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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82
5월1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노동자 성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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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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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49p9p51t89k&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1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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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셉 성인이 있었기에 마리아께서도 짙은 안개 속 신앙여정을 충실히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살다보니, 시골 어르신들이 왜 그리 빨리 주무시는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어르신들 노동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육체노동을 해보니, 저녁식사만 끝나면 벌써 온 몸이 노곤해집니다.
묵주기도를 마치고 뉴스라도 보고 자려고 티비 앞에 앉으면, 단 5분도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고 앉아있는 형제를 발견합니다. “빨리 침실에 올라가 자!”라고 해놓고, 저 역시 몇분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노동자 성 요셉 축일입니다. 아마 목수요 장인(匠人)이셨던 나자렛의 요셉 성인께서도 하루 온종일 강도 높은 육체노동에 전념하셨을 것이고, 저녁 식사만 마치면, 마리아와 소년 예수께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자리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 성인은 매일 밤마다 성모님으로부터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빨리 씻고 들어가 자!”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본업에 최선을 다하며, 매일 반복되는 일상,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충실하게 살아가셨던 노동자 성 요셉이셨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일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던 요셉 성인이셨습니다.
고객이 요구에 따라 완벽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작은 것 하나라도 세심하게 헤아리던 요셉 성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모든 근로자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근로자의 날인 동시에 노동자 성 요셉 축일입니다. 짧게나마 산업의 역군으로 일하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땀흘려 일하고 난 후의 뿌듯한 성취감이 참 좋았습니다.
동고동락하던 직장 동료들과의 끈끈한 정도 잊지 못합니다. 부족한 내 두 손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뭔가 작게나마 기여했다는 데서 오는 기쁨도 컸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나치게 빡빡했던 근무 시간, 강도 높은 근무 조건으로 힘겨워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상습 피로, 수면부족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힘겹게 출근하던 기억들도 떠오릅니다.
마치 큰 시스템 속의 부속품이 된 느낌도 잊지 못합니다. 좀 더 충실하고 모범적인 직원으로 살지 못한 송구함도 큽니다.
이땅의 많은 근로자들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노사(勞使) 양측의 부단한 대화와 경청, 상호 이해와 배려를 위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근로자들,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요셉 성인도 하루하루 성실하고 근면한 노동으로 성가정의 생계를 책임지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에게 매일 주어지는 일들을 진지하고도 과묵하게 해나갔습니다.
특히 요셉 성인은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목재를 손질하면서도 자신의 인생 여정, 신앙여정 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찾아나갔습니다.
결국 그는 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을 기도화했습니다.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더불어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에 대단한 기여를 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 성인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서 안에서 요셉 성인은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만큼 요셉 성인은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충직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자기 길을 충실히 걸어가던 의인이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든든한 동반자 요셉 성인이 있었기에 마리아께서도 짙은 안개 속 신앙여정을 충실히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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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모의 살과 피를 먹지 못하면 패륜아가 된다>
명문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와오다니(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간 뒤 실종된 사건이야기 입니다. 엘리엇과 친구들은 영혼 구원이라는 한 가지 목적으로 아우카족 선교를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은 실종되었고 가족들은 이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으나 엘리엇과 친구들은 모두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끔찍한 비극을 미국 언론은 ‘이 무슨 낭비인가!’(What a waist!)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습니다.
20대에 홀로된 아내들은 풀뿌리 캐 먹는 법이나 도마뱀을 잡아먹는 법 등 정글 생존 훈련을 받았고, 짐 엘리어트의 부인인 엘리자벳 엘리어트는 2년 동안 간호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남편을 죽인 아우카족 마을로 들어가 정성껏 그들에게 봉사하였습니다. 아우카족은 남자는 죽여도 여자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기 날 때 아기 받아주고, 감염된 상처를 치료해주며 기생충 약을 주고, 그들에게 새로운 농사법도 가르쳐주었습니다.
추장이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존 엘리어트의 부인 엘리자벳이 대답했습니다.
“남편들이 다 하지 못한 말을 전해주려고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그 후 와다니 추장은 그 마을 전부와 함께 세례를 받았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된 4명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서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이 귀한 복음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죽음으로 우리는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벳은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쓴 기자에게 남편이 휘튼대학에서 썼던 일기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지 마라.” “이 쓸모없는 나뭇개비에 불을 붙여 주옵소서. 제 삶을 주의 영광을 위해 태워 주옵소서. 저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풍성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이야기는 ‘창끝’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피 흘림 없는 태어남은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요한 19,37)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은 당신이 주러 오신 것이 당신의 살과 피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우리 양식이 되시기 위해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을 믿게 하러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당신을 떠나가도 예수님은 이 말씀을 멈추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신 죽음 덕분으로 살게 되었음을 믿지 않으면 당신 구원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가끔 제가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 혼자 큰 줄 알아요!”
그러면 저도 장난으로 “아니, 그럼 더 크게 잡아당겨 주던가?”라고 대꾸합니다. 몸은 밥을 먹으면 크지만, 정신은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성장합니다.
만약 부모가 주는 음식만 먹고 그 안에서 부모의 살과 피를 보지 못하면 그 사람은 성장을 멈춥니다. 어른이 되지 못하여 어른으로 살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런 경우 패륜아가 되기도 합니다. 패륜아들은 음식은 먹었지만, 그 음식 안에 섞인 부모의 살과 피는 먹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체를 영한다고 다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 양식이 하느님의 살과 피임을 믿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패륜아가 될 수 있습니다.
TV 드라마 ‘허준’에 스승 유의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의태는 허준을 만나 자신의 모든 의술을 전수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유교 사상 때문에 인체 내부를 공부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유의태는 허준에게 얼음골로 급히 오라는 파발을 띄웠습니다. 스승의 부름을 받고 찾아간 허준 앞에는 왕골자리에 반드시 누운 스승의 시체와 유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람의 병을 다루는 자가 신체의 내부를 모르고서는 생명을 구할 수 없으니 비록 병든 몸이나마 제자에게 주니 정진의 계기로 삼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유서 앞에 꿇어앉은 허준은 험난한 의원의 길을 가겠다고 맹세를 하고 나서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여 오장육부와 인체 내부를 공부하였습니다. 이처럼 스승의 살신성인 덕택으로 명의가 되어 불후의 명작인 ‘동의보감’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꾸며낸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지 않으면 더는 발전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이를 극복하게 만드는 부모와 같은 스승의 희생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도 부모의 그런 희생 없이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듯,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그분의 살과 피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변합니다. 우리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 나를 위해 나에게 찔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성체를 마치 비타민으로 여기면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주신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우리는 성체 안에서, 그리고 모든 성사 안에서 들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합니다.
“나는 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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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54-58 :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목수로 일한 요셉 성인은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1955년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해마다 5월1일을 ‘노동자의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 회당에는 악의에 찬 믿지 않는 군중이 모여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을 때 그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찬양하는 마음이 생겨서가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들의 교만은 주님께서 완전하게 가르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라고 한다. 그들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솔로몬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아직 어릴 때,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왕위를 받아들였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지혜를 받기를 바랐고, 진심으로 그것을 청하여 그것을 받았다. 주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면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나자렛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고 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주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신다. 그분의 가르침에서 나타난 지혜와 기적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서 그런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들먹이며 그분에게 이런 능력이 생겨나게 할 어떤 실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샘으로 눈이 어두워졌다.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잘 알까?”(요한 7,15)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몹시 놀라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 하기만 했다. 그들은 그분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해야 했지만 오히려 그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을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하고 만다. 우리는 이웃을 보고 그에 대한 선입견으로 그를 무시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며 상대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하며 이웃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 이 말씀은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아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로 예언자들의 고향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그들의 혈연관계로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박해를 당했다.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사도 7,52)라는 말씀대로 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정의를 부르짖으며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였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항상 예언자들은 이렇게 박해를 받는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58절) 믿음이 없어 자격을 지니지 못한 이들에게는 권능이 힘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에 대한 놀라움이 커져 갔는데 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기적이 보여주는 광경이 아니라 기적의 소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기적이 소용이 없을 때는 행하지 않으셨다. 단지 몇 번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그들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루카 4,23)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저자가 기적을 일으켰더라면, 우리도 믿었을 텐데’하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나의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나를 판단하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업과 가족관계를 가지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전혀 틀리는 경우가 많다. 고향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가 반복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분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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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1)부활 제3주간 금요일>
영원한 생명, 만남 등의 단어들은 요한 복음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아냅니다. 생명을 얻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지고지순한 바람이겠지요. 문제는 그 방법이 무엇이냐인데,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쉽게 그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해 줍니다.
초대 교회는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다는 믿음을 다듬어 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 믿음을 미사성제를 통하여 이어 나가고 있지요. 성찬례는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매우 단순한 전례입니다. 그저 먹고 마시는 일이 중심이 된, 너무나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거창하거나 세련된 예식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손쉬운 몸짓들이 성찬례에 녹아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줄곧 예수님의 정체성,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먹고 마시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입니다. 먹을 것을 주면 먹으면 되고, 마실 것을 주면 마시면 될 일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때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느님을 만나고자 신앙생활을 하지만, 무엇을 추구하기에 앞서 우리는 무엇을 배고파하는지, 무엇을 목말라하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찾아 헤매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굳이 필요 없는 것조차 끝까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더욱더 많이 채우려 덤비는 오늘의 세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배고픔을 묵상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배고플 때 모든 음식이 맛있어 보이듯, 우리가 무엇에 정말 배고픈 것인지 살펴보는 일이 그리스도인이 맛볼 참된 양식을 찾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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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노동자 성 요셉>
초대 교회가 선교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무지함도, 교회 공동체의 게으름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여야 해!’라는 자아도취적 선민의식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주축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었고, 그리스도교가 유다주의를 기반으로 시작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 중심, 유다 문화 중심은 더욱 보편적인 선교에 걸림돌이었습니다. ‘적어도 유다의 이런저런 전통은 지켜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지.’라는 선민의식의 폐쇄성은 초대 교회가 성장하는 데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의 폐쇄성 때문에 존경은커녕 무시의 대상이 되어 버리십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보다는 예수님의 주변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부모가 누구며, 형제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집안이 어떤지 ……. 대개 사람들은 제 사상과 신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본질을 보는 눈을 잃어버리지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또 질투나 열등감에 그것이 사라져 버렸으면 할 때, 사람들은 자신 안에 단단히 자리 잡은 나름의 논리로 눈앞의 것을 깎아내리거나 무시하기 마련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저 보기 싫은 것뿐입니다. 그들의 비좁은 마음에는, 저들보다 많은 지혜와 깊은 학식을 지니신 것처럼 보이며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적어도 자신들보다 잘나서는 안 된다는 지독한 경쟁의식과 패배주의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더 많이 알고 더 자세히 아는 데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저 마음을 열고 마음의 빈자리를 만드는 일이 복음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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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아드님, 목수의 아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4-55)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 13,57)
마태오복음에서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목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르코복음을 보면 ‘목수’ 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 (마르 6,3)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믿고 있는 예수님은 인간 세상에서는 목수의 아들이었고, 목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 지역에서는 목수는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가장 높은 위치와 ‘목수의 아들’이라는 가장 낮은 위치는, 인간의 시선에서는 글자 그대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위치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족보를 보면,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입니다.(마태 1,16) 말하자면 요셉은 혈통과 신분으로는 고귀한 ‘왕족’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가장 낮은 계층 사람인 가난한 목수였을 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요셉의 직업만 보았고, 그의 혈통은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점보다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께서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로 사신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께서 어떤 목적이 있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은 ‘가장 낮은 삶’을 취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가장 낮은 삶을 취하셨을까?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내려가 주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올라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이 나에게로 내려오셨는데, 그냥 내려오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섬기려고 나보다 더 낮은 위치로 내려오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노동은 신성하다.” 같은 상투적인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우리는 예수님의 직업만 보고 예수님을 배척한 나자렛 사람들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나자렛 사람들의 말에는 목수에 대한 천대와 멸시가 들어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아마도 “목수는 목수 일만 해야 한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은 하지 마라. 목수 따위가 어찌 사람들을 가르치는가?”라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나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의 부자 신자들을 엄하게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교회 안에서든지 밖에서든지 간에 부자들끼리만 어울리면서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는 것은, 하느님께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사람을 차별하는 죄를 짓는 자들을 꾸짖는 말이 나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야고 2,1-4) 야고보서 저자는 ‘가령’이라고 말하면서 예를 들어 말하는 것처럼 표현했지만,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하나의 예가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늘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위, 직업, 재산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일 외에도 남녀차별, 인종차별, 민족차별 등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상에서 차별 당하는 ‘작은 이’로서 오신 분입니다.(마태 25,40) 즉 내가 차별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그 ‘작은 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일 수도 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다.”입니다.) 루카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불우이웃 돕기’는, 위에 있는 내가 나보다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주는 일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생색내거나 자랑할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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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성 안토니오 수도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눈을 멀게 하는 은총의 빛>
극렬 박해자였던 사울을 당신의 사도로 뽑으신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미 당신의 제자였던 사람 중의 하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지 않고 주님께서는 왜 당신의 박해자를 이방인의 사도로 뽑으신 것일까?
이 대목에서 주님께서 들려주신 한 비유가 생각납니다. 두 아들에게 일을 시켰는데 큰 아들은 “예”하고 대답하고는 하지 않은 데 비해 작은 아들은 “싫다”고 대답하였지만 곧 뉘우치고 실천하였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아주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건성으로 대답할 정도로 아버지의 뜻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면전에서 깨고 싶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는 좋게, 좋게 얘기하고 실제로는 자기 좋을 대로 하고 뒤통수친 것입니다.
이런 사람 여러모로 아주 불쾌합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것인지, 말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버지 말씀이지만 정말 하기 싫었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싫어하시는 것 알면서도 면전에서 싫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긴 하였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가서 했습니다.
반대를 분명히 했던 만큼 실천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제가 사장이라면 작은 아들 같은 사람을 부하직원으로 채용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뽑으신 것도 같은 이치인 것 같습니다. 나를 본 적이 없고 그래서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반대한다면 나를 보여주고, 나를 제대로 알게 하면 확실한 나의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보여주고 알려주기로 마음 먹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하실 일이 있으셨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의 눈을 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빛으로 사울의 눈을 못 보게 합니다.
은총의 빛은 이렇게 먼저 눈을 멀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합니다. 잘못 보는 눈은 멀게 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 눈도 멀게 합니다.
보지 못하는 기간은 사흘이 필요합니다. 사흘 정도는 보지 못해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흘이 지난 다음 주님께서는 눈에서 비늘을 떼어내시어 이제 봐야 할 것을 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먼저 주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저 인간 예수로만 알았는데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자기의 주인님이심을 알아 뵙게 합니다.
그리하여 하늘로부터 소리를 듣자 즉시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제 게임은 끝이 난 것입니다.
“주님!”하였으니 자기는 주님의 종이라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인님이 원하시는 것을 종으로서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열성껏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기가 받은 그 은총의 빛을 자기처럼 보지 못하는 이방 민족에게로 갑니다. 자기처럼 보게 하기 위해서.
이 아침, 사울을 보면서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것을 가장 싫어하시고 뱉어버리시는 주님께서 나를 뱉어버리시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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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어떻게 자기 살을(요한 6, 52-59)>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우리가 생활하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직면할 때가 있다. 자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체험을 하였다. 사울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그리고 사울의 상식적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의문의 질문을 한 것처럼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 해주었지만 유대인들은 도저히 알아듣지를 못하고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매우 당황스러워한다. 그 일로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다라면 상황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말다툼을 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주시기까지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오히려 감격하고 감사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자기들 살까지는 못 내주어 준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내어주는 사람을 살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하였고 자기들끼리 말다툼까지 벌였다.
우리도 학문을 하다보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을 읽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만나게 된다. 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또 때로는 장상의 말을 들었을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저 사람이 어떻게..."라고 당황하게 된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의 한계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은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한다.
김해 공항에 착륙하려다가 참사를 당한 비행기 탑승객 유가족들이 사건 현장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라고 울부짖으면서 통곡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가 많이 있고 도저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렇다. 이 세상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더 많다.
이 세상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기 때문에 우주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벽에 부딪쳤을 때 그것이 내 생활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 나의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또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나 말을 들었을 때 그 앞에서 절망하고 돌아설 수도 있다.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단절할 수도 있다.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말다툼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사실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서로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조금만 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화해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고놈의 한계점을 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서로 말다툼하고 갈라지게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적어도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것은 하나의 위기이다. 그 장애물 앞에 그냥 주저앉을 수도 있고 그것을 잘 극복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장애물 앞에 주저앉을 때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그것이 자기의 한계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그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바라보게 된다.
이런 식의 생활로서는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수도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항상 제자리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영적 세계는 무한하다. 또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도 아니다. 그래서 시인 괴테는 "사색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행복은, 탐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탐구하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을 조용히 우러러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구도자의 자세가 있다.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마리아가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듣지를 못했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2)고 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이다.
이 세상은 자기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휠씬 넓고 깊고 신비한 세계이다. 더군다나 영적인 세계, 하느님 나라의 세계는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담을 수 없는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한한 세계를 향해 늘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보고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그리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초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내놓으시는 그런 성체의 삶을 살 수 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자기들의 살을 먹으라고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은 한번도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놓은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삶을 살려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오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이었다. 바오로는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자기의 신앙이었다.
그가 예수님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자기의 신앙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그 이상의 세계 즉 자기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마스쿠수 사건을 통해 그 세계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영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적 세계는 거기에서 멈출 것이다.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 라고 곰곰이 생각하며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묵상하며 생활한다면 자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될 것이고, 이성적으로 도저히 알아듣지 못했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이성의 세계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리라.
그렇게 될 때만이 비로서 우리는 박해하던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듯이 우리의 삶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부터 신앙의 그 깊은 세계, 넓은 세계, 무한히 펼쳐지는 신비로운 세계를 볼 수 있으리라.
우리가 남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들어 주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나의 이해의 폭이 좁다는 것이요, 자기 자신의 영적 생활의 빈곤함을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인 사람만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서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깊은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때 아무리 우리가 성체를 영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예수님의 힘으로 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서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때까지 걸어가야 한다.
먹고 마시는 일은 간단할런지 모르지만 다른 이들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도록 내 살을 내어 주는 사람이 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알의 쌀이 밥이 되어 우리의 입에 들어가기까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봄부터 농부의 수고와 벼들의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포도송이가 포도주가 되어 우리들이 마시게 되기까지에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알의 포도송이가 우리 입에 먹혀지기까지에도 봄부터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을 맞으며 견뎌온 결실이다.
우리 자신이 남에게 먹히는 존재로 성장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 봄부터 부지런한 농부의 수고와 땀방울이 필요로 하였듯이 그렇게 우리의 영성 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남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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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앙인이 되는 길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앙인이 되는 경우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부모님은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 아이가 세례를 받도록 합니다. 아이에게 물어보지 않고 여행도 가고, 물어보지 않고 옷도 입히고, 물어보지 않고 이사를 갑니다. 아이는 아직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이는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세례를 받도록 하는 것은 교회의 법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신앙이 아이의 삶에 소중하고,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신앙인의 삶을 모범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저도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제게 성(性)을 주시고, 신앙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부모님께서는 사제가 되어서 교회에 봉사하는 저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시고, 응원해 주십니다.
본인의 선택으로 신앙인이 되는 경우입니다. 배우자가 원해서 신앙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친구나 이웃의 권유로 신앙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귀감이 되는 신앙인을 보고 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에는 많은 사람이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가 소외된 이들과 함께 했었고, 교회가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었고,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종교를 넘어서서 한국에서 존경받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성탄절이면 늘 가난한 공동체를 찾아가셨고, 그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공권력을 피해 성당으로 젊은이들이 들어왔을 때입니다.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학생들을 잡아가려면 먼저 나를 잡아가시오, 내 뒤에는 사제들이 있고, 수도자들이 있소. 그런 다음 학생들을 잡아가시오.” 학생들은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봉사하는 분들은 대부분 그 당시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개종해서 신앙인이 되는 경우입니다. 바다로 나갔던 연어가 강으로 돌아오는 걸 봅니다. 연어는 바다에서 거친 물살을 견디며 살았습니다. 잡혀 먹힐 위험도 이겨냈습니다. 그러기에 강으로 돌아온 연어는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 놓습니다. 개종한 신앙인은 신앙심이 더 깊어지곤 합니다. 참된 믿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잘못된 신앙을 가진 것을 후회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피정과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영적인 갈망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끼는 먼저 달려갔지만 게을렀습니다. 거북이는 늦었지만 성실했습니다. 신앙심은 세례의 연도에 비례해서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아세례를 받았어도, 본인의 선택으로 세례를 받았어도, 개종을 해서 세례를 받았어도 신앙은 영적인 갈망이 있어야 깊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능력, 경력, 재산, 혈통을 기준으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없는 자비와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은 사도 베드로와 함께 초대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을 위해서 선교하였고, 서간을 통해서 신자들을 격려했고, 가르쳤고, 꾸짖기도 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리와 신학적인 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했고, 늦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교회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5월의 첫날입니다.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코로나19를 이겨내고, 코로나19로 못 다한 신앙이 있다면 더욱 열심히 애덕을 실천하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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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노동자의 아들>
마태오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노동자의 아들>
노동자의 아들 예수가
지혜와 기적의 힘을 지니자
고향사람들은 비아냥댔지
저 사람은
노동자의 아들이 아닌가?
노동자의 아들 예수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노동으로 세상을 빚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창조하시는 하느님을 보았겠지
노동으로 스스로를 이루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계시는 하느님을 보았겠지
노동으로 벗을 섬기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돌보시는 하느님을 보았겠지
노동자의 아들 예수가
지혜와 기적의 힘을 지니니
나는 고백하리라
저 사람은
노동자의 아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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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2008년 8월에 일어난 중국 쓰촨성 대지진을 기억하시는지요. 이 지진은 무려 7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 재해였습니다.
당시에 2차 강진이 지난 후, 소방대원들에 의해 진흙벽돌 무더기 안에서 모녀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엄마는 9살 딸을 온 몸으로 감싸 안은 모습으로 숨져있었습니다.
단란하게 저녁식사를 하다가 딸을 구하려고 했는지 딸을 끌어안고 있는 엄마의 손에는 젓가락이 꽉 쥐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이 당시 서너 달밖에 안된 아기의 생명을 살리고 숨진 20대 여성의 일화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아기 엄마는 무릎을 꿇고 두 팔로 벽을 지탱한 채 품속에 아기를 넣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아기는 발견 당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이 옆에 놓여져 있던, 숨진 엄마의 휴대폰 액정에는 “네가 살게 된다면 엄마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꼭 기억하렴”이라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신종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의료진이 곳곳에서 희생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도 전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희생해 소중한 것을 지켜내고자 하는 이들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바로 우리가 이 같은 사랑을 우리의 부모님 혹은 주변인들로부터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기에 더욱 존경어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한편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들도 많이 있습니다. 모두가 힘들 때 자신의 이익만 취하는 이들, 남을 위해 희생하기보다는 그것을 회피하거나 심지어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돌아보게 되기도 합니다.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적으로 나 역시 그들과 같이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할수록 타인에게 양껏 사랑과 희생을 베푸는 이들에게 경외심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내가 준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논쟁을 벌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마음을 철저히 닫아두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보다는 시기 질투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고귀함만 내세우던 이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인간적으로, 현실적으로만 주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편 저는 이 유다인들과 다른 자세를 견지하는 이들을 종종 만나게 되는데, 예를 들면 봉성체를 가서 만나게 되는 분들입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하여 방문하지 못하고 있지만, 병자 영성체를 가게 되면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참으로 거룩하고 기쁘게 성체를 기다리시는 환우 분들을 보게 됩니다.
그분들은 성체를 모시고 온 저에게 말할 수 없는 감사를 표현 하시고 성체를 모신 뒤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힘든 와중에 자신을 방문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난 월요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태도입니다.
성당이 문을 닫았던 지난 시간, 성체를 모시지 못했던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몸이 그리웠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과 그리움이 가득했습니다.
물론 성체를 모시지 못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직접 나누어 받는 행위가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매 미사 때 모시는, 사제에 의해 축성된 성체는 그야말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예수님의 살덩어리 그 자체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극도의 희생마저도 감수하는 진정한 사랑으로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미사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성체 안에는 앞서 서두에 말씀드린, 자녀를 위해 무너지는 벽돌을 떠받치는 젊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악의 공격을 온 몸으로 막아내시는 젊은 예수님의 눈물이 있습니다.
젓가락을 꽉 쥔 채로 아이를 감싸 안은 부모의 마음으로,십자가를 꽉 짊어 진채 우리를 감싸 안고 계시는 어버이 예수님의 희생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고 참으로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됩니다.
이 뜻을 안다면 단순히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기억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이에 보답해야 합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있다면, 혹은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부족한 모습마저 지켜주고자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 때에 우리 안에 모셔진 성체가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됩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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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견과류 알레르기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8세 이하 아동 중에서 이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는 1,000명당 4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2008년 조사에는 1,000명당 14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왜 견과류 알레르기가 더 증가했는지를 연구하다가, 이 알레르기가 나타난 1990년대 부모들이 아예 견과류에 노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예 견과류를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하지 않게 해서 보호 면역 기능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견과류를 먹지 못하게끔 ‘보호받은’ 아이 중에서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날 비율이 17%에 달했고, 그렇지 않은 아이는 3%에 그쳤습니다. 면역체계는 생애 초반의 경험에서 단기간에 재빨리 학습하도록 고안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다양한 음식, 박테리아, 심지어 기생충에 노출되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백신 접종도 마찬가지지요. 백신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위험 요소를 하나둘씩 줄여서가 아니라, 면역체계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면역체계란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조건 피할 수만은 없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면역체계를 만들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즉, 세상을 살아가는데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는 면역체계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몸과 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우리의 머리로도 예수님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사 안에서 예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분의 참된 살과 피를 먹으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살을 받아먹는 이는 생명을 먹고 마시는 것이므로 그분과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하기에 어떤 것에도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됩니다.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면역체계를 만들어주는 참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많은 사람이 영양제나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습니다. 특별한 병이 없는데도 이러한 것들을 챙겨 먹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혹시 내게 다가올 병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당신의 살과 피는 세상의 그 어떤 영양제보다도 또 몸에 좋다는 음식보다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효과도 막강합니다. 따라서 성체 모시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성체는 주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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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야 할 것>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모두가 여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끼고 절약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머릿속에 세뇌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기워입는 것은 당연했고, 헤져서 도저히 입지 못할 상태가 되면 그곳에 다른 천을 덧대어 입었습니다.
저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부끄러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옷은 당연히 그렇게 입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양말은 조금 달랐습니다. 양말 역시 구멍이 나면 당연히 기워서 신었지만, 구멍이 난 상태의 양말을 들키게 되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누구나 다 기워서 신는데, 또 구멍 난 상태 역시 별것 아닌데 왜 부끄러워했을까요? 자신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나의 부족해 보이는, 나약해 보이는 부분을 내어놓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누구나 숨기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꼭 숨긴다고 숨겨질까요? 숨길 것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내어놓음이 필요합니다. 특히 주님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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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함께 늘 새로운 시작>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고, 감동스런 은총의 기적같은 삶-
계속되는 부활시기에 참 아름다운 계절의 날들입니다. 어제는 4월의 끝날이자 석가탄신일이었고 오늘은 5월 성모성월의 첫날이자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입니다. 성 요셉을 주보로 모신 우리 요셉 수도원에는 각별한 날이지만 우리는 그냥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1955년 비오 12세 교황은 해마다 5월1일을 ‘노동자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했습니다.
끝은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성모성월 첫날 노동자 성 요셉을 기념함이 참 의미있다 생각됩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성모성월 5월을 맞이하여 모든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충실히 바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가정에 많이 머물게 되는 이들에게 묵주기도의 아름다움과 성모신심의 전통을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는 것입니다. 하여 가정이든 개인이든 모든 신자들이 매순간 ‘그리스도의 얼굴’에, ‘마리아의 마음’에 시선을 고정시시킬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참 아름답고 은총 가득한 계절입니다. 아마 1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일 것입니다. 오늘 아름다운 ‘성모의 성월' 입당성가(244)도 좋았습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모아 성전 꾸미오며/기쁜노래 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오월 화창한 봄날 녹음 상쾌한데/성모뵈옵는 기쁨 더욱 벅차네”-
더불어 어제 써놨던 ‘사랑’이란 짧막한 시도 나누고 싶습니다.
-“자연은/늘 새롭다, 아침은/늘 새롭다
나도/늘 새롭다, 꽃도/늘 새롭다
선분홍/철쭉꽃, 밤새/임사랑에
환히 깨어있었구나/활짝 피어있었구나”-
올들어 요즘의 꽃들이 더 새롭고 곱고 아름다워보입니다. 어제 마침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의 새차를 축복한후 성요셉 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역시 참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자연에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럴 수록 엊그제 이천 물류센터 화재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은총의 기적같은 날들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은 새로움, 놀라움, 아름다움, 감동스러움으로, 은총의 기적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의 결정적 회심 과정은 얼마나 놀랍고 새롭고 아름다운 은총의 기적인지요!
때가 될 때까지 끝까지 기다린 주님의 인내의 사랑이 놀랍습니다. 스페인어에서 ‘기다리다’와 ‘희망하다’는 같은 동사(esperar)를 사용한다 합니다. 그러니 주님은 희망하며 끝까지 때가 될 때까지 겸손히 바오로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다음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사울의 결정적 아름다운 만남은 늘 읽어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당신을 믿는 성도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형제자매들 하나하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사람 하나니아스의 인도하에 세례를 받는 사울의 모습도 새롭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니아스는 사울에게 안수하고 말합니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시종일관 살아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고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자 곧장 ‘박해자’에서 복음 ‘선포자’로 돌변하여,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 선포합니다. 평생 이 결정적 회심 체험의 기억이 아마도 늘 바오로의 삶을 새롭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세례성사에 이은 성체성사를 통해 바오로의 주님과 일치도 날로 깊어졌을 것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파스카의 삶은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삶입니다. 누구보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 복음 말씀을 속속들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안에 머무른다.”
그대로 성체성사의 요약이자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미사은총을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살아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를 이루어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때 참으로 진짜 살아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하루하루 늘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기적의 은총같은 삶이 겠습니다. 얼마전 타계하여 주님 안에 고이 잠든 인천교구 김병상(필립보) 사제와 그 옆에 이수일(제르바시오) 사제 묘비명도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16)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1.21).
김일희 인천교구 사무처장이 들려준 김병상 신부님에 관한 유머 넘치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선종 며칠 전 “일희야, 나 죽었어. 지금 여기 하늘나라야”하셨다. 보고 싶으니 얼른 달려오라는, 당장 달려가게 하는 귀여운(?) 어른, 김병상 신부님이셨다.-
윗 묘비명에서 보다시피 두 분 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사셨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제였음이 분명합니다. 역시 죽어야 영원한 사제요 수도자요 신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늘 새롭고 아름다운 감동적인 은총의 기적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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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천상의 빵을 올바르게 모셔야 한다>
음식을 먹으면 그만큼 몸에 영양을 보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풍성한 음식이 준비되어있다고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살은 생명을 주는 행위이고, 피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고자 영혼의 힘이 되는 양식을 기꺼이 내어 주시고 또한 우리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서 대신 희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살게 되고 또 살찌게 됩니다. 영혼이 살찐 이들, 즉 사랑이 풍부한 이들이 비로소 다른 이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하셨는데‘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추구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나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고,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나도 따라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의 빵을 올바로 받아 모실 필요가 있습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천상의 양식인 성체를 제대로 모셔야 합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말합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 “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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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우리를 살게 하고 움직이는 원동력에 대해 숙고하도록 초대받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사람은 자기가 먹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 안에 섭취된 음식이 그 사람의 물리적 양분이 되는 동시에 정신과 영혼을 지탱할 에너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에게 머무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머무름은 상호적입니다. 그분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또 우리도 그분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머무름은 사랑의 그윽한 몰입 방식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의 머무름은 서로가 서로에게 몰입하고 포함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상호적 통교입니다.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섭취한 양분은 생명의 동력이 됩니다. 유지하고 성장시키고 강화하며 변화하게 만들지요. 우리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 무엇일지 숙고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하며 기울어지는 힘의 원리 중심에 무엇이 자리합니까?
제1독서는 사울의 회심 이야기입니다.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사도 9,1)
사울은 충실한 유다인입니다. 그를 움직이는 힘은 유일하신 야훼 하느님과 율법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맞게 전력질주합니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사도 9,2)에 대한 박해도 단순히 사람에 대한 악의나 증오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하느님께 대한 열의와 충성에 기인했지요.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사도 9,17)
빛과 목소리로 주님을 맞닥뜨린 극적 사건으로 사울은 눈 먼 상태가 되어 하나니아스의 방문을 받습니다. 하나니아스는 사울의 육체적 시력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그가 영적으로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돕지요.
사울이 가진 하느님께 대한 충성심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더해지자, 과연 그의 길은 이방인의 사도로 전환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이 야훼 하느님과 맺은 옛 계약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약으로 완성되었음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길"의 수호자가 된 것이지요.
이제 사울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꽉 잠겨 있는 율법의 경직성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유연한 새로운 길의 영혼입니다. 곧, 성령이지요.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또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주님 안에 머무릅니다. 이 머무름으로 우리는 성삼위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그 사랑 안에 잠깁니다. 완전한 사랑의 일부가 되고 고리가 되고 흐름이 됩니다. 이로써 주님이 우리 생명과 활동의 근원이요 원리가 되시지요.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 9,15)
오늘 주님께서 사울에게 하신 이 말씀이 내 귓가에도 내려앉아 뇌리를 관통합니다. 실로 주님이 머무르시고 주님 안에 머무르는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한 주님의 그릇입니다. 주님께서 선택하신 그릇은 주님을 담게 마련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사울처럼 어마어마한 소명의 주인공은 못 되어도, 주님 향한 사랑의 열렬함에서는 뒤지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만이 내 생명의 이유이고 지향이고 목적이라고 고백하며, 말씀과 성체 안에 머물며 이 아름다운 계절 오월을 시작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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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메신저>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사도 9,17)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을 당신께로 이끄시기 위해 누군가를 보내 주십니다.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 주시고 당신을 박해하는 사울에게 하나니아스를 보내 주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오늘 나를 위한 천사나 사람을 보내주실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 천사와 하나니아스를 알아보는 눈이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에게 밝혀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사울처럼.
다른 한편, 하느님께서는 오늘 나를 가브리엘 천사로, 하나니아스로 다른 누군가에게 메신저로 파견하실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이 내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답니다. 그러나 나는 대상이 누구이든 간에 하느님의 메신저가 되기만 하면 됩니다. 그를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 나의 가브리엘 천사, 나의 하나니아스를 만나 봅시다. 나도 누군가에게 천사가 되고 하나니아스가 되는 기쁨과 희망의 메신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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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2020년 5월 1일 금요일
♥감사하는 삶은 은총의 삶이며 기쁨의 삶이기도 하다
성령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된다.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지금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합니다.”
이러한 감사의 삶은 나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에서 출발한다.
14세기 영국인 누가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내용은 분명하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무지無知의 길’이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고백이 바로 영성생활이다. 나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가? 아니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이러한 무지와 나약함에 대한 고백은 우리를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일상의 삶에 집중하도록 이끄시는 성령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나는 영성적 삶을 살고 있는가 」에서
♣‘감사와 은총’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라틴계 언어에는 ‘감사와 은총’을 동의어인 ‘그라시아, Gratia’라고 합니다. 이태리어는 ‘감사합니다’를 ‘그라시아스, Gratias’라고 인사합니다. 감사의 꽃이 피면, 기쁨의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감사와 기쁨’은 ‘기도’로 얻어지는 수확물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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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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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KV1jrQLKoA&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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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 55)
빛나는 눈물의
오월입니다.
삶을 깊어지게
하는 노동이
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노동의 삶입니다.
노동자 성 요셉은
노동자의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노동은 사랑이고
노동은 삶의
보람입니다.
노동은
생명의 길을
만들어갑니다.
일상과 노동은
계절과 노동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하느님
창조의 길과
맞닿아 있습니다.
노동자의 맥박
노동자의
땀방울을 기억합니다.
노동은 족쇄가 아닌
하느님께 충실한
삶의 깨우침임을
믿습니다.
말씀과
말씀 사이에
노동이 있습니다.
말씀이 노동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노동을
먹고 마시며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서로의 노동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시간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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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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