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눈 속으로 떠난 고려댁/ 염성연/ 제23회 전원생활 수기 최우수작
그날은 꽃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솔솔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솜털같이 하얀 백양나무 씨앗을 하늘에 마구 뿌려댔다. 오월의 하늘이 하얀 눈이 하늘하늘 춤추는 꽃 하늘로 변했다. 땅에도 하얗게 덮였다. 하얀 꽃 융단을 깔아놓고 귀빈을 모시려는 것 같다.
중국에 살 때다. 친정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하던 일을 팽개치고 허둥지둥 달려갔다. 방에는 벌써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가득 모여 앉아있었다. 손님 중 절반이 중국식 꽃 적삼을 입은 한족 할머니들이다. 어머니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누군가 딸이 왔다고 알리는 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 한족 왕 할머니가 꼭 잡고 있던 어머니의 손을 내 손에 넘겨줬다. 자식에게 기름기를 다 빼앗긴 손가락은 마디마디 대나무 뿌리처럼 옹이 지고 소나무 껍질처럼 꺼칠꺼칠했다.
고운이, 고려댁, 나의 어머니
왕 할머니는 나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옆에 앉더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쳤다. 고려댁은 어릴 적 우리 이웃집에 살았지. 네 엄마의 별명이 고운이야. 예쁜 얼굴에 하는 짓이 고와 다들 그렇게 불렀어. 동갑인 나와 고운이는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어. 내가 일곱 살이 되던 어느 날, 아빠는 흰 광목천 한 필을 사 오더니 반으로 길게 찢어 기다란 띠를 만들어 내 발을 동여매기 시작했어. 울며 발버둥치는 나를 아빠가 붙잡고 엄마는 내 발가락을 안으로 접어 꺾어 넣고 움직일 틈도 없이 꽁꽁 동여매 놓았지. 어찌나 아픈지 숨이 넘어가라 소리치며 울었지만 막무가내였어. 너무 울어 목이 쉬었지만, 엄마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처럼 전족을 만드는 것이었지. 여인이면 꼭 걸어가야 할 길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엄마 아빠는 내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 문을 모조리 잠그고 일하러 나갔어. 나는 너무 아파 밥도 먹지 못하고 울기만 했지.
갑자기 창문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 이어서 고운이가 “왜 우니? 무슨 일이야?”하는 말소리가 들렸지. 내가 전족을 하느라고 갇혀있다고, 너무 아파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한다고 말하자 “내가 들어가 도와줄 수 있을까” 묻더군. 문은 다 잠겼고 창문은 너무 높아 키가 닿지 않았지.
고운이는 김치움에서 쓰던 작은 사다리를 꺼내어 창문에 기대어 놓고 기어올라 창문으로 내 방에 뛰어내렸어. 그러고는 어린아이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게 묶어놓은 광목 띠를 이빨로 피가 나도록 물어뜯어 풀었지. 그때의 그 해방감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어. 고운이는 어린 것이 어디서 그런 담력과 꾀가 나오는지 내 발을 풀어줬다가 엄마 아빠가 돌아올 시간이면 다시 감쪽같이 느슨하게 묶어놓아 어른들의 눈을 속였지. 거의 1년이 지나서야 우리 엄마는 내 발이 쪽발이 아니라 도둑 발이 된 것을 발견하고는 이런 발로는 시집가기 글렀다고 꺼이꺼이 울었지만, 때는 이미 원님 행차 뒤의 나팔이었지.
왕 할머니는 이야기를 마치면서 다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손등을 쓸어준다. 어머니가 잠시 눈을 뜨고 왕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때 그 시대에 전족을 하지 않은 중국 여인은 만에 하나 있을 둥 말 둥했다. 그러니 어른들이 여자 하나 버렸다고 야단치는 것은 당연했다.
어머니의 발치에 앉아 어머니의 발을 주무르던 박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고려댁이란 별명은 한복 때문이었네.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해 온 많은 사람은 까마귀 무리 속의 흰 비둘기 같아질 것을 꺼려 흰 조선 옷을 잘 입지 않았지. 그러나 네 어머니는 한복 사랑이 대단했지. 어떤 일이 있어도 치마저고리를 고집했단다. 그때 중국 사람들은 조선인을 고려인이라 불렀단다. 그래서 네 엄마는 동네에서 고려댁으로 불렸지.
나도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나에게도 봄 가을이면 꼭 한복을 입혔어요. 치마는 빨간 무명천이었고 저고리는 노랑 아니면 흰 바탕의 꽃부리천이었지요. 애들이 나더러 꼬마 고려인이라 놀리는 것이 싫어 한복을 입지 않겠다고 떼쓰면“너 고려인 맞아. 고려인을 고려인이라고 하는 건 욕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야. 너의 외할아버지가 독립군이 돼 항일하려고 조선에서 이 땅까지 왔단다. 왜놈들을 무찌른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조금도 부끄러워할 게 없고 자랑스러운 일이란다”라고 하셨죠. 그 말씀이 뇌리에 박혀 저는 어린 시절 뿐 아니라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늘 한복을 입고 출근했지요.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마쳤다. 어머니는 듣는지 못 듣는지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입은 벌린 채로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입술이 말라 터실터실 갈라졌다. 나는 더운 물에 거즈를 적셔 살포시 덮어드렸다.
어머니와 동갑인 외삼촌 댁이 내 말꼬리를 받았다. 너의 외할아버지이신, 나의 시아버지는 일본놈들의 등쌀에 1917년 가을걷이가 끝나자 1년 먹을 곡식과 농사지을 씨앗을 달구지에 싣고 조선을 떠나 백두산 기슭에 있는 왕청현 얼차즈 골에 짐을 풀었지. 이듬해 봄에 네 엄마가 태어났고. 그곳은 항일 유격 근거지였어. 외할아버지는 글을 많이 읽은 학자였으나 그런 환경에서 자식들을 제대로 공부시킬 수는 없었어. 여섯 아들은 그럭저럭 제 앞의 글은 읽을 수 있는 정도로 가르쳤으나 막둥이이자 하나뿐인 딸인 네 엄마에겐 여자라는 이유로 글을 가르치지 않았단다. 대신 살림살이와 바느질을 배우게 했지.
글을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된 네 엄마는 해방을 맞아 마을에서 야학을 꾸리자 한글 공부를 시작했단다. 그때 네 엄마는 서른을 넘긴 세 아이의 엄마였지. 큰아들은 시골을 떠나 타향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지. 네 엄마의 목표는 아들이 보내는 편지를 읽고 답장을 손수 쓰는 것이었어. 매번 네 아버지 입을 통해 아들의 소식을 듣는 것을 성에 차지 않아 했지. 마음 속 말을 자기 손으로 쓰고 싶었던 거였어. 그때 네 살인 너는 책만 보면 달려들어 찢었고 돌이 안 된 네 동생은 젖 달라고 아우성이었지. 네 엄마는 너는 등에 업고 젖먹이에게 왼쪽 젖을 물리고 오른손으로 글씨 연습을 했단다. 야학에 갈 때는 수업 시간에 울기라도 할까 봐 포대기 속의 아기를 그대로 왼쪽 옆구리까지 돌려 젖을 물리고 공부했지. 1년간 그런 자세로 한쪽 젖만 물리다 보니 왼쪽 젖만 발달해 큰 바가지만 한데, 오른쪽 가슴은 퇴화해 빈 가죽만 남았어. 그 모양은 아무리 유명한 만화가라도 그려내지 못할 것 같은 형상이었지. 요즘은 아름다운 가슴이 무너진다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지 않는 여성도 있다는데 네 엄마는 참 대단해. 한글 배우느라 제 한 몸을 내 던졌지.
“맞아요.” 내가 맞장구쳤다. 엄마 가슴만 보면 나는 웃다가 배에 금이 갈까봐 배를 끌어 안고 웃었지요. 우리가 놀리면 어머니는 누렇게 바랜 상장과 졸업장을 한 무더기 꺼내놓고 자랑했지요. 이것들과 바꾼 가슴이라고. 조금도 부끄럽거나 후회하지 않는다고.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듣다보니 새날이 푸름푸름 밝아오는 것도 몰랐다.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있으나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얼굴에 활짝 웃음기가 번졌다. 아마도 야학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우등생 졸업장을 받는 장면을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하얀 머리를 뒤로 쪽 지어 올리고 전족을 한 제갈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어머니는 우리 마을에 김치를 만들어 퍼뜨린 장본인이야. 반년씩이나 되는 백두산 밑의 겨울은 추웠지. 기나긴 겨울에 우리는 여름에 말려둔 무청시래기, 우거지, 무, 호박 말랭이 등 마른 채소가 아니면 간장에 절인 짠지나 소금물에 절인 신 배추로 반찬을 만들어 먹었지. 고려댁은 봄이면 달래와 무를 납작하게 썰어 만든 나박김치와 열무.풋배추로 만든 겉절이를 가져다주면서 맛 보라고 했지. 여름이면 오이 김치, 가을이면 깍두기. 생채. 갓김치와 영채 김치까지. 얼마나 맛이 좋은지 거친 수수밥과 강냉이 떡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갔다네.
제갈 할머니는 말하다 말고 꿀꺽 군침을 삼켰다. 그해부터 우리 집 뿐만 아니라 동네 중국집에서 김치냄새가 진동했지. 밥상이 풍성해진 것은 둘째이고 고뿔도 감히 근접하지 못해 건강해진 것이 첫째라네.
꽃눈 속으로 떠난 어머니
어머니는 눈을 반쯤 뜨고 사람들을 한바퀴 둘러보면서 싱긋 웃더니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다시 눈을 감더니 고개를 외로 떨궜다.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외친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고려댁, 고려댁, 고려댁!“
열일곱 어린 나이에 시집 가던 날, 처음 보는 신랑을 마주 보고 웃었다고 어른들로부터 심심풀이 놀림감이 되었지만, 늘 웃음을 물고 있던 어머니는 다시는 웃지 않는다. 자식 아홉을 낳았으나 해방 후에 낳은 셋만 겨우 건졌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대학 졸업을 앞둔 끌날 같은 맏아들을 가슴에 묻고 갈가리 찢겨 선혈이 낭자한 심장을 부여안고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나머지 자식들과 가족들을 쓰다듬던 그 손은 움직임을 멈췄다. 일제 강점기에 거칠고 황량한 만주에서 제1세대 조선인 후예로 태어나 이주민 고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그 몸은 떠나갔다. 다시는 오지 못할 곳으로.
창문을 열어젖혔다. 갓 솟아오른 태야이 집안 구석구석을 밝게 비춘다. 하얀 꽃눈들이 햇빛을 받아 연분홍빛으로, 보랏빛으로,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창문으로 시름없이 날아든다. 꽃눈은 사뿐사뿐 어머니 이불 위에, 머리 위에 곱게 내려앉는다.
첫댓글 문학적인 장치는 없지만, 중간중간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고려인 어머니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