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일기(14) : 양평 물소리길 - 용문역 코스(용문산)
1. 겨울철 답사는 항상 묘한 느낌을 돋아나게 한다. 그것은 고독을 가장한 자부심같은 것인지 모른다. ‘살을 에는 추위를 뚫고, 거센 눈과 바람을 맞으며, 전진하는 인간의 의지’, 뭐 대략 이와 같은 생각을 부여한다. 영화나 문학 속에 등장하는 겨울 걷기의 이미지가 이럴 것이다. 실제로도 겨울 걷기는 고통을 주는 것만큼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는 특별한 감정과 만나게도 된다. 인간의 절대적 고독,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혼자만의 삶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2. 하지만 ‘겨울의 인식’은 엄청난 추위 앞에서는 무력하다. 너무도 강한 힘 앞에서는 생존의 본능만이 살아남고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내면의 사색 속으로 들어가기 적당한 온도는 영하 5도에서 10도 사이인 듯싶다. 그보다 더 추우면 ‘추위’ 그 자체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나와 인간’에 대한 사색은 사치가 된다. 또 영하 5도보다 따듯해지면 겨울이 주는 냉정한 힘을 지각하기 어렵다. 2023년이 끝나가는 시점인 12월 18일 한반도는 갑작스레 추위가 몰려왔다. 불과 며칠 전 영상 20도에 가까웠던 따뜻한 기온이 돌변한 것이다. 추위의 기습은 겨울의 낭만적인 ‘걷기’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새벽과 밤에는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졌지만, 낮에는 영하 10도 안팎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3. 양평의 ‘겨울’을 만나기로 했다. 이번 코스는 용문역에서 시작했다. 용문역에서 면사무소 쪽으로 이동하는 코스와 역 뒤쪽 하천길을 따라 걷는 코스가 있다. 하천길로 향했다. ‘흑천’이라 불리는 하천을 따라 걷는다. 겨울의 느낌을 만나게 되는 최적의 날씨이다. 차갑지만 견딜만한 바람을 맞으며 힘차게 걷는다. 겨울의 냉기를 뚫고 나가는 쾌감을 만끽한다. 그렇게 하천을 지나고, 산길을 걸었다. 2시간 조금 더 지나자 용문산이 나타났다. 겨울에 만나는 산은 그 자체로 웅장한 힘의 상징이다. 겨울철 산은 인간의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 접근의 어려움이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외경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인지 모른다. 인간은 쉽게 얻는 것에는 감사하지 않는다. 고통이 수반되었을 때만 그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한다. 산이 겨울에 변모하는 것은 친근하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자연의 본성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4. 등산은 포기하고 지평역 쪽으로 왔다. 역 주변을 답사했다. 역에서 조금 이동하면 <송현리>가 나오는 데, 여기에는 걷기 좋은 하천길이 길게 이어졌다. 하천길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길의 시각적 아름다움 뿐 아니라 충분한 거리가 확보되어야 한다. 30분 안에 끝나는 하천길은 마무리되지 못한 과제처럼 찜찜한 기분을 준다. 충분히 걷고 충분하게 땀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지평역 주변 하천길은 그런 점에서 좋은 길이다. 온도는 올라갔지만 여전히 춥다. 바람이 불지 않는 오늘과 같은 날은 움직일수록 추위와 맞설 수 있다. 멈추면 냉기를 더 강하게 느껴지게 때문이다. 움직일 때 몸과 외부의 공기는 조화를 이룬다. 적절한 균형을 통해 겨울의 매력을 맞볼 수 있는 것이다. 4시간 이상 걸었다. 몸에 기분좋은 피로가 느껴졌다. 지평역으로 돌아가 역대합실에서 설핏 잠이 들었다. 충분한 움직임 후에 맛보는 휴식은 달콤했다. 서두르지 않은 시간이다. 열차는 시간의 규칙성이 가져다주는 여유 때문에 쫓기지 않는다. 2023-2024 겨울 시즌의 첫 번째 ‘겨울 걷기’였다.
첫댓글 - "인간의 절대적 고독 = 삶에 대한 명확한 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