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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암(靑岩)칼럼 스크랩 석향(石香)과 난(蘭)·혜(蕙) 감상
靑岩/정일상 추천 0 조회 30 13.02.05 07: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북소리·죽비소리·철부지소리(169)

 

              

     석향(石香)과 난(蘭)·혜(蕙) 감상

 

 

  초겨울 밤에 책을 읽거나 혹은 원고를 쓰기위해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다 싫증이 나고 피로가 엄습해 오면 최면에 걸린 듯 정지되어 있는 시간을 애오라지 거실의 창을 밀어붙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둠이 깔린 밤하늘 저쪽 반짝거리는 별들이 눈에 들어오면 눈에 생기가 돈다. 내 거실에서 느끼는 밤의 풍경도 강상할 만하지만 때론 오후 해질녘 무렵 침엽수인 푸른 소나무 잎을 음미하며 느끼는 심미성과 앙상한 활엽수의 나뭇가지들에 몇 개 남아 대롱대롱 나불대는 잎 사이로 옅은 햇살과 파란 하늘 끝에 흐르는 구름 한 두 점도 눈에 들어올라치면 내 거실은 더욱 내게 더할 수 없는 안식처로 바뀐다. 서재와 거실이 트여서 두 개의 공간을 적절히 잘 활용토록 배려해 둔 덕으로 거실이 서재고 서재가 거실인양 뚜렷하게 구분은 못하지만 거실 쪽에 컴퓨터와 책상, 책 더미, 그리고 TV를 배치해 놓고 있다. 그리고 서재엔 책장과 서랍장과 그 위에 책을 쌓아 두고 여러 공간에 언제나 의젓한 군자의 자태를 닮은 난분들과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주목과 땅 향나무 등 관 엽 분재 몇 분과 수석(壽石)몇 점을 사이사이에 엇박자로 곁들여 놓아두고 있는데 이들은 언제나 나와 대화를 나누는 신선한 벗들이 되고 있다.

 

  또한 내 거실 쪽에도 난분과 분재이외에 수석(壽石) 몇 개가 함께하고 있어 거실과 서재의 돌들이 시경(詩經)에서 말했듯이 무성무치의 석향(石香)을 뿜어내고 있다. 수석들은 언제나 그 모양이나 자세가 고정되어 있으면서 육중함의 미를 발산하며 이 수석들은 돌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이 수석들이 향을 뿜어내니 난들이 청기(淸氣)를 의연히 시샘하듯 발산해 내 돌과 난은 다투어 군자처럼 고상한 격조를 경쟁하듯 묘한 분위기를 이뤄낸다. 수석은 남성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난은 여성적 성품을 닮아있다. 그리고 이들은 마치 공자의 인(仁)과 맹자의 왕도 청치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연상케 한다. 석수만년(石壽萬年)이라는 말이 있듯이 천지창조 이래 영겁(永劫)의 나이를 삼키고도 생명력을 발휘하듯 미래의 존재적 나이는 또 그 얼마만할까? 라고 상상해 본다. 이런 수석에서 내뿜는 석향(石香)은 무한하여 아무리 맡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법이다. 좋은 향기는 향기가 없다는 ‘진향무향(眞香無香)의 돌‘이라고 일찍이 노자가 말 했듯이 돌에서 풍기는 향은 만고에 빛나는 성인(聖人)이나 현자(賢者)의 덕향(德香)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지난 봄 아직도 찬 기운이 세찬 어느 날 남도 지역의 남해금산(또는 금강산)을 등산 겸 난 탐색여행을 한일이 있다. 이 금산을 일명 명품바위의 전시장이라고도 일컫지만 알듯 모를 듯 춘난이 자생한다는 곳으로 잘 알려진 산이었다. 그늘 쪽엔 아직 잔설(殘雪)이 발밑에서 사그락 사그락 밟히는 감촉이 이는 곳이기도 한데 산을 오르는 우리 일행들은 어느 누구하나 피로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야생 난 탐색 산행이었는데 야생난의 자생지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얼마만큼의 시간과 자생지 장소를 찾아 헤매고 다녔든가? 그러던 어느 순간에 등산로를 조금 벗어나 살펴보니 바위틈에 자란 난 잎이 보였다. 적막한 산속 바위틈이나 밑 흙이 부엽토로 잘 삭은 나무그늘 아래, 인적이 잘 가지 않는 은유(隱幽)한 곳을 좋아하는 난들이 옹기종기 모여 가녀린 난 잎들이 솟구쳐 있었다. 그리고 한줄기 난 꽃대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참으로 청순한 처녀가 고개를 숙이고 상대를 올려 다 보는 듯 수줍은 형상을 닮았다.

 

  비바람이 치고, 백설이 산하를 뒤덮고 차디차고 세찬 바람이 일어 온 세상 땅이 동토(凍土)가 되어도 난의 잎사귀는 청초하고 가녀리면서 쭉 뻗어 휘어진 잎과 꽃대를 대지위로 내밀고 있었다. 마치 방만하고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게 그 귀태와 우아함과 도도함에 어찌 넉넉한 찬사를 보냄에 인색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참 아름답고 귀태가 나면서 우아한 귀인이라도 만난 듯 나도 모르게 ‘와! 심봤다’라고 환호성을 질렀고 일행들에 알리면서 그 자태를 유심히 살피면서 여러 각도에서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바위틈이라 이끼 낀 바위와 돌의 향기를 맡았다. 이 싱그럽고 석향(石香)을 무엇에 비견할 수가 없이 천년의 신비한 향을 풍기고 묵묵히 자리하고 서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누구도 난을 함부로 캐가거나 눈에 잘 뜨이지 않게 하기위해 마른 나뭇가지를 몇 개 꺾어 난 주위에 던져놓고 쉽사리 눈에 띄지 않도록 살짝 가려놓으면서 발자국도 나뭇잎을 모아 흩뿌려놓아 살금살금 되돌아 그곳을 벗어났다. 내년에도 귀태가 나고 곱게, 귀엽게, 청초하게 난 잎이 피어오르기를 기원하면서.

 

  한국춘란은 꽃을 피우면 향은 없지만 피어난 꽃 모양의 생김새는 참으로 우아하면서 귀태가 있다. 거기에는 문학이 있고 철학이 샘솟는다. 한국춘란의 꽃의 귀태는 가히 일품이고 제주의 한란은 꽃을 피우면 향을 내 뿜는 그 생명력이야말로 다른 꽃들 보다 서너 배나 길어서 오래 간다. 거의 한달 가까이 그 모습을 흩트리지 않으니 그 정신엔 감히 어떤 화초들에 비견되랴.

   내가 집에서 기르는 난들은 전부 토분에 담겨져 길러지고 있다. 이런 난들이 어느 경로를 거쳐 분에 담긴 난들로 변신한 역사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난들은 내 거실에서 나와의 대화의 벗으로 자리하고 있으니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헤일 수가 없다. 난으로 인하여 인간의 아름다운 진·선·미를 추구하고 또 생활에 접목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난의 형태와 이름을 고인들이나 옛 선비들이 남긴 글에서, 또는 난을 즐기며 난을 감상하는 법을 기록으로 많이도 남겨 두었는데 난을 이렇게 구분하고 예찬하고 있다.

 

 

                   한 줄기에 꽃 한 송이 피는 것을 난(蘭)이라 하고 (一莖一花之蘭)

                   한 줄기에 여러 송이 피는 것을 혜(蕙)라 한다. (一莖數花之蕙)

                   난은 군자와 같고 혜는 대부와 같도다. (蘭似君子 蕙似大夫)

 

 

  난 꽃은 꽃대 하나에 꽃 하나만을 피우는 난(蘭)을 일경일화라 하여 그 자태는 단아하고 방정하여 유덕한 군자와 같다하였고, 꽃대 한줄기에 많은 꽃을 달고 피는 것을 일경구화(一莖九花) 또는 일경수화라 하여 혜(蕙)라 지칭했는데, 이 혜(蕙)는 화려하고 권위가 있어서 마치 조정(朝廷)의 유도(有道)한 벼슬아치와 같다고 했다. 참으로 적절한 예찬이 아닐 수 없다.

   예로부터 난을 사람에 비유하여 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부귀나 공명을 초월한 군자(君子)적 기질과 정신을 닮았다고 했고, 혜를 좋아하는 사람은 현실 참여와 조직사회의 일원이 됨을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달인(達人)이라 했다.

 

  금년엔 혹독한 추위로 일찍이 늦봄에 밖에 내 놓았던 난분들을 가을의 중턱에 들 무렵 전부 거실로 옮겨 놓았다. 옮겨 놓기 전에 난 잎과 분을 깨끗이 닦으니 잎들이 반지르르하게 윤이 난다. 우주에서 내려 쏟아 놓는 햇볕을 받은 윤기를 삼켜 윤택해 졌다는 증거이리라. 그리고 수석과 분재들과 적절한 조화를 이뤄 감상하기에 알맞도록 배치해 두었고 이들과 매일 대화를 나누니 내 벗이요 대자연의 섭리를 깨달으며 생활하는 내 내면의 세계를 살찌우고 있지 않은가. 내년 봄 까지는 나와의 생활과 항상 가까이 하면서 많은 것을 교감하고 대화의 대상이 될 것이다. 아무리 늦은 밤에 집에 돌아와도 이들을 반듯이 한번 찾아 모두를 훑어보고 난 후에 옷을 벗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즐거움이 있고 외롭지가 않다. 석향(石香)을 뿜어내는 해맑은 수석들과 청아(淸雅)하며 청기(淸氣)와 우아함을 뽐내는 난들이랑 그들 그런 친구들이 항상 내 곁에 있으니 말이다.

 

 

                                       신량입교 (新?入郊)하니 서늘한 바람이 교외에서 불어오니

                                       등화가친 (燈火可親)이다. 등불을 가까이 하고 독서를 한다.

 

 

  짧으면서도 몇 마디의 시어로 가을과 초겨울의 정취를 물씬 풍기게 함과 동시에 인생의 무명(無明)을 밝혀주는 감미로운 시다. 당(唐)나라 때의 두보(杜甫)가 쓴 시어(詩語)다.

   내가 사는 곳은 안양 주소지의 도시지만 관악산 변두리에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위치해 있어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살을 가르며 전해오는 시절을 음미하면서 석향(石香)과 난향(蘭香)을 맡으며 이 겨울의 늦은 밤에 먼지를 털고 눈을 맞출 책을 골라 독서삼매경에 빠져 볼까한다.

                                                                                                                                                                                          

                                                                                                                                                   2012.12. 25

                                                                                                                                                  仁德院 靑岩寓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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