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모임 하나님 나라 2강
큰 틀에서의 개념은 정리되신 걸로 알고 이번 시간에는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원리 속성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주기도문에 “나라가 임하옵시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헬라어에만 있는 문법인데 이 뜻은 그 나라가 이미 임했고, 또 임하고 있고, 그리고 반드시 임할 것이라는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되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으로 해서 그 십자가 위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고, 또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성도 안에 예수님의 영이 임한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그들 안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땅에서 마지막 성도의 목이 베어져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완성될 때까지 그 나라는 오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렇게 마지막 성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날, 예수님은 그들을 다 거느리시고 이 땅에 재림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시록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첫 창조를 하신 하늘과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살게 될 여러분을 위해서 그 시험관으로 미리 준비하신 거란 말이에요. 게할더스 보스의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는 말의 뜻이 이것입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죄의 권세 속에서 신음하게 되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도록 만드는 조건과 환경으로서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21장에서는 그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없다고 합니다. 그 하늘과 그 땅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 그 하나님 나라예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속에 있는 그 나라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나라를 소망하는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정신과 힘의 원리 속에서 신음하고 탄식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를 떠나 우리의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면 당장 생존의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나쁜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있어야 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패해도 괜찮고 넘어져도 괜찮고 욕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반드시 배우고 가야 할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시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에는 없는 예수님이 선물하신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게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는 믿음이란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우리에게는 아직 육의 몸이 있고 이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약하신 주님이 아니라 강하심으로 나를 도와주시는 주님을 원하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살지 못해요. 우리에겐 그 믿음이 없단 말이지요 이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이 삶이 있어야 소망도 같이 주어집니다. 이런 우리들의 갈등과 충돌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절망과 주저앉음의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조금 열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매일 홀리하고 성령 충만해서 새벽부터 밤중까지 기도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절망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의 실존을 직면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 보인다는 겁니다. 참 아이러니해요. 우리의 바람이나 노력이나 열심과 아무 상관없는 너무도 낯선 그 천국이 언제 보이느냐? 우리 자신과의 갈등, 우리 자신과의 충돌 속에서 보입니다. 자기부인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은 나 같은 죄인이 갈 수 없는 곳이 맞구나.. 라는 그런 절망.. 하나님이 계신 천국은 의인들만 갈 수 있는 천국이니까 한편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용서를 받은 죄인들이 가는 천국인 것을, 그리고 그 용서는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 주어지는 용서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불가능한 죄인들을 향한 성령의 책망이 날마다 주어지는 상태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있는 천국입니다. 우리는 그때 잠시 그 나라의 평안과 풍요를 누리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나는 왜 이리 안 되지?’라는 것으로 걱정하지 마세요. 안 되는 게 정상이에요. 그 나라는 나의 이 몸으로는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니까.. 그러니 다른 기도 하지 마시고 “하나님, 어서 속히 이 몸 좀 바꿔주세요. 이 몸 가지고는 안 되겠습니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땅에 속한 형상이 있듯이 하늘에 속한 형상이 따로 있다.. 그걸 바라는 거예요. 착한 행실이나 어떤 깨끗함으로도 갈 수 없는 나라가 천국임을, 오직 어린양의 피로 빤 흰옷을 입은 자들만 갈 수 있는 천국임을 알게 되는 약함인 거예요.
제가 갈라디아서를 나눌 때도 말씀드렸는데,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그 옷으로 인해 우리의 불가능이 날마다 폭로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전혀 죄 같지 않은 것까지도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조그마한 의도 깨끗함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 그 은혜의 필연성을 날마다 확인당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빤 옷을 입은 성도는 이런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라
하나님 나라 천국이 있는 자들이 어떤 자들이라고요?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여기서 큰 환난이라는 건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죽지 못해서 사는 그 정도의 환난이 아닙니다. 차라리 폭탄이 떨어져서 죽는 건 어려운 게 아니에요. 날마다 우리를 슬라이스해서 조금씩 죽여나가시는 죽음,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 산 자가 예수의 죽음에 날마다 넘기우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를 지키고 튼튼히 하기 위해서 세상의 자원을 끌어모으고 나를 위한 건축물을 세우고 하는데, 이런 우리를 쫓아다니시면서 뿌리를 잘라내시고 세상 집을 허물어 뜨리는 분이 계시단 말이에요. 이런 과정이 없이는 우리 눈은 절대 하늘을 향하지 않습니다. 이게 고난이에요. 나를 위해서, 나의 나 됨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 게 고난이고 환난이에요.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라는 말의 뜻이 이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무엇이라고요? 피로 빤 세마포 옷이란 말이에요. 그분께서 홀로 준비하신, 그분의 피로 빤 세마포 옷을 입혀주신 것을 두고 착한 행실, 옳은 행실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성경의 모든 언어는 우리의 상식이나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렇게 천국은 예수님 홀로 완성하신 천국이지 인간들의 협조나 열심이 필요한 나라가 아니에요. 오히려 천국을 향해서 손을 뻗치는 열심이나 종교 행위를 성경은 죄, 탐심,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불의’입니다.
대전모임이 벌써 일년이 되었는데요 주제가 오해시리즈입니다. 죄에 대한 오해, 의에 대한 오해, 구원에 대한 오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등인데 이런 오해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 있어야 하는 겁니다. 나쁜 게 아니에요. 이렇게 우리 육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들을 통해서 이것 아닌 그것을 배우게 하십니다. 육에서 나오는 것들은 이런 것들밖에 없구나...
그런데 이런 인간들의 행위를 책망하거나 간섭하시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게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심판은 내버려 두심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살도록 내버려 두심이 심판이고 반대로 그 인생이 자꾸 꼬이게 만드시는 게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사람 막대기로, 인생 채찍으로, 담으로 막아 그 길을 가지 못하게 하시는 거지요. 그 길을 가면 큰일 나니까 그길은 멸망의 길이니까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여기서 개들과 점술가들 음행하는 자들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은 예수님의 언약의 피 그 다 이루심을 극구 부정하면서 자기 의를 고집하는 인간교 교인들입니다. 그냥 거의 모든 인간이라고 보면 돼요. 이 모두가 우리에게서 그냥 나오는 것들이니까요. 선악과를 먹고 자기중심의 선악 체계로 자기 구원 가능성을 위해서 율법 행위에 집착하는 자들이 그들이고, 그 종교인들의 대표로 불려 나온 자들이 착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에서 칭찬 듣는 유명 인사들, 죽어서도 장례 행렬이 몇 키로 길게 늘어서 있다는 사람들, 그런 종교인들, 그들이 자기도 천국 못 가면서 다른 이들도 천국 못 가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들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냥 옷을 입혀주신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나라에 가서도 말하길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제가 어떻게 주를 위해서 살았다고 하십니까?.. 라고 말하는 겁니다.
반대편의 사람들은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 찾아가고, 굶주리고 헐벗었을 때 도와준 제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내가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주겠다..
우리가 행한 게 뭐가 있습니까? 행한 대로 갚으면 .. 이런 게 오해인 겁니다. 1강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갚으신다는 건 율법 행위 종교의 세계거든요. 그게 심판이에요 어느 누구도 율법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자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행한 게 무엇입니까? 행한 것 중에 기억나는 것 있어요? 새벽기도 10년 다닌 것? 십일조 빼먹지 않는 것? 정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천국 갈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분 앞에 내어놓을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럼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게 뭡니까? 우리 인생을 예수님이 살아주신 거예요. 믿음이란 말입니다. 그분의 믿음 안에서 산거에요
(갈라디아서 2장)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이 살아온 인생을 한 번 돌아보세요. 그분이 어떻게 내 인생을 사셨는지... 이게 바로 그 이야기예요. 성경 마지막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아직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 이 행위 하나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주께서는 이걸 우리가 주를 위해서 산 행위로 여겨주시는 겁니다. 우리의 행함은 믿음이에요
그런데 이 복음, 이 은혜의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뭐예요? 왜 거절합니까? 왜 이스라엘이,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인들이 예수를 죽이고 그 은혜를 거절했을까요? 난 그런 천국 싫다는 거예요. 난 그런 천국 안 간다는 거예요. 내가 내 땀 흘리고 내 시간 투자하고 노력해서 내 손으로 얻는 구원과 천국을 원하지 당신이 일방적으로 주는 천국은 싫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의를 애써 거부하고 자기의에 집착하는 인간교입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종교인입니다. 무교는 없어요. 무신론 종교가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왜?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안에 이미 자기중심의 선악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처럼’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자기신학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이런 겁니다. 여러분 예전에 세상교회 다닐 때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의 일을 돕고 각자의 헌신에 따라 하늘 상급도 다르게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여러분이 열심히 노력해서 쟁취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잖아요 천국은 침노하는 자에게서 침노당한다고.. 그러니까 그 나라를 침노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선행과 구제와 헌금을 하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도와드려야 하고 그렇게 하나님나라는 확장되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기독교예요. 오늘날 개혁신학이 모두 이런걸 가르친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이게 마귀의 가르침이에요. 세상 신에 장악된 교회의 현실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단의 작업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겁니다. 십자가 은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이걸 성경이 믿음 없음, 불의, 부정이라고 하는 거에요.
이런 사단의 미혹은 이 땅에 교회가 처음 생길 때부터 계속 있어 왔고,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영광에 인간의 행위가 보태져야 구원이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사도는 불법한 자의 나타남, 미혹의 역사, 사단의 활동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다른 영을 좇아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퍼뜨리는 자들을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지요. 십자가를 우회해서 갈 수 있는 천국을 가르치는 자들..
제가 첫 시간에 그랬죠? 심판 없는 구원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신 하나님의 저주를 우리와 상관없는 것인 양 피해서 내가 가고 싶은 천국 가는 건 다 가짜입니다. 그래서 인간교라는 건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나라를 꿈꾸는 자들이예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해서 추방해 버린 인간들의 나라입니다. 당신 같은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어.. 당신이 없어도 우린 잘 살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오지 마.. 여긴 우리 땅이니까.. 당신이 말한 그런 나라, 그런 천국은 필요 없으니까 다시는 이 땅에 오지 마..
그래서 만일 예수님이 지금 다시 오신다 해도 그런 인간교에 의해서 출입 금지당할 겁니다. 신천지와 예수 출입 금지.. 지금 실제로 써놓지만 않았지 세상 교회들이 하는 짓이 그거란 말이에요. 그들의 세상을 성경이 지옥이라고 합니다. 지옥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가 필요 없는 세상, 십자가 은혜가 아니라도 아무 불편함이 없는 세상이 지옥이에요. 그래서 주께서 자기 살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신 자들은 이미 이 땅에서부터 지옥을 살고있는 겁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천국을 살고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이 땅에서부터 지옥을 사는 거예요. 성도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살면서 그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고, 또 너희가 아닌 그들은 이 땅에서부터 지옥을 살면서 영원한 지옥을 살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선택이 아니에요. 그들 스스로 살고 싶은 인생을 산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그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참 다양한 지옥이죠? 요즘 신문, 뉴스, 방송 보세요. 얼마나 다양합니까?
그런데 그들도 할 말이 많을 거예요. 아니 그럼 우리에게도 진작 얘기 좀 해 주지, 그냥 우리 사는 대로 내버려 두고 지옥 보내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이야기를 해 주면 들을까요?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셔도 그들은 못 들었단 말이에요. 오죽하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셨겠습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갈라디아서 6장)
15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여기서 할례나 무할례란 말은 율법행위 종교의 세계를 말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이 아닌 새로 지음을 받는 것만이 사는 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나누어지고, 그 죽음이 나누어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도 새로 주어지는 것, 그것을 새 창조라고 합니다. 안약의 죽음 언약의 피 십자가입니다. 그 죽음 안에서 우리가 연합된 거예요. 우리 신랑 예수와, 우리 주님 예수와, 우리 하나님 예수와 연합된 상태, 그게 구원이고 그게 영생이고 그게 하나님 나라예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핑계치 못할지니라.. 요한복음에 나오잖아요. 내가 말하지 아니하였다면 모르지만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너희에게 말했다 무엇으로? 나의 죽음으로, 언약의 피를 흘림으로 너희에게 말했다.. 이제는 아무도 핑계치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끝났다.. 이미 주께서 이 땅에 언약의 피를 흘리셨고, 그분이 이미 세상을 다녀가셨고, 세상을 향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 누구도 핑계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성도에게 임한 것처럼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이 세상 역시 그때로부터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불타고 있는 지옥이에요.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 속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듯이.. 그 세 친구는 풀무불 속에서 춤추고 있었잖아요. 그들이 바라본 세상은 불타고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불 속에 집어넣었으나 실제로 불타고 있는 건 세상이었습니다.
그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여러분은 이미 불타고 있는 세상 밖으로 옮겨진 사람들이에요. 이 세상 밖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이란 말이에요. 세상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된 약속의 사람들은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의 심판을 통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불타고 있는 지옥, 심판이 실행되는 이 세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성도입니다. 모든 사건과 모든 환경과 모든 관계 속에서 이 나라가 아닌 그 나라를 소망하게 된다.. 이 지옥을 영원히 살아야 하는 저들과 내가 다를 게 전혀 없는데, 저들보다 잘난 것도 착한 것도 똑똑한 것도 없는데, 내게 임한 하나님 나라는 오직 우리 주님의 희생이고 예수님의 공로로 주어지는 나라가 맞구나.. 하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종말의 세상을 보면서, 심판의 근거로 나타나는 모든 사건, 모든 현상들을 접하면서 수시로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지금도 이 세상과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세상을 바라보는 세상관, 역사관, 인생관, 가치관 이 모든 게 바뀌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장 마음(카르디아)을 주께서 바꿔놓으셨어요. 값없이 주어진 용서와 사랑을 이 세상을 향해서 증언하라고.. 교회가 이 세상에 남겨진 이유는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처럼 그 길을 가다가 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세상의 심판을 외치면서 너희도 세상으로부터 별세를 경험하라고... 이 큰 성 바벨론으로부터 큰 성 길 가로 쫓겨남을 당하는 게 우리의 현세적인 구원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차츰 열리는 거예요.
거룩은 그렇게 이 세상으로부터 갈라짐이 있을 때 거룩이 나타납니다. ‘거룩’이라는 말 자체가 분리됨이에요. 내 행실이 착하고 됨됨이가 올바른 그런 의미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분리됨, 구별됨입니다. 그래서 전혀 거룩하지 않은 우리가 몇 초라도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그때란 말이에요. 우리 믿음의 선진들도 다 그 길을 갔어요.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의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흩어져 있는 교회,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는 그 거룩한 교회가 바로 여러분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뿌리를 깊이 박고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려고 하지 마세요. 성도라면 그러려고 해도 안 됩니다. 성경이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저도 나이 칠십까지 살면서 내가 꿈꾸는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보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는 외부의 어떤 힘이 자꾸 갈라놓더라고요. 그게 구원이고, 그게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사는 거란 것을 이젠 압니다.
그래서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 이 땅에 침노한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반응이나 기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어명(왕의 명령)처럼 그 나라를 선포하는 게 교회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는 자체가 세상의 위기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 신은 여러분을 귀신같이 압니다. 귀신같이 알고 귀신같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밀어낼 겁니다. 그게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그들의 역할이기 때문이에요. 그 세상에 대해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가 임한 자들, 다시 말하면 이미 흑암의 권세로부터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그 아들들만 외칠 수 있는 심판이란 말이지요 달리 말하면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이기에 그래요. 사도바울이 그랬잖아요. 너희가 천사들까지도 판단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성도의 눈에 비친 세상의 현실은 그렇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노아를 가리켜 이 세상을 심판하고 의를 좇는 하나님의 후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노아가 한 게 뭐 있습니까? 착한 일을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세상 다니면서 전도를 많이 한 것도 아니에요. 백이십 년간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든 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배를 지은 행위 자체가 이 세상을 향한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을 향한 심판인 거예요. 여러분 안에 그 나라가 이미 임했으면 여러분은 부득불, 하기 싫어도, 때가 되면 그 나라를 선포 하게 됩니다. 누구에게? 먼저 내 자신에게... 「목사와 설교」라는 책을 보면 목사는 1차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쓴 원고에 스스로 아멘을 할 수 있어야 교인들에게 전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파요.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의 자아가 죽어나가고 또 그 말씀을 살아내면서 날마다 죽어요 이 땅에서 천국을 산다는 건 그런 겁니다. 다들 실망한 얼굴인데, 다른 천국을 기대하지 마세요. 그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십자가에 못 박힘 그 죽음 안에서 하늘 본향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믿음을 따라 어떻게 했다고요? 행복하게 살았다? 부자되고 출세했다?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잘 살았다? 아니지요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 고 합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천국에 가려면 최소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 되심을 부끄러워하시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을 모르고 천국엘 가면 천국 물만 다 흐려놓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홀로 자기 길을 만드시면서, 없는 길을 만드시면서 십자가를 향해서 가셨단 말이에요.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이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름없이 사는 것 같지만, 여러분이 가는 길은 세상과 다른 길이에요. 세상에 없는 길을 지금 여러분이 가고 있다니까요. 어떻게? 생명길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이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그 길 위에 있는 동안 도망가지 못합니다. 결국은 우리 목적지가 아닌 그분의 목적지로 데려다 놓으시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사는 현실은 층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다른 층을 사신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과 섞일 수 없는 질이 다른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냥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그런 시간이 아니에요. 영원이라는 미래로부터 오는 그 시간을 지금 살고있는 거예요. 그게 침노 당하는 천국입니다. 그 천국이라는 시간, 수직적인 시간을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육을 벗고 사망의 문을 열고 나갈 때, 그때부터가 진짜 사는 겁니다. 이미 침노해 들어온 하나님 나라를 그때는 우리가 온전히 누리게 될 거예요. 우리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면서 주께서 우리 눈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그날, 그때는 저와 여러분이 그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이 세상에 미련이 있나요? 젊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굉장히 미안한데, 지금은 그냥 사시면 돼요. 주께서 허락하신 그날 동안 열심히 사세요.
김성수 목사님이 부른 노래 중에 ‘집으로 가자’ 있죠? 아직도 세상을 그렇게 기대하나.. 세상과 나에 대한 기대가 차츰 소망에 의해 밀려난 사람들이 세상 미말에 끌려가는 성도란 뜻이에요 그렇게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는 감추어진 세계, 그래서 죽음은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그리 나쁜 게 아니에요. 죽음과 생명은 하나이니까...그렇다고 자살하라는 말은 아니고... 우리는 자살한 권리조차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에게 죽음은 나쁘고 더러운 게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잔칫집 말고 초상집에 가라고 하잖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진짜 유일한 현실은 단 하나, 죽음밖에 없어요. 이것만이 진짜 현실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본의 아니게 그 죽음을 날마다 살아내고 있어요. 그냥 단순히 이 목숨이 끊어지는 그런 죽음이 아니에요. 우리는 원래 예정된 죽음 안에서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걸 죽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딱 하나, 진짜 생명이 있는 분이 자기 목숨을 버린 그 죽음, 그 죽음을 알고 그 죽음에 연합되어야, 그 죽음이 나누어져야 진짜 생명도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미 그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씀이 어디에 있는 말씀인지 아시지요? 소위 부활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이미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는 날마다 죽는다는 겁니다. 그 생명을 배우기 위한 죽음이란 겁니다. 이 역설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해요.
우리의 죽음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육이라는 옷 하나 벗는 거예요. 이 옷을 벗어야 신랑이 준비해준 신부의 예복을 입을 수 있는 거예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들에게 입혀주신 그 예복, 그리고 그들에게 증표로 주신 게 믿음이란 겁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회개에 대한 예수님의 강론 중에 잃어버린 드라크마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전이 무어 그리 귀한 거라고 그렇게 열심히 찾습니까? 그게 뭔가 하면 옛날 이스라엘에는 결혼에 대한 증표로 신랑이 신부에게 동전으로 만든 목걸이를 주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 목걸이를 잃어버리면 큰일 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여러분에게도 신부 된 증표로 주신 게 믿음이에요. 너는 내 신부야.. 그래서 요한복음 마지막에 보면 요한과 베드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네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돌아다녔지만, 늙어서는 내가 너를 띠 띠워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게 베드로의 죽음이며 그게 예수 믿음 안입니다. 이게 여러분에게 주신 증표로서 믿음이란 말입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 안에 심겨졌는데, 어떻게 심겨졌는가 하면 겨자씨처럼 심겨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들어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너희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겁니다. 믿음은 원래 너희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겨자씨처럼 우리에게 심겨진 것,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다.. 가루 서말 속에 감추인 누룩처럼 그렇게 부풀어진 하나님 나라를 지금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그 믿음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만 열리고 보이는 하나님 나라예요.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있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입니다. 우리 주님의 씨 심는 죽음이 작동하는 믿음 안에서 부풀어지고 열매 맺게 된 나라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졌는데, 그 씨 심는 죽음이 우리 안에서 지금 작동하고 있고 그 죽음이 날마다 우리 삶에 재현되어 나오기 때문에 그 죽음에 넘기우는 죽음을 우리가 살아내야 천국의 생명, 예수의 생명도 우리 안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에서 말하는 현재적 구원, 하나님 나라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예수의 죽음이 역사하고 작동하는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 생명이 나누어지게 된다..
자, 이런 시각으로 예수님이 강론하신 천국 비유를 다시 볼텐데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게 왜 선악과 먹은 인간은 천국에 갈 수 없는가.. 그럼에도 이 땅에 천국을 몰고 오신 예수님은 그 천국을 우리에게 어떻게 심어주셨는가.. 이것을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서 보자는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감추어졌으나 여러분에게는 감추어지지 않은 천국의 비밀이니까.
(누가복음 13장)
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우리 카페 대문 그림은 이 말씀의 이미지를 옮겨놓은 건데, 여기서 천국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이거든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하는 질문에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너희들 같은 소경이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도 너희에게는 감추어져 있다, 겨자씨처럼 가루 서말 속에 누룩처럼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나오잖아요. 이 이야기가 등장하는 건 본다고 하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 소경이 소품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렇게 그 소경의 죄가 누구 것이냐고 묻는 제자들이나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 니들이 바로 소경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도 소경인 너희에게는,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너희에게는 감추어진 나라다.. 그리고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라고도 못하리니.. 이 말은 너희들 지식이나 판단에 절대 포착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있는데, 너희가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구나..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다.. 이사야의 그 말씀이 지금 이루어졌단 말이에요.
그렇게 아주 보잘것없고,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겨자씨, 어떤 씨보다도 작지만, 그 씨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는 임하게 된다.. 그래서 그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수난을 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 약하심의 그 모습 안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거예요.
그러나 세상 나라는 그와 반대죠. 이 세상 왕국은 나 자신이 왕이 되어서 나의 왕국, 나의 영토를 지키고 확장하는 일에 모든 것을 이용합니다. 나의 힘이될만한 것은 다 끌어 모으잖아요 심지어 예수님도 하나님도 교회도 모두 나를 위해서 나의 힘으로 존재하는 게 세상 왕국이에요.
그렇게 이 세상 교회는 그런 이 세상의 왕들이 모여서 각자의 신을 열심히 섬기는 곳이에요. 교회가 그런 왕들 용사들의 존재 가치와 가능성을 부추기고 긍정해주는 곳이 돼버렸단 말입니다. 이름만 하나님이고 예수님이지 사실은 나라는 우상, 나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도움 되는 힘있는 예수를 이용해 먹고 있는 거예요. 그들에게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 사용 설명서입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경쟁적으로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전도, 봉사, 구제 성경 공부까지 하지만 결국 그 결과물은 누가 챙깁니까? 내가 챙깁니다. 나의 나 됨을 위해서,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신앙생활이란 걸 하는 것이지 주를 위한 믿음이 아닙니다. 나로 시작해서 내게 되먹임 되는 자기 사랑, 자기 숭배일뿐이에요. 이게 하나님을 안다는 이스라엘의 유대 신학, 율법주의의 결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우리는 우리 열심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그렇게 착각했는데, 하나님은 늘 우리 편이라고 착각했는데, 구약성경의 여호와는 이런 이스라엘과 전쟁하시는 여호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이스라엘에 오셔서 그런 인본적인 종교, 유대교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실 목적으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그런 하나님 나라는 없다는 말이에요. 너희들의 종교 행위로 인해서 풍성한 백향목 같은 나무에 깃든 새들을 천국이라고 착각하지만, 너희들은 그렇게 부흥되고 발전되고 규모가 커지고 더 많은 소유를 자랑하는 걸 축복으로 알고 있지만, 그런 천국은 너희가 만든 천국이지 약하디 약한 겨자씨로 오신 예수님이 만드신 천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게 겨자씨 비유예요.
오늘날도 이 천국 비유를 거꾸로 가르치는 게 세상 교회들인데요, 그들로부터 나온 게 번영신학이고 고지론입니다. 한 마디로 이 땅을 다녀가신 예수가 누구신지를 모른다는 이야기예요. 그분이 이 땅에 남기고 가신 언약의 피가 무엇인지를 모르니까 땅의 것, 보이는 것들을 좇아서 땅의 것들로 만든 천국을 가르치는 거에요.. 여러분 많이 들어보셨을 거에요 천국 갔다왔다는 사람들의 간증 전부 그런 거잖아요 제가 단언하지만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그런 천국을 꿈꾸는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로 딱 정리를 해버리셨습니다. 니들은 땅에서 난 자들이야... 그리고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너희 죄 가운데서 죽는다.. 내가 몰고온 천국을 모르니까 너희들은 이 땅에서만 살고 이 땅에 영원토록 가두어질 거야 바꾸어 말하면 그게 지옥(地獄)이란 말이에요. 너희가 그리도 사랑하는 이 땅에서 영원토록 살아라.. 그게 지옥이에요.
조금 보충해서 설명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에 나오는 나무는 구약 에스겔서에 나오는 백향목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인용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겁니다.
(에스겔 31장)
3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 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5 그 나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크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뻗어 나갔고
6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7 그 뿌리가 큰물 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 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1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솟아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11 내가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줄지라 그가 임의로 대우할 것은 내가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쫓아내었음이라
12 여러 나라의 포악한 다른 민족이 그를 찍어 버렸으므로 그 가는 가지가 산과 모든 골짜기에 떨어졌고 그 굵은 가지가 그 땅 물가에 꺾어졌으며 세상 모든 백성이 그를 버리고 그 그늘 아래에서 떠나매
13 공주의 모든 새가 그 넘어진 나무에 거주하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지에 있으리니
14 이는 물가에 있는 모든 나무는 키가 크다고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그 꼭대기가 구름에 닿지 못하게 하며 또 물을 마시는 모든 나무가 스스로 높아 서지 못하게 함이니 그들을 다 죽음에 넘겨주어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게 하였음이라
15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가 스올에 내려가던 날에 내가 그를 위하여 슬프게 울게 하며 깊은 바다를 덮으며 모든 강을 쉬게 하며 큰 물을 그치게 하고 레바논이 그를 위하여 슬프게 울게 하며 들의 모든 나무를 그로 말미암아 쇠잔하게 하였느니라
이게 세상 인간들이 소망하고 꿈꾸던 천국이에요. 계시록에 나오는 부정한 새들이 깃들인 나무 그리고 그 천국의 종말입니다. 모든 인간이 깃들이고 싶어 하는 천국은 이 세상의 힘과 권력으로 자기라는 우상을 증명하고 숭배하는 자들이 키워낸 나무다.. 그 웅장한 나무 안으로 수많은 새들이 몰려들지만 그 나무에 그 큰성에 몰려든 그들을 하나님은 가증한 새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8장)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 세상 인간들, 가증한 새들이 깃든 나무란 말입니다. 바벨론이라는 큰성 그래서 성도들은 그 큰성으로부터 쫒겨나 큰성 길가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 바벨론이라는 세상 나무에 모여들어서 음녀와 음행을 일삼는 것을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바벨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가 계시록 18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8장)
12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이 세상 가운데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그리고 그 바벨론 성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가 사람의 영혼을 사고파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바벨론이 어딥니까? 종교의 세계, 세상 교회입니다. 그 세상 교회에서 장사치들이 벌이는 일이 결국은 인간의 영혼을 사고파는 일이에요. 예수 믿어서 병 낫고 부자 되고 출세하고 죽어선 천당 가는 인간들의 온갖 탐심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 곳 기복신앙, 번영신학, 긍정의 힘, 건강 복음 등등 인간의 정욕과 탐심을 부추기고 세상과 간음하게 하는 자들, 예수님의 비유를 변개하여 사람에 의한 사람의 천국으로 만들어버린 장사꾼들.. 지금도 그런 일들이 이 세상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 힘을 추구해서 생명나무에까지 손을 뻗치는 가증한 새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시고 약하디 약한 가지 하나를 꺾어 땅에 심어서 마치 작은 밀알 하나가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이 불가능한 땅에서 하나님은 자기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출생되는 아들들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세상과 연결되지 않는, 어떤 접점도 없는 그런 천국을 예수님은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비유로 말씀하신 거예요. 그래서 누룩에 부풀린 밀가루가 겨자씨 비유와 함께 등장하는 겁니다. 너희들을 부풀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은 너희들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친절하게 설명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원하고 만들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하나님 나라 만들지 마라.. 너희들이 원하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 나라를 너희의 종교성과 신학과 교리로 형식화하고 고정화하는 것, 더 나아가 교회가 보이는 하나님 나라라고 사기치는 그런 짓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예전에 그런 말 많이 들었죠? 교회는 보이는 하나님 나라라고.. 그래서 그 교회가 부흥하는 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는 놈들은 절대 하나님 나라에 못 간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내시는 그분에 의해서 부풀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로 지어진 적이 없으니까 다시 말하면 부풀게 하시는 한분과의 관계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내어버려 두신 자들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들이 규정하고 자기들이 신학화한 그 천국,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천국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면서 속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양게 나타난 거짓 선지자이며 오늘날 세상교회의 삯군들이에요
제가 하나님의 원수 된 교회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교회에 원수진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그 다른 영에 대해서 분별하고 지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1서에 나오잖아요. 이미 세상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출현했다.. 그러니 너희들은 반드시 그 영을 분별해야 한다.. 귀신 쫓아내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예”와 “아니오”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이것입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는 이 땅에 피를 흘리신 그분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다른 복음을 좇고 있습니다.. 이것을 증거 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결과는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증인은 증언만 정확히 하면 돼요. 심판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분에 대해서 증언하고 그 영을 분별하게 되면 반드시 세상에 맞아 죽게 됩니다. 좋은 소리를 못 듣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설교 한 편을 하고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세상은 세상이란 말입니다.
제가 왜 세상 교회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는가 하면 사람들을 예수 믿지 못하도록 교회 안에 가두어두기 때문이에요. 어디 저기 동화사, 해인사 가서 복음을 들을 수 없잖아요. 조계사 가서 예수 이야기 못 듣는단 말이에요. 그나마 예수 이야기를 하는 곳이 교회인데, 교회가 목사가 다른 영에 장악되면 아예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물론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가톨릭 교리예요. 가톨릭의 교리는 복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가톨릭이라는 교회에 소속됨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게 가톨릭 교리예요. 그래서 교회를 떠나면 구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교회를 하나님의 대적자라고 하는 겁니다. 신부를 神父(godfather)라고 하잖아요. 모든 구원의 권한은 교황에게 있어요. 성경의 권위보다 가톨릭 교회가 상위에 있단 말이에요.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게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심지어 교황은 무오한 사람이고, 마리아는 죄가 없이 태어나서 예수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런 자들이 교회를 위한 신학, 교회를 위한 교리를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리고 그 안에 사람들을 가두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런데 흑암의 중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거 아니니까 다시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라고 했죠. 그런데 그게 백 년 가지 못했어요. 다시 되돌아 가버렸어요. 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요.
문제는 가톨릭에서 나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개신교들이 그 짓을 똑같이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교회가 있고,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해요. 그러다 보니 개신교 교회 안에도 계급이 생긴 겁니다. 그럼 목사나 신부나 교황이 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요새는 가톨릭이 놀린답니다. 너희들 개혁했다고 하면서 아직도 십일조 하니?..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는 교회에 가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니고 목사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데, 보이는 교회와 보이는 목사에게 가두어두는 게 오늘날 대한 유대교입니다.
그러나 그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왜 하늘과 땅이 아직 제자리에 있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섬기시는 여러분이 아직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성도 한 사람의 목이 베어지면, 즉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되면 하늘은 큰소리로 떠나가고 이 땅도 해체될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홀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우리를 그 나라로 완성하는 그 일을 지금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하고 계신단 말이에요. 그런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의 소망입니다. 내가 나를 보면 만족할 게 없지만, 내가 아닌 그분의 열심과 그분의 온전하심과 그분의 일하심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지친 다리를 일으켜서 남은 길을 가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 그 천국은 예수님 홀로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만들어진 그분의 작품입니다. 거기 어디에 인간의 열심과 협조가 끼어들 자리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인간의 의를, 착함을 이야기하느냔 말이에요. 천국은 너희의 행함이나 의가 아니라고 수도 없이 이야기해도 또 돌아서면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게 우리 행위의 가능성이에요. 빈대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공짜로 받냐는 겁니다. 이렇게 방바닥 틈새로 스며드는 연탄가스처럼 우리 몸에서 자연스럽게 스멀스멀 피어나는 게 바로 탐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실명으로 천국 갔다고 기록된 나사로의 직업이 거지입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거지예요. 부자가 주는대로 받아먹고 안주면 굶고
어떻게 하면 내가 천국 가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날마다 반성하고 날마다 내 탓이오 라고 가슴치고... 그렇게 기도라는 행함, 성경 읽기라는 행함, 전도라는 행함, 예수 믿기라는 행함이 없으면 불안한 종교인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야?.. 착각하는데 우리는 절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본성상 가만히 못 있는 게 인간이에요. 오죽하면 출애굽 때 홍해 앞에서 모세를 시켜 잠잠하라.. 제발 가만히 있거라.. 내가 하는 일을 보라고 하셨겠어요. 주일 성수 안 하면 불안하고, 십일조 떼먹으면 불안하고, 새벽기도 한 번 빠지면 나쁜 일 생길 것 같고... 이게 무슨 믿음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더러 믿으라고 하지 않고 믿음 안에 있는가 확인하라고 하는 거에요 그 믿음 없으면 버림 받은 거라고
하나님 나라에 침노 당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라고 말은 하건만 자꾸 자신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근거를 찾으려고 해요. 그냥 부풀어지면 되는데, 자꾸 반죽 안에 손가락을 넣어 누룩을 찾아내려고 해요. 그걸 분석해서 하늘까지 사다리를 만들려는 것 이걸 다른 말로 신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여러분이 자는 동안에도 부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약속에 충실하신 그분을 믿으시면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 하나님을 아무리 분석하고 연구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이성에 포착되지 않는 분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등장하는 거예요. 성령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다 이루신 그 모든 결과물을 다 담아서 주신 그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말은 우리의 행위는 아니라는 뜻이에요. 천국은 우리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약속으로만 주어진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겁니다.
그래서 그 천국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마침내 자기 일을 쉽니다. 히브리서에 나오잖아요. 안식에 참여된 자는 자기 일을 쉰다.. 그러니까 그 나라는 공짜로 누리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 모두 공짜 좋아하시잖아요. 아닌가? 왜 공짜로 주신 것들을 누리지를 못하느냔 말이에요. 공짜로 준다니까 실감이 안 나고, 또 자존심도 살짝 상하고 그죠? 내가 거지냐?.. 그러나 그 나라는 공짜로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그걸 아는 걸 찬송이라고 해요. 천국도 은혜고, 용서도 구원도 은혜고, 영생도 은혜고 내 존재 내 인생 전체가 다 은혜란 말입니다.
강진이라는 가수 노래 중에 ‘공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이 공짜, 들판에 피어있는 꽃들이 공짜, 하늘 땅 바람 소리 새 소리 공짜, 당신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거 공짜, 당신의 웃음도 공짜’.. 유행가 가사만큼 이런 정도도 못 누리면서 무슨 천국엘 간다고 합니까?
이렇게 나에게는 없는 것을 보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생존이 아닌 생명으로 충만한 사람들로 채워진 나라입니다. 나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으로 완성된 곳.. 그래서 내가 나를 위해서 살지 않아도 되고, 나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그 나라,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곳.. 그곳이 천국이에요. 너와 내가 서로 비교하지 않아도 되고 오직 서로 섬김의 대상만 있고, 또 만인들이 나를 섬겨주는 곳..
이런 새로운 질서의 세계.. 그 나라를 배우기 위해서 우리 몸 안에 하나님이 주신 게 있어요. 바울이 말한 가시입니다. 나의 약함을 고백하고 자랑하게 하는 가시에요 마찬가지로 세상 교회 안에도 가라지와 알곡이 모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담고 우리에게 오셔서 그 다 이루심 앞에 입을 가리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니요 당신이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우리가 손 댈수 없는 주님의 몸입니다.그거 아는 게 참된 교회에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여러분 안에 침노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부터 그 나라를 누리는 만큼 많이 섬기고 많이 사랑하시면 돼요. 다 공짜니까.
내가 믿었던 예수, 내가 가려고 했던 천국이 가짜였음을 우린 이제 알잖아요. 믿음 안에서 그 실체를 알았으면 이젠 우리가 바라는 것도 바뀌어야 한단 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까.
그렇게 예수가 여러분의 천국이 되고 여러분의 소망이 되기를 빕니다.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 나라로 데려가시는 것, 그 천국이 되게 하시는 게 우리 주님의 업무요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득불 그 나라로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안에 계신 그분을, 그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잘 누리시기를 빕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그분으로 기뻐하고 그분으로 감사하고 그분으로 부족함이 없는 그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잘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주께서 심어놓으신 그 천국이 여러분 앞에 온전히 펼쳐지고 나타날 거예요. 우리는 거기서 그 은혜의 영광을 영원토록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