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목소리의 친화력, 영화 전성기의 스타
- 최무룡의 등장과 연기 세계 -
Spotlights on Choi Muryoung: His Cinematic Realms and Affinitive Qualities
김종원 Kim Jongwon 청주대학교 겸임 교수, 영화평론가
Film Critic
60년대만 해도 우리 영화계는 신파극과 신연극적인 연기가 공존했다. 판소리·산대극 등이 주류를 이룬 구극 이후 창극과 신극 사이에서 과도기적 역할을 한 신파극은 1910년 초기엔 개화사상이 중심인 주제였으나 30년대에는 세상 풍속과 인정 비화 등 통속적인 내용이 즐겨 다루어졌다.
이에 맞서 서구 근대극의 영향을 받은 신극은 윤백남 등 동경 유학생들로 구성된 토월회의 공연 이후 사실적인 무대, 일상적인 자연스런 대사와 연기 등 리얼리즘에 특징을 두었다.1)
신파극은 30년대 말 황금좌(극동극장 전신)의 전속 악극단 성보를 비롯한 백조가극단, 청춘부대 등에 의해 악극을 낳았고, 신극은 유치진, 이해랑, 김동원이 주도한 극예술협회(1947)를 거쳐 50년대 신협으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신파극은 표현의 폭을 넓게 함에 따라 자연히 오버액션의 경향이 강했고, 신극은 사실적인 연기에 기초함으로써 표현의 절제가 가능하였다. 이의 중간 지점에 자리한 연기 형태가 동양극장을 모체로 한 청춘좌 단원들이 보인 일렬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영향을 받은 배우가 전옥, 황해, 장동휘, 김희갑, 박노식 등이라면 후자의 영향 아래 놓인 배우로 최은희, 김진규, 박암, 문정숙, 윤일봉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사이에 놓인 청춘좌 출신의 김승호, 황정순 등은 엄밀히 따질 때 앞의 성향에 가까운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류에 적응시키기 어려운 예가 연기 경험 없이 순전히 스크린용으로 발탁된 김지미, 남궁원, 신성일, 엄앵란 등이다.
신극의 영향받은 연기 바탕
그렇다면 최무룡은 어느 쪽에 해당될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후자 곧 신극적인 연기의 소유자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혈맥>(1963)에서 그를 기용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둔 바 있는 김수용 감독도 같은 의견을 표명한 적이 있다.2)
대체로 배우들은 큰 동작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려고 한다. 그것은 연기의 내적 축적보다 외부 발산을 강조하기 때문에 심리적인 측면에서 형식적인 면이 강조될 때가 있다. 연기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완전히 조화를 이룰 때 성공할 수 있다. 최무룡과 함께 출연했던 당시의 배우 중 김승호, 황정순, 신영균, 엄앵란은 형식면을 중시했다. 조미령, 김지미, 최무룡은 내적 연기에 충실했다. 물론 조용하고 침착하면서도 떠들썩한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몸 전체로 섬세한 감정 표현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무룡의 연기에는 퍼스(호흡)가 적절하다. 대사를 줄줄이 외우지 않고 말과 말 사이에는 간격을 둔다. 요즘처럼 영화 전체가 뜀박질하다 끝나는 시대에는 좀 지루하게 느껴지겠지만 연기의 흐름은 반드시 속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필요 적절한 사이가 절대로 필요하다. 최무룡은 40년 전에 벌써 연기 개안을 하고 감정의 흐름 속에 적절한 정지 상태를 삽입해서 극의 진전에 긴장과 격조를 높이는 연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김수용이 말한 ‘심리적 또는 내면적 연기’와 필자가 언급한 ‘사실에 기초한 표현의 절제’는 결국 같은 맥락으로 최무룡이 신극의 영향을 받은 배우임을 뜻한다. 그의 연기는 비교적 자연스럽다. 지나치게 자신에게 몰두한 나머지 주어진 배역의 감정선을 넘어서는 의식 과잉의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인물 성격의 분수를 지키는 편이다. 신극이 중시하는 사실성을 바탕으로 영화가 요구하는 배역에 접근해 나간다. 호흡이 적절히 조절된 맑은 성량, 정확한 발음이 밑받침된 대사 소화력, 그리고 눈을 무기로 한 감정 표현 등은 내면적 연기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가 대학 시절 <햄릿>과 같은 독백 중심의 세익스피어 연극에서 쌓은 기초와 한때나마 경험한 성우로서의 기량이 크게 작용한 결과로 보여진다.3)
성장 배경과 연기 유형
최무룡은 1928년 2월 25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45년 개성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9년 중앙방송 전속 성우를 거쳐 52년 중앙대 법과대학을 나온 그는 54년 이만흥 감독의 <탁류>로 처음 무비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러나 그가 먼저 얼굴을 내민 것은 연극 무대였다. 그의 말을 빌리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6년간을 학예회 때면 죽 무대에 섰고 또 군대용 나팔을 불어서 선생과 학부모들로부터 저놈은 광대팔자 타고났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4)
개성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제일 먼저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본을 불었고 아울러 연극부를 창설하여 일 년에 한 번씩 학기말마다 성대한 예술제를 열었다. 6년에 걸친 예술제 연기 생활의 여세를 몰아 연극계로 진출할 생각을 했지만 그 꿈은 잠시 접어야 했다. 생활이 문제였다. 하는 수 없이 은행에 들어가 해방 전까지 지루하게 보내다가 중앙대학의 입학을 계기로 다시 연극을 하기 시작했다. 연극부를 만들어 활약하는 한편 청년단 조직에 뛰어들어 문화부장직을 맡고 농촌 계몽을 위한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 무렵 그가 중앙대 학생들과 함께 주연을 맡아 시공관 무대에 올린 한국 최초의 세익스피어극 <햄릿>은 연극계에서까지 화제를 모았다.
이럴 때 그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 제1회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참가작은 <비오는 산골>(계곡의 그림자)이라는 번역극으로 깊은 산 계곡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노학자와 그의 부정한 젊은 아내, 그리고 양치는 목동과 길을 잃은 방랑자, 단 네 명이 등장하는 존 미리톤 싱 원작이다.
최무룡은 여기에서 주인공 방랑자 역을 맡아 준수한 외모와 열연으로 연기상을 받았다. 1948년 가을이었다. 이후 신협(新協), 극협(劇協), 자유극회, 공연극장 등 극단 단원으로 연극 무대에 서다가 스크린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탁류>는 데뷔작으로선 역할의 비중이나 작품에 있어 성공적이지 못했다. 일부에서 두 번째 출연작인 <주검의 상자>(1955, 김기영 감독)를 그의 첫 작품으로 여기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계에 나와 86년 <자유부인 2>(박호태 감독)까지 32년 동안 8백 여 편(이중 주연작 230여 편)을 남긴 최무룡의 연기 세계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사실상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작 <잃어버린 청춘>(1959. 유현목 감독)과 <오발탄>
(1961. 유현목 감독), <혈맥>(1963. 김수용 감독) 및 <기적(汽笛)>(1967. 이만희 감독) 등에서 드러낸 사회의식, 인간은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분단의 갈등과 냉전의 대치 속에 직면한 삶과 죽음의 해석,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주검의 상자>, <5인의 해병>(1961. 김기덕 감독),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이만희 감독), <빨간마후라>(1964. 신상옥 감독), <제3지대>(1968. 최무룡 제작·감독) 등을 들 수 있다. 셋째는 사랑의 성취와 좌절을 그린 <유전의 애수>(1956. 유현목 감독),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최훈 감독), <꿈은 사라지고>(1959. 노필 감독), <길은 멀어도>(1960. 홍성기 감독), <아빠와 함께 춤을>(1970. 정소영 감독) 등 멜로 드라마의 연기. 넷째는 <젊은 그들>(1955. 신상옥 감독), <에밀레종>(1961. 홍성기 감독), <원효대사>(1962. 장일호 감독),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1970. 정진우 감독) 등 역사극에서 표출한 연대기적 인물의 형상화가 그것이다.
그의 연기 생활 중 정점을 이룬 <잃어버린 청춘>과 <오발탄>, 그리고 <기적>은 각기 우발적 살인, 은행강도 미수, 살인 누명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법의 심판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좌절의 인간상을 공통적으로 그리고 있다. 먼저 그 자신이 제작하기도 한 <잃어버린 청춘>을 보면 6. 25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의 전경처럼 지치고 고단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는데, 그가 연기한 전기공 위진국은 그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스탠드 바의 웨이트리스인 애인(이경희)과 셋방을 얻어 사랑의 보금자리를 펴는데 이 사나이의 꿈이지만 일과 뒤 우연히 한 남자가 괴한에게 돈을 강탈당하는 현장에 이르렀다가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리자 갖고 있던 벤치로 내리쳐 죽게 만드는 불상사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결국 그는 형사들의 포위망이 조여드는 가운데 자수를 하지만 애인의 위로만으로는 냉엄한 철학, 사르트르나 까뮈가 추구했던 소설의 주인공처럼 모든 희망을 잃고 극한 상황에 직면한 전기공 위진국 역을 정확한 해석과 전신 연기로 창출하는 의욕을 보여 주었다.
적합과 대응이라는 대비의 측면에서 볼 때 <오발탄>의 연기는 그 모범 답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만큼 강한 흡인력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인 김진규를 철저하게 보조하면서도 독자적인 빛깔을 보여준 부상 제대병 영호는 최무룡이 만들어 낸 성공적인 허구의 인물형이다. 50년대 6.25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뒤의 불안과 부조리, 무순과 절망의 사회상을 신랄하게 묘사한 <오발탄>의 성공은 또한 이들의 성실한 연기 자세와 도전적인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대식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소극적인 형에 맞서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를 최무룡은 영호라는 인물을 적극적인 한탕주의자로 가공한다. 그러나 그가 결행한 은행털이는 실패로 막을 내린다.
이처럼 세상을 부정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다가 참담한 실패에 직면한 캐릭터에서 성과를 거둔 그의 도전은 전쟁영화에 속하는 일련의 화제작을 통해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5인의 해병>에서는 인민군이 포진한 지역에 잠입하여 임무수행 중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귀환병의 일원으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선 북진중인 전선에서 용맹을 떨치지만 전우들을 잃는 채하사의 모습을, <빨간 마후라>의 경우엔 출격중 전사한 파일럿으로, 그리고 <남과 북>에서는 아내의 옛 남편으로 월남 귀순한 인민군 소좌에게 아내를 돌려주기 위해 죽음의 특공대에 지원하는 중대장 역을 맡아 열연했다. 특히 <남과 북>(1961. 김기덕 감독)은 최무룡에게 내면적인 연기를 요구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서사구조가 갖는 통속성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모았다. 앞의 영화들이 주로 액션에 의존하는 큰 틀 속의 폭의 연기를 필요로 한다면, <남과 북>은 보다 심리적인 깊이의 연기를 지향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사랑의 방정식을 빌어 분단의 갈등을 부각시킨 이 영화의 메시지는 이에 앞서 선보인 <5인의 해병>과 <돌아오지 않은 해병>에 의해 예고되고 남북이 대치되는 분단 상황 속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로 귀착된다.
양의 멜로 드라마보다 질의 사회성 영화로
어떤 의미에서 60년대 이전 5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배우 가운데 이민을 빼고는 가장 멜로 드라마적 성향의 스타로 꼽히는 최무룡이 이 장르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흥행에 성공한 최훈 감독의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의 경우를 보면 6.25 전쟁으로 참전했다가 성불구자가 된 이발사 역을 맡지만 애인의 이해와 포옹에 힘입어 새 출발하는 모습을 무난한 감성으로 이끌어 낸다.
같은 해 출연한 <꿈은 사라지고>에서는 애인이 카바레 여급이라는 사실을 알고 술로 날을 보내다가 심기일전하여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권투선수로, 최초의 파리로케이션 영화로 김지미와 공연한 <길은 멀어도>(1960)에선 아내의 출산에 가난까지 겹치자 애인의 집을 터는 촉망받는 작곡가 역으로, 전계현과 공연한 <아빠와 함께 춤을>(1970)에서는 아내가 친구의 여자가 된 데에 실망한 나머지 외국으로 떠났다가 암이라는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고 귀국한 뒤 어린 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나는 중동전 취재 기자 역으로 역량을 발휘한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신파 연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눈물의 여왕’ 전옥과 <항구의 일야(一夜)>(1957)에서 공연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영화에서 맡은 인물은 항구의 카바레 여급과 하룻밤 풋사랑을 하게 되는 마도로스 역. 그 상대방이 장모인 전옥(배우 강효실의 모친)이라는 점이 화제였다.
역설적이지만 최무룡은 대부분 해피엔드로 이루어진 많은 멜로 드라마에 출연했으면서도 연기 기량은 오히려 사회성 강한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에서 돋보였다.
네 번째 그의 연기 지점에서 분류된 역사극 역시 최무룡이라는 배우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젊은 열혈청년 역을 연기한 <젊은 그들>(1955)의 신선함. 장인(匠人)의 번민하는 창조의 진통을 안으로부터 끌어올린 <에밀레종>(1961)의 종장이 참마루 역은 오랫동안 기억되는 내면 연기의 승화였다. 어쨌든 최무룡은 김승호, 김진규, 신영균과 함께 한국영화 중흥기에서 전성기를 장식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연기자였다. 이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의 맑은 목소리와 친화력으로 빛나는 눈의 연기는 다양한 배역과 함께 한 시대를 사로잡았다. 그는 분명 정이 많은 것이 탈이었던 이 땅의 스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