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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묵상글 들 ( 연중25주목요일 - 혼자 이 세상을 퇴장할지라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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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5주 목요일-혼자 이 세상을 퇴장할지라도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저는 고독과 함께 허무도 얼마간 즐기는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허무 예찬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옛날부터 코헬렛서-옛날에는 전도서라고 했음-를 좋아했고,
코헬렛서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들은 이 구절을 특히 좋아합니다.
며칠 전 어떤 분과 얘기를 나누다가 뜨는 해와 지는 해에 대한 얘기를
나눴는데 그분이 당신은 해뜰 때보다 해질 때가 더 아름답다고 하셨지요.
그때 아무 대구를 하지 않았지만 저도 해질 때를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봄철 피어나는 꽃들의 아름다움도 아름답지만
가을철 지면서도 아름다운 단풍의 아름다움도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아가씨도 아름답지만 흰 머리에 주름진 얼굴임에도
아름다운 아름다움이 더 아름다운 것과 같이
저무는 아름다움 또는 소멸의 아름다움이 제게는 더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얘기하면 소멸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저물어가고 소멸되어가는데도 아름다운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저물어가고 소멸되어가는 것을
싫어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소멸은 아름다운 소멸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때 내가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나만 죽는 것이 두렵거나 나만 죽기에 허무합니다.
나는 죽은데 다른 것들은 다 그대로 있고
오늘 코헬렛서의 말대로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오지만
태양은 여전히 뜨고지고 땅도 영원히 그대로이기에
나 혼자 이 세상에서 퇴장하는 것이 쓸쓸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아무도 나와 함께 같이 죽어주지 않고,
아무도 나 대신 죽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럴 거라고 기대하고 믿어왔다면
그렇게 믿어온 나의 삶이 허무할 것이고 허무해야 합니다.
내가 죽는다고 이 땅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죽는다고 누가 같이 죽어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소멸은 이런 소멸을 직면한 소멸입니다.
이런 직면을 통해서 혼자 이 세상에서 퇴장하는 것이
쓸쓸하지도 허무하지도 싫지도 두렵지도 않게 된 소멸입니다
직면을 통해서 뭘 얻었고 어떤 경지에 이르렀기에?
내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세상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얻었을 때,
우리는 고독하지도 허무하지도 두렵지도 않는
담담한 가운데서 이 세상을 퇴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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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새벽을 열며.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빠다킹신부님.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많은 분이 말씀하십니다. 이 행복을 위해 우리는 노력합니다. 성공하기 위해, 돈을 벌려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멋진 외모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신기루일까요? 돈을 벌어도, 소위 성공을 해도, 원하는 바를 이루어도 행복한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너무 많습니다. 순간의 만족은 가져다주지만, 행복이라 할 수 있는 영원한 만족은 주지 않습니다.
행복은 성취로써 얻게 되는 단기적인 만족감이 아닙니다. 그래서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행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사랑하면서 저절로 얻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의 항상 일 순위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에 행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나만의 행복에만 머물게 됩니다. 너와 내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랐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했던 자신의 말의 권위를 위해서 또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라서 주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당황해합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그는 행복할 수 있을까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라서 주었을 때는 “내가 이렇게 힘 있는 사람이야.”라는 뿌듯함이 행복인 것처럼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 안에 있으면서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얻었던 사람은 헤로데처럼 의심을 품고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또 진리에 대한 확신을 하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행복을 얻었지, 헤로데처럼 불안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아무런 것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코헬렛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이 세상의 것들은 허무에 그칠 뿐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시고 당신께서 직접 보여 주셨던 사랑만이 남게 됩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행복을 채워줄 것이고, 우리의 존재 자체의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입니다. 허무한 세상 것이 아닌, 끝까지 남을 사랑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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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자기다워지는 길을 아는 것이다(미셸 드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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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생각
어느 회사에 노총각 과장님이 계셨습니다. 이 과장님이 생일을 맞이했지요. 동료 직원 중의 한 명이 영화표 두 장을 선물로 주면서 “빨리 여자 친구 만들어서 같이 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과장님은 뭐라고 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싸! 두 번 볼 수 있겠다.”
곧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계속해서 노총각으로 살아갈 것 같지 않습니까? 여자 친구 만들 생각보다 혼자 영화 두 번 볼 것을 먼저 생각하니 말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을 확장하기보다 자신의 틀에 가둬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생각들을 계속해야 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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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연중 25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를 통해 자유를 회복하라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꿈에 끌려 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저지른 과오나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익숙해져서 그냥 그대로 편안함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 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심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내면에 굳은 심지가 있는 사람은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용서하시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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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형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감
4)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 받고자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기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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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9,3-5)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한 선교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헤로데 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는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 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께 대한 소문은 꽤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현상은 헤로데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도 이러한 모습은 계속 이어져 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가르침을 계속 가르쳐 왔으나, 자기가 원하는 예수님을 만들어 놓고, 하느님을 만들어 놓고 믿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올바로 주님을 따르지도 못하고 그분의 뜻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이런 것은 진실이 드러나면 헤로데와 같이 당황하고 동요하며,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먼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 많은 사람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며,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참된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 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자.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하여야 한다. 내가 신앙을 가지고 행복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그 신앙을 가지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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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한상우 신부님.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올바르지
않는 것을
멈출 수 있는
지혜가 참된
지혜이다.
헛소리와
침묵사이에
우리가 있다.
그림자와
실체사이에
우리가
살아간다.
듣지 말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우리들
세상이다.
그야말로
절제가 필요한
세상이다.
절제란
떠도는 소문을
서로에게
옮기지 않는
언어의
침묵이다.
올바르지 않는
소문은 소중한
한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한다.
헐뜯는 험담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인색한 마음
안에서는
소문만
무성할뿐이다.
소문이 아닌
참된 만남이다.
소문의
그 사람이 아닌
진짜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소문과 오해는
참된 만남을
언제나
방해한다.
빠르게 판단하고
서둘러 단정하는
우리들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성찰이 필요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소문을 성찰하는
시간이 되어야한다.
말(言)의 순교가
필요한 때이다.
순교는
절제이다.
순교의 길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절제이다.
절제는 소문의
자리가 아닌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겸손이다.
교만과
소문사이에
우리가 있고
그 교만을
치유하는
절제와 반성이다.
소문의
예수님이 아닌
참된 예수님을
우리 내면에서
만난다.
소문이 아닌
소중한
한 사람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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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이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꽤나 유명하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이천 년 동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였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삶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때로는 거부하며 내친 결과가 예수님에 관한 무성한 소문으로 전해지고 또 전해졌겠지요.
소문을 다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소문의 가치를 애써 무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소문을 통하여 교회는 지금까지 제 모습을 유지하고 다듬어져 왔으니까요.
문제는 다양한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 한 것은 다른 뜻,
다른 권력, 다른 유명세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죽인 헤로데가, 새로운 가르침을 얻어 새롭게 거듭나고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헤로데의 호기심은 권력에 대한 애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소문에 헤로데는 당황하였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잘못이었음이, 그 잘못이 드러날까 불안했을 터이지요.
헤로데의 모습이 저의 일상 모습인 것 같아 헤로데의 마음에 한참이나 머물며 이 묵상 글을 적고 있습니다.
무성한 소문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들에도 교회는 지금껏 여유로운 의젓함으로 살아왔습니다.
잘못과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잘못과 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오로지 예수님의 자비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어떻든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예수님 앞에 솔직히 서 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오늘도 여전히 끝기도 때 저는 하루 동안 저지른 잘못으로 아파하고 용서를 빌겠지요.
다만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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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함께 왓킨스 글렌(Watkins Glen) 주립공원엘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함께 지냈습니다. 5명이 함께 갔습니다. 모두들 장점이 있었습니다. 장을 보고 계획을 세우고, 음식을 준비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동료들을 위해서 맛있는 음료수를 만들어 주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야영의 꽃인 모닥불을 피우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향이 좋은 커피를 직접 갈아서 마실 수 있도록 해준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특별한 재능이 없는 저는 주로 설거지를 담당하였습니다. 공원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장이 있었고,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시설도 있었습니다. 조용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오솔길도 있었고, 빙하가 남긴 멋진 계곡도 있었습니다. 폭포와 호수를 보고 싶으면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되었습니다. 기도하고 싶으면 오솔길을 걸으면 되었습니다. 공원을 나가서 20분만 걸으면 눈을 맑게 해주는 멋진 세네카 호수가 있습니다. 세네카 호수는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를 닮았습니다.
함께 식사하고, 계곡의 멋진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모닥불 주변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모닥불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타오르는 불빛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순서도 없이, 주제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생활의 지혜를 나누기도 하였고, 삶의 어려움을 나누기도 하였고, 코로나19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신학교 이야기도하였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모두 각자의 텐트로 돌아가고, 모닥불은 재가 되었습니다. 모닥불이라는 노래도 생각났습니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약간의 불편함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야영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추억이 됩니다. 서로가 가진 장점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인생이 헛되다고 합니다. 모닥불이 아름답지만 재가 되듯이 건강했던 사람도, 지혜롭던 사람도, 권력을 지녔던 사람도, 부유했던 사람도 언젠가는 모두 한 줌의 흙이 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는 노랫말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는, 어둠을 밝게 비춰주는, 빛으로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모닥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닥불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은 늙고 병들어 흙이 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깨달음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고, 천국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문화와 문명이 되었고, 역사와 신앙이 되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이태석 신부님은 기꺼이 모닥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면 결코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권력, 명예, 재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이미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 같은 인생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 모닥불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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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코헬렛 1,2-11
루카 9,7-9
모든 것이 지나가고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는 오늘 제1독서인 코헬렛의 말씀을 묵상하며 여러 반성꺼리들이 떠올랐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보면 큰 일 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한 마디로 ‘인생 뭐있어?’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 때와도 같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과거 ‘전도서’라 칭함)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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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9,7-9
솔직함이 주는 힘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헤로데 영주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 엘리야나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무성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헤로데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나려면 요한의 목을 벤 사실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자신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분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려면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솔직해져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루카 2,35) 하시는 분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을 거부하면 의롭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영화 ‘뮬란’(2020)은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실제로 남성으로 위장한 채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진실’입니다.
영화에서는 ‘진실과 초자연적 힘’을 결합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지혜와 힘을 지닌 여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는 여성은 얌전하게 시집이나 잘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사내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하지만 뮬란은 이런 기존의 틀을 거부합니다.
뮬란은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 대신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리고 남성으로 속이고 모든 훈련을 감내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내재한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실할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인 것이 발각되는 즉시 군에서 쫓겨나고 그러면 가문 전체가 불명예를 입기 때문입니다.
뮬란은 자신의 힘이 발휘되지 않으면 자신의 전우들이 죽게 될 것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초자연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숨을 내거는 결단이었지만, 그 진실함 때문에 자신 주위에 맴돌기만 하던 기(氣)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기는 우리로 말하면 성령님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동료들을 구합니다.
사람이 왜 진실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다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같아지는 것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 뜻보다 우선합니다.
그런 교만함은 죄를 짓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렵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아담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고 뒷걸음질 친 것과 같습니다.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평판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에 관련된 말씀을 하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야고 5,16)라고 권고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려는 겸손이 없으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멀어지고 그분이 주시는 은총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고해성사 때 굳이 죄를 사제 앞에서 고백하게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헤로데는 “내가 요한의 목을 베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까이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 달 정도 어느 부대의 중대장 운전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제 기억으로 미스터 건국대였습니다.
대학에서 보디빌딩으로 일등을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늘 자랑하였습니다.
그분은 30대 중후반이 되었고, 저는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저는 운전병으로 운동할 시간이 많아서 근육이 한창 붙을 때고 그분은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그분의 대학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우나에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저의 몸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멀리에서 해. 내 옆으로 오지마!”
다른 것은 몰라도 팔뚝은 제가 더 두꺼웠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근육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제가 조금 더 좋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 하는 사람은 자신과 비교될 만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물며 우리 죄의 민낯이 드러나게 만드는 주님께서 옆에 계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겠습니까?
내 죄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도록 나를 낮추기를 원해야 합니다.
낮아지기를 원치 않으면 주님을 가까이하기 싫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원하고 그분이 주시는 성령의 힘을 받아 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여 겸손해지는 일을 즐기는 것입니다.
겸손이 은총과 진리를 부르고 지혜와 힘을 발휘하며 살게 합니다.
그러려면 솔직함으로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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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님.
교우촌의 사목자, 최양업 신부
헤로데 영주는 몹시 당황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활약상에 대한 헤로데 영주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직후였는데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참수함으로써 자신의 불의한 통치를
비판하는 여론을 잠재우고자 했었는데도 계속해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민중이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예수는 요한보다 더 많은 백성을 끌어 모으고 있다고 하며,
요한이 일으키지 않았던 기적들까지 일으키고 있어서 자칫하면 자신의 권력을 끌어내리려는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헤로데의 신하들은 예수의 활약을 전해 주는 여론을 전해 듣고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고 세례자 요한과 연결짓거나,
“엘리야가 나타났다.”거나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둥
예수의 복음선포 활동의 예언자적 면모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헤로데 영주에게 고해 바쳤습니다.
그러자 당연히 갈릴래아에서 로마 제국을 대리하던 헤로데 영주는 그 예수도 붙잡아 죽이려고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헤로데 영주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는 갈릴래아에서
군중을 상대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활동을 일단락지으시고 예루살렘으로 피하셨습니다.
하지만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이번에는 군중이 아니라
제자들을 상대로 집중적인 사도 양성 교육을 실시하셨습니다.
이 여정에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세 번이나 예고되었고, 혼인잔치의 비유,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 약은 집사의 비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세리와 바리사이의 기도에 관한 비유, 미나의 비유 등이
집중적으로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시는 가르침으로 나왔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케리그마 대신에, 당신 사후의 케리그마를 준비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는 디다케에 집중하신 것입니다.
헤로데 영주와 로마 제국의 앞잡이들은 요시찰 위험인물들이 연이어 나타나는 바람에
바짝 긴장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와는 반대로 백성의 기대는 점점 더 고조되어 갔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에서 보자면, 세례자 요한이 닦아 놓은 길을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면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양성해 놓으셨기에, 이 열두 사도가 세우게 되는
교회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열릴 참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돋보이는 활약으로 유다교 당국의 눈 밖에 나서 돌을 던져 죽이는
사형을 당한 스테파노 이후에 그 동창생이었던 사울이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더 본격적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국내에서가 아니라 소아시아와
그리스 나중에는 로마에까지 진출해서 복음을 선포하게 된 역사로 이어집니다.
요한에게서 예수로 이어지고, 다시 예수님에게서 스테파노가 나오는가 하면,
죽은 스테파노 대신에 바오로가 출현함으로써 이래저래 로마 제국으로서는 없애보려던
하느님의 힘이 더욱 커지는 의외의 결과에 직면하게 된 셈이었습니다.
박해시대 조선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801년 신유년에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를 처형하고 났더니,
이번에는 엥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텡 신부 등 더 많은 수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약하는 바람에 1839년 기해년에 모조리 처형했고,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예 한국인으로서
첫 사제가 된 김대건이 나타나서 1846년 병오년에 또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김대건과 함께 수학했던 최양업이 신부가 되어 나타나서 발각되지도 않은 채 12년 동안이나
삼남지방을 밤중 산길로 매년 7천리를 걸어다니면서 130 군데의 공소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다녔습니다.
박해 중이지만 최양업 신부의 활약으로 삼남지방 곳곳에 흩어진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최양업은 부제 시절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전해 듣고는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가서 머물면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파리와 로마로 보냅니다.
이 기록이 훗날 시복시성 자료로 요긴하게 활용된 것은 물론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년 여름 장마로 공소 순방을 할 수 없는 7,8월에는 충청도 교우촌의 중심 역할을 했던
베티에서 천주가사를 집필하여 교우촌 신자들을 교육할 준비를 했습니다.
이 천주가사는 천진암 강학회 활동으로 조선천주교회를 준비했던 선비들이 시작했던 토착화 작업의 일환
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에서 발간하는 계간 잡지 ‘평신도’의 2016년
여름호에 최문태 힐라리오 교수가 기고한 글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가 벌인 사목 활약상이 이렇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에 이어
1849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하여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조선의 사회상을 둘러보고는 양반계급의 독선, 오만, 횡포, 부도덕이
모든 악의 근원이고 온갖 비참함의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각종 세금과 수탈과 착취에 짓밟혀 고통받는 가난한 백성들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였다.
이러한 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사목적 열정은 매 년 7천 리가 넘는 여정을 지속하게 한 근원이었다.
그는 귀국 직후인 1850년 1월부터 9월까지 무려 5천 리 길을 걸어 다니며 3,815명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행하였다.
그의 편지에 따르면, 당시 신자들은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암송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 외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와 성녀 바르바라의 성인전,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 한글로 쓴 신심서 등을 암송
하였다.
한문을 해독할 수 없었던 신자들은 성경을 읽으며 신심을 다질 수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최양업 신부는 한글로 된 4·4조의 천주가사를 지어 한문을 모르던 교우들에게 노래로 가르쳤다.
즉 노래를 통해 더 쉽게 교리서와 경문의 내용을 암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노래 중의 하나가 천주가사 <사향가(思鄕歌)>다.
사람이 본향을 그리워하며 현세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리책 『주교요지』의 가르침을 당시에 유행하던 가사로 만든 문학작품이었다.
《주교요지》는 주문모 신부의 인가를 얻어 복자 정약종이 한글로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리서였다.
이러한 교리서의 내용을 더욱 용이하게 ‘조선시대’의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한 <사향가>는
신자 교육뿐만 아니라 비신자와 적대자들을 향한 전교와 호교의 목소리를 동시에 담았던 것이다.
교리의 가사화는 교리서의 대중친화성을 고양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교리의 토착화에 기여하는 일이었다.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천주교 교리를 가사라는 친근한 시가
장르에 형상화함으로써 신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래의 생경한 가르침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조선화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사향가>에서는 죽음 이후의 사심판, 공심판, 천당, 지옥 등 사말교리에 중점을 두었다.
현세는 잠시 지나가는 풍진세계이므로 현세의 복락을 탐할 것이 아니라,
사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고향인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생각하며 살아야 대부모인 천주를 볼 수 있다 는 지복직관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향가>는 현세보다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무게 중심을 둠으로써
자연스럽게 당시의 순교영성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게 되었다.
즉 <사향가>를 부르는 이들은 누구나 진리의 길에 들어서서 모진 역경을 이겨내고,
기꺼이 치명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김대건에 이어 혼자서 독보적인 사목활동을 펼치던 최양업은
1861년 6월 15일 영남 지방의 사목 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에 과로와 장티푸스로 40세의 나이에 문경에서 병으로 선종하였고, 나중에 배론에 안장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자였기 때문에 1984년에 시성되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순직자였으므로 시성 명단에서 제외되었다가,
‘땀의 순교자’라는 호칭이 붙여졌고 2016년 5월 8일에 가경자로 선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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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연중25주간 목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충만한 삶 -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이다 -
오늘부터 토요일까지 제1독서는 코헬렛입니다. 읽을 때 마다 충격입니다.
공감하면서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그 내용을 일부 인용해 봅니다.
-“2.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태양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8.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11.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아주 예전 피정지도시 묘비명을 써보라 했을 때 한 수도형제의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글을 읽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허무와 무지 역시 인간의 본질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을 떠났을 때 귀착점은 허무와 무지입니다. 영혼의 고질적 질병같은 허무와 무지의 어둠입니다.
윗 내용을 보십시오, 온통 회색빛 우울한 분위기 아닙니까? 결국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지혜로운듯 하나 어릭석은 무지의 코헬렛입니다. 도대체 새로움, 놀라움이 없습니다.
삶에 감동도 감격도 감탄도 없습니다. 기도도 사랑도 찬미도 감사도 기쁨도 평화도 행복도 자유도 희망도 믿음도 성령도 분별도 없습니다.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도 없습니다.
빛이 아니라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흡사 태양이 진 저녁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그런 회색빛 분위기입니다.
보이는 현실뿐이요 현실 넘어 영원한 세상에 대한 초월적 비전도 꿈도 없습니다.
완전히 현실의 감옥에 갇힌 영적 수인같고 숙명의 노예같습니다. 병도 보통 병이 아닙니다.
너무 부정적이요 비관적입니다. 도대체 무슨 맛, 무슨 재미, 무슨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하느님 없이 이 거칠고 험한 인생 광야 여정,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우울증에 급기야는 자살에 이를 수 있겠습니다.
제가 강론시 참 많이 썼던 제목이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삶은 여정이요, 믿음의 여정, 순종의 여정,
회개의 여정, 순례의 여정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체험을 바탕으로 강조한
‘1.목적지;하느님, 2.이정표, 3.도반, 4.기도’라는 인생 순례 여정의 네요소도 생각납니다.
결국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인데 하느님이 빠졌으니 코헬렛의 허무한 인생에는 이런 ‘여정’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디에 가든지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삶의 중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코헬렛에는 하느님이 빠져 있기에 삶의 중심도, 삶의 의미도, 삶의 목표도, 삶의 방향도 없습니다.
말그대로 허무와 무지의 어둠 가득한 현장입니다.
어떻게 삶의 목표도 방향도 중심도 의미도 없는 이런 무지와 허무의 분위기속에서 무미건조의 반복의 날들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말그대로 지옥일 것입니다.
하느님 아닌 그 누구가 그 무엇이 이 자리에 올 수 있겠는지요?
오늘 복음의 헤로데가 우리에겐 반면교사가 됩니다. 헤로데처럼 저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인 하느님이 빠진 허무한 삶, 헛된 삶의 전형이 헤로데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불안과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는 헤로데의 참 허약한 모습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바로 내면의 불안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이 그 삶의 중심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면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런 내적 불안이나 두려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중심에 없기에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며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는 무지와 허무의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헤로데 임금입니다.
밤의 어둠을 몰아내는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어둠에 대한 궁극의 답은 태양같으신 하느님
뿐입니다. 하느님이, 파스카의 예수님이 삶의 중심에 자리잡을 때, 우리 삶의 여정에 목표이자 동반자가 되실 때, 허무한 삶은 충만한 삶으로 변합니다. 인생고해는 인생축제가 됩니다.
코헬렛의 허무에 대한 참으로 멋진 최고의 응답이 바로 이런 좋으신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4.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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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이영근 신부님. 이 사람은 누구인가?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를 말합니다. 곧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요한의 목을 벤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뉘우침이나 슬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길을 찾지 못한 혼란과 당황 속에서 말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이 사람은 누구인가?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만이 아닐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확인하고자 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은 더욱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을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는 저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가 소문으로 듣고 믿고 있는 이 분은 누구신가?
내가 찾기도 전부터 나를 찾으시고, 나를 훤히 아시는 이 분은 대체 누구신가?
나를 믿고 사랑하고 있는 이분은 대체 누구신가?
그리고 이러한 고백과 기도를 드려봅니다.
당신은 설혹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니,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그토록 훤히 저를 아시니,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토록 저를 믿으시니, 당신은 저의 신자입니다. 그토록 저를 쫄쫄 따라다니오니, 당신의 저의 추종자입니다. 그토록 저를 사랑하시니,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아주시니, 당신은 저의 벗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주님!
제게 다가오신 당신은
제가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고, 그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니, 당신은 저의 아버지입니다.
제가 듣고자 하기도 전, 제가 알려고 하기도 전, 알려주고 들려주신 당신은 언제나 제가 들은 바를 넘어,
제가 알고 있는 바를 넘어 계시며, 저를 훤히 아시는 저의 스승입니다.
제가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저의 신자요, 제가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저의 연인이요,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아주시는 저의 벗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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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
♣ 만 남 ♣
성지에 가서 순례는 하지 않고 성지를 구경만 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사참례를 한다고 성당에 앉아서
참례는 하지 않고 미사를 구경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을 펼쳐놓고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는 않고 성경이라는 책을
구경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예수님과 마주치거나, 예수님 곁을 스쳐 지나가거나,
그분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을 텐데,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그 자리에 백스무 명가량 모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사도 1,15), 아마도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승천 때까지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일 것입니다.
성지순례는 성지 관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좀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한 일입니다.
미사참례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성경 독서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 ‘만남’은 나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내 삶 안으로 깊이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라고 말하지만,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스쳐 지나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헤로데가 당황하였다는 것을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또는 “죄책감을 느꼈다.”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요한의 귀신이 해코지 하지나 않을까, 라는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헤로데는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백성들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더욱 자신감을 얻어서 예수님마저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다는 것은
‘불순한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한 번 ‘구경’해 보고 싶어 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과 헤로데가 만나긴 합니다.
빌라도가 재판 도중에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보냈기 때문입니다(루카 23,7).
그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관한 불순한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자,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했습니다(루카 23,11).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것은 만난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 없이 구경만 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일보다 더 나쁜 일이었습니다.
헤로데의 죄만 더욱 커졌기 때문입니다.
헤로데와 완전히 대조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자캐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1-4).”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모습은,
한 번 구경이나 하려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경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아마도 새 인생,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설 용기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직업과 또 여러 가지 처지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부르셨는데(루카 19,5),
자캐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더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바르티매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마르 10,46-47).”
예수님께서 그날 그곳을 지나가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바르티매오는
그냥 그 자리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다가 생을 마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르티매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기 앞으로 스쳐 지나가시는 그 순간이
일생일대의,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단 한 번의 기회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전부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그의 처지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었을 것이고,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앞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자캐오보다 훨씬 더 절박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찾았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입니다.)
자캐오도 그렇고, 바르티매오도 그렇고,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완전히 변화되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만남’은 ‘부르심’과 ‘응답’이 합해진 일입니다.
‘부르심’을 직접 받았지만 곧바로 응답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9,59-60).”
“고추를 말리려고 마당에 널어놓았는데, 비가 올 것 같으니까 집에 가야겠다.”
라고 말하면서 미사참례를 하다 말고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경우에도 “죽은 이들의 일은 죽은 이들이 하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여기에서 나를 만나라.”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 일은 ‘예의’에 관한 일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일입니다.
(“나는 지금 주님이신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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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연중 제25주간 목요일/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시의적절한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이 ... 되살아났다. ... 엘리야가 나타났다. ...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루카 9,7-8)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많이 놀라웠던 겁니다. 헤로데도 몹시 당황했다고 복음사가가 전할 정도지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고 기가 꺽인 이들을 위로하는 모습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 안에 등장했던 여러 하느님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듯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코헬렛의 지혜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뼛속 깊이 박혀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을 이롭게 했던 예언자와 선지자들의 되풀이 또는 환생이나 부활이라고 추측하고 간주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너무도 당연한 '무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고대했더라도 하느님께서 친히 오실 것이라고까지는 짐작 못했겠지요. 메시아를 어느 지역 출신, 어느 지파의 후손의 사람의 아들로만 여긴 듯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이 예언은 존중해 세상에 오셨고요. 그래도 성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존재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 세상에도 "완전한 새로움"이었으니, 경험과 관습에 기대어 살아온 이들에게 당연히 미지의 존재셨습니다.
그렇다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말씀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는 그렇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성자 예수님은 이 모두를 넘어서는 새로운 태양이시고 새로운 하늘이시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는 완전한 새로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두고 이래저래 억측하는 군중이나 헤로데의 무지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 인물들 중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는 헤로데지만, 그의 말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포착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헤로데가 묻습니다. 자기가 무고하게 죽인 요한까지 떠올리는 걸 보면 마음에 찔리는 구석이 있긴 한가 봅니다. 하지만 두려움에서건, 앎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서건, 사랑에서건 이 질문은 인간 삶에 중요한 화두를 제시합니다.
새로운 사람이나 사건을 맞닥뜨릴 때, 경험이나 선지식이 새로움의 자기 계시를 가려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생을 거처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인 선입견과 편견이 새로운 만남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면 곤란하겠지요. 새로움을 마주하면, 있는 그 자체로 상대를 직관하며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는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질문은 갈망을 낳습니다. 보고 싶은 열망입니다. 내면에서 들썩이는 추측이나 지레짐작의 함정을 넘어서 진정한 앎의 관문을 통과하고 싶은 것입니다. 서로가 바람으로 이끌린 만남은,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일치를 기대합니다. 절대자와의 만남이 그렇고 사랑하는 이들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새로움이 다가올 때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은 늘 새로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선입견의 틀에 자신을 가두지도 맙시다. 과거에 묶이면 새로움이 가져온 은총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지금 새롭게 오신 이분이 누구이신지 직관하고 관상하며 방향을 돌려 만남에로 나아갑시다. 새로움은 "다시"나 "되풀이"의 향수에 젖은 상태에서는 알아보기 어려운 실재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인해 예전에는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던 극한 현실을 지나고 있습니다. 흔히들 코로나가 끝나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 예전의 익숙했던 행복을 되찾으리라 내심 기대를 합니다만, 우리가 질문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어쩌면 "새로움"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신문 기사에서 마음을 때리는 구절을 만났습니다. "다시 시작할 것인지,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이 질문은 사회 지도층이나 신학자,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실존과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교회, 새로운 질서를 맞이할 것인 지 진지하게 기도하고 관상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만나 보려고 하였다."
오늘 이 질문을 안고 그분께 달려갑시다. 그분께서 지혜와 사랑과 진리를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품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이 고통의 시간을 헤쳐 나아갑시다.
우리가 먼저 새로움을 맞이할 새로운 피조물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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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창조시기 24일째-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9,9)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헤로데에게 전해집니다.
곧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고,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는 소문이 헤로데에게 전해집니다.
이 소문을 전해 듣고 헤로데가 몹시 당황해 합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을 듣고 보니,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구세주로', '나의 그리스도로'로 고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그들에게는 아직 무리겠지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물음을 던져봅니다.
'지금 나에게 들려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무엇이고, 지금 나는 예수님에 대해 어떤 소문을 내고 있는가?'
'내가 만난 예수님과 내가 체험한 천국을 이웃에게 잘 전하고 있는가?'
오늘 독서에서 코헬렛 저자는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코헬1,2.9)
정말 허무한 일이지만 코로나는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름만 바뀔 뿐이지, 또 다른 모습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올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지금처럼 계속해서 꼭꼭 숨어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계속해서 사람들을 경계하면서 코이노니아(친교)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이런 모습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천국)와 정반대의 모습인 '지옥의 한 모습'입니다.
코로나가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지옥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을 바라보면서 모든 피조물들을 포함한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천국의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시 시작하라는 메시지를...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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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4. 연중 제 25 주긴 목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말씀의 주제는 '코헬렛의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 새로운 것 없음 과 예수님에 대한 헤로데의 당황과 궁금증'입니다.
코헬렛은 모든 것이 허무다. 태양 등 있던 것은 다시 있으며, 이루진 것은 다시 이루어 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고 고백합니다. 루카 복음은 헤로데는 예수님의 출현에, 요한인가? 하며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은 특별하고 경이롭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의 삶도 특별합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나 사람들. 만남 대화, 한 일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그릇됨을 봅니다.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함과 개선, 실행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 온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 데, 바다는 가득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있던 것이다.
아무도 옛날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 한가지다. 코헬 1,2-11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났다."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루카 9,7-9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고 나서, 많은 사람이 그분을 만나러 갔고, 만났습니다. 그의 말씀은 듣고 이해하기가 손쉬웠으며, 힘있고 능력이 있는 말씀으로, 그 말씀을 통하여 병의 고침과 치유를 받고, 더러운 영들이 쫓겨 나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의 회개을 외치던 세례자 요한, 대 예언자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 임금과 백성, 그 사회에 정의를 외치는 옛 예언자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인식들은 예수님께서 행한 말씀과 권위와 권능의 일에 대해서 그들이 느낀 바였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율법교사나 사제들과 달랐습니다. 권위있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분의 행업은 특별하고 경이로웠습니다. 영주 헤로데도 그분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자, 주님의 제자들도 말씀으로 특별하고 경이로운 이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권위와 힘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감동하게 하며, 자유와 해방을 선포합니다. 그런 주님의 일꾼입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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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4일 목요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매일미사
_김민호 베네딕토 신부
https://youtu.be/obAYC96716A (26:23)
•2020. 9. 24.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김민호 베네딕토 신부 (서울대교구 경찰사목위원회 부위원장) 집전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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