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포를 논하다. - 중략 - 기본적으로, 진수의 '삼국지'의 신뢰도는 상당히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부분만큼은 모두가 인정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중국의 역사서중에서 신뢰도나 그 가치성 등에 있어서 베스트 3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진수의 '삼국지'입니다. 또한 저자인 진수도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에 비유될 정도의 역사적인 안목과 객관성을 가진 학자로 당대에 이미 인정 받은 바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진수의 기록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자세입니다. 사마천의 사기 조차도 신뢰가 가지 않는 부분이 일부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며, 이는 모든 역사서들에 다 해당되는 것일 것입니다. 아무리 신뢰성이 높다 하더라도 이는 분명히 상대적인 것이며, 아무리 객관적인 시각으로 저술한다 하여도,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있으므로 저술 당시의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을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분에 거쳐서 신뢰성을 의심하는 것은 지나치며, 자칫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은 신뢰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신뢰하지 않는 비 객관적인 태도가 되기 쉽습니다. 제가 헤아려 볼때에에는 기본적으로 모든 역사서에 공통적인 부분인 승자에 대한 관대함과 패자에 대한 혹독함은 기본적으로 간주하되, 하나의 사실만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 걸쳐서 비교를 함으로써 그 객관성을 판단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일단은 진수의 삼국지가 왜 신뢰도가 높다고 하는지부터 말하고, 여포에 대한 부분을 언급해 보겠습니다. 1. 진수의 삼국지가 신뢰받는 이유 기본적으로 진수의 삼국지는 사마천의 사기와 비슷한 '기전체'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이 기전체의 특징은 '기'와 '전'으로서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인물 중심으로 기록이 되어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건에 대한 진상을 알려고 하면, 그 사건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의 기록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점이 단점이긴 하지만 그때문에 오히려 객관적으로 저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역사가들이 저술할시, 그가 처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서 객관적으로 기록하는데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기전체로 저술하게 되면 어떤 인물의 실수나 단점을 다른 인물의 '기'나 '전'에서 언급할수 있는 것이죠. 이런 장치로 해서 객관적인 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도 유지하는데에 매우 유요한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진수의 삼국지는 이러한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무제기'를 보면 적벽전이나 한중전 등의 패전의 기록은 '불리하여 돌아왔다'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적벽전도 전염병으로 인해 물러난 정도로 나타나 있지요. 그러나 관련의 다른 인물들의 기록을 보면 그 과정이 상대적으로 상세히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물론 표현상에서의 문제는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조조가 손권을 '토벌한다'라든지, 장비와 마초가 변방을 '어지럽혔다'라든지의 표현은 어쩔수 없는 정치적 상황에서의 표현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무제기를 보시면, 조조의 패전이나 조조의 실책적인 면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진수가 '위'를 정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뿐만 아니라 조조는 '기'에 기록되었으나, 유비나 손권은 '전'으로서 한단계 낮추어 기록하고 있지요. 그런데 위나라에 소속된 다른 인물들의 기록들을 세세히 보다 보면, 조조의 실책들이 종종 눈에 띄게 됩니다. 억울하게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신하도 보입니다. 이런 부분들로 인해서 쓰여진지 오래된 진수의 삼국지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역사가는 없었다고 합니다. 2. 여포에 대해서 진수의 삼국지의 신뢰성은 상당히 믿을만 하지만, 그럼에도 승자에게 관대하고 패자에게 혹독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어느정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어느정도'라는 표현이 애매하지만, 기타 다른 역사서들보다는 덜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포에 대한 기록을 보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여포를 혹평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포전'이든 다른 열전에서 보이는 당대 인물들의 여포에 대한 언급의 기록들을 모두 다 보아도 그렇습니다. 좋은 기록이라면, 용맹하다는 것과, 인중여포라는 것인데 인중여포라는 것은 아마도 외모나 풍모쪽을 이야기 하는듯 싶습니다. 그 외의 기록들은 사실상 여포를 패륜아쪽으로 몰아가는 것들이라 하겠습니다. 결국 갈림길은, 이 여포에 대한 기록들을 신뢰하느냐 못하느냐가 관건이 될듯 싶습니다. 신뢰하는 쪽은 진수의 삼국지에 대한 신뢰도가 손에 꼽을만큼으로 인정되므로 여포의 기록들도 대체로 인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평가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쪽은 몇몇 이유들로 인해서 여포에 대한 기록들을 신뢰할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들은 대체로 두가지 인데, 첫째는 여포가 이민족 출신이어서 불리하게 기록되어졌다라는 주장(김운회 교수가 이 주장을 하다가 숱한 반론에 아무 대답 못했습니다.) 여포가 역사상 패자이기 때문에 불리하게 기록되었다는 주장들인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결국은 이 두가지에 포함이 되는 내용들이더군요. 첫번째 여포가 이민족이어서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점은 일전에 김운회 교수등이 '삼국지해제'나 '삼국지 바로 읽기'를 통해서 주장한 바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두가지 책들은 대부분의 전문가나 논객들에 의해 숱한 반론들이 제기되었고 어떤 전문가는 '비평한 가치조차 없다'라고 까지 언급하시더군요. 그도 그럴것이, 여포의 출신인 '오원군'은 변방지역이라고는 할수 있으나, 그 출신이 곧 이민족이라 하는것은 지나친 추측이며, 오히려 병주 사람으로 사도까지 지낸 왕윤이 여포를 동향사람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포와 비슷한 출신으로 많이 거론되는 사람이 가후 인데, 가후의 기록을 보면 악평은 별로 없습니다. 대체로 가후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지요. 변방출신이어서 불리하게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다른 변방출신 인물들도 악평이 가득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다는 점은 이 주장에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두번째로 여포가 패자여서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점인데, 이 점 역시 마찬가지로 보여집니다. 삼국지 에서 승자라고 할수 있는 인물은 사실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유력자들이 결국은 패자가 되었습니다. 여포가 패자여서 불리하게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그 많은 패자들 모두 불리하게 기록되었다는 말이 되고, 여포에게만 특별하게 불리하게 기록되었다고 말할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여포가 역사상 패자여서 불리하게 기록되었다면, 다른 패자들 역시 그러하다라는 것이 함께 주장되어지고 또 그 근거들이 제시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원소나 동탁 원술 유표 공손찬 등의 인물들이 패자여서 불리하게 기록되었다는 주장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때 여포도 전술한 인물들처럼 불리하게 작용한점이 어느정도 있을 것이다라는 점에는 저 역시도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포에 대한 평들은 너무나 안좋습니다. 여포와 비슷한 정도의 평을 듣는 인물이라면 동탁, 원술 정도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들 모두가 패자여서 불리하게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다른 패배자들은 왜 이들보다는 훨씬 나은 기록이 남아 있을까요? 저는 이러한 의문들이 해결되지 않는한, 여포에 대한 정사의 평가는 정당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여포를 싫어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흥미롭고 매력적이고, 심지어는 인간적인 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도 여포를 좋아하는 인물중 한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깁니다. 게임을 해도 누구보다 여포를 먼저 얻으려고 하거나, 여포를 군주로 해서 플레이도 많이 해 보곤 했었지요. ^^ 그러나 좋아하는 것과, 냉정한 평가는 별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사에서의 여포의 평가들은 대개 아래와 같습니다. 1. 여포전 - 이전에 사도 왕윤은 여포가 자신과 같은 고향사람이고 건장한 인물임을 알고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친해 두었다. : 이민족이 아님을 증거.(실제 동향사람은 아니었음) - 그러나 원술은 그가 반복하여 배반한 것을 증오하여 거부하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 이후에 여포는 원소에게 군대를 충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게다가 여포의 장사들이 약탈을 일삼자 원소도 여포를 두려워하며 기피하였다. 오래지 않아 여포는 원소이 속마음 을 알아차리고 원소에게 그가 떠날 수있도록 요청했다. 원소는 여포가 돌아와서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며 자객을 보내 밤에 여포를 암살하도록 했는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 진등은 조조를 만나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고 배반하고 의존함을 가볍게 여기니 일찌감치 그를 제거하는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니 조조가 말했다. "여포는 야만스런 마음을 갖고 있는 이리 같으므로 진실로 오래 받들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대가 아니었다면 그의 정황을 살필 수가 없었소" - 여포는 비록 용맹스럽지만 무모하고 의심과 질투가 많고 그의 부하를 통제할 수도 없었으며 단지 몇몇 장수들만 믿었다. 2. 정욱전 - 진궁이 모반하여 여포를 영접하자 모든 성이 호응했소, 이는 마치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그대가 보건대 여포는 어떤 사람이오! 무릇 여포는 가슴속에 친함이 적고 강퍅하고 예의도 없으니 필부의 영웅일 뿐이오. 3. 무제기 - 조조가 말했다. "여포가 하루아침에 한 주를 얻었지만, 동평을 근거지로 하여 항부와 태산의 길을 끊어버리고 요충지를 이용하여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양에 주둔하고 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겠다." 4. 장홍전 -여포는 사나운 호랑이같이 용맹스러웠으나 특이한 재능이나 뛰어난 모략이 없었고 천박하고 교활하며 번복하기를 잘하며 오직 이익만 보고 이를 도모하였다 5. 진수의 평 -여포는 효호(虓虎, 포효하는 범)의 용맹을 지녔다. 그러나 특출한 지략은 없었고 경박하고 교활하게 반복(反覆, 언행을 이리저리 바꿈)하여 그의 안중에는 오직 이익 밖에 없었으니,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자가 이멸(夷滅, 멸망)되지 않은 적이 없다. 영웅기(야사) - 여포는 자신이 원씨(袁氏)에게 공(功)이 있다하여 원소 휘하의 제장들을 업신여기며 오만하게 굴고 (그들의 관직이) 함부로 서치(署置)한 것이라 하여 족히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포가 낙양으로 돌아간다고 청하자 원소는 여포를 영(領) 사례교위(司隷校尉)로 삼았는데, 겉으로는 응당 보내줄 것이라 말했으나 내심으로는 여포를 죽이려 했다. - 여포가 태조에게 말했다, “내가 제장들을 후대했으나 제장들은 위급해지자 모두 나를 배반했소.” 태조가 말했다, “경은 처를 저버리고 제장들의 부인을 사랑했으면서 어찌 후대했다 하시오?” 여포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 고순(高順)은 사람됨이 청백(淸白-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궤유(饋遺-선물)를 받지 않았다. 칠백 여 군사를 거느렸으나 천 명이라 일컬었는데, 개갑(鎧甲-갑옷), 투구(鬪具-싸움 도구)가 모두 정련(精練), 정제(齊整)하고 매번 공격할 때마다 격파하지 못함이 없으니 함진영(陷陳營)이라 불렀다. 고순이 매번 여포에게 간언하길, “무릇 집안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충신(忠臣)이나 밝고 지혜로운 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쓰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군께서 거동(擧動)하실 때 치밀히 생각하지 않고 번번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길 좋아하시니 그런 잘못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 여포는 그의 충성됨을 알았으나 능히 쓰지는 못했다. 여포는 학맹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다시 고순을 소원하게 대하고 위속(魏續)이 안팎의 친척이라 하여 고순이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빼앗아 위속에게 주었다. 그러다 싸움이 있게 되자 영을 내려 위속이 거느리던 군사를 고순이 이끌게 했는데 고순은 또한 끝내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이 알게되고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포
오래전에 썼던 글을 그대로 가져오느라 다듬어지지 못했습니다.
여포 ㅋ
쟌피님이 하도 근거 갖고오라고 하셔서 썼는데 막상 그 이후론 무반응이시네요.
뭐 오셔도 또 뇌피셜 주장만 하실거 같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