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고요 최지훈 소설 심문모 전 제1부 외팔이 검객 3. 지, 곽, 사공 그들이 문모네 집은 달구초등학교에서 팔달교 쪽으로 올라가다가 있는 모포장을 지나서 있었다. 도살장은 거기서도 한참 더 올라가 논처럼 펼쳐진 미나리꽝의 들 가운데 있었다. 그러니까 거기서 윤호네 동네인 왜옥동네까지 걸어오려면 젊은이들의 걸음으로도 거의 이십 분 남짓 걸렸다. 그 길을 길자는 매일 걸어서 이 집까지 출퇴근 하듯이 오갔다. “지가 나갔다 오겠심더.” 길자가 그 고기 뭉치를 얼른 챙겨 들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는 이 집의 부엌 구조나 살림을 손금보듯이 훤히 꿰고 있었으므로 득순 씨가 따로 무슨 지시도 부탁도 하지 않았다. “아이고, 거기 무슨 대단한 일이라꼬 이 귀한 괴기를!“ 의수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황 국장이 자랑삼아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의수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한 가지는 얼핏 보아 진짜 팔과 손 모양을 한 것으로 고무와 가죽으로 겉을 싼 마네킹의 손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런 기능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늘어뜨려 놓거나 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손 구실밖에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전혀 손 모양과는 상관없이 마치 로봇의 손과 같이 기능 위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것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공통적인 점은 재질이 스테인레스 계통의 아주 가벼운 강철로써 그야말로 단순 작업의 손 노릇하게 만든 기계손이라는 거였다. “기계손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는 합디더만……. 저는 실제로 보지 못했고예. 군정 의무관이 제 팔의 제원을 재고 석고로 저의 팔 모양대로 뽄을 떠 가지고 주문을 한 모양입니더. 그래가지고 보내 온 기 지금 지가 이렇게 끼고 있는 거 하고, 집에 또 한 벌 있심더. 그거는 좀 더 무겁고 무뚝뚝하게 생긴 깁니더.” 미국내 기독교 자선 봉사 재단에서 공짜로 지원해준 것이라고 했다. 1/13 주문을 하고도 퇴원할 때까지도 오지 않아서 아마 안 되는가보다 했는데 바로 얼마 전에야 받아 착용할 수 있었다고 했다. 현재 자기가 차고 있는 것은 비록 두 개의 손가락밖에 없어도 관절이 많아서 상당히 섬세한 작업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숟가락질이나 펜을 잡고 글을 쓴다거나, 작고 가벼운 물건을 집어 들거나, 간단한 공구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집에 두고 온 손기계에 비해서 고장이 잦고, 부품이 우리 국내에서 현재로서는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형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집에 두고 온 또 한 벌은 보다 훨씬 단단하게 생겼지만 무겁지는 않고 기계 기능이 아주 단순해서 그저 꽉 집어 올리고 놓는 기능밖에 할 수 없는 것이란다. 그것은 기계 자체가 단순해서 고장이 거의 없고, 상당히 무거운 물건도 집을 수 있고, 웬만한 물건은 꽉 잡으면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의 관절이 없이 그냥 갈구리같이 생겼기 때문에 지금 차고 있는 의수보다도 더 혐오스럽다고 말했다. 아직도 다루는 것이 서툴러서 자유롭게 사용하는 데도 어색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계를 차고 있기 때문에 항상 짐을 지고 다니는 기분이라는 것이었다. 팔이 잘린 부분은 손목에서 3센티 정도 위였지만 기계는 왼팔의 어깨에서부터 입듯이 걸쳐 있다고 했다. 그래서 팔꿈치 관절 위치에 기계손의 관절이 딱 맞아 있어서 함께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득순 씨는 문모의 이야기가 잠시 끊어지자 “길자 오빠는 예수를 믿어야겠네예. 미국 기독교 단체에서 도움을 받았으이 고마운 마음에서라도……. 길자도 교회 댕기는데 이 참에 같이 댕기보소. 그라마 오빠 맘 속에 맺힌 한도 풀릴 깁니더. 한을 품고 살면 병이 됩니더. 오빠한테 해롭은 기라.” “숙모님요. 말씸 놓으시이소. 준호랑 여기 길자랑 같은 조카로 생각해 주시이소.” “그라까.” 득순 씨는 웃었다. “숙모님을 일본에서 처음 뵈었을 때 말입니더.” 문모가 우울한 표정에서 별안간 장난끼를 나타내면서 빙글거렸다. 득순 씨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싶어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기모노 입고 오싰길래 아하 준호 새 숙모님은 일본 여자구나 했심더. 그때 야아지[이 아이지] 싶우다. 니 윤호라 캤제?” 문모는 윤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젖먹이를 업고 나타나지 안했으면 처녀인 줄 알았을 깁니더. 지금도 변함없이 곱지만도 그때는 참 고왔심더. 그 후에도 아마 두어 차례 더 다녀가실 때마다 요행히 그때마다 먼눈으로 봤심더. 참말로 이뿌셨지예.” 그러니까 길자도 거들었다. “머라카노. 지금도 얼매나 이뿌신데. 집에서 일하는 차림으로 기시니까 그렇제. 공일날 교회 가실 때 함봐라. 온 동네 뒤져봐라. 우리 숙모님만한 미인이 있능강.” “야가 못할 소리가 없네.” 득순 씨가 길자의 허벅지께를 꼬집은 모양이었다. 2/13 길자가 ‘아야!’ 하고 허벅지를 싸안으면서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따져보이까네 불과 3,4년밖에 안된 땐데 꼭 십 년도 더 지난 세월 같심더.” “그렇제. 작년과 올해, 2년도 안 된 사이에 일단 세상이 확 바뀌고, 매일매일 새로운 일이 터지고 변하고 있으이까네 십년에도 못 겪어낼 일을 그저 한두 해에 처내고 있으이까네 안 그런가 말이다.” “맞심더.” 그러자 말꼬리가 끊어진 것처럼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자 순득 씨가 그 꼬리를 찾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예배당에 댕기자 카이까네 엉뚱한 소리로 이야기를 피하네. 나쁜 사람이데이.” 득순 씨가 문모를 보며 그렇게 나무랐다. “예비당에 댕기는 거……. 우리 집에서는 길자가 숙모님 덕분에 새로 믿기 시작했지만도요, 실은 제 이종사촌 형이 성문교회 전도사 했심더.” “그래애? 그기 정말이가? 그런데 길자는 그 새 전혀 그런 내색도 안 했제? 성함이 우째 되시는 분인데?” 길자는 소리 내지 않고 웃는 입을 한 손으로 가리면서 고개를 외로 돌렸다. “김주식이락합니더. 그런데 얼매 전에 그 교회 그만두고 시골로 가서 쪼꼬만 교회를 맡아 목회한다 카네예. 아직 목사가 못됐다 카던데…….” “그랬구마. 나도 신자 생활 연조라 칼 것도 없지만도 내가 성문교회 댕기기 전에 떠나셨던 갑다. 당회장 목사가 바뀔 때 떠나셨는동 모리겠네. 그라마 외가 집안이 기독교 집안인 갑네. 어무이도 신자시겠네?” “예, 울어매도 처녀때꺼정 예배당에 댕깄다 카네예.” “그라마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 깊겠다. 길자 오빠도 이 참에 믿어봐라. 남매가 같이 예배당에 댕기마 얼매나 보기 좋겠노? 그래 갖고 여기 우리 준호도 인도해주고.” 득순 씨는 그때까지 그저 듣기만 하고 있는 준호를 돌아보며 반갑다는 듯이 화제를 돌리는 듯했다. “외가가 신앙 집안이라 카이 생각났다. 길자 니도 알잖아. 내가 인사 시켜 줬제. 우리 교회 이윤옥 선생이라 카는 학생. 윤호 주일학교 담임반산데…….” “압니더.” “그 선생 외가도 신앙 집안이다. 들으이 즈거 집은 동촌 과수원하는데 예수를 안 믿지만도, 그 외가 식구들은 우리 교회 신도들이니라. 그런데 그 선생 어무이도 결혼하고는 신앙생활 접었다 안 카나. 그런데 윤옥이 선생도 여학교 들어가서 외삼촌 댁에서 밥붙여 묵으면서 학교 댕기느라고 외숙모 따라 우리 교회 댕기게 됐다 카데. 외삼촌 되는 사람은 얼매 전에 군대가 새로 생길 때 군인 장교가 됐다 카더라마는.” 그러다가 이야기는 문모의 팔을 이 모양으로 만든 사건으로 돌아갔다. “신문에 기사가 보도되는 바람에 검찰에서 수사를 받는 중에 사건이 크게 확대된 기지예.” “어떻게?” “지막철이 그 자식이 검찰에서 자기하고 나하고 단 둘이의 감정싸움 끝에 저지른 일로 밀고 나갔는데……. 그때 낫 같은 흉기를 휘둘렀기 때문에, 그것도 내 뒤에서 내리 찍었기 때문에 살인미수로 될 수 있다 카네예. 그렇게 공소될 것 같았거든예……. 그런데 강문식 기자께서 병원에 찾아주시고, 신문에 그게 그런 기 아이다 카고 밝히 주시서…… 개인적인 싸움이 아니라 노조가 저질은 부정을 막을라꼬 하다가 조직한테 폭행을 당했닥꼬 밝힌 깁니더……. 산업 시설을 무단 횡류하고 원자재도 도둑질해가지고 팔아 묵고……. 다 들통 난 기지예. 그래서……, 지금 재수사가 진행되고 있심더. 아마 신문에 나기 전에 경찰에서도 알아갖고 다오루 공장 노조를 덮친 모양입니더. 폭동이 나자 폭동 주모자들을 검거할 때 노조 간부 중 몇은 붙들려 들어가서 구속 중에 있었다 카네예. 그런데……, 그때까지는 지막철이 사건하고, 폭동 주모자들 사건은 별개로 취급한 기라예. 그런데……,” 3/13 문모가 감정이 치받치는지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면서 말을 이어가는데 어조가 고르지 않고 더듬고 있었다. “신문에 그래 났부이까네 그제사 그게 아이구나 싶었던 가봐예. 그래서 경찰에서 새로 공장을 덮쳐서 나머지 노조 간부를 찾을락 캤는 모양인데 헛다리 짚은 거 같심더.” 문모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역력했다. 잠시 숨을 끊고 눈을 몇 차례 슴벅거리면서 표정을 정돈시켰다 싶었는지 말이 빨라졌다. “……다 이미 도망갔부고 없다 아입니꺼. ……그렇지만도 현재 구속된 다오루 공장 노조 간부들에 대한 범행을 짚어보니 저한테 낫부림한 것도 이 폭동 사건과 한 덩어리락 하는 기 드러난 모양입니더. 신문에 난 대로 일대일 개인 문제가 아이라 공장 시설이랑 재물을 훔쳐내 갖고 팔아 묵고 들통이 나서 조직적으로 저를 공격한 기 들어났기 때문이락 하는 기지예. 물론 경찰들이 병원으로 지한테 여러 번 댕겨 갔심더. 아마 재판이 시작되마 지가 증인으로 나서야 할 깁니더.” “그렇닥캐도 지막철이라카는 인간은 살인미수죄를 면할 수 없을 끼구마는.” 그는 퇴원하는 길로 그 산동네 밀주집을 찾아갔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집은 이미 술집도 아니었고 주인도 바뀌어 있었다고 했다. 문모는 자기도 몰랐던 사실을 신문 보도로 그 집이 바로 남선 메리야스 노조원들의 근거지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막철과 일부 노조 간부들은 이미 구속 상태에 있었지만 공장 기물을 훔쳐서 처분하거나 은닉한 노조원들의 행방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문모 총각은 그 사람들한테 한이 맺힌 모양이제?” “하믄예. 정말 지막철 그 노무새끼야 말할 것도 없지만도, 그 놈을 조종한 노조 지도부 새끼들 모두를 그대로 갈아마시도 시원찮심더. 그러니까…….” 문모는 말을 하다가 창밖을 향해 돌렸다. 가슴에 뭔가 맺히는 게 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창밖은 아주 어두워져 있었다. “아직도 눈이 오나?” 득순 씨는 혼자말처럼 그랬지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창밖이 어둑해서 눈이 오는지 어떤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윤호야, 남포 심지를 좀 더 올려볼래?” 윤호가 남포 심지를 돋우자 방 안이 더 환해졌다. 전기가 들어오려면 아직도 한 반 시간은 기다려야 할 모양이었다. “지가 퇴원하고 나서 여기저기 많이 댕겼심더.” 4/13 “……?” “곽양수 씨 아시지예? 지난 가을꺼정 이 집에 살던 음악가 선생.” “문모 총각도 그 사람을 아는가베?” “알다말다예. 작년, 아니다. 지난봄에 여중 선생으로 가기 전까지 같은 공장에서 한 솥밥 묵고 같이 지냈다 아입니꺼?” “참 맞다. 그랬제.” “한 공장에 댕겨도 뭐 서로 사귀고 그런 사이는 아니었심더. 그분은 총무과에 있었고, 지는 생산 공장에 있었고예, 연배도 전혀 다르고예. 그냥 얼굴만 알고 지냈지예. 조용하고, 안정감 있어 보이고, 사람 편안하게 하는 분으로 인상 받았지예.” “노래도 잘하시고 해서 직원들 사이에도 인기가 있었겠네.” “노래를 그렇게 잘하시는 줄은 몰랐고예. 또 선생하던 분인 줄은 더더 몰랐지예. 그카다가 지난 봄에 중학교 선생으로 나가게 됐다꼬 그만 둔닥하이까네 좀 뜻밖이면서도, 우짠지 싶더라꼬예. ” 문모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방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그 곽양수가 지가 입원해 있을 때 문병 댕겨 갔심더. 우째 소문을 들었는지 알고 찾아 왔데예. 좀 뜻밖이었심더. 폭동이 있고 한 며칠 지냈던가 했을 때 였을 깁니더. 헤어진지 반년도 더 넘어서 처음 만났지예. 그런데 더 놀랜 것은, 입원해 있어 몰랐는데, 그 폭동 때 곽양수가 우리 공장에 다시 나타나서 시위를 선동하고 빨갱이 노래를 가리치고 했닥하는 말을 듣고 믿기 어렵었심더. ……그런데 문병 와서 하…… 하는 말이…… 말이예…….” 문모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들고 천정을 쳐다보았다. 기어이 눈물을 삼키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눈에 열기를 띄고 득순 씨를 바로 마주 보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혀 생각지도 않는 참말로 난데없는 소리를 했심더.”
곽양수는 문모를 문병하는 자리에서 말했다. “오랫만일세, 동무. 고생이 많아요. 그런데…….” ‘뭐, 동무?’ 문모는 깜짝 놀랬다. 이 자가 누군가? “문모 동무, 자네는 조직을 원망하는 거는 아이제?” 문모는 처음에 무신 소린가 했다. 도저히 그 사람한테는 안 어울리고, 또 그런 조직에 가담했을 거라는 상상도 안했던 사람한테서 그런 소리가 입에서 툭 튀어 나오니까 참으로 어리둥절했었다. 그 순간 며칠 전 폭동 나던 날인가 그 다음 날인가 준호가 와서 곽양수가 공장 노조 시위를 지휘하고 있었다는 말을 했지만 실감나지 않았었다. ‘설마 그 색시 같은 곽양수가…?’ 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 노조, 나아가서 그 노조를 움직인 공산당 조직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참말로 놀랐다. ‘아, 이 분이 공산당 간부라니. 준호 말이 헛말이 아니었구나!’ 이 색시같이 여려보이도록 얌전한 모습을 가진 사람이 거친 투쟁에 앞장선 사상가라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5/13 결국 알고 보니 공장에도 의도적으로 직공으로 취업해 가지고, 노조를 뒤에서 몰래 조직하는데 지휘하고 있었다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마치 자기는 노조원이 아닌 것처럼 하고서.
“우리는 그 사람하고 살기 시작해서 금방 좌익 사상가인 것을 눈치 채고 있었는데.” 득순 씨가 말했다. “아, 그랬심니꺼? 저는 참말로 몰랐심더. 나는 아무도 권하지 않아서 조직에 들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문병이랍시고 나타나서 마치 노조원에게 하듯이 날더러 말하는 깁니더.” “그 사람이 찾아간 거는 노조하는 사람들이 저지른 불법이랑 조직적인 공장 재산 빼돌리고 도둑질한 보도가 나가기 전에 있었던 모양이제? 보도가 나간 줄 알았이마 그렇게 무모한 문병도 안했을 끼고 했다 캐도 그런 말을 못했을 낀데.” “맞심더. 곽 가가 댕겨가고 나서 그런 기사가 신문에도 났었지예.” 곽양수가 문모 문병 왔을 때 그는 이미 쫓기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도 그만 둔 상태였던 것인데 대담하게 병원에 나타났던 것이다. 아무래도 문모 때문에 조직이 흔들리는 사태가 발생할 것 같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병 온 곽양수는 문모의 병상 옆에 바싹 붙어서더니 의자에 앉지 않고 두 손으로 자신의 두 무릎을 각각 짚은 채 허리를 굽혀서, 그의 눈을 병상에서 상반신을 세운 문모의 눈 가까이에 닿을 듯 맞추었다. 마치 어린 아이의 눈을 사랑스럽게 들여다보느라고 허리를 굽히고 눈을 맞추듯이. 그 특유의 부드럽고 평화로운 미소를 지닌 그 표정으로. 그리고 소리를 낮추어, “문모 동무, 조직을 원망하는 거는 아이제? 동무는 유망한 혁명전사가 아닌가? 지금도 당연히, 그렇제? 한때 실수로 자칫 조직을 망칠 뻔했지만 동무는 그것이 조직에 위해가 된다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거 알아.” -이 사람이 뭘 착각하고 있구나. 내가 조직원인 줄 알고 있는 모양인가베. 문모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기가 조직원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아니라고 하면 뭔가 해꼬지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문모 동무는 너무 순수해서 조직이 타락하게 될까봐, 그래서 오히려 조직이 반동 당국에 의해서 타격을 입게 되는 빌미가 될까봐 그랬다는 것을 나는 잘 알아. 그러나 그것은 조직의 심층적인 깊은 뜻과 미래의 이상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일어난 불행한 돌발사태지. 지막철이 그 동무는 앞뒤 가릴 줄 모르는 친구야. 생각이라는 게 없거든. 그런 친구를 교육하고 훈련할 기회가 없었던 게 탈을 불러일으킨 거라는 거 알아. 그러나 말이다. 더더욱 문모 동무 같은 이성적 동지는 필요한 거야. 비록 팔 하나가 없어졌다 할지라도, 낫을 휘두른 그 바보 같은 인간 열과도 바꿀 수 없는 조직의 인재란 말이지. 조직은 동무를 버리지 않았어. 버리기는커녕 더욱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그전보다 더욱 충성스런 투쟁의 선봉이 되어 주었으면 하네. 동무는 퇴원하면 바로 복직이 될 것이고, 조직은 동무를 열렬히 환영할 것이네. 그러나 입원해 있는 동안 그런 내색을 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반동 경찰 놈들이 심문을 해오면 어디까지나 이 피해는 그 가해자와 단 둘만의 우발적 사고로 처리될 수 있도록 처신해 줄줄 믿네.” 6/13 문모는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무슨 말로 대꾸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는 어정쩡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병실을 나갔다. 그런데 그가 병실을 나설 때 침대에서 내려서서 그를 전송하느라고 문밖까지 따라 나가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돌아서서 문모의 양 어깨를 잡고 침대에 도로 억지로 눌러 앉히면서, “환자가 걸어 나오면 어떻게 해. 그냥 누워 있게나. 조리나 잘 하시게. 장담할 수 없지만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조만간 다시 올 수 있을 걸세. 그때는 기분 좋은 만남이 되었으면 좋겠네.” 그리고는 부랴부랴 돌아서서 나갔다. 문모도 잠시 침대에 주저앉았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급히 일어나서 병실 문밖으로 후다닥 나가보았다. 곽양수는 문 밖에서 기다리던 누군가와 함께 복도를 걸어나가는 듯했기 때문이다. 복도 끝에서 계단 쪽으로 막 돌아서는 그는 투피스 양장의 젊은 여인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저 여자가 누구지? 같은 학교 선생인가? 참 학교에는 계속 잘 나가는지 물어볼 것을. 그리고 지난 스트라이꾸 때 지휘했다는 소문이 정말인지 물어봤어야 하는 긴데.’ 그의 말만 듣노라고 자신의 궁금한 바는 하나도 묻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미리 그가 나타날 것을 예측했다면 준비했을 텐데 뜻하지 않은 때 뜻하지 않은 방문이었던 탓이기도 했다.
“아!” 문모가 병원에 다녀간 곽양수 이야기 끝에 숨을 잠시 돌리는 듯하더니 별안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오른손 손바닥으로 자기 무릎께를 덮은 이불을 탁 쳤다. “그랬구나.” 그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낮게 부르짖었다. “와? 와 카는데, 오빠?” 길자가 문모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카고 보이 영추이도 곽 가하고 같은 빨갱이 조직원이었던갑다!” 문모는 역시 제 발끝이 묻혀 있음직한 곳의 이불을 내려다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고?” “니 영추이 알제? 사공영추이.” “그 백작댁이 집 머슴산다 카는 오빠 동기생?” “그래 맞다. 그 영추이 말이데이. 그아도 문병 왔었데이.” “우째 알고?” 7/13 “그캐 말이다.” 문모는 지금 ‘영춘’을 ‘영추이’라고 발음하고 있는 거다. 경상도 식 발음이 그렇다. “아까까지도 생각 못했는데 지금 곽양수 이바구를 하다보이 문득 생각이 났데이.” “?” 길자는 문모의 말이 무슨 소린지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득순 씨는 더더욱 무슨 소린지 몰라서 그저 남매가 하는 양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날 영추이가 즈거 직장 동료라꼬, 자기 또래하고 둘이서 병실에 나타났는 기라. 그렇제. …… 그때가 곽양수가 댕겨가고 한 이삼일이 지나서였던 갑다. 그때는 곽양수하고 영추이를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이 그기이 아이네.” “오빠, 그러니까 영추이 오빠가 곽양수하고 무슨 연줄이 있다는 뜻이가?” “그래. 지금 생각해 보이까 그렇네. 와 여태 그걸 못 깨달았을꼬?”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랬지. 해방되고 고향에 돌아와서 그날 처음 만났거등. 그 동안 우째 지내는지 아무 연락이 없어서 모르고 지냈는데……. 하기사 내가 귀국했다는 걸 소문내고 댕기지 안 했으이까 지가 알 텍이 없제. 내가 동창들 찾아댕긴 것도 아이고 말이다. 그런데 지가 우째 알고 내 입원해 있는 데를 알고 왔겠노. 그래서 댓듬 그랬제. 아이고, 니가 우째 알고 여겔 다 왔노? 하고 물어봤다 아이가.” 다시 문모의 이야기-. 그의 국민 학교 동창 동무인 사공영춘이 뜬금없이 문병 다녀갔었던 것이다. 그의 가족은 대대로 백작댁이 댁의 가노(家奴) 노릇을 해왔었다.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거의 오륙년 만인가? “야아, 영추이 아이가? 얼마마이고?” “한 오년 됐제? 육년이가? 우리 졸업하고 처음 아이가? 문모 니 졸업하자말자 일본으로 안 들어갔디나?” “맞다. 그렇네. 그라마 5년이제? 내가 일본 들어간 해가 소화 16년이었거등. 올해가 그러이까 우째 되노. 그것도 한참 안 썼다꼬 헷갈리네. 21년이가, 22년이가?” “하하하. 니 술 뭇나? 와카노? 지금이 무슨 세상인데 쇼와 타령이고? 지금은 단기 사이칠구년이데이.” 그는 이불 밖에 내 놓은 문모의 오른 손을 잡고 걸걸하게 말했다. “아이 그래, 그건 아는데……, 내가 도일(渡日)하던 해를 쇼와로 기억하고 있으이까 그렇제.” “그 칼 꺼 머 있노? 우리 몇 살 때 헤어졌는지 따지마 되제. 니랑 나랑 동갑 아이가? 졸업하던 해가 열니 살이었거등. 그때부터 치마 보자. …… 육년 맞네. 우리가 육년 만에 만낸 기다.” “그렁가? 귀밑이 보송보송할 때 헤어져갖고 이렇게 장정이 된 니 보이까네 세월이 간 거 같다만도 되게 빠르데이. 그런데도 니 모습은 한 개도 안 변했네.” “하하, 한 개? 모습도 한 개 두 개 카고 세아리나? 하하하. 하나도 안 변하기는 니도 마찬가지데이. 니는 얼굴에 광대뼈가 좀 불거졌구마.“ 영춘이는 두 손바닥으로, 일어나 앉은 문모 얼굴을 싸안고 쓰다듬었다. 문모가 오른손으로 그의 한 손을 잡아 얼굴에서 떼어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그가 두 손을 모두 거둬들였다. 8/13 “그런데 도대체 우째 알고 왔노?” “야, 일마야[이놈아], 니 소식 신문에 대문짝만하기 났는데 와 모리겠노? 그래 귀국했시마 이 성(형)한테 댓바람에 신고부터 해야 옳제. 우째서 소문 하나 없이 지내다가 이 꼴을 당해갖고 사람을 놀래키노 말이다.” “그래 니는 뭐하며 지내노? 아직도 침산동 백작어른 댁에 사나?” 그러자 영춘이 표정을 굳히며, “백작은 썩을 노무 백작! 우리가 이 해방 된 조국에서 와 그 친일 두목한테 목매고 산다말고. 갈아마셔도 시언찮을 인간인데.” 하더니 병실 바닥에 침을 찍 뱉었다. 문모는 그의 말투와 표정이 흥미롭다는 듯이 빙긋 웃는 표정으로 유심히 그의 눈을 마주 들여다보았다. 영춘이는 윗도리 안 포켓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담배 낱개비가 몇 개비 안 되는지 포갑이 거의 납작하게 구겨져 있었다. “니도 담배 피울 수 있제?” 그는 그러면서 갑에서 두 개비를 빼내어 자기 입에 하나 물고 한 개비는 문모 앞에 내밀었다. “팔 다쳤지 입 다친 건 아이니까, 하하. 그런데 그 썩을 백작 나리는 아직 갈아 마시지는 못했는갑네?” 문모는 멀쩡한 손으로 그 담배를 받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담배 개비는 가루가 빠져서 양 끝이 헐렁하고 껍질이 구겨져 있었다. 그것을 다친 팔의 깁스에 대고 톡톡 두들겨 가루가 한쪽으로 단단하게 몰리게 한 다음 입에 물었다. “시끄럽데이. 그 인간들 이바구는 꺼내지도 말거래이.” 영춘이는 담배를 입에 물고 그렇게 말하면서 겉 호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어 불을 켜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성냥개비의 황만 무너지고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것을 버리고 새 개비를 꺼내어 득득 그었지만 역시 불발이었다. 세 개째에야 개비에 불이 일었다. 그는 그것이 꺼지지 않게 다른 손으로 감싸면서 문모의 담배부터 불을 붙여주었다. 문모는 담배를 힘껏 빨았다. 담배에는 불이 붙었으나 성냥에는 불이 꺼졌다. 그러자 영춘이는 성냥개비를 바닥에 버리고 문모의 입에서 담배를 빼어 자기 입에 문 담배 끝에 대고 불을 댕기느라고 빨았다. 그리고는 연기를 한 번 뿜고 문모의 담배를 돌려주었다. “그라마 어데서 우짜고 사는데? 농사짓는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문모는 영춘이의 차림새를 아래위로 훑으면서 물었다. “내가 니한테 내 사는 거 고해 바칠라꼬 온 기 아이거등? 그래 상한 팔은 좀 어떠노? 좀 뵈줄 수 없나?” 그는 말을 돌렸다. 비로소 문병 온 목적에 맞는 화제로 돌아온 셈이긴 했다. 문모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빙신 팔띠기 보이 우짤 낀데.” 하고 외면했다. 이번에는 문모가 가슴에 칼바람이 분 것이다. 9/13 하나는 가슴 밑에 꽉 쌓인, 사회적 신분에서 오는 분노와 서러움 때문에, 또 하나는 사회적 갈등이 빚어낸 어이없는 피해자로서 분노와 불구가 된 신체에 대한 좌절감 때문에 젊은 가슴들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있었다. 영춘이는 더 궁금증을 풀고자 하지 않았다. 따로 위로할 말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병실은 잠시지만 무거운 침묵으로 젊은이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문모는 그러한 기분을 스스로 깨뜨려 보겠다는 듯이 순간 표정을 바꾸고, “그래 니 사는 이야기 좀 해봐라.” 하고 그의 이야기를 요구했다. “나? 나도 니 맨치로 기술자로 묵고 산다. 니는 옷에 구리스 같은 기름 바림서 살았겠지만도 나는 잉크를 처바리고 산다.” “잉크를 처발라?” “인쇄공 아이가.” “아아, 그거 좋은 기술이제. 그래 그거는 품삯을 지대로 받나?” “흥, 품삯 같은 소리. 그런 거 지대로 받는 세상이라카모 와 스트라이꾸하고 난리쳤간데?” “스트라이꾸? 너거도 스트라이꾸했나?” “이 조선 땅에 노동자치고 스트라이꾸 안하고 지낸 인간이 어데 있겠노? 니도 그래서 다친 거 아이가. 참 그라고 보이 니는 ……내가 문병 와서 육년 만에 만낸 동무 앞에서 할 소리는 아이다만도 ……스트라이꾸 시위 때 반동적으로 놀다가 그런 참변을 당했다 카더라마는, 그래 우짜자꼬 같은 노동자로 악질 자본가한테 붙어서 그런…….” “머시라? 반동적?” 문모는 한 순간 피가 멎는 것 같았다. 무슨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러자 영춘이가 얼른 손사래를 치며 “아이다, 아이다. 내가 환자 앞에서 할 소리가 아닌데 실수 했데이.” 하고 자신의 실수를 사과했다. 문모도 모처럼 만난 동무와 마음 상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그래 내가 못 들은 소리로 하께. ……그래 니는 스트라이꾸하는 데 그냥 뒤따라 댕긴 모양이네. 주먹이나 흔들어주고. 지금 이렇게 무사하게 돌아댕기는 걸 보이까네.” “허허허, 그래, 그렇지 머. 나 같은 기야 어데 가나 졸개 노릇 말고 할 기 있겄나? 그런데 니는 지금 반동 군정이나 경찰 개들한테 영웅 대접 받는 모양이데이. 이런 병실을 차지하고도 돈도 안 들고 있다 카이.” “돈도 안 든다꼬 누가 카더노?” “인자 들어 오민서 여게 간호실에서 병실을 묻니라고 묻다가 안 물어봤나? 어렵은 살림에 치료비가 여간 아닐 낀데 싶어서 말이다. 그래 들으이까 공장에서 다 대주고 있다 카는 갑더라. 그라고 퇴원하마 다시 공장에서 일하게 해준다꼬 약속했다 카데? 경찰에서도 문병오고 신문기자들도 번질나케 찾아온다 카이 여게저게서 도와줄 거 아이가.” “니 말뽄새가 빈정대는 거 같대이?” “허허, 내 말이 그렇게 들렸나? 그렇다카마 용서해라. 하하하. 세상이 하도 벨이 꼴리게 돌아가이까네 내 말뽄새가 좀 더럽아 졌는갑다. 하하하.” 10/13 “그기 아이고, 말끝마다 반동반동 캐샀는데 니는 인민을 위해 투쟁하는 투산갑다?” “오늘날 젊은이가 그런 식으로 안 살고 있는 인간이 어뎄노? 안 그렇다 카마 지 정신이 지대로 박였다 칼 수 없겠제. 미제 군정한테 벨을 빼주고 있는 얼가이나[얼간이나] 왜놈한테 충성하던 친일 매국 역도들이라모 모리지만도.” 문모는 이해했다. 그가 하는 말이 크게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젊은이 치고 적색 이념에 젖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동자라면 노조에 대부분 가입했고, 노조원이라면 그것은 스스로 투사이기를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몰라도 영춘이는 스스로 적색분자라는 것을 감추지 않고 있는 만큼 적극적인 사상가이거나 행동대원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모는 자칫 화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서로 마음에 상처를 낼 수 있겠다 싶어 말을 돌렸다. “어른은 건강하신가?” “응, 아부지는 노구를 추스리고 지내시지. 농사는 큰형이 다 맡아 하고 있고,” “참, 그렇겠군. 그래 형님은 장가드셨제?” “하모. 지금 조카가 바로 얼매 전에 돌을 지냈제.” “아들이던갑다.” “그런데, 골골거린데이. 돌날 잠간 집에 들렀는데 보이까네 형수가 젖이 모지래서 밥물을 멕이는데 잘 안 묵어 주이까 아아가 골았지러. 형수가 맘 고생인갑다. 호열자가 지나가고 나서 태어나서 망정이제. 조금 일찍 태어났더라면 어떤 변을 당했을동 모리제.” “그라마 니는 식구들캉 같이 안 지내고 따로 사는갑네?” “그래, 직장이 시내에 있으이까 집에서 댕기기 힘들거등.” “집이 어덴데?” “좀 멀다. 촌이데이.” “침산이 아니고?” “침산, 침산 캐샀치 마래이. 꿈자리 사납다.” “알았데이.” 그러니까 침산 백작댁이 집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만 이해하기로 했다. 문모가 영춘이의 손을 잡고 지긋이 잡아당겨 그의 윗몸을 자기 쪽으로 기울이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영춘의 귀 가까이로 입을 대고 소근대듯이 물었다. “니 좌익 운동하고 댕기나?” 그러자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얼굴을 돌려 문모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문모의 손에서 제 손을 천천히 빼고는 병실의 침대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두어 개의 스툴 중 가까운 것 하나를 끌어다가 침대 가까이 당겨 엉덩이를 내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혁명 사업을 한다고 해야겠제.” “혁명 사업?” 11/13 “그렇제. 지금 삼팔이북에서는 혁명 사업이 성공적으로 착착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남에서는 반동 미제 군정의 박해 때문에 지지부진 아이가. 그렇지만 결국 해내고 말 것이다. 지금 이 기회를 놓지마 우리가 피 흘려 얻은 독립이 헛되고 말 것이 아니겠나?” “그래애? 그런데 거기서 니가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머꼬? 인쇄 노조 운동이가? 그 카고 댕기도 무사하나? 가족들은 안 말리나?” 문모는 잇달아 물었다. “쉬잇!” 영춘이가 입술에 오른손 검지를 세웠다. 같이 온 동료가 문 쪽을 돌아보더니 가만히 나가서 문밖의 동정을 내다보고 문을 닫은 다음 다시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영춘이는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저 인쇄공일 뿌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겄노? 그냥 그런 활동을 하는 일선 동지들을 존경하고 지지할 뿌이제. 그래서 그 동지들이 나 겉은 무지랭이도 필요하다꼬 도와달라 카마 기쁘게 달려가서 도와주고 싶기도 하지만도 머 아는 기 있나, 할 줄 아는 기 있나, 힘이나 세나 ……, 그라이 도와달라 카는 이도 없지만도 도와 줄줄도 몰라서 그저 활자나 만지작거리는 신세다 그 말이다. 그렇다고 세상 부조리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인 기고하이 가마이 안 있을 작정인 기라. 그 날이 언제가 될 동 모리지만도.” “그러이까 마음으로는 지지하지만 정작 마음 겉이 행동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 말이고마.” “말하자마 그렇데이. 니도 마찬가질 기다. 인자 몸이나 추스르고 밖으로 나가마 무슨 일을 할 수 안 있겄나? 그렇지만도 사회주의 세상이 되마 니 겉은 불구자도 일할 기회는 얼매든지 마련될 끼다. 사회주의 세상은 비록 불구자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과 꼭 같은 대우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권리가 인정될 끼니까.” “그래애?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하하하. 그 세상 되도록 귓밥 만지고 있어야겠데이. 하하하.” 문모는 별안간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웃을 일이 아이다. 이 동무야.” “이 동무? 나 심 가데이. 하하하.” “농담하는 기 아이데이.” 그는 잠시 뜸을 들이는 듯 하더니 옆의 동료가 문 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을 힐끗 본 다음, “노서아 혁명 같은 혁명을 아무 때나 해낼 수 있는 기 아이제. 만민이 평등한 공산 사회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도 아이고,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이다 말이다. 피 흘려 쟁취해야 하는 거 아이겠나? 쟁기로 굳은 땅을 갈아엎듯이 이 모순 덩어리의 세상을 바닥부터 깡그리 끌어 엎어버리고 그 위에 천만 인민이 꼭 같이 누릴 수 있는 복된 세상을 세워야 한다 그 말이다. 그런데 해방된 조국은 마침 아무런 기득권의 장애가 없는 멋진 기회 아이가. 이 기회를 놓지마 정말로 값비싼 피의 댓가를 치루어야 할 처절한 투쟁을 치러야 할 끼다. 오직 미제의 반동 세력만 몰아 내마 이 조선반도 남북 삼천리강산은 전 인민의 복지, 만민 평등의 세상을 누리게 될 끼다.” 문모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을 그의 얼굴 가까이 하면서 음성은 낮았으나 힘 있고 유창하게 말을 쏟아놓았다. 12/13 “야아, 니 대단하데이. 언제 이렇게 인민의 전사가 되고, 유창한 사상가가 됐제? 공부 마이 했구나.” 실지로 문모는 감탄했다. 그는 국민학교 다닐 때 알던 영춘이가 이미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일본에 들어가 헤어져 있던 육년 동안이 영춘이에게는 혁명전사로서 다져지게 한 세월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4년은 일제 치하였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설마 광복한 지 2년 만에 그를 이토록 변화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니 중학교는 어데 나왔노?” “그런 거 알 거 없다. 그런 기 뭐 중요하노? 중요한 거는 니도 조선의 젊은이답게, 비록 한 손을 못 쓴다 캐도 머리나 입은 얼마든지 쓸 수 있제. 또 보이 이 오른손이 든든하네. 퇴원하마 내가 다시 함 오께. 그 때는 우리 같이 뜻을 모아보재이. 어차피 다시 그 다오루 공장으로 돌아갈 거 아이가?” “그래서?” “그라마 다시 노조에 가입해서 혁명 사업에 남은 한 손을 살려서 잘 써야 할 거 아이가? 오늘은 비록 한낱 밑바닥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그 노동의 귀한 경험이야말로 인민의 세상에서는 가장 값진 경력이 될 기라 말이다. 그 때를 위하여 젊은 사나이답게 나라와 민족을 위한 큰 뜻을 품어야지 쫀쫀하게 개인감정이나 사소한 일로 낫부림 겉은 싸움에 휘말려서 귀중한 신체를 훼손하는 불상사를 치러서야 되겠는가 말이데이.” “꼭 선배가 어린 후배 갈치듯 하네. 허허허.” “그랬나, 내가? 하하하. 그래, 또 보세.” 문모가 입원해 있을 때 찾아왔던 초등학교 동창 사공영춘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하고는 “…… 영추이가 그렇게 댕겨갔는데도 아까까지도 그아아가 곽양수하고 선이 닿아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데이.” 그리고는 이야기를 이렇게 매듭지었다. “그 아아야 종살이하던 신분이다 보이 빨갱이가 된 거는 어떤 의미에서 당연했을 끼다. 종살이로 태어났다는 그 근본 때문에 세상 살아가기가 얼매나 어렵겠는가 말이제. 그런데 그런 근본이 오히려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이 있다 카는데 와 그 사상에 안 빠지겠노? 지 말대로 피를 흘릴 값이라도 결사적으로 그 세상을 위해서 몸 바치겠제. 그 아아가 곽 가하고 한 통속일 거라는 생각까지는 못 미치고 있었다 말이다. 그런데 지금 곽 가 이야기 하다 보이까 곽 가가 하던 말하고 영추이가 하던 말하고 이가 맞는 소리가 있네.” “그기 뭔데, 오빠?” “낫부림한 새끼한테 가지는 원한을, 노조 조직과 연결하지 않도록 신경 쓰던 그 말 말이다. 영추이는 나를 아예 노조에 가입해서 활동하라고 하는 투였던 기 말하자마 좀더 영악했다꼬 하겠제.” 그리고 그 며칠 뒤에는 공장장이 찾아왔었다고 했다. |
좋은벗약초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