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미워!”
“누군 너 좋은줄 아냐?”
악을 쓰고 덤벼보지만 꼴에 고등학생이라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정윤준.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 사진이 잔뜩 들어있는 폴더를 지워버리다니.당장이라도 혈연을 끊어버리고 싶다.중학교 일학년때부터 삼학년인 지금까지 매일 웹서핑을 할 때마다 적어도 하나씩은 사진을 모았다.하나의 새로운 사진을 구하기 위해 밤을 샜다.시험기간에도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는 핑계로 가수의 사진을 모았다.
“내 오빠 맞아?딴 오빠들은 잘 해준다는데,오빠는 왜 이 모양이야?!”
“넌 내 동생 맞냐?딴 동생들은 다 오빠,오빠 하면서 따른다는데 이건 지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겨우 가수 사진 지웠다고 난리는….”
가수를 향한 내 열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오빠였다.그 가수가 나오는 프로그램이 할 시간이 되면 눈물을 머금고 오빠의 비위를 맞춰가면서까지 반드시 그 방송을 보고야 말았다.앨범이 나올때마다 엄마를 조르고,아빠를 졸라 결국 얻어냈다.어떤 물품을 사면 브로마이드를 공짜로 준다고 하면 내게는 전혀 필요 없는 물품이라도 주머니를 탁탁 털어 샀다.
“휴지통까지 비워버리면 복원도 못 하잖아!컴퓨터도 못하는게,휴지통은 왜 비워?”
“너보다는 잘해.야,휴지통을 안 비우면 그 폴더를 삭제한 보람이 없잖아.”
“왜 지웠냐고,왜!”
“그냥 지우고 싶어서.공부나 해,이것아.별것도 아닌거가지고 한창 공부하고 있는 사람 불러내고 난리야.”
벼…별것도 아닌거?지금 정윤준,이 개한테 던져줘도 모자랄 놈이 내가 삼년동안 죽자살자 모아놓은 사진 폴더를 별것도 아닌거라고 한 거야?진짜 죽여버릴까!
“야!정윤준!너 진짜 나한테 죽어볼래?!”
“야?정윤준?어쭈,많이 컸다?이제 아주 오빠한테 개기네?”
“니가 오빠라고?!어떻게 오빠가 동생이 그렇게 아끼던걸 지울수가 있어!”
정윤준의 표정이 살짝 굳은것 같기도 했지만,지금 보물을 잃어버린 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적당히 해,정윤주.”
얄미웠고,증오스러웠고,짜증났고,미웠다.내가 만약 자기 여친이 준 선물,편지들을 싸그라 갖다 버렸으면 나보다도 너 난리 쳤을게 자기는 내가 그것들을 갖다버려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였다.정말 갖다버려버릴까.오빠에게는 삼년동안 사겨온 여친이 있었는데,예쁘고 얌전하고 착한게 오빠에게는 분에 넘쳐도 한참 넘칠 여자였다.둘이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자신이 준 선물을 모두 버렸다는걸 알면 아무리 착한 언니라도 오빠를 차버릴 거였다.
내가 자기 여친이 준 것들을 갖다버릴 궁리를 하는걸 알아차렸는지,피식 아주 얄밉게도 웃으면서 “만약 현정이(여친 이름)가 준 거 갖다버리면 진짜 가만 안 둘거다.”라고 말하는 정윤준.
“진짜 죽여버릴거야,정윤준.그냥 나가 죽어!”
“안 그래도 나갈거다.”
표정이 확 굳어져 버렸다.살짝 쫄렸다.몇달 전이었지만,한번 화난 오빠가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다 던져 부수려던걸 겨우겨우 막았던 기억 때문이었다.하지만 나에게 그 오빠(가수)보다 중요한건 없어!정윤준이 화내는건 하나도 안 무서워!
…라고 생각은 했지만,표정이 확 굳어진 채 자기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가 잠바를 들고 나오는 정윤준 앞을 막아서고 욕을 퍼부어댈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진짜 싫어,정윤준.
“어린게 벌써부터 가수한테 빠져서.지워버리길 잘했네.”
“뭐?!야!정윤준!너 그냥 나가서 오지 마!진짜 죽어버리기나 해!”
정윤준이 나가기 직전까지 내뱉은 폭언.쾅!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진 현관문.
“진짜 싫어.”
나도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
혹시라도 휴지통에서도 없애 버린 폴더를 복원할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해서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실패.그냥 다시 처음부터 모으는 수밖에 없을 듯 했다.마침 엄마,아빠가 여행 가고 안 계시는 날이니 마음 놓고 사진을 모았다.다행인건,내가 링크해둔 사이트까지는 지우지 않았단 것 정도.
그렇게 몰입해서 사진들을 찾아 모으고 있을 무렵,내 휴대폰이 울렸다.
죽여도 시원찮을 정윤준 놈이었다.
만에 하나,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하나 싶어 휴대폰을 열까 했지만 이런 생각은 아주 잠시였다.그 못되고 악랄한 정윤준이 나에게 사과를 할 리가 없었다.아마 나를 놀리려고 하거나,생각해보니 열불이 나서 욕이나 퍼부으려고 전화를 한게 분명했다.
전화를 받지 않자 시간이 흘러 휴대폰 벨이 끊겼다.하지만 곧이어 계속해서 벨이 울렸고,세번정도 무시했는데도 불구하고 네번째로 벨이 울리가 짜증이 난 나는 거칠게 전화를 받았다.
“아,왜!또 뭐!”
-네,정윤준 분 동생 되세요?
나긋나긋한 상대편 여자의 목소리는 아주 싸가지 없게 소리 질렀던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네,그런데요. ”
-여긴 ㅇㅇ병원입니다.유감스럽게도 정윤준씨께서 교통사고로 운명하셨습니다.
“…네?”
순간 멍해졌다.아니,이건 분명 장난일 거야.정윤준이 나가기 전에 내가 죽으라고 했던 것 때문에 화가 나서 지 친구를 시켜서 이런 장난 치는거야.그럴거야.아니,그래야 돼.
“장난 치지 마세요.저 안 속아요.정윤준한테 내가 그 정도로 속을 것 같냐고 전해주세요.”
-믿기 힘드시겠지만,사실입니다.
그 이후로 상대편 여자가 뭐라고 더 했던것 같았지만,들리지 않았고 기억나지 않았다.전화가 끊기도 나서 정신을 가다듬었다.이건 장난이야,라고 수십번 수백번 내게 세뇌시켰지만 이놈의 뇌는 정말 오빠 말대로 병신인지 수백번 한 세뇌도 먹혀들지 않았다.만약 장난이라고 했을 경우 쪽팔리지 않게 친구랑 만나러 나왔다고 해야지,라는 생각에 샤워를 했다.예쁜 옷도 입었다.오빠가 골라줬던 옷이었다.
정말,나는 그딴 장난에 속지 않는다고,내 말은 진심이라 니가 죽는다고 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장난일게 분명했으니까.최대한 여유롭게 가기로 했다.하지만 엘리베이터 기다릴 시간도 아까워 계단으로 뛰쳐나가고,택시를 잡아 세워 대학병원으로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했을 때,나는 알았다.
아까부터 나는 떨고 있다는 걸.여유따위는 온 힘을 다 짜내도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샤워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일분동안 온 몸에 물을 묻히고,대충 샴푸를 비비고,린스는 바르고 어느 정도 효과가 나타날때까지 기다리기는 커녕 바르면서 씻어냈다.물기도 제대로 닦아내지 않아 오빠가 골라줬던 옷이 축축해졌다.로션도 덕지덕지였다.얼굴을 만져보았다.미끌미끌했다.로션과 미친듯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섞여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학생,남자친구한테 차였어?”
택시기사 아저씨가 휴지를 건네며 물었다.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건넸을때야 아까부터 아저씨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는걸 알았다.휴지를 받아 얼굴을 닦아내면서 고개를 저었다.
“오,오빠가…장난쳐서…그,그딴 장난…치지 말라고…”
말하러 가는 길이에요.이 말이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계속 나오는 눈물을 삼켜내기도 힘들었다.
병원에 도착했다.간호사에게 정윤준이 이 병원에 있냐고 묻자 105호 병실에 있단다.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가라고 했다.비틀비틀거리며 병실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오빠 여자 친구가 오열하고 있었다.오빠와 제일 친하다는 친구와,그 친구의 여친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래요.왜 그렇게 울어요.누구 죽었어요?”
침대에 누워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천을 뒤집어 쓰고 있는 저 사람.누구길래 이 사람들이 이렇게 오열을 하는 건데.
“윤,윤주야…윤준이가….”
현정이 언니가 나를 보고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예쁘장한 얼굴은 이미 눈물에 섞여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화장 때문에 엉망진창이었다.
“나 때문에…나 때문에….”
“니 탓 아니야.”
현정이 언니 말에 오빠 친구가 언니를 달랬다.목이 메었지만,억지로 내뱉는 목소리였다. “아니야,내가 그러지만 않았어도…”하면서 계속 울어대던 언니는 결국 기절했다.간호사들이 와서 언니를 데려갔다.오빠 친구의 여친이 같이 따라갔다.
“뭐야,장난이 심하잖아.정윤준,얘 정윤준 맞죠?그죠?그만 일어나라고!야!”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을 흔들었다.점점 소리가 크게 났다.그만 일어나라고.나 충분히 놀랐으니까 일어나라고.오빠 친구 쪽팔리게 울잖아.남자는 우는거 아니라며.오빠 여친 울잖아.남자가 쪽팔리게 여친 울리는거 아니라며.왜 울게 내버려두는데.오빠가 일어나서 달래줘야되잖아.나 놀랐어.설마 나 놀리려고 오빠 여친,오빠 친구,오빠 친구의 여친까지 나서서 저러는거야?나 놀랐어.그만해.
“일어나아…!”
나중에 오빠 친구에게 들었다.
오빠는 언제나 가수에게 빠진 내가 걱정이라고 했다.저렇게 좋아해서 어쩔련지,앞뒤 안가리고 저러다가 성적 어쩔련지,나중에도 저러면 어쩔련지.그래서 큰맘 먹고 USB를 사서 그 안에 사진 폴더를 옮겨놨다고 했다.16기가로도 부족해서 32기가짜리로도 두개를 사느라 꽤 돈을 많이 썼다고 했다.USB에 옮겨 놓고,사진 폴더를 지운척 했다.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나를 잔뜩 화나게만 했다.그래서 그냥 돌려줘야겠다고,컴퓨터 용량 넉넉하게 쓰라고 USB까지도 같이 줘야겠다고 했단다.
나를 생각해서 한 거였는데,오빠 맞냐고,니가 내 오빠냐고 했을때는 정말 화났다고 했다.
그런데 현정이 언니가 그 USB들을 갖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과 세게 부딪쳐 실수로 그만 그 USB 하나가 차도로 떨어졌다고 했다.오빠는 혹시라도 내가 더 화낼까봐,속상해 할까봐,혹시 늦으면 저 USB가 차에 깔려 부서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로 차도로 들어갔다.그리고 일톤 트럭에 치였다.
“꼭,꼭 전해달라더라.너한테.”
오빠 친구가 전해준 USB 두개.
그제야 기억 났다.다른 친구들이 내가 오빠 얘기를 할 때면,오빠를 못됐다고 하면서도 오빠를 부러워하던 친구들.운동 잘 하고,여동생의 쇼핑을 도와주고,이것저것 은근히 챙겨주던 행동들.아까처럼 화 내고 나갔으면서도 나중에 되면 슬쩍 미안하다는 전화나 문자를 보냈고,올때는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들을 사가지고 오기도 했었다.
그런데 난 아까 어쨌더라?
오빠에게 오빠 맞냐고,나가 죽으라고 소리 쳤다.내가 죽었어야 했다.오빠처럼 여동생을 위해주는 착한 사람이 아닌,인간관계 좋았던 오빠가 아닌,자길 생각해주는 것도 몰랐으면서 오빠가 잘해줬던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면서 하나 가지고 바락바락 대드는 못된 여동생이었던 내가,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던 내가 죽었어야 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쉴새 없이 흘려내렸다.
“오빠,미안해….”
그리고 오빠는 정말 좋은 오빠였어.
첫댓글 정말 오빠의 진한 사랑을 알게 되네요...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