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시리즈 6-1강> 죄와 의에 대한 오해
다 같이 묵도하심으로 주일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시편 51편)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모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고 우리 죄를 가리시며 우리 죄를 덮어주시는 우리 주님의 인자하심을 날마다 찬송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은 어제 대전 모임에서 했던 죄와 의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하도록 할 텐데요 먼저 죄란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죄가 무엇인지 다들 아시잖아요. 지금까지 죄인으로 살아오셨으니까. 그런데 막상 죄가 무엇인지 물으면 선뜻 대답이 나오질 않죠. 그렇게 죄인에게 죄는 가장 친숙한 것이면서 또 감추어져 있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자기 백성들에게 계시하셨어요. 그런데 계시란 감추어졌던 것을 밝히 드러내셨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셨을까요?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기도 중에 사랑하는 딸아 하면서 나타나십니까? 구약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말씀으로 나타내시고, 또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교회에게 주신 성경말씀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성경이 증거하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 땅을 다녀가신 그 하나님만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목적과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교회의 신학은 그것을 죄를 그치게 하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들의 죄를 분명하게 죄로 드러내시기 위해서 계명과 말씀 율법 그리고 아들을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지 않았으면 죄가 없으려니와 이제는 너희가 변명하지 못한다, 핑계치 못한다.. 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모든 말씀은, 예수님은 분명히 죄와 관련이 있어요.
(갈라디아서 3장)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둔 것이 무엇이라 합니까? 성경이에요.
(로마서 3장)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온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7장)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이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들을 보시는 시각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죄인들끼리는 죄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는 겁니다. 죄인들끼리는 죄를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밖에서 오신 그분에 의해서만 죄는 죄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결국 죄는, 인간들의 태생적 죄의 본질은 예수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마침내 예수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속성으로의 죄란 말이에요. 이게 죄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어떤 잘못을 하고 범죄를 저질러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시편 51편)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러니까 무슨 죄를 저지르기도 전에 인간 자체가 죄 덩어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어떤 다양성을 띠어도 최종적으로는 동일한 형벌를 받게 되는데, 그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죄는 양(量)의 문제가 아닌 거예요. 죄를 많이 짓고 적게 짓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예전에 그런 농담이 있었어요. 염라대왕이 죄의 양에 따라 바늘로 뜨기도 하고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버리기도 한다고... 그런 거 아니란 말이에요. 죄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인간은 죄나 의 어느 쪽이든 주체가 되지를 못합니다. 처음부터 불의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워야 하고 의롭고 거룩한 자는 의롭고 거룩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어떤 선택권도 없고 그 운명을 바꿀 능력도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죠?
제가 얼마 전에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카페에 글을 올렸는데.. 죄를 선택하는 것과 의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가능하다.. 그리고 복과 저주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같은 그릇된 선악관에 갇혀있는 게 오늘날 인본에 매몰된 기독교예요. 인간의 가능성과 주체성과 자율성을 절대 포기하지 못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죄를 허락하셨어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의 처음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 구원의 하나님, 인간 구원을 위한 기독교의 상태를 야고보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고보서 1장)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기서 죄가 장성한다는 말은 죄가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치는 탐심이 죄의 완성이거든요. 결국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살해해버린 그 죄입니다. 한 마디로 왜 우리가 당신의 용서를 받아야 하고 당신의 은혜만 붙들어야 합니까?.. 이게 예수님에 대한 반발이었어요. 이런 자존심으로 투철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단 말이에요. 하나님을 안다는 그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살해를 당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죄의 문제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동시에 인간들이 가장 직면하기 싫어하는 문제입니다. 가능하면 멀리하고 싶은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이 죄인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과 무지로 인한 것이지 절대 극복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양심이 있고 법질서가 있다.. 그래서 교육과 훈련, 계몽을 통해서 얼마든지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 세상 인간 중심의 죄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아담 이래로 인류 역사는 조금도 개선되거나 발전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악랄하고 대형 범죄로 넘쳐나는 것이 현대사회잖아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도덕 윤리 교육, 준법 교육, 사회성 교육으로 세상에 유익한 홍익인간을 키워내는 것이 현대교육의 지향점이잖아요. 그런데 왜 세상은 갈수록 악해지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 자체의 근원적인 문제를 무시하는 것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인간을 모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종교가 있건 없건 어떤 인간도 자기중심의 선악 판단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선이고 자기를 해롭게 하는 것은 악입니다. 이기심, 자존심, 자기 영광, 자기 사랑, 자기 가치 챙기기, 자기 증명, 자기 숭배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갇혀서 살아가는 게 바로 죄인들입니다. 심지어는 진실(fact)과는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 옳습니다. 이것이 정치판의 진영논리잖아요. 그러니까 객관적인 옳고 그름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눈멀고 귀먹은 죄인들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 주변에는 이런 병자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눈멀고 귀먹은 사람, 중풍 병자, 벙어리, 귀신 들린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이런 사람들이 왜 등장할까요? 예수님이 단순히 병 고치는 사람이에요? 그들은 우리 죄인들을 대표해서 죄의 증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일곱 귀신 들린 마리아처럼... 그렇게 우리 죄인들의 몸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귀신들이 들락날락거리는 몸이에요. 한마디로 죽은 자들이 산자의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가 살고있는 좀비들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세상을 어둠의 세상, 죽은 자들의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평생을 나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데 다 허비합니다. 그런 인간의 내면 깊숙이 깔린 것이 두려움과 수치심이에요. 근원적인 공포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첫 인간 아담이 범죄한 후에 나타난 증상이 두려움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된 아담에게 범죄 후에 나타난 증상이 그것이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자기 하체를 가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숨기는 행위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낯섦, 두려움이 생긴 것이에요.
본래 하나님과 아담은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객체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그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자 인식, 즉 자아가 생겨서 자기를 스스로 챙기고 자기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려는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심지어 자기 몸에서 생겨난 하와에게까지 범죄의 책임을 떠넘기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자가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이 말에는 벌서 두 객체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여자예요. 아담에게서 드디어 죄성이 발동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선악과로 범죄한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류는 그 실체도 알지 못하는 ‘자기’로부터 결코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자기 안에 갇힌 인간이 됩니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자기 존재를 지키고 가리고 다듬고 굳히는 자기 사랑, 자기 영광을 위해서 일생을 소비합니다. 우리 모두 그래요.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죄의 실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 자리 이탈이 죄의 본질인 거에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생명력,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가 가능한 피조물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이 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가 죽음이에요.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이것이 모든 인간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을 유혹한 뱀, 그리고 아담과 하와, 또 땅을 저주하셨습니다. 범죄로 인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단 말이에요.
그로부터 죄로 오염된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 세상은 죄의 권세와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현실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기독교적인 세계관 역사관은 그렇게 부정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만물의 영장이 아니며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서 난 첫 인간인 가인과 아벨의 형제살해사건을 통해서 선악을 판단하게 된 인간에게서 그 악의 정체가 드디어 드러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로 악에 속한 자와 선에 속한 자가 나누어지는데, 그 하나님의 선택이 뭐였습니까?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하나님의 선택은 가인 것은 받지 않고 아벨 것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이 나타나니까 죄와 악의 정체가 드러나고 악에 속한 자에 의해서 선에 속한 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인과 아벨에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 내내 작동하는 악의 기능이고 죄의 정체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역사는 유일한 의요 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위해 악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해야 하는 세상 역사입니다. 세상과 역사는 그 기능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 역사의 이런 기능을 잘 보여주는 것이 시편 2편입니다.
(시편 2편)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이에요. 12절이 그 결론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이 바울서신에도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의 말미를 보면 권면과 함께 저주가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망한다고 했고,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세상이란 말이에요. 한마디로 세상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한 고린도교회 안에 작동하고 있는 악의 실체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세상이 그대로 들어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의 공간을 따로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에는 교회도 포함이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셨을 때 그가 나무 뒤에 숨었던 것처럼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한 교회 안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별도로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두려움을 숨기고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죄의 속성들이 적나라하게 나타난 거예요.
복음이 던져짐으로 해서... 하나님이 찾아오시자 아담이 나무 뒤로 숨은 것처럼 고린도에 복음이 전해지자 자신들의 선악 지식으로 당 만들기가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당이 한 두 개가 아니죠? 베드로파, 아볼로파, 바울파, 그리스도파... 몇 명 되지도 않은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당파가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당을 지어서 그 당 속에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면서 죄인된 실체를 숨겨버린 겁니다. 같은 지식을 가진 집단 속에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내면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거예요. 교회가 자신들의 두려움을 지켜주는 공간이자 해방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겠지만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 대전 모임에서 식사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세상 인간들은 다투거나 문제가 있으면 만나서 술 한잔 하고 풀면 되는데 오히려 교인들은 꼭 뒷통수 친다고... 모여서 쑥덕거리고...뒷담화 하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추악하고 살벌한 전쟁이 뭔지 아세요? 종교전쟁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이면 상대는 악마 편이기 때문에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인간들의 원초적인 두려움과 수치는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소멸이 될 수 있는데, 성령을 받은 사도를 통해서 예수가 이미 전파되었음에도 오히려 그들은 복음의 진리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들만의 다른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어둠은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게 갈라짐이에요. 빛과 어둠은 함께 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세상에는 이런 게 잘 보이지를 않지만 복음이 전해지는 교회 안에는 반드시 그런 갈라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전투, 진리의 싸움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곳이 교회여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 안에서 그런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목사가 가장 싫어하죠. 어떻게 해서든지 은혜롭게 합시다.. 하면서 교회가 시끄럽지 않게 하려고 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아예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는 거지요 교인들이 십자가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에요
자 이렇게 끝까지 자기 문제는 자기가 처리하려는 아담의 속성을 물려받은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자기 증명과 자기 지키기, 자기 숭배에 써먹는 죄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 불려나온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들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할례 언약을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선민 됨을 보증하는 표지 정도로 할례를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가 가리키는 새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육적 몸을 벗는 그 세례를 알지 못한 거예요. 물론 그때는 성령이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들을 귀가 없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할례는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는 할례인데, 그들은 오히려 그 할례 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애굽 됨을 애써 감추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사도는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십자가의 할례에 대해서 다시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 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도들은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수치와 두려움의 육의 몸을 벗는 세례를 통해서 아담의 혈통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됨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 ‘아들’로 완성이 됩니다. 그것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약속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아들들을 위해서 뱀의 유혹으로 죄와 사망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신 거예요. 이게 로마서 12장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실수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몰라서 절대 먹지 말라고 하시고 뱀이 하와를 유혹할 것을 몰라서 뱀을 풀어놓으신 것도 아니에요.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죄도 악도 자기 목적대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위한 창조이며 그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죄도 사망도 선악과도 사단도 사용된 것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도는 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세상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성도, 거룩한 교회에 있어서 죄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로마서에서 죄의 기능과 역할을 읽었고 알고 있습니다,
그 죄가 어떤 죄입니까? 어거스틴이 말한 ‘오, 거룩한 죄’...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를 단순히 인간들이 저지르는 범죄의 유형 정도로 이야기하지 않고 죄의 권세로 설명을 합니다. 또 그 죄로 인한 사망의 왕 노릇으로 인해 우리 실존이 어떻게 죄의 노예처럼 갇혀있고 붙들려 있는가..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의의 왕 노릇, 은혜의 왕 노릇을 대비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현실, 구원의 현실을 가르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이 율법이라고 율법의 용도까지 덧붙여서 설명하는 것이 로마서 5~7장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와 율법의 관계, 그리고 아무 한 것 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믿음의 복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앞에서 말씀드린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란 무엇인가?..
우리가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말은 죄인들에게는 죄를 짓고 안 짓고의 선택권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잖아요. 내가 죄를 지을 수도 안 지을 수도 있었는데 잠시 생각을 잘못하고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죄를 지었다고...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죄인은 무엇을 하든지, 어떤 행위를 하든지 다 죄가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점 때문에 세상이 복음에 대해서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심지어 세상 교회들까지 성경이 말하는 죄와 의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정직하게 말하면 손님들이 다 떠나 버리니까요.
제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동네 커피숍에 있는데 옆 테이블 아주머니들이 말하길 “야야, 교회 가면 아무리 착한 일 많이 해도 천국 못 간다 카더라”.. 아마 복음을 들었나 봐요. 그러니까 옆 아줌마가 “에이 그런 천국이 어딨노. 난 그런 교회 안 간다.”.. 이게 인간의 주체성이고 자존심이고 자율성이에요. 내가 한 행위에 따라서 내가 상도 받고 벌도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오늘날 교회마저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대로 구원하시고 상도 주신다면 천국 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서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행위의 부족한 부분들을 메우는 데 사용될 뿐이에요. 자기가능성, 가치를 위한 장식품 정도란 말이지요, 가톨릭은 이런 부분들을 고해성사를 통해서 해결합니다. 원죄는 십자가로 해결했고 살면서 짓는 자범죄는 사제가 해결해 주는 거에요. 세상이 다들 그렇게 가르치니까 사람들 입에서 그런 말들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인간은 죄를 지을 자유조차도 없다는 뜻입니다. 죄의 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이에요. 죄를 안 지을 자유만 없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자유조차 없어요. 이게 세상 인간들의 착각이에요 그런데도 막 살라고 하는 인간은 뭡니까? 죄는 짓는 게 아니라 죄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삯은 사망이에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사망 안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겁니다. 죽음 안에서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 인간들의 실존입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죽고 또 죽으리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두 인간으로만 보십니다. 범죄한 아담과 오실 자 예수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5:12~14절의 내용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처음 자리를 이탈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범죄한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을 한 사람 아담으로 보시고 세상 끝날까지 그 아담은 죽고 죽는 아담입니다. 창세기 5장의 기록이 모두 이것입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죽었더라.. 누구는 누구를 낳고 몇 세까지 살다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모두가 그 이야기잖아요.
그렇게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가두어진 인간의 현실을 가르쳐주시고 더욱 분명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로마서 5장)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게 성경이 말하는 죄와 의예요.
13절에 보면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지만, 율법이 없었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하죠? 방금 말씀드린 그 내용입니다. 율법이 없었을 때는 인간이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꼼짝하지 못하고 가두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말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죄인에게는 무조건 죄만 나온다는 사실, 무엇을 해도 어떤 선한 일을 해도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이 옴으로 해서 죄가 더욱 죄 되게 했다.. 죄가 무엇인지를 밝히 보여주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7장)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바로 이거예요.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 나는 육신에 속한 자요, 죄 아래 팔렸다.. 내가 행한 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무엇을 해도 죄만 나올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왜 그렇다고요? 이유가 뭐예요? 바로 나 중심의 선악 판단, 선악과의 독성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선악과를 못 먹게 하신 겁니다. 나 중심의 선악 판단, 나밖에 모르고 나만 위해서 살 수밖에 없는, 나에게 갇힌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는 죄입니다.
신은 둘이 될 수 없잖아요. 하나님은 두 분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미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우리 인간에게 인간의 그 벌거벗은 실체를 똑바로 가르쳐주시는 한 분, 그 한 분이 오시면 우리는 도저히 구원 불가능의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유대인들이 예수라는 저 인간만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민으로 행복하게 살 줄 알았던 거죠.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모든 죄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죄성입니다, 하나님처럼이라는 죄성이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 나쁜 놈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이 그것 때문에 수천 년간 천대를 받으면서 떠돌아다녔잖아요. 이것은 세상 인간들이 죄를 제대로 몰라서 그런 겁니다.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는 지금도 유대인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은 많지만...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했을 뿐이에요. 기능적 이스라엘이죠.
그럼 오늘날 세상 교회는 예수님을 압니까? 진짜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예수 이름으로 모인다는 교회가 그분의 주되심을 알고 있느냔 말이에요. 맨날 주여 삼창은 하지만 주의 이름(약속의 내용)은 모르는 거에요. 만약 예수님이 지금 다시 오신다 해도 예수를 믿는다는 바리새인들, 그들 종교인들 때문에 다시 쫓겨납니다. 아니 아예 교회 입구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겁니다. 신천지와 예수 출입금지.. 오늘날 세상 교회들이 얼마나 십자가 복음을 싫어하는지 여러분도 다 아시잖아요. 그곳을 다 거쳐왔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된다(이미 되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가.
이렇게 세상은 죄와 의에 대해서 몰라야 합니다. 모르는 게 정상이에요. 자기들이 생산한 인본의 신학에 갇혀서 죄도 의도 예수도 오해하면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욕하고 돌을 던져야 세상은 세상다운 겁니다. 예수이 그러셨지요? 소경되었으면 죄가 없으려니와 너희가 본다고 하니 죄가 그냥 있다고
그럼 하나님의 사람은 그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가 육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전혀 없지만,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는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책망입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쉴새 없이 책망하시고 징계하시고 또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네가 또 네 중심의 선악 판단을 하고 있구나.. 네가 또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써 하나님의 의,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지 않고 있구나.. 네가 있어야 할 그 자리, 그 십자가의 사랑을 잊어버렸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자유를 잃어버렸구나.. 이렇게 우리 인생은 평생토록 우리 안에서부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인생입니다. 이게 성령 받은 성도의 삶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작동하는 거룩한 교회란 말입니다.
성령 받으면 매일 기뻐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펄쩍펄쩍 뛰는 게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은 정신병원 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계획대로 살 수 없기 때문이죠. 그들에겐 주가 계신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바 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통하여 목표를 달성하고, 그 결과물을 내 손에 쥘 때를 그것을 성공이라 하고 그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흔히 꿈은 이루어진다 하잖아요 그러나 성도들은 그런 인생을 살 수가 없어요. 나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성공이 무엇입니까? 나는 아니요. 당신이 주님이십니다.. 이 자리까지 매일 털리고 끌려 나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그러잖아요. 우리 옛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이 말은 날마다 무너져내린다, 날마다 죽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속에서 새 사람이 살아 올라옵니다. 이게 하나님의 성공이고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이에요
여러분, 만약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게 다 주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여러분이 예수를 믿을 것 같아요? 천만에요. 다들 제 갈 길로 가게 됩니다. 제가 보증할게요 힘만 있으면 우린 예수 믿을 인간이 아니에요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지로 끌고 가니까 울미불미 끌려가는 것 뿐이에요. 마치 언약궤를 실은 벧세메스의 암소 같은 거에요 새끼를 두고 번제의 자리로 떠나는 그 암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보다는 내 손으로, 내 노력으로, 내 것으로 챙길 수 있는 결과물을 더 원하기 때문에 날마다 나 중심의 선악을 판단하고 나의 가능성을 발휘하여 내 존재 가치를 챙기는 일을 포기할 줄 모릅니다. 이게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사망의 몸이에요. 그런 죄인들에게 선한 일은 하나님이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믿음.. 믿음을 주셨어요. 아들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를 띠 띠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닌 하나님의 목적지로 끌고 가십니다. 그곳이 어딥니까? 주님의 십자가죠.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이게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죽음과 생명이 같이 나타나야 한단 말이에요. 참으로 폭력적인 은혜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8장)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십자가라는 영적인 현실을 직면하고 나로부터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에게로 우리 눈이 들리는 것,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되는 것, 그렇게 세상과 나로부터 그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믿음이에요. 이것이 죄와 사망까지도 우리 구원을 위해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죄도 사망도 사단도 자기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성도들만 율법의 선한 것을 인정할 수 있어요. 그들은 다 율법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죽으심으로 우리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의문의 증서를 빡빡 찢으셨습니다. 자기 육체로 모든 정사와 권세를 이기시고 박살 내셨단 말이에요.
그렇게 십자가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예수 안에서 그 사랑으로 완성되는 아들들 거룩한 교회,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 피로 사신 그 신부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자유가 있어요 진리로 자유케 되는 그 자유입니다. 무엇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죄도 사망도 우리의 이 지긋지긋한 육의 몸도 성도 여러분에게는 다 유익이에요. 이 세상 것들, 아랫것들을 통해서 위의 것, 하늘의 것들을 알고 소망하게 되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재료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땅의 것들을 사랑해서 그것에 갇히면 그것이 심판입니다. 지옥은 다른 게 아닙니다. 땅 지(地), 갇힐 옥(獄)이 지옥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대 땅에 갇힐 수 없는 존재들이에요. 사망이 예수님을 가둘 수 없었던 것처럼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고 예수님의 부활에 함께 참여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 감추어져 있단 말입니다.
(골로새서 3장)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어떻습니까? 이게 진짜 우리의 현실이라니까요. 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
그러니까 아무리 파고 파도 답이 없는, 아무리 분칠하고 다듬어도 되지 않는 나로부터, 그런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 하시라는 말이에요. 나도 믿지 말고, 이 세상도 믿지 말고, 교회도 믿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는 겁니다. 십자가로 이루어진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게 자유예요.
성경은 여러분을 이미 하늘로 옮겨졌다고 하잖아요. 여러분은 이 세상에 있어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리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고 싶어도 안 된단 말입니다. 여러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여러분의 근본은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하늘에서 공급해주시는 생명력으로 영원을 살아야 할 여러분이 날마다 자기만 쳐다보고 세상만을 좇아가면 하나님이 얼마나 섭섭하시겠어요? 저게 언제나 철이 들려나..
그래서 주님이 따라다니시면서 여러분이 세상에 뿌리내릴 만하면 밑동부터 싹둑 잘라내십니다. 제일 귀하고 아끼는 것을 쳐내신단 말이에요. 그런 별세의 경험들이 쌓여서 우리가 마침내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 소망이 쌓여간단 말입니다. 그렇구나.. 내가 있을 곳은 이 땅이 아니구나.. 내가 진짜 살 집은 하늘에 있네.. 바울처럼 어서 속히 이 육신을 벗고 하늘의 형상으로 바꾸어주시기를 바라는 거에요, 우리 동요에도 그런 게 있잖아요.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여러분은 그렇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안으로 사라진 에녹처럼 세상에 있어도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이미 하늘로 옮겨진 하늘들이란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죄와 사망까지도 감사입니다. 왜? 이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을 통하여 진짜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생은 그 사망의 문을 열고 나갈 때 그때부터 진짜 사는 것이니까요. 진짜 삶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
이 죄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하려면 3박 4일은 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필요한 만큼 새겨주실 것을 믿고 죄에 대한 오해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는 성경이 말하는 의에 대해 나누도록 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를 우리로 깨달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죄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님의 은혜만 꼭 붙들게 된 것이 우리의 거룩이고 구원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세상도 뒤로 하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그런 복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은혜의 영광의 찬송이 울려 퍼지는 그 십자가 아래로 날마다 저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