 복마검법(伏魔劍
法)……
한결같이 진지하지 못하다.
투혼(鬪魂)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공을 장난으로 익히는 겐가?
해남문도들은 중원 무림을 종이호랑이처럼 가볍게 보았다.
해남파의 무공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검법이니 하나같이 처절할 수밖에 없다. 장난삼아 익힌 무공은
하나뿐인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
호기심은 치민다.
황담색마가 중원에 알려지고, 중원무인들이 찾아오고, 결전
을 벌인 사람들은 선조들이다.
선조가 남긴 서적을 들춰보면 팔파일방의 무공이 상당히 깊
고 심오하여, 비록 승리를 했을 망정 힘든 승리였다고 기록하
고 있다.
나름대로 뭔가 특징이 있으니 그런 글을 남겼으리라.
끓는 피를 속으로 삭히고 있는 해남문도들.
한광은 서둘지 않았다.
장문인이 되면 대륙으로 진출하지 마라는 율법을 깨버리리
라.
해남도에서처럼 공정한 비무를 통해 해남무공이 가장 강하다
는 것을 입증하리라.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다짐한 생각이었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아버지가 장문인으로 있는 한 절대 중
원 무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해남문도들은 다른 돌파구로 끓는 피를 삭혔다.
노름으로, 여자로, 술로……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그런 점
에 대해 관대했다. 정도에서 지나치지 않는 범주에서.
"석두가 잡기를 즐겼다는 말인가? 귀찮게 빙빙 돌리지 말고
왜 석두를 충동질했는지, 어떻게 충동질했는지 그것만 말해."
"석영주는 여색(女色)을 탐했습니다."
"석두가? 하하하!"
한광은 사람 좋은 인상의 석두가 여자를 보고 침을 흘리는
광경을 상상하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여족인입니다."
"그래?"
대수롭지 않았다. 그까짓 여족 계집 좀 건드렸기로서니.
"자식이 두 명 있는 것으로 압니다."
흘겨들었다. 계집을 건드리다보면 자식을 낳는 것이야 당연
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놈들은 자식이랄 수 없다. 여족인이
피가 섞였으니 그 놈들도 여족인이다.
"석두는 그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한광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거렸다.
계집을 건드리는 자는 많아도 건드린 계집을 책임지거나 여
족의 피가 섞인 자식을 사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석영주는 그 아이들에게 무음검법을 전수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해남십이가의 무공은 한족에게만
전수되어야 한다. 해남파가 만들어진 근원이 여족인의 반란으
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함이었으니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여족인에게 힘을 주는 자는 파문을 각오해야 한다.
파문이란 것이 무공을 익히고도 사용하지 못하는 굶주린 늑
대 같은 무인들에게 먹이 감으로 던져준다는 의미로 볼 때는
죽으라는 말과 다를 바 없지만.
그것 또한 한족일 경우이고, 여족인의 경우에는 즉시 참살해
도 무방했다. 그들의 일가족까지 모두.
"후후후! 그랬군. 그래서 석두가 꼼짝없이 하파의 말을 들었
군. 내키지 않지만 검을 들기로. 후후후! 하파…… 나는 네가
점점 무서워져. 실없이 머리만 큰 자들은 종종 말썽을 일으키
지."
하파는 독오른 독사처럼 살광을 번뜩이는 한광의 눈길을 담
담히 받았다.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충돌을 일으켜 강성
오가 가주들의 입을 막는 것. 두 번째는 적엽명의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것. 석영주가 죽을 줄은 예상치 못했
습니다."
"적엽명이 그렇게 강했나? 아니면 석두가 약했나?"
"적엽명이 강했습니다. 전검을 익히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한광의 몸이 굳어졌다.
"전검이라고 했나?"
"……"
"말해라. 전검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전검…… 전검…… 전검…… 푸하하핫!"
- 대저 무공을 익힘에 있어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한다.
앞으로 한 걸음 내딛기 위해서는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하는
것.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노력만이 무공을 수련하는 진실한 요
체(要諦)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일부 무인들은 노력 없이 고강한 무공을 얻고자 한다.
사검(邪劍)이 그렇다.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무엇의 힘을 빌려 강해진 검.
사검 중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검은 탈혼검(奪魂劍)이다.
탈혼검은 영매(靈媒)의 힘을 빌리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극히
난해하다.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탈혼검은 검을 전개하기에는 부
적절한 기수식을 펼친다. 일종의 검무(劍舞) 같기도 한…… 진
기(眞氣)를 순행(巡行)시키는 과정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당이 접신(接神) 행위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영매
를 몸 안으로 불러들이는 과정이다.
참으로 위험한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 일정한 수위까지는 오를 수 있으되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탈혼검을 상대하는 방법은 오로지 정심(精深)한 내력(內力)
이다.
탈혼검은 내력이 정심(精深)한 고수를 만나면 속절없이 무너
지고 만다.
- 탈혼검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검을 꼽으라면 전검을 말
할 수 있다.
실전을 통해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을 앗으면서 검의 묘용과
진리를 체득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검.
전검은 투로(鬪路)가 없다. 단지 신체의 모든 감각을 극대화
시킬 뿐이다.
바람이 검을 스치는 것 같은 미세한 움직임도 감지하고, 계
절이 바뀌어 검의 강도가 달라진 것도 깨닫게 된다. 종래에는
검의 기분까지 살피는 경지에 오른다.
처음에는 동물적인 감각에서 출발하되 정심한 감각으로 다듬
어진다고 봐야 한다. 또한 결전에서 전검을 사용할 정도라면
일단 동물적인 감각을 넘어섰다고 인정해야 한다.
전검은 살업(殺業)이 뼛속 깊이 박힌 자만이 이룰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 이루기 어렵다.
일부 전검에 뜻을 품은 자들이 나타났으되 결국 전검을 소지
하지 못한 이유는 살업이 너무 깊고 악독하기 때문이다. 중원
무림은 결코 살업을 간과하지 않는다.
전검을 소지한 자가 나타나면 재삼재사 숙고하여 검을 들어
야 한다.
깨달은 바가 너무 깊으니……
한광은 눈빛을 활활 불살랐다.
'전검이란 말이지. 전검……!'
아버지에게 검을 배우면서 탈혼검과 전검에 대한 말을 들었
다.
피가 끓었다.
그런 무공이라면 목숨을 걸고 시도해 볼만하지 않은가. 특히
전검은…… 이제 전검이 나타났다. 난생 처음 패배라는 것을
가르쳐 준 적엽명이 전검을 익혔다. 그 놈이, 그 놈이……
"쿠쿠쿠……!"
한광은 끊임없이 웃었다.
목함 안에서는 모종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쥐 네 마리가 자신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놈을 정한 것이
다.
그 놈은…… 이제 곧 동족들에게 뜯어 먹힐 놈은 새빨간 눈
을 디룩디룩 굴리며 계속 몸을 움츠렸다.
한광은 산짐승들이나 다닐만한 소로를 유람이라도 하듯이 천
천히 걸었다.
그의 머릿속은 전검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했다.
적엽명이 전검을 익혔다면 호적수(好敵手)일지 모른다. 어쩌
면 그가 강할 수도 있다. 터럭만큼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지
만.
나무들이 더욱 빼곡해지고 조그만 소로마저 끊겨버렸다.
한광은 잠시 생각했다.
어느 방향이었더라? 왼쪽? 오른쪽? 아니면 정면?
숲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한광은 낯익은 바위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곰처럼 커다란 바위.
한밤중에 보면 팔척거한이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형상으
로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한광은 피식 웃었다.
너무나 놀라 자신도 모르게 검을 빼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
로웠다.
바위를 옆으로 끼고 돌자 소로가 다시 이어졌다. 산짐승들은
용하게도 바위가 갈라진 틈으로 다닌 것이다. 소로를 따라 반
각 가량을 더 걷던 한광은 조그만 움막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
췄다.
움막에서는 음산한 사기(邪氣)가 물씬 풍겨 나왔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원래 을씨년스럽기 마련이지만 금방
이라도 쓰러질 듯한 움막은 황량함 이상의 머리털을 쭈빗 서게
만드는 공포가 있었다.
"두 달 만이군."
한광의 입에서 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움막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움막 근처에는 짐승도 나다니지 않는지 잡초가 허리춤까지
차 오를 만큼 무성했다. 묵중한 무게에 눌린 흔적은 전혀 발견
할 수 없었다.
통나무로 만든 문짝 주변도 훑었다.
아직 있다. 움막을 떠나면서 문짝 바깥쪽에 그려놓은 선이
아직도 있다. 문짝이 열렸다면 선을 지워졌을 텐데.
'아무도 오지 않았어.'
한광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성에 낯선 타인이 침
입하는 것처럼 기분 나쁜 일은 없으리라.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광은 문짝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움막 안은 정갈했다.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늘어진 것만 제외하면 떠날 때 모습
과 똑 같았다.
탁자와 의자도 가지런하게 정돈해 놓은 모습 그대로였고, 벽
에 걸어놓은 활과 화살도 손상되지 않았다. 침상 앞에 쳐놓은
붉은 색 휘장은 색깔도 변하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냄새다.
움막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물씬 풍겼다.
밥이 쉬고, 곰팡이가 슬다 못해 까맣게 변해 있었다. 나물도
썩었다. 맛있게 먹다 남기고 간 고양이고기도 구역질이 치밀게
했다.
그러나 냄새는 음식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한광은 냄새가 풍겨오는 곳을 찾아 침상으로 다가섰다.
붉은 휘장 너머로 은은하게 모습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
한광은 흥분에 겨워 숨이 가빠옴을 느끼고 깊게 심호흡을 했
다.
휘장을 걷었다.
침상 위에는 두 구의 시신이 누워있었다.
죽은 지 오래 된 듯 한 구는 구멍이 뻥 뚫린 얼굴뼈가 완전
히 드러났고, 다른 한 구는 반쯤 썩은 모습이었다.
한광은 천천히 이불을 걷어 올렸다.
숨이 더욱 가빠왔다.
몸통은 아직 완전히 썩지 않았다. 덥기로 유명한 해남도에서
유일하게 한여름에도 어름을 만져볼 수 있다는 천빙계곡(天氷
溪谷)은 시신조차 더디게 부패시킨다. 천빙계곡이 아니라면 벌
써 누르스름한 뼛조각으로 변해 있으리라.
한광은 잠시 썩어 들어가는 육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
이 두 사람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중이다. 세상에
서 얻은 육신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중이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답고 성스러운 광경이 또 있을까?
한광은 머리뼈가 완전히 드러난 해골을 집어들었다.
해골에 묻어있는 육신 조각을 털어 내고, 준비해간 마포로
깨끗이 닦았다.
해골은 곧 번지르한 윤기를 흘려냈다.
"아름다워. 아름다워. 너무……"
해골의 주인은 여자다.
살아서는 발가벗은 몸으로 거리를 활개치고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을 추녀(醜女)에 뚱보였다.
옆의 시신은 여인의 남편이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고 남편 또한 정상이 아니다. 어려서
질병을 앓아 얼굴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얽었고, 더군
다나 타고난 불구로 다리까지 절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눈을 피해 사냥으로 목숨을 연명하자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광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뿌듯한 희열을 느꼈다.
자신은 이들을 구원해주었다.
한 많은 세상에 미련을 버리라는 충고와 함께 편안한 안식처
를 찾아주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들 부부에게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리라.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뼛조각인가!
육신의 남은 조각을 완전히 버리기만 했어도.
한광은 아쉬움을 느끼면서 해골을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놓
았다.
마음이 급하더라도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더운 곳에 놔두면 시신이야 빨리 썩겠지만 자칫 뜨거운 열기
에 뼛조각이 변형될 우려가 있다.
한광은 아름다움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무척 슬플 것이다.
한광은 의자에 앉았다. 두 손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눈은
썩어 들어가는 시신을 바라보았다.
망막에 부부의 윤곽이 또렷이 그려질 무렵 그는 눈을 감았
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뚱보가 계곡에서 물을 긷는다.
놀라운 일이다. 천빙계곡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어려서부터
오지산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지만 천빙계곡에서 사람 그림자
를 발견하기는 처음이다. 그 전에도 보기는 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다.
호기심이 치밀어 여인의 뒤를 쫓았다.
여인은 무엇인가 불안한지 자꾸 뒤를 흘끔거린다.
그는 조심스럽게 뒤를 밟았다. 습관이었다. 여인이 상승무공
을 익힌 고수를 발견할 리는 없지만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습관
이 조심성 있는 행동을 요구했다.
여인은 소로를 걸어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뚱뚱하다. 소로가 좁아 보이지 않는
가. 몸이 뚱뚱하다보니 걷기도 힘에 부치는지 앉아서 쉬는 횟
수가 잦다.
여인이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다시 나왔다.
여인은 밥을 짓기 시작한다.
그는 차분히 기다렸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불쌍했다. 절룩…… 절룩……
여인과 사내는 뭔가 말을 나눈다. 그리고 움막 안으로 들어
간다.
그는 잠시 더 기다렸다.
돼지를 잡을 때도 궁핍한 돼지는 잡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모양세가 추해진다.
반각을 더 기다린 그는 통나무로 만든 문짝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놀란 얼굴들.
웃어주었다. 고통은 잠시 뿐이고 곧 평안한 휴식이 찾아온다
고 말해주었다.
사내가 뭐라고 말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채 걸
음을 떼어놓기도 전에 폭삭 무너졌다.
지실혈(志室穴)은 방광경(膀胱經)의 요혈(要穴)로 요추(腰
椎) 둘째 마디와 셋째마디의 중간에서 옆으로 손가락 하나 정
도 길이에 있다. 허리에 힘을 쓸 수 없으리라.
사내가 꿈틀거리고, 여인은 소리를 지른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데는 천주혈(天柱穴)이 제일이다.
여인은 쓰러졌다.
그는 여인의 배에 올라타서 푹신한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목을 졸랐다.
느껴진다. 공포, 고통, 절망…… 죽음.
여인은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인상을 찌푸리며 그가 만족할
만한 반응을 나타내주었다.
여인의 눈이 위로 뒤집히고, 혀가 목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르르하게 관통하는 전율.
사내의 눈은 공포로 물들었다.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조금만 참으면 안락한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거라고, 자신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사내의 목을 졸랐다.
목뼈가 부러지면 안 된다. 뼈에 손상이 생길 뿐 아니라 쉽게
죽은 시신은 짜릿한 전율을 안겨주지 못한다.
그는 두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신 조그만, 아주 조그만
보답을 받고 싶었다.
꿈틀거림과 발버둥을 감지하고, 혀가 목안으로 말려 들어가
는 소리도 듣고, 영혼이 육신에서 이탈하는 소리 정도는 들어
야 하지 않는가.
여인과 사내를 침상으로 옮기고, 옷을 벗겼다.
세상을 떠날 때는 찾아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떠나야 한다.
두 사람은 안식을 취했다. 평온한 모습으로……
한광은 깊게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당시의 상황이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떠오른다.
사내와 여인의 영혼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 느껴진다.
한광은 일어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깨부터 들썩들썩…… 자연스럽게…… 흥이 치미는 대
로……
"아아야 나비가례 알베 다나탸 옴 삼마라……"
한광의 입에서 알지 못할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의
춤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눈은 위로 뒤집혀 흰자위만 희번덕거
리는 가운데 무서운 살광을 쏟아냈다.
허리춤에 꼽힌 접선도 꺼내들었다.
활짝 펼치기도 하고 접기도 하면서 무당이 접신 행위를 하듯
이 너울너울 춤을 췄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쉬익!
몸과 접선이 합일되어 허공을 날았다.
사아악……!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흙벽으로 만든 담이 석자 가량 갈라져 입을 벌렸다. 갈라진
틈으로 초록빛 바깥풍경을 비쳐졌다.
"전검…… 기다려보지. 후후후! 고맙군. 전검을 익혀줬다니.
전검에 대한 궁금증을 풀게 됐어. 누가 죽나 해보자고. 후후
후!"
한광은 하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 파리해졌을 뿐 여인이 한 눈에 반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입가에 하얀 웃음이 걸리자 매력은 더욱 빛을
발했다.
1
한광은 서신을 와락 꾸겨버렸다.
- 외관영 영주, 석두 사(死).
놀라운 보고였다.
삼십육검 중 일인이며 무음검 석불의 형.
그런 사람이 죽었다. 적엽명에게.
그러나 한광은 놀라움보다도 아깝다는 감정이 더 컸다.
엄격히 말해서 석두는 십삼대 해남오지보다 항렬(行列)이 높
다.
허나 해남오지가 되면 각기 해남파 무인들을 수련시키는 수
련총(修練總), 모든 재화(財貨)를 관리하는 가물함(價物函),
해남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담하는 내관영(內關營), 해안
부터 그 너머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외관영(外關營), 장문인의
호법을 책임지는 추운단(秋雲團) 중 일각(一脚)을 총괄하는 직
위에 놓인다.
통령(統領).
해남오지를 일컫는 말이다.
직위는 사 년마다 교대되며 오 개 부처를 고루 견식한 이십
년 후에는 다섯 명중에 가장 뛰어난 수굴일지가 총관(總管)에
임명된다. 총관이 되지 못한 해남오지는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
간다.
총관은 천여 명에 이르는 문도들뿐만이 아니라 해남도의 안
과 밖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게 되는 것이다. 당장 지금 해남파
장문인직을 이어받는다 해도 아무 하자(瑕疵)가 없는.
해남파 장문인이 되기 위해서는 한가지 난관을 더 거쳐야 한
다.
이십 년 주기로 이어받는 총관 중 가장 뛰어난 총관이 되어
야만 한다. 무공, 인격, 명성, 발전 가능성 등에 대해서.
하파는 제일 먼저 외관영을 추천했다. 외관영을 장악하는 것
이 가장 시급하다면서.
- 가물함에 관한 일은 크게 변동될 소지가 없고, 또 제가 수
좌로 있으니 손 댈 필요가 없습니다. 내관영도 시급하지 않습
니다. 우화가 극성을 부리지만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
니다. 수련총은 해남문도들의 지지를 얻는다는 측면에서 꼭 장
악해야 할 곳이지만 그곳 역시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추운
단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잖아도 무적이라는 장문인. 그런
장문인을 호위하는 일에 변수(變數)가 생길 리 없습니다. 외관
영은 다릅니다. 해남도는 지리적 특성상 모든 일의 발단이 외
부로부터 시작됩니다. 살수도 외부에서 들어오고, 중원(中原)
에 대한 소문도 외부에서 들어오며, 해남파를 들썩이게 할 파
란(波瀾)도 외부에서 들어옵니다. 외관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선점해야 할 곳입니다. 마수광의 사건으로 확인되지 않았습니
까? 날다람쥐 같이 약삭빠르던 마수광의조차 초월이라는 말에
미끼를 덥석 물었고, 잔월검보를 회수하는 것은 물론 놈의 목
을 치는 것도 간단하다는 것을. 외관영을 완벽하게 장악하면
힘들게 싸울 일도, 골머리를 싸맬 일도 없습니다. 석두는 문제
삼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약점을 움켜쥐는 일이다. 약점이 있는 인간은 말 잘 듣는 강아
지처럼 꼬리를 치며 귀여움을 떨게 마련이고, 세상에 약점 없
는 인간은 없습니다. 석두를 장악하면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효
과도 있습니다. 남해삼십육검 중 일인이 자신의 동생이 아닌
남을 지지한다면 그 파장은……
안으로 황담색마와 종부권을 움켜쥐고, 밖으로 외관영을 움
직인다면 백 년 이래 제일의 기재라는 사촌 형, 건곤검 한혁을
제치고 장문인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하파의 생각.
한광은 하파가 권하는 대로 외관영부터 손을 댔다.
하파가 주절거린 말은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지만 어차피
두루 견식해야 하는 바에야.
"미련한 놈! 그 따위 놈에게 당하다니. 내가 석두를 잘못 본
모양이군."
한광은 무의식중에 거친 말을 씹어뱉듯이 내뱉었다.
"소공, 말씀을…… 지금은 애도(哀悼)를 표시할 때입니다."
하파가 간섭하고 나섰다.
해남오지가 된 다음부터 그의 간섭은 눈에 띄게 늘었다. 해
남 장문인이 되려면 마음을 숨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
였지만 귀찮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다.
해남도의 왕이 된 다음에도 말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게 무슨 왕이란 말인가.
쓸어버려야 한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인간들
은……
"공석인 외관영 영주는 부영주인 독검(毒劍) 장가태(張茄 )
가 맡게 됩니다. 비록 삼십육검에는 들지 못했지만……"
한광은 하파의 말을 더 듣지 않았다.
이미 외관영에는 흥미를 잃어버렸다.
독검 장가태는 강하지만 관심을 가질만한 인물이 아니다. 인
물이 못되는 사람에게 시간을 빼앗기는 것처럼 아까운 게 또
어디 있으랴.
한광은 작은 목함(木含)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큰 쥐 다섯 마리가 축 늘어진 채 꼼짝 않고 있었다.
놈들은 이틀을 굶었다.
이제 며칠만 더 굶기면 서로를 잡아먹을 게다. 종래는 마지
막 한 마리만 남게 될 것이고, 놈은 맹수와 다름없는 난폭함을
지니게 될 것이다. 목함 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물어뜯
는.
그런 상태에서 고양이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까?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을까? 아니면 '고양이 앞에 쥐'란 말처
럼 오금이 저린 채 속절없이 잡혀 먹힐까?
아직까지는 다섯 마리 모두 서로를 잡아먹을 생각이 없는 모
양이다.
'위선이야. 이 놈들도 어차피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후후! 위선을 벗어 던지고 본색을 드러내는
광경을 봐야 하는데……'
"소공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적엽명은 숨통만 간신히
붙어있어야 한다고."
"그럼 비가를 집적거릴 수 있는 사건이란 것이?"
"석영주는 불만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웅지(雄志)를 펼쳐야 할텐데. 대륙에서는 모두들 그렇게 하는
데. 해남도가 아니더라도 대륙에만 나갈 수 있다면. 십이세가
의 장남들이 한 번씩은 겪어야하는 심마(心魔)입니다."
"그래서?"
"해남파는 대륙으로의 진출을 금하고 있습니다. 무공은 지녔
으되 사용할 곳이 없으니. 내관영은 그나마 우화라도 있으니
분풀이를 할 곳이 있지만 다른 곳은…… 곪을 대로 곪았습니
다."
"언제까지 너스레를 떨 거야?"
"수굴일지가 되시려면 필히 아셔야 하는 문제입니다. 모두들
탈출구를 원하고 있습니다. 무공을 통쾌하게 펼칠 수 있는 탈
출구. 현실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잡기(雜技)에 몰두
하곤 합니다."
한광도 익히 아는 사정이었다.
해남파 무인들은 대륙으로 나가기를 원한다. 해남파와 어깨
를 나란히 하는 팔파일방의 무학을 견식하고 싶어한다.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는 소림사(少林寺)에는 스물 여섯 명이
펼치는 간가권(看家拳)이 있다고 들었다. 그 누구도 깨지 못한
무적의 권법이라지? 그런데 뭐야? 집을 지키는 권법?
소림과 더불어 무림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는 무당파(武當
派)에는 태극권(太極拳), 태극검(太極劍)이 있다. 첨연점수(沾
連 隨:상대방을 놓치지 않고 따라붙는 것)의 극치라서 왜 졌
는지도 모르게 지고만다는 무공.
음의 검법은 해남도에도 있다. 그 중 석가의 무음검은 미풍
조차 일지 않는다는 음음의 검법이다. 그러면서도 강(剛)과 유
(柔)가 깃들어 있다. 부드러움만으로는 진정한 무공을 성취하
지 못한다.
개방( )의 타구봉법(打狗棒法)? 하하! 우습다. 개를 때려
잡는 무공이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모두들 마찬가지다.
화산파(華山派)의 매화검법(梅花劍法), 곤륜파(崑崙派)의 운
룡대팔식(雲龍大八式), 공동파( 派)의 복마검법(伏魔劍
法)……
한결같이 진지하지 못하다.
투혼(鬪魂)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공을 장난으로 익히는 겐가?
해남문도들은 중원 무림을 종이호랑이처럼 가볍게 보았다.
해남파의 무공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검법이니 하나같이 처절할 수밖에 없다. 장난삼아 익힌 무공은
하나뿐인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
호기심은 치민다.
황담색마가 중원에 알려지고, 중원무인들이 찾아오고, 결전
을 벌인 사람들은 선조들이다.
선조가 남긴 서적을 들춰보면 팔파일방의 무공이 상당히 깊
고 심오하여, 비록 승리를 했을 망정 힘든 승리였다고 기록하
고 있다.
나름대로 뭔가 특징이 있으니 그런 글을 남겼으리라.
끓는 피를 속으로 삭히고 있는 해남문도들.
한광은 서둘지 않았다.
장문인이 되면 대륙으로 진출하지 마라는 율법을 깨버리리
라.
해남도에서처럼 공정한 비무를 통해 해남무공이 가장 강하다
는 것을 입증하리라.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다짐한 생각이었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아버지가 장문인으로 있는 한 절대 중
원 무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해남문도들은 다른 돌파구로 끓는 피를 삭혔다.
노름으로, 여자로, 술로……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그런 점
에 대해 관대했다. 정도에서 지나치지 않는 범주에서.
"석두가 잡기를 즐겼다는 말인가? 귀찮게 빙빙 돌리지 말고
왜 석두를 충동질했는지, 어떻게 충동질했는지 그것만 말해."
"석영주는 여색(女色)을 탐했습니다."
"석두가? 하하하!"
한광은 사람 좋은 인상의 석두가 여자를 보고 침을 흘리는
광경을 상상하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여족인입니다."
"그래?"
대수롭지 않았다. 그까짓 여족 계집 좀 건드렸기로서니.
"자식이 두 명 있는 것으로 압니다."
흘겨들었다. 계집을 건드리다보면 자식을 낳는 것이야 당연
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놈들은 자식이랄 수 없다. 여족인이
피가 섞였으니 그 놈들도 여족인이다.
"석두는 그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한광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거렸다.
계집을 건드리는 자는 많아도 건드린 계집을 책임지거나 여
족의 피가 섞인 자식을 사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석영주는 그 아이들에게 무음검법을 전수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해남십이가의 무공은 한족에게만
전수되어야 한다. 해남파가 만들어진 근원이 여족인의 반란으
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함이었으니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여족인에게 힘을 주는 자는 파문을 각오해야 한다.
파문이란 것이 무공을 익히고도 사용하지 못하는 굶주린 늑
대 같은 무인들에게 먹이 감으로 던져준다는 의미로 볼 때는
죽으라는 말과 다를 바 없지만.
그것 또한 한족일 경우이고, 여족인의 경우에는 즉시 참살해
도 무방했다. 그들의 일가족까지 모두.
"후후후! 그랬군. 그래서 석두가 꼼짝없이 하파의 말을 들었
군. 내키지 않지만 검을 들기로. 후후후! 하파…… 나는 네가
점점 무서워져. 실없이 머리만 큰 자들은 종종 말썽을 일으키
지."
하파는 독오른 독사처럼 살광을 번뜩이는 한광의 눈길을 담
담히 받았다.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충돌을 일으켜 강성
오가 가주들의 입을 막는 것. 두 번째는 적엽명의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것. 석영주가 죽을 줄은 예상치 못했
습니다."
"적엽명이 그렇게 강했나? 아니면 석두가 약했나?"
"적엽명이 강했습니다. 전검을 익히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한광의 몸이 굳어졌다.
"전검이라고 했나?"
"……"
"말해라. 전검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전검…… 전검…… 전검…… 푸하하핫!"
- 대저 무공을 익힘에 있어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한다.
앞으로 한 걸음 내딛기 위해서는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하는
것.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노력만이 무공을 수련하는 진실한 요
체(要諦)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일부 무인들은 노력 없이 고강한 무공을 얻고자 한다.
사검(邪劍)이 그렇다.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무엇의 힘을 빌려 강해진 검.
사검 중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검은 탈혼검(奪魂劍)이다.
탈혼검은 영매(靈媒)의 힘을 빌리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극히
난해하다.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탈혼검은 검을 전개하기에는 부
적절한 기수식을 펼친다. 일종의 검무(劍舞) 같기도 한…… 진
기(眞氣)를 순행(巡行)시키는 과정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당이 접신(接神) 행위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영매
를 몸 안으로 불러들이는 과정이다.
참으로 위험한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 일정한 수위까지는 오를 수 있으되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탈혼검을 상대하는 방법은 오로지 정심(精深)한 내력(內力)
이다.
탈혼검은 내력이 정심(精深)한 고수를 만나면 속절없이 무너
지고 만다.
- 탈혼검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검을 꼽으라면 전검을 말
할 수 있다.
실전을 통해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을 앗으면서 검의 묘용과
진리를 체득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검.
전검은 투로(鬪路)가 없다. 단지 신체의 모든 감각을 극대화
시킬 뿐이다.
바람이 검을 스치는 것 같은 미세한 움직임도 감지하고, 계
절이 바뀌어 검의 강도가 달라진 것도 깨닫게 된다. 종래에는
검의 기분까지 살피는 경지에 오른다.
처음에는 동물적인 감각에서 출발하되 정심한 감각으로 다듬
어진다고 봐야 한다. 또한 결전에서 전검을 사용할 정도라면
일단 동물적인 감각을 넘어섰다고 인정해야 한다.
전검은 살업(殺業)이 뼛속 깊이 박힌 자만이 이룰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 이루기 어렵다.
일부 전검에 뜻을 품은 자들이 나타났으되 결국 전검을 소지
하지 못한 이유는 살업이 너무 깊고 악독하기 때문이다. 중원
무림은 결코 살업을 간과하지 않는다.
전검을 소지한 자가 나타나면 재삼재사 숙고하여 검을 들어
야 한다.
깨달은 바가 너무 깊으니……
한광은 눈빛을 활활 불살랐다.
'전검이란 말이지. 전검……!'
아버지에게 검을 배우면서 탈혼검과 전검에 대한 말을 들었
다.
피가 끓었다.
그런 무공이라면 목숨을 걸고 시도해 볼만하지 않은가. 특히
전검은…… 이제 전검이 나타났다. 난생 처음 패배라는 것을
가르쳐 준 적엽명이 전검을 익혔다. 그 놈이, 그 놈이……
"쿠쿠쿠……!"
한광은 끊임없이 웃었다.
목함 안에서는 모종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쥐 네 마리가 자신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놈을 정한 것이
다.
그 놈은…… 이제 곧 동족들에게 뜯어 먹힐 놈은 새빨간 눈
을 디룩디룩 굴리며 계속 몸을 움츠렸다.
한광은 산짐승들이나 다닐만한 소로를 유람이라도 하듯이 천
천히 걸었다.
그의 머릿속은 전검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했다.
적엽명이 전검을 익혔다면 호적수(好敵手)일지 모른다. 어쩌
면 그가 강할 수도 있다. 터럭만큼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지
만.
나무들이 더욱 빼곡해지고 조그만 소로마저 끊겨버렸다.
한광은 잠시 생각했다.
어느 방향이었더라? 왼쪽? 오른쪽? 아니면 정면?
숲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한광은 낯익은 바위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곰처럼 커다란 바위.
한밤중에 보면 팔척거한이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형상으
로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한광은 피식 웃었다.
너무나 놀라 자신도 모르게 검을 빼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
로웠다.
바위를 옆으로 끼고 돌자 소로가 다시 이어졌다. 산짐승들은
용하게도 바위가 갈라진 틈으로 다닌 것이다. 소로를 따라 반
각 가량을 더 걷던 한광은 조그만 움막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
췄다.
움막에서는 음산한 사기(邪氣)가 물씬 풍겨 나왔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원래 을씨년스럽기 마련이지만 금방
이라도 쓰러질 듯한 움막은 황량함 이상의 머리털을 쭈빗 서게
만드는 공포가 있었다.
"두 달 만이군."
한광의 입에서 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움막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움막 근처에는 짐승도 나다니지 않는지 잡초가 허리춤까지
차 오를 만큼 무성했다. 묵중한 무게에 눌린 흔적은 전혀 발견
할 수 없었다.
통나무로 만든 문짝 주변도 훑었다.
아직 있다. 움막을 떠나면서 문짝 바깥쪽에 그려놓은 선이
아직도 있다. 문짝이 열렸다면 선을 지워졌을 텐데.
'아무도 오지 않았어.'
한광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성에 낯선 타인이 침
입하는 것처럼 기분 나쁜 일은 없으리라.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광은 문짝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움막 안은 정갈했다.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늘어진 것만 제외하면 떠날 때 모습
과 똑 같았다.
탁자와 의자도 가지런하게 정돈해 놓은 모습 그대로였고, 벽
에 걸어놓은 활과 화살도 손상되지 않았다. 침상 앞에 쳐놓은
붉은 색 휘장은 색깔도 변하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냄새다.
움막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물씬 풍겼다.
밥이 쉬고, 곰팡이가 슬다 못해 까맣게 변해 있었다. 나물도
썩었다. 맛있게 먹다 남기고 간 고양이고기도 구역질이 치밀게
했다.
그러나 냄새는 음식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한광은 냄새가 풍겨오는 곳을 찾아 침상으로 다가섰다.
붉은 휘장 너머로 은은하게 모습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
한광은 흥분에 겨워 숨이 가빠옴을 느끼고 깊게 심호흡을 했
다.
휘장을 걷었다.
침상 위에는 두 구의 시신이 누워있었다.
죽은 지 오래 된 듯 한 구는 구멍이 뻥 뚫린 얼굴뼈가 완전
히 드러났고, 다른 한 구는 반쯤 썩은 모습이었다.
한광은 천천히 이불을 걷어 올렸다.
숨이 더욱 가빠왔다.
몸통은 아직 완전히 썩지 않았다. 덥기로 유명한 해남도에서
유일하게 한여름에도 어름을 만져볼 수 있다는 천빙계곡(天氷
溪谷)은 시신조차 더디게 부패시킨다. 천빙계곡이 아니라면 벌
써 누르스름한 뼛조각으로 변해 있으리라.
한광은 잠시 썩어 들어가는 육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
이 두 사람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중이다. 세상에
서 얻은 육신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중이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답고 성스러운 광경이 또 있을까?
한광은 머리뼈가 완전히 드러난 해골을 집어들었다.
해골에 묻어있는 육신 조각을 털어 내고, 준비해간 마포로
깨끗이 닦았다.
해골은 곧 번지르한 윤기를 흘려냈다.
"아름다워. 아름다워. 너무……"
해골의 주인은 여자다.
살아서는 발가벗은 몸으로 거리를 활개치고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을 추녀(醜女)에 뚱보였다.
옆의 시신은 여인의 남편이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고 남편 또한 정상이 아니다. 어려서
질병을 앓아 얼굴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얽었고, 더군
다나 타고난 불구로 다리까지 절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눈을 피해 사냥으로 목숨을 연명하자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광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뿌듯한 희열을 느꼈다.
자신은 이들을 구원해주었다.
한 많은 세상에 미련을 버리라는 충고와 함께 편안한 안식처
를 찾아주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들 부부에게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리라.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뼛조각인가!
육신의 남은 조각을 완전히 버리기만 했어도.
한광은 아쉬움을 느끼면서 해골을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놓
았다.
마음이 급하더라도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더운 곳에 놔두면 시신이야 빨리 썩겠지만 자칫 뜨거운 열기
에 뼛조각이 변형될 우려가 있다.
한광은 아름다움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무척 슬플 것이다.
한광은 의자에 앉았다. 두 손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눈은
썩어 들어가는 시신을 바라보았다.
망막에 부부의 윤곽이 또렷이 그려질 무렵 그는 눈을 감았
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뚱보가 계곡에서 물을 긷는다.
놀라운 일이다. 천빙계곡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어려서부터
오지산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지만 천빙계곡에서 사람 그림자
를 발견하기는 처음이다. 그 전에도 보기는 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다.
호기심이 치밀어 여인의 뒤를 쫓았다.
여인은 무엇인가 불안한지 자꾸 뒤를 흘끔거린다.
그는 조심스럽게 뒤를 밟았다. 습관이었다. 여인이 상승무공
을 익힌 고수를 발견할 리는 없지만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습관
이 조심성 있는 행동을 요구했다.
여인은 소로를 걸어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뚱뚱하다. 소로가 좁아 보이지 않는
가. 몸이 뚱뚱하다보니 걷기도 힘에 부치는지 앉아서 쉬는 횟
수가 잦다.
여인이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다시 나왔다.
여인은 밥을 짓기 시작한다.
그는 차분히 기다렸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불쌍했다. 절룩…… 절룩……
여인과 사내는 뭔가 말을 나눈다. 그리고 움막 안으로 들어
간다.
그는 잠시 더 기다렸다.
돼지를 잡을 때도 궁핍한 돼지는 잡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모양세가 추해진다.
반각을 더 기다린 그는 통나무로 만든 문짝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놀란 얼굴들.
웃어주었다. 고통은 잠시 뿐이고 곧 평안한 휴식이 찾아온다
고 말해주었다.
사내가 뭐라고 말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채 걸
음을 떼어놓기도 전에 폭삭 무너졌다.
지실혈(志室穴)은 방광경(膀胱經)의 요혈(要穴)로 요추(腰
椎) 둘째 마디와 셋째마디의 중간에서 옆으로 손가락 하나 정
도 길이에 있다. 허리에 힘을 쓸 수 없으리라.
사내가 꿈틀거리고, 여인은 소리를 지른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데는 천주혈(天柱穴)이 제일이다.
여인은 쓰러졌다.
그는 여인의 배에 올라타서 푹신한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목을 졸랐다.
느껴진다. 공포, 고통, 절망…… 죽음.
여인은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인상을 찌푸리며 그가 만족할
만한 반응을 나타내주었다.
여인의 눈이 위로 뒤집히고, 혀가 목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르르하게 관통하는 전율.
사내의 눈은 공포로 물들었다.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조금만 참으면 안락한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거라고, 자신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사내의 목을 졸랐다.
목뼈가 부러지면 안 된다. 뼈에 손상이 생길 뿐 아니라 쉽게
죽은 시신은 짜릿한 전율을 안겨주지 못한다.
그는 두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신 조그만, 아주 조그만
보답을 받고 싶었다.
꿈틀거림과 발버둥을 감지하고, 혀가 목안으로 말려 들어가
는 소리도 듣고, 영혼이 육신에서 이탈하는 소리 정도는 들어
야 하지 않는가.
여인과 사내를 침상으로 옮기고, 옷을 벗겼다.
세상을 떠날 때는 찾아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떠나야 한다.
두 사람은 안식을 취했다. 평온한 모습으로……
한광은 깊게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당시의 상황이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떠오른다.
사내와 여인의 영혼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 느껴진다.
한광은 일어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깨부터 들썩들썩…… 자연스럽게…… 흥이 치미는 대
로……
"아아야 나비가례 알베 다나탸 옴 삼마라……"
한광의 입에서 알지 못할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의
춤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눈은 위로 뒤집혀 흰자위만 희번덕거
리는 가운데 무서운 살광을 쏟아냈다.
허리춤에 꼽힌 접선도 꺼내들었다.
활짝 펼치기도 하고 접기도 하면서 무당이 접신 행위를 하듯
이 너울너울 춤을 췄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쉬익!
몸과 접선이 합일되어 허공을 날았다.
사아악……!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흙벽으로 만든 담이 석자 가량 갈라져 입을 벌렸다. 갈라진
틈으로 초록빛 바깥풍경을 비쳐졌다.
"전검…… 기다려보지. 후후후! 고맙군. 전검을 익혀줬다니.
전검에 대한 궁금증을 풀게 됐어. 누가 죽나 해보자고. 후후
후!"
한광은 하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 파리해졌을 뿐 여인이 한 눈에 반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입가에 하얀 웃음이 걸리자 매력은 더욱 빛을
발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