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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소학동자 김굉필(2)
이장희 추천 0 조회 28 14.05.16 20: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소학동자  김굉필 (2)

 

 

              김세곤( 노동부 법무행정팀장)

 

 

 

 

 

경현문에서


임청대를 보고나서 옥천서원 입구로 간다. 거기에는 경현문(景賢門)이라는 편액이 붙은 문이 있다. 경현문. 이 현판은  순천 부사 이정(1512-1571)이 김굉필과 조위의 행적을 정리하여 만든 책 경현록에서 따온 것 같다. 외삼문은 3칸 대문이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고 문 앞에는 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다. 바로 옆은 주택가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옆 담장이 헐려 있다. 그래서  헐린 담장을 따라서 곧장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서원에는 옥천서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곳이 바로 한훤당 선생이 전라도의 유림들을 가르친 곳이다. 그는 유배 중에도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한다.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영남의 사림이 전라도에도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의 가르침은 주로 소학을 실천하는 일이고 修身에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만든 계율이 바로  한빙계이다. 한훤당은 한빙계를 만든 경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반우형이 나를 스승으로 대접하려 하였다. 나는 너무 과분하다고 사양하였지만 이것은 우형 자신의 본뜻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선친이 평소에 가르친 교훈이 있었다. 나는 그 효성에 감동되어 이를 거절하지 못할 일이나, 문을 닫고 들어앉아 방문객을 사절한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래서 그는 별 수 없이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매우 섭섭한 마음에서 내 자신을 수양하며 사물에 대응하는 방법등 몇 가지 조항을 손수 써서 한빙계라는 제목을 붙이고 그에게 주고 또한 나 자신도 경계하려고 한다.”


  한빙계(寒氷戒)는 한훤당보다 계급이 훨씬 높은 대사헌 반우형이 그를 스승으로 모시기를 간청하였을 때 한훤당이 반우형에게 준 글이다. 한빙이란 뜻은 ‘얼음은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차갑다’는 의미이다. 이는 소학에 나오는  증자가 말한 내용이다. “두려워하고 조심해서 마치 깊은 못가에 다가간 듯하고 , 살얼음을 밟고 서 있는 듯이 더욱 경계한다.”


 한빙계는 일상생활에서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항상 얼음을 밟듯이 경계하면서 지켜야 할 18가지 계심(戒心)으로 되어 있다.


 그 계율은  동정유상(動靜有常: 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정심솔성(正心率性: 항상 마음을 바로 세워 착한 본성을 따르라.) 정관위좌(正冠危坐:  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 꿇고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하라), 지명돈인(知命敦仁: 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안빈수분(安貧守分: 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일신공부(日新工夫: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독서궁리(讀書窮理: 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불망어(不妄語: 망령된 말과 삿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지언(知言: 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지기(知機: 일의 기미를 알도록 하라), 신종여시(愼終如始: 시작할 때와 같이 끝도 신중하게 하라), 지경존성(持敬存誠: 존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등이다.


이 한빙계의 기저에는 그가 일상생활에서 일관되게 지켜온  ‘경(敬)’이란 글자가 자리 잡고 있다.


  성리학의 입문서인 근사록(近思錄)에 의하면  유학의 특징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학문)이고, 성리학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인간형성의 기본으로 확립시킨 학문이라는 것이다. 거경은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고 잡념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궁리는 이(理)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경(敬)’이야말로  자기수양을 높이기 위한 修身의 요체이다. 주자는 “경이란 신중을 기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몸과 마음에 긴장감이 생기고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하며 저절로 품격이 높아진다.” 고 하였다.

(더 부연하면, 성리학은  송대에 새롭게 일어난 유학으로 우주의 근본원리인 이(理)를 핵심으로 다루고 있어 성리학이라고 하며, 사상가 주자가 집대성하였다 하였다 하여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한편 근사록(近思錄)의 근사는  ‘논어’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한편 옥천서원을 구경하고 나서  뒤뜰을 가니 석비가 하나 있다. 내삼문 옆에 있는 데  자세히 보니 옥천서원 묘정비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비문이 군데군데 흠이 나 있다. 글씨도 희미하여 묘정비의 내용도 잘 알기 힘들다. 화순의 적려유허비처럼  한글로 번역된 안내문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묘정비를 보고나서  내삼문을 여니 그곳에 새로 지어진 사당이 하나 있다. 거기에는 옥천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사당은 아직 단청도  안 되어 있고 뒷담장도 안 만들어져 있다. 찢어진 창호지 틈으로 사당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김굉필 선생의 신위를 보지 못하였다.


  아직 정리정돈이 안된 옥천사를 나오면서 나는 한훤당 선생이 귀양 살았던 집이 어디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옥천동 이 근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가 귀양 살면서  읊었으리라는 시 두수를 생각한다.


하나는 서회라는 한시이고 또 하나는 청구영언에 실린 시조이다.


서회(書懷)  


외로이 홀로 살면서 모든 왕래를 끊고  

밝은 달만 바라보며 외로움과 가난을 달래네.

부탁하노니, 사람들아 인생사를 묻지 마소서

안개 속 첩첩 산중에서 묻혀 사는 것이라네.

                                                            

處獨居閒絶往還

只呼明月照孤寒 

憑君莫問生涯事 

萬項烟波數疊山 “


“ 삿갓 쓰고 도롱이 입고  가랑비 오는 중에  호미 메고

산전(山田)을 바삐 매다가 녹음에 누웠으니

목동이 소와 염소를 몰아 잠든 나를 깨운다. “





 회포라는 한시에는 세상과 등지고 사는 외로운 삶이 잘 표현되어  있고,   ‘도롱이 입고 녹음에 누워’ 라는 시조는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전원생활을 즐기는  여유가 있다.


나는 다시 임청대 앞으로 간다. 그곳에서 임청대  안내판을 살펴본다.



순천 임청대 (臨淸臺)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7호

                   전라남도 순천시 옥천동 155


  임청대는 조선 연산군(1494-1506)때 한훤당 김굉필과 매계 조위 두 사람이 무오사화로 인해 순천에 유배되어 지낼 때 돌을 모아 만든 것이다. 임청이란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라는 뜻으로 조위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두 사람이 죽은 후 60여년이 지난 뒤인   명종 20년(1565)에 순천부사 구암 이정이 두 사람의 얼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석을 세웠다. <임청대>란 글씨는 퇴계 이황이 쓴 것이다.  본디 임청대는 여기서 동쪽 약 30m 지점에 있었는데 1971년 5월 이곳으로 옮겨 왔다.


  임청대는 한훤당 김굉필과 매계 조위(1454-1503) 두 사람이 같이 지내던 곳이다. 한훤당과 매계 두 사람은  모두 김종직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를 한 사람이다. 한훤당이 성리학에 밝았다면 매계는 시를 잘 써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한다. 특히 매계는  김종직 부인의 동생이었는데, 그는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그대로  성종실록에 올리게 하여 무오사화 때 연산군으로 부터 처형을 명 받았으나  겨우 죽음만을 면하여 의주에 귀양 갔다가 다시 1500년에 순천으로 이배된다. 같은 해에 김굉필도  평안도 희천에서 순천으로 이배된다. 그리고 둘은 이곳 옥천동 하천가에서 3년 동안 같이 지낸다. 그런데 매계는 1503년에 유배 중에 병으로 죽고 만다. 그래서 고향인 금산에 묻혔는데  갑자사화로 인하여 그의 관은 쪼개어지고 참시를 당한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사흘간 방치된 채로 뒹굴어졌다한다.


  김굉필의 생애 또한 기구하다. 그 역시 갑자사화로 인하여 유배 중에 순천의 철물 저잣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한다. 그런데 그는 목이 베이는 참형을 당하면서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한다. 그의 고향인 달성군에 있는 도동서원의 묘정비에 쓰인 그의 기록을 보면 그는 매우 단정하게 수염을 정돈하고 참형을 당하였다 한다. 한빙계의 정관위좌를 죽음 앞에서도 실천한 것이다.


 임청대를 다 구경하고 나서 나와 아내는 여수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하여 옥천서원에서 시내로 10분정도 걸어갔다. 그런데 큰 도로변에는 중앙시장이라는 꽤 큰 시장이 있다. 이곳이 바로 500년 전에 김굉필 선생이 참수당한 저자거리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김굉필 선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한훤당 김굉필. 그는 진정한 조선의 선비이다. 조선 선비의 맥을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매천 황현으로 이어가게 한 賢人이다. 



                                        (2006.4.2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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