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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의 성립과 종류
경장(經藏)-
부처의 교의(敎義)를 집성한 것이다. 불교의 경전이 최초로 성립된 것은 석가모니의 열반 직후에 열린 제1결집(結集)에서였다. 가섭(迦葉)이 초집하고 우바리(優婆離)가 율(律)을, 아난다(阿難陀)가 교법을 편집했는데, 500여 명의 비구(比丘)가 모였으므로 오백결집이라고도 한다. 제2결집은 불멸(석가모니의 열반) 100년 후 바이샬리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명확하지 않으며, 칠백결집이라고도 한다. 제3결집은 불멸 200년 후 아소카왕 18년에 이루어졌으며, 천인결집(千人結集)이라고도 하는데 이때 비로소 문자화되었다. 제4결집은 2세기 무렵 카니슈카왕 아래 파르시바·바수미트라를 중심으로 3장(藏)을 편집했다.
율장(律藏)-
부처가 제정한 교단생활의 규칙이며 계본(戒本)·건도부·경분별(經分別)·부수(附隨)로 이루어진다. 율장이 최초로 성립된 것은 석가모니의 열반 직후 제1결집 때의 일이며, 이때 결집된 율이 그 후 점차 정리, 조직되어 오늘에 전해진 율장이 되었다.
논장(論藏)-
제자들이 경설(經說)을 조직화하고 대계화(大系化)한 논의를 설하는 것으로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아비담장(阿毘曇藏)이라고도 한다. 초기의 것으로는 팔리어(語)의 칠론서(七論書), 한역(漢譯)의 육족론(六足論)·발지론(發智論) 등을 들 수 있다.
중국의 역경(譯經)
인도에서 성립되고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에 들어온 불교경전이 중국인에게 알기 쉽게 처음으로 한역(漢譯)된 것은, 중국에서 최초로 불교를 믿었던 후한(後漢) 때의 일이었다. 안식국(安息國)에서 환제(桓帝) 때(148년 무렵) 뤄양[洛陽(낙양)]에 온 안세고(安世高)는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아비담오법경(阿毘曇五法經) 등 선관(禪觀)과 소승불교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안세고와 같은 무렵에 뤄양에 온 지루가참(支婁迦懺)도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등의 대승경전을 번역하였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때는 담가가라(曇柯迦羅)·강승개(康僧鎧) 등의 역경승이 들어왔고, 오(吳)나라에서 활동한 역경승으로는 지겸(支謙)과 강승회(康僧會)가 있다. 서진(西晉)의 축법호(竺法護)는 역경부수에서 단연 앞섰는데,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정법화경(正法華經) 등 약 150부 300권을 번역하였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때에는 중국불교의 기반을 쌓은 도안이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신뢰를 얻어, 불전의 교정과 주석·경록의 편찬 및 의궤(儀軌)의 제정 등에서 크게 활동하였다. 중국의 불교와 역경의 역사를 성장과 발전의 시대로 바꾼 후진(後奏)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은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의 대승경전과, 중론(中論),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의 논서·율전을 번역했는데, 그것들은 중국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唐)나라 때의 가장 유명한 역경승 현장은 인도에 갔다가 돌아올 때 산스크리트로 된 불서를 많이 가지고 돌아왔으며, 그 자신도 76부 1347권의 경전을 번역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성유식론(成唯識論)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 법상종(法相宗)이다.
한국의 불교 경전
중국의 구마라습과 현장의 번역은 특히 한국의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그 역경서는 거의가 바로 한국으로 전해졌다. 한국·중국·일본의 불교는 다 같이 한역(漢譯) 대장경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한국의 불교는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불교로 발전하였다. 고구려에는 372년 소수림왕
((小獸林王;고구려 제17대 왕(371∼384). 이름은 구부(丘夫).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한다.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 371년 평양성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부왕의 대외진출 기도 실패에 따른 고구려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하여 체제정비를 도모하였다. 372년 전진(前秦)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고, 37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였다. 373년에는 국가통치의 기본법인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고구려가 4세기 말부터 5세기까지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 374·375·376년에 잇달아 백제를 공격하였고, 378년에는 거란족의 침략을 받았다. 전연(前燕)이 멸망한 뒤 북중국의 패자로 등장한 전진과 372·377년에 외교사절을 교환하고 불교를 수용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국력의 분산을 막았다. 죽은 뒤에 소수림(小獸林)에 묻혔다. ))
전진(前秦;351~394중국 오호십육국의 하나. 서진의 말엽에 저족의 부건(?健)이 세웠으며, 후진에게 망하였다.) 의 승려 순도(順道)가 불교를 전래하면서 불상과 같이 불경을 전하였으며, 395년에는 중국의 전도승 담시(曇始)가 와서 경·율수 십 권을 전했다고 한다.
백제의 불교는 384년에 동진(東晉)으로부터 온 호승(胡僧;외국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전래함으로써 시작되었고, 그 후 526년에 겸익
(.(謙益;백제 성왕 때의 승려. 율종(律宗)의 시조. 529년(성왕 4) 인도에 다녀와서 율종을 개창하였다. 그는 인도 중부의 상가나사(尙伽那寺)에서 범어(梵語)를 배우고, 특히 율부(律部)를 전공하여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들은 흥륜사(興輪寺)에 머물면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범어로 쓴 율문((율(律)-불교의 계율 및 그것이 씌어져 있는 책. 비나야(毘奈耶, 毘尼;산스크리트 vinaya의 음역)라고 하며, 또는 조복(調伏)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출가수행자는 남녀 제각기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집단을 산가(samgha;僧伽, 僧)라고 하며, 율은 산가의 규칙으로서 2종으로 나뉘는데 산가의 운영 규칙과 수행승 개인이 지켜야 할 규칙이다. 산가의 운영규칙은 갈마(의결방법이라는 뜻)라고 하며, 입단허가의 규칙인 구족계갈마, 반월(半月) 1회의 집회 규칙인 포살갈마 등 대략 100종이 있다. 수행승이 지켜야 할 규칙은 남성(比丘)에 대략 250조(250戒), 여성(比丘尼)에 350조 정도(사분율(四分律)에서는 348인데, 수는 부정확하며, 흔히 비구니의 500戒라고 말한다)가 있다. 이 조문을 모은 것을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라고 하는데 계경(戒經)이라고 번역하며, 인도의 불교교단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다. 250계는 8절로 나누어져 죄의 경중(輕重)이 정해져 있다. 가장 중한 죄를 바라이(波羅夷)라고 하는데, 정결(貞潔)의 파기, 도적질·살인·대망어(大妄語)의 4조이며, 이 계율을 어기면 산가로부터 추방당한다. 비구니의 조문에는 8조의 바라이가 있다. 율은 석가가 제정한 규칙을 모태로 하고, 그것에 해석이 부가·정비되어서 불멸(佛滅) 100년 무렵에 성전(聖典)의 형식으로 완성되었으며, 또한 BC 1세기에 베껴서 책이 되었는데 이것을 율장(律藏)이라고 한다.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 전해진 《팔리율》, 5세기에 중국에 전해진 십송률(十誦律),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그리고 7세기에 의정(義淨)에 의해서 전해진 근본설일체유부율(根本說一切有部律)이 있다. 이것들은 제각기의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 전지(傳持)된 율장이므로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대강은 일치하고 있으며, 스리랑카·미얀마·타이 등지에서는 현재도 이 율장으로 교단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율은 강제적인 규칙이지만 수행승(修行僧)이 이것을 자발적으로 지키기 때문에 이것을 계(戒)라고 말하며 율(律)과 합해서 계율이라고도 한다. 재가신자(在家信者)는 산가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율은 없고 오계(五戒) 등의 계만이 있다. 대승불교도(大乘佛敎徒)도 처음에는 재가교단이었으나 뒤에 출가교단도 생겼으므로 부파불교의 율장을 채용하여 교단의 규칙으로 삼았다. 중국불교나 한국·일본의 율종(律宗)은 사분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을 국내의 고승 28인과 함께 율부 72권으로 번역하였다. 겸익의 율학으로 백제의 불교는 계율 중심의 불교가 되었고,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율종의 근거가 되었다))
이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5분율(五分律)》을 전함으로써 율전 연구가 본격화하였다.
신라의 불교는 5세기 전반(19대 눌지왕;마립간(麻立干)신라 때 임금의 칭호. 19대 눌지왕, 20대 자비왕, 21대 소지왕, 22대 지증왕의 네 임금이 이 칭호를 썼다.) 때 묵호자
((墨胡子, 또는 阿道-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다는 고구려 승려.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고구려로부터 신라 일선군(一善郡;지금의 善山)에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있었다. 그때 마침 양(梁)나라에서 온 사신이 왕께 향(香)을 바쳤으나 아무도 그 용도를 알지 못해 사방에 수소문했다. 그러자 묵호자가 나아가 <이름은 향(香)인데 그것을 불에 태우며 삼보(三寶)께 기도하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했다. 마침 왕녀(王女)가 병이 들어 있었으므로 왕은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기도하게 하니 병이 나았다. 그 후 불교를 선교하길 원했으나 백성들이 듣지 않고 해치려들자 다시 모례의 집에 숨었는데, 그 뒤의 행방을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묵호자라는 이름으로 눌지왕 때 일로, 삼국사기에는 아도(阿道)란 이름으로 미추왕 때 일로 되어 있는데, 모습이 비슷하고 둘 다 고구려를 거쳐 신라로 왔으므로 동일인으로 보는 설도 있다.))
가 고구려로부터 전래한 것이 처음이며, 527년(법흥왕 14) 국가적으로 공인되었는데, 통일 이전의 신라에 불교경전이 많이 들어온 것은 진흥왕 때에 중국에 갔던 유학승들이 돌아오면서였다. 통일신라 전기(前期)는 교학연구가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였는데, 원효(元曉)·원측(圓測)·의상(義湘) 등의 많은 고승들이 경전 연구를 본격화함으로써 어느 때보다도 경전 유통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경덕왕 이후에는 경전 연구가 차차 둔화되어 화엄경, 법화경 등 외에는 널리 유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신라 말 선문구산(禪門九山) 성립 이후 경전을 연구하는 교종은 크게 위축되었다. 고려 때에 와서 불교는 국가종교로서 보호·정비됨으로써 한국의 불교 역사를 통하여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다. 경전의 정비도 진전되어 고려대장경의 간행이 2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현종∼문종 때에 간행된 《초조(初彫) 대장경》과 뒤이어 간행된 의천(義天)의 《속장경(續藏經)》이다. 두번째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두고 완성시킨 《재조(再彫) 대장경(1236∼51)》이다. 현재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는 이 《고려대장경》의 판목은 엄밀한 교정(校訂)으로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며 18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조의 배불정책으로 불경 연구는 활발하지 못했으나, 《금강경 ((금강반야바라밀경 (金剛般若波羅蜜經1415년(태종 5)에 펴낸 조선시대 목판본 . 2권1책. 보물 제1082호.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크기는 세로 26.5㎝, 가로 16.5㎝.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모든 법이 실체가 없으므로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공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흔히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금강경을 연구한 주석서로, 양나라 부대사(傅大士), 당나라 혜능(慧能)과 종밀(宗密), 송나라 종경(宗鏡)과 천노(川老) 등이 지은 금강경에 대한 5가지 해석을 모아서 편집한 것으로, 금강경오가해라고도 부른다. 1415년(태종 5) 성거가 글씨를 쓰고, 해혜와 조구가 시주하여 펴낸 것으로, 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었으며 상·하 2권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져 있는데 상권의 첫째 장과 책 끝의 득통결의 得通決疑 앞 부분의 첫째와 둘째 장이 떨어져 나가 내용은 알 수 없고, 득통결의 부분은 완전하다. 일반적으로 금강경오가해에는 조선 전기 고승 기화(己和)가 중요한 내용을 풀이한 설의 (說誼)가 붙어 있는 것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 책에는 설의가 없고 책 끝에 결의 (決疑)만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설의는 나중에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능엄경
((楞嚴經);한국불교 근본경전 중의 하나. 금강경,원각경,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불교 전문강원의 사교과(四敎科) 과목으로 채택되어 학습되었다. 원명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며, 대불정수능엄경,수능엄경이라고도 한다. 인도의 나란타사에서 비장(秘藏)하여 다른 나라에는 전하지 말라는 왕명에 따라 당나라 이전에는 중국 및 한국에 전래되지 않았다고도 하며, 중국에서 후대에 찬술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소화엄경(小華嚴經)이라 불리면서 널리 독송되었던 이 경은 전 10권의 각권에 수록된 내용들이 모두 한국불교의 신행(信行)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제3권에서는 세간의 만법이 모두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이라 하여 마음의 영원불멸성을 깨우치고 있고, 제4권에서는 여래장이 무엇인가를 밝혀 여래장사상 발달사에서 매우 요긴한 해설로 간주된다. 그리고 제6권에서는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갖가지 몸으로 화현함을 밝히고, 이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 관음수행문(觀音修行門)임을 설하여 법화경과 함께 한국의 관음신앙 유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경에 관한 주석서로는 고려시대 보환(普幻)의 능엄경신과(楞嚴經新科) 2권, 조선시대 유일(有一)의 능엄경사기(楞嚴經私記) 1권 등이 있으며, 간경도감에서 편찬한 언해본을 비롯한 10개의 판본이 전래된다.》
《화엄경
(華嚴經);불경의 하나. 원제목은 산스크리트로 Buddha-avatamsaka-mah?vaipulya-s?tra(부처의 華嚴이라고 이름하는 大方廣의 經), 한역명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대승불교 초기의 중요한 경전이며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낸 것으로 산스크리트 원본은 전하지 않고 티베트어 번역본이 완역본으로 전해진다. 한역본은 북인도 출신 승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번역의 60권본과 중국 당(唐)나라 때 승려 실차난타(實叉難陀) 번역의 80권본, 반야(般若) 번역의 40권본 등이 전해지는데 40권본은 60권본·80권본의 마지막 장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므로 완역본은 아니다. 구성은 60권본이 34품, 80권본이 39품, 티베트본이 45품으로 되어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화엄종을 대성시킨 당나라 현수대사(賢首大師) 법장(法藏)이 60권본을 바탕으로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라는 해설서를 쓴 이래 60권본이 가장 널리 유포되었고, 한국에서는 60권본·80권본·40권본이 모두 널리 유통되었다. 화엄경은 처음부터 완역본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 별도로 전해지던 여러 경들이 4세기 무렵 중앙아시아에서 합쳐져 완역본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전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과 그로부터 화엄처럼 피어나는 인과응보에 대해서 설하고 있으며 석가가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것이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교주로 한다. 60권본에 의하면 구성은 7처(處;설법 장소) 8회(會;설법 모임 수) 34품(品;장)으로 되어 있다. 제1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 : 제1·2품)·제2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 제3~8품)는 지상에서, 제3도리천회(제9~14품)·제4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 : 제15~18품)·제5도솔천궁회(제19~21품)·제6타화자재천궁회(他化自在天宮會 : 제22~32품)는 천상에서, 제7보광법당회(제33품)와 제8기타림회(祇園精舍 : 제34품)는 다시 지상에서 설법이 행해진다. 제1회는 석가모니불이 마가다국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대각(大覺)을 이룬 것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때 석가모니불은 비로자나불과 일체가 되어 있다. 제2회에서는 석가모니가 보광법당의 사자좌(獅子座)에 앉아 있고, 문수보살이 사제(四諦;苦·集·滅·道의 4진리)의 법을 설한 뒤 10명의 보살이 각각 10가지 심오한 진리를 설한다. 제3회에서는 십주(十住;보살이 가져야 할 10가지 마음가짐), 제4회에서는 십행(十行;보살이 행해야 할 10가지 행위), 제5회에서는 십회향(十廻向;수행의 공덕을 중생에게 돌리는 보살의 10가지 행위), 제6회에서는 십지(十地;보살의 10가지 수행단계)가 설해진다. 특히 이 제6회는 산스크리트 원전으로도 남아 있는 <십지품(十地品)>으로, 화엄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십지경으로 따로 편찬되었다. 이 십지경과 화엄경은 고려·조선시대 승과(僧科) 교종선(敎宗選) 시험과목으로 쓰일 정도로 중요경전이기도 하다. 제7회는 지금까지의 설법을 요약하여 설한다. 제8회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도를 추구하는 이야기이다. 화엄경에는 이상의 법문 외에 십현연기무애법문(十玄緣起無碍法門)·사법계설(四法界說)·육상원융론(六相圓融論) 등 불교의 세계관 및 인생관 등의 주요 사상들이 실려 있다. 중국에서는 이 경을 바탕으로 6세기에 <현수종(賢首宗)>이라고 하는 화엄종이 성립되었다. 한국에서도 원효(元曉)·의상(義湘)이 이 경을 연구한 뒤 화엄종을 창종함으로써 화엄경은 한국 화엄종의 근본경전이 되었다. 또 한국불교 소의경전(所衣經典) 가운데 최고의 경전이며, 한국 천태종의 근본경전인 법화경(法華經)과 함께 불교의 주요 경전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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