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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07]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루카 5,33-39
그때에 33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 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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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 사치스런 마음을 꿰매야 할 때 <독서 : 1코린 4, 1 – 5 / 복음 : 루카 5, 33 – 39>
지금과 다르게 70,80년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기억이 바로 새 옷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어려운 시절 어찌어찌 해서 새 옷이 하나 생기면 그것 좀 오래 입어 보려고 장롱 깊숙이 숨겨두었다가 특별한 날에만 입었던 기억이 있다. 옷이 귀해서 자녀들끼리 대물림( ?) 까지 하는 그런 집도 흔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 대형 마트나 옷가게를 가 보면 정말 엄청난 양의 새 옷들이 전시되어 있고, 값싸게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었다. 계절마다 때마다 옷을 사고, 이제는 옷이 헐거나 떨어져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유행이 지나면 버리는 시대가 되었다.
지난 인사이동 때 짐을 챙기면서 옷장을 정리하는데 왜 그리 옷이 많은지,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도 있었다. 입지도 않고 그냥 짐처럼 가지고 다니는 옷을 버리려다 보면 너무 깨끗하고 좋은 옷들이었다. 예전에는 한 번 옷을 사면 몇 년씩 입고 그랬던 내가 이렇게 사치스러워졌나 하는 생각에 참 많이 부끄러웠다.
지금도 여전히 내 옷장엔 잘 입지 않는 새 옷 같은 새 옷이 아직도 많다. 그리고 여전히 새 옷을 사고 있다. 이제는 옷을 꿰매서 입는 그런 시절은 아닐지라도 필요한 옷만 갖고, 유행이 지났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새로 옷을 사거나 버리는 그런 사치스런 마음을 꿰매야 할 것 같다.................◆
[말씀자료 : 이석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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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22주간 금요일(2018-09-07)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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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sp.pauline.or.kr%2Ffsp_upload%2F2015%2F09%2F20150925122714_94469.jpg) 부활이며 생명이신 주님, 당신을 따르는 길에 때로는 그 십자가가 너무나 무거워서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다가 온갖 모욕과 고초를 겪으신 하느님의 사람들은 어려운 이 세상에 작지만 큰 빛과 소금이 되는 존재입니다.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가 온 세상에 퍼져나가는 십자가의 영광을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굳셈을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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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성소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젊은이들에게 주님께 향하는 믿음의 열정을 일으켜주시어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에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오늘의 복음 : [나해]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루카 5, 33-39
그때에 33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 고 말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8%2F09%2F00%2F52%2F489c6bb40b3d7%26filename%3Dda_icon05.gif)
영적독서 : 아버지의 이름
포도군관이 중년 사내들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은 군주도 어버이도 모르는 사악한 난신적자들이다. 또한 타국의 세력을 끌어들여 조정을 뒤집어엎으려 획책한 역적들이다. 대역죄인인 너희들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될 것이다. 할 말이 있는가?" 최인호 야고보가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눈이 부어 왼쪽 눈으로만 볼 수 있었다. 상투마저 풀어져 긴 머리가 피범벅이 된 얼굴을 반쯤 덮고 있었다. "우리가 왜 난신적자란 말이오? 천주님께서 태초에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어찌 임금 중의 임금이 아니라 할 수 있소? 또한 천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모습대로 만드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어찌 아버지가 아니란 말이오? 그런 분을 주인으로 아버지로 공경하는 게 대체 무슨 잘못이란 말이오?".............<김문태 |「세 신학생 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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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22주간 금요일(2018-09-07) I 말씀 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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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은 하느님의 일꾼이며 관리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이신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고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다. 그들이 한 일에 대하여 심판하실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제1독서). 구약의 백성은 신랑을 기다리지만 신약의 제자들은 이미 신랑과 함께 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단식은 신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와 계신 신랑과 함께 있는 이들에게 단식은 더 이상 뜻이 없다. 여기에서 예수님에 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비난은 힘을 잃는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신랑을 기다리며 단식하지만, 신랑은 이미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새로움이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새로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형식적인 종교적 관습에 얽매여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서는 안 된다(복음). |
<말씀묵상-1> : † 묵은 포도주는 달고, 새 포도주는 떫다.
우리가 이번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마지막주간 토요일까지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줄곧 루가복음을 봉독하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의 모든 부분을 연이어 듣지는 못한다. 이 말은 평일미사에 제공된 복음을 읽고 한정된 부분만으로 복음의 참뜻을 깨우치려들면 무리가 생긴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도는 늘 복음의 참뜻을 위협한다. 한정된 어느 한 단락의 복음만 가지고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된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예수께서 공들여 설파한 복음전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복음사가들의 편집의도를 곡해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사의 그날 복음으로 제공된 부분의 앞뒤 문맥을 함께 살펴야 하며, 진정한 신자(信者)라면 ‘매일미사’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신구약 합본성서를 늘 곁에 두고 빠진 부분을 함께 읽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이 그렇다. 매일미사 책에 실려 있는 오늘 복음의 시작은 “그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 성서의 원문에는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라고 되어 있다. 어느 표현이 복음의 앞뒤 문맥을 더 잘 말해주는가? 두말 할 것 없이 성서원문이다. 따라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무슨 말씀을 듣고 예수께 반론을 제기하는 지는 앞부분을 살펴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권위 있는 가르침과 기적행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명성이 순식간에 나자렛과 가파르나움을 넘어 사마리아와 유다지방 일대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4,37.44; 5,15) 급기야 이를 확인하고 감찰할양으로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파견된 것이다.(5,17)
그들은 이미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반감을 가지고(5,21), 못 마땅하게 여겨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으며(5,30), 오늘은 복음에서와 같이 단식문제로 예수께 시비를 걸고 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을 묵상한다면 잘 이해할 수 있겠고, 좋은 결론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단락으로 구성된 오늘 복음은 단식에 관한 말씀과 옷과 포도주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를 담고 있다. 물론 후반부의 이중비유는 전반부의 단식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이해해도 좋다. 오늘 담론은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보아도 타당하다.
단식(斷食)이란 회개의 표징으로서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이다. 구약성서와 유대교에서 단식은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미 도래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ipso facto) 모순이다.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온통 메시아 도래의 기쁨에 차 있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일은 기쁨으로 가득 찬 잔치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단식의 날이 오게 될 것인즉, 예수께서 더 이상 그들 곁에 계시지 않을 때가 바로 그때가 될 것이다.(33-35절)
‘새 옷과 헌 옷,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 새 부대와 헌 부대’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는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층 더 또렷하게 밝혀준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도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말한다. 이제 헌 것은 가고 새 것이 도래한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도래했다. 새로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헌 것을 가지고 맞을 수 없는 일이다.
묵은 포도주는 달고, 새 포도주는 떫기 마련이다. 여기서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준비는 마음의 ‘어느 한 조각’으론 불가능하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과 태도의 전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당장은 맛이 좀 떫고 불편하더라도 하느님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법칙을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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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2> :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새 결실의 계절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2005년도 겨울, 봄, 여름이 지나서 아름다운 탐스러운 열매를 수확하는 계절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두 2005년 추수(3/4분기)의 결산과 4/4분기의 계획을 새롭게 세우면서 나름대로 계획과 기대 속에 마지막 남은 기간 동안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 아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구하고 실천할 때 반드시 응답하시며 축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새로운 하반기를 맞이하는 우리가 어떻게 축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오늘복음을 통해서 묵상하겠습니다.
오늘복음의 핵심주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새 부대에 넣어야 되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복음을 성독해 보겠습니다. 루카 5,36-38(마태 9,16-17)입니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릴 것이니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는 못쓰게 된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옛날에는 옷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에 요즘처럼 자주 새 옷을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벌의 옷을 낡을 때까지 입고, 낡아서 떨어지면 기워서 다시 입었습니다. 여러 차례 천을 덧대어 기운 무릎이나 팔꿈치 같은 부분은 나중에는 마치 가죽처럼 단단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혹시 헌 옷을 기우기 위해 새 옷에서 옷감을 잘라내실 분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헌 옷보다 귀한 새 옷을 버리게 되고 헌 옷의 상태도 더 악화되어 버립니다. 헌 옷은 천의 올이 낡아서 약해져 있기 때문에 새 천을 붙이면 이것이 헌 옷의 약한 올을 사방에서 잡아 당겨 오히려 구멍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 천과 낡은 천의 비유는 이어지는 17절을 설명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릴 것이니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는 못쓰게 된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예수님 당시, 중동 지방에서는 포도주를 보관하거나 운반할 때 가죽부대를 사용했는데 오래 사용하게 되면 낡은 부대는 탄력이 사라지고 단단하게 변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넣지 않고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새 부대는 탄력이 있고 튼튼하므로 새 포도주가 발효할 때 발생하는 가스의 압력을 이겨내지만, 낡은 부대는 오래 되어 건조하고 딱딱하므로 가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새 복음을 저장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옛 것을 완전히 비우고 새로운 것을 넣는다는 의미의 새부대로도 의미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남은 것이 아까워서 새 포도주를 함께 섞어 넣는다면??? 그건 알아서 해석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전하시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먼저 새 포도주와 새 부대, 묵은 포도주와 낡은 부대 등의 영적인 의미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포도주는 포도나무의 열매에서 나오는데 성서의 여러 곳에서 주님을 포도나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요한 15,1.5).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을 증거하시고, 천국과 지옥, 회개와 영생의 길을 알려 주셨고 또한 몸소 겸손과 사랑과 섬김으로 진리의 모범이 되셨으며 질병과 나약함을 치료하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통해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오셨음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행적들이 포도나무의 열매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으로 포도주에 대한 묵상입니다. 포도주란 잘 아시다시피 포도 열매의 즙을 낸 것입니다. 즙은 열매의 액기스입니다. 다시말하면 열매가 자긴 영양분을 최고로 농축한 것입니다. 이 농축된 질 좋은 액기스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그 참맛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진리의 열매를 내신 후 마침내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심과 동시에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완성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사랑의 법이 바로 새 포도주입니다.
그러면 묵은 포도주란 무엇일까요? 바로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곧 모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며 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할 수가 없는데, 구약에서는 사람의 범죄를 용서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 그 피로 행위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는 바로 구원받기 위해 묵은 포도주를 마셨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로는 새 포도주를 마심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사람이 아직 죄 중에 있으므로 하느님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주신 것이므로 온전한 것이 못되지만, 신약은 주님께서 생명까지 내어주심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 표현한 것이며, 우리가 성령을 받았기에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본체입니다.
이러한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성경상의 한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마태 19장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간음한 이유 외에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일은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다고 하셨지만, 바리사이들은 하느님께서 율법을 통해 이혼을 허락하셨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마태 19,7).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 앞에 맹세하고 남녀가 한 몸이 되었으면 변함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 남편이 어떤 이유로 아내와 함께 살기 싫은 마음이 된다면, 그 마음이 다시 사랑의 마음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혼하지 않고 같이 산다고 해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악한 마음을 아시기에 율법 안에 이혼의 절차를 규정해 놓기는 했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온전하신 뜻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상대의 허물과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어 주고 오래 참아 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원하시는데 이것이 참되고 온전한 것이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약을 구약의 묵은 것과 비교하여 새 포도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낡은 가죽부대를 새 가죽부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방법은 한가지 뿐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거듭나기 위한 할례(세례)를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오래된 포도주가 비싸고 좋은 것처럼 신앙 안에서도 구약적인 것을 신약의 새 법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러했습니다(루카 5,39). "또 묵은 포도주를 마셔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 하면서 새 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구약의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로 하느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주신 율법 외에 여러 가지 부수적인 규칙들도 만들어서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이 있으면 그 율법을 지키는 방법을 사람 편에서 만들어 냅니다. 안식일에는 음식을 만들 불을 피워도 안 되고, 몇 킬로미터 이상은 여행을 해서도 안 되며,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것도 안 된다는 등 세세한 규정을 만들어서 철저히 지켰습니다.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원래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임의적으로 안식일에 대해 만든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구약의 율법을 좇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며 기도와 단식을 드린다 하더라도 마음에 죄를 짓고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거나 짐승을 잡아서 회개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겉은 물론 마음까지 거룩하게 변화되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을 원하셨던 것입니다(마태 23,23).
사도 바오로는 에페 4,21-24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따름인데 여러분이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고 배웠다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낡은 부대일 뿐이요, 진리의 말씀이 지식으로만 쌓여 교만해지기만 합니다. 또한 변화되지 않는 마음 가운데 말씀이 자꾸 찔림이 되면 오히려 악을 발하여 선한 사람을 미워하며 훼방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을 새 부대로 변화시키지 않음으로 ‘묵은 포도주가 좋다’ 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육신의 생각과 틀, 또 자기 이익만을 구하는 마음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던 바리사이들과 같이 낡은 부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기 교양과 지식의 틀이 있으므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신자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하셨는데도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거룩하게 기도해야지. 시끄럽게 소리 내어 기도하고 부르짖는 것은 은혜롭지 못하다” 합니다. 또 “사람이 노력할 수 있을 뿐이지 어떻게 죄를 마음에서 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 하셨지만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은 사랑할 수가 없다”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는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가 없으니 낡은 부대로서 주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요, 결국 천국과도 상관 없이 멸망의 길로 스스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를 불러주신 그분, 즉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위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말씀에 따로국밥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 같이........
또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 마음으로 바꾸지 않으면서 스스로 새 포도주를 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가령, 미워하지 말라, 혈기를 버리라고 하니까, 미움과 혈기를 억지로 꾹꾹 눌러 참습니다. 그들은 그런 참는 행위를 마치 수양이나 인격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신 인격이나 영성이 아니고 인간이 만드는 인격이나 지식을 시간이 지나면 들통이 납니다. 앞에서 설명한 그런 사람들은 마음에서부터 악을 버린 것이 아니기에, 시간이 지나면 결국 깊이 눌러놓은 악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 안 드는 일을 보았을 때 참고, 그 뒤로도 몇 차례를 거듭 참았습니다. 그런데도 상대편에서 여전히 싫은 행동을 할 때는 마침내 폭발하여, 전에 참았던 일들에 대한 감정까지 더하여 혈기를 내고 악을 발하는 것이지요.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았다가 그만 부대가 터져 버리는 것처럼, 그때까지 참았던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허물을 말하고 싶고, 판단하고 단죄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고 가려운데, 하느님 앞에 간절히 응답 받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일단은 악을 누르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들어서 지식적으로는 알기 때문에 일단 하느님 앞에 죄의 담을 만들지 않으려고 응답 받을 때까지 꾹꾹 참는 것입니다. 이 참음은 단련이 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태어 날 수 있습니다. 영신수련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맇게 하여 일단 옛 마음이 새 마음 곧 새 가죽부대로 바뀌어지면, 억지로 악을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악이 나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는 성령 속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다운 덕목입니다.
예전 같으면 미움과 혈기가 났을 만한 일을 보아도 지금은 온유한 마음으로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게 되며 또 전에는 상대를 찌르고 수군거렸을 일을 보아도 지금은 상대의 마음이 느껴지고 자선의 마음이 일어나서 어찌하면 그 허물을 덮어 줄까...하는 것입니다.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새 부대로 변화된 사람에게는 성경의 약속들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는 것마다 신속하게 응답되고 만사가 능통하며 믿음의 증거로서 표징과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질병이 떠나가고 마귀가 물러가며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행복한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산 믿음의 활기 있는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므로 이것이 정녕 축복의 길이요 결국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영원한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복음 묵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말씀에 비춰 보심으로 정녕 마음을 깨끗히 하고 거룩한 새 마음 즉 새 부대로 만들어 마음의 소원과 기도에 응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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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