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절은 한국만이 가진 국가기념일 이다 출3:7-8, 6:6-8
7월5일 신문과 인터넷에서는 원로배우 신영균(95)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1875~1965년)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는 가운데 서울 강동구의 사유지 4000평을 기념관 부지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혀서 우리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지난달 2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발족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던 자리에선 기념관 부지와 재원 마련에 대한 얘기도 오갔다. 국가보훈부는 이 전 대통령이 독립유공자법을 근거로 정부 예산은 사업비의 최대 30%만 지원받을 수 있어 나머지 70%는 국민 성금을 모으기로 했다는 와중에 추진위원으로 참석한 신 회장이 “제가 서울 강동구에 땅 2만4000평이 있는데, 그 땅 중에 이 전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던 한강 변 고덕동 땅 4000평이 있는데 추진위가 기념관 부지로 쓰겠다면 4000평을 모두 기증하겠다”는 취지로 기부 의사를 밝힌 신 회장은 4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회의에 참석해보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뜻깊은 일이 제대로 추진되는 것 같아 너무나 다행스럽고, 참석한 내가 자랑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건국의 아버지를 기리는 사업에 국민으로서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에서 기증 의견을 밝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 회장은 “여태껏 살면서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 아직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이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세웠을 뿐 아니라 한국 전쟁 땐 미국을 참전시켜 영토를 지켜냈다. 이 전 대통령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 광복절은 78번째를 맞는 해인데 78년전만 하더라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국교회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때가 되어 우리나라를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해방되기 35년 전 조선 스스로는 무너져가는 나라를 일본에게 도움을 받겠다는 취지하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고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일본과 합병하면서 이 나라는 단군 이래 주권을 빼앗긴 일본의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빼앗자 조선사람들의 정신에서 혼을 빼고자 놀라운 일들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발행된 한성신보 초대사장을 지낸 낭인 출신 아다치 겐조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조선인 동화를 위해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배일(排日)자료를 공급하는 기념물”이라면서 산성과 옛 사찰 등을 보면 ‘여기서 왜구를 격파했다는 배일자료가 새겨져있는 기념물을 제거하는 것이 민심통일과 선인동화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숭례문은 ‘타도 1순위’가 됐다.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낡아빠진 남대문은 빨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제동을 건 자가 바로 당시 한성신보 사장이자 일본거류민 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였다. ‘숭례문 철거반대’를 외친 나카이의 주장은 ‘포격파괴’를 주장하던 하세가와에게 “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이라면서 파괴하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하세가와는 “임진왜란 때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가 개선장군처럼 통과해서 서울을 함락한 숭례문”이라는 이야기에 뜻을 굽혔다(나카이의 <조선회고록>, 당업연구회출판사, 1915년). 흥인지문(동대문) 역시 가토 기요마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없어질 뻔 했던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이 오늘날 한류의 원산지가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한류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까다로운 단어로 좁게는 K-pop. 드라마, 한식 등 한국 문화 콘텐츠의 해외수출 그 자체가 한류라 불린다. 유통업계는 화장품과 의류, 외식 브랜드를 ‘한류의 첨병’이라 한다. 오늘날 한류로 이름을 알린 것은 당연히 K-pap인 방탄소년단(BTS)이라 할 수 있다. 국내와 아시아를 넘어 K팝의 진입 장벽이 높았던 미국에서도 진정한 ‘글로벌 스타’로 특히 이들은 세계 최대 음악시장으로 꼽히는 가장 권위 있는 빌보드 차트에서 정상에 올라서며 K팝을 팝 주류 시장에 안착시켰다. K팝이 글로벌 신한류 확산에서 한국여행객 증가에 일등 공신 역할을 담당하는 가운데 특히 글로벌 K팝 팬 10명 중 9명은 향후 한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K-팝에서 시작한 한류 열풍이 또 다른 분야인 K-편의점까지 이르고 있다. K-편의점은 베트남, 말레이시아, 몽골 등지에서 수백 개의 점포가 운영되고 있으며, K-편의점은 이제 새로운 한류 트렌드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특히 동남아권에서 K-편의점은 한류를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K-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등장한 다양한 K-푸드를 만날 수 있으며, 또 많은 현지인들이 K-편의점을 통해 한국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여행 대리만족을 얻고 있다는 K-편의점 역시 한류가 뻗어나가는 창구로서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안보 위기가 고조돼 세계 여러 나라가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가 우리나라에서 무기를 다량으로 수입했다는 보도가 K-방산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고 있다. 지난해 폴란드 방산 수출 물량은 전차 180대와 자주포 212문, 경공격기 48대 등으로 계약액은 약 17조 원의 K방산 사상 최대 1차 수출에 이어 금년 윤석열 대통령의 순방으로 폴란드 2차 수출 규모는 90억 달러, 우리 돈 11조 3천억 원 규모인 것으로 지난해 1차 수출에 이어 총 30조 원 이상의 추가 물량에 대한 2차 계약을 체결했다. "폴란드는 유럽에서 내수 시장 6위의 국가이고, 유럽 시장 진출의 전략적 교두보이자 우크라이나 재건 협력의 허브"라고 밝혔다. 향후 10년 동안 3차에 걸쳐 최대 3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국내 방산 수출 역사상 가장 큰 액수다. 한국 방산 수출 사상 한꺼번에 이렇게 다양한 무기를 대량으로 수출한 건 전무하다.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k-팝, k-푸드, k-편의점, k-방산등 한류를 일으킨 적은 이제까지 없던 일로 전세계가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류확산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세종학당이다. 한국어·한국문화 교류 활성화를 위해 세종학당이 2023년 7월 기준 85개국 248개소이며 한국어 전문교원 파견 인력도 350명으로 확대된다. 이에 따라 2022년 기준 14만여명이던 세종학당 수강생은 2027년까지 50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방탄소년단(BTS), ‘오징어게임’ 등 K-컬처의 인기가 세계로 확산하고 있는 만큼, 한국어가 문화매력국가의 위상과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있다는 여론에도 솔직하게 우리현실을 직시해 보자. 탈북자 김태산 전 북한 체코대사의 글-대한민국 국민은 어떤 국민인가?라는 장문에서 그가 말하기를 분별력이 없는 멍청한 사람들을 가리켜 똥과 된장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운을 띄우면서 똥과 된장조차도 구분 못 보는 한국인들이여 당신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나는 북한에서 한국인들은 자원도 없는 악조건 속에서 그것도 북한의 항시적인 도발속에서 저렇게 빨리 발전된 나라를 세운 국민이니 응당 정치적 각성도 높고 애국심과 단결력 또한 강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실망이 크다고 하면서 명백히 말하건대 앞으로 북한이 따라 배워야 할 것은 오직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뿐이라고 하였다. 현재 국민들의 정치적 인식정도는 매우 낮고 애국심과 단결력 따위는 전혀 없다고 한다면 나를 비난할 분들도 있겠지만 자유에 맡긴다. 미안하지만 한국 국민들은 바람 따라 흔들리는 갈대 같이 애국자와 반역자를 구분못하는 어리석은 국민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첫째 한국인들은 북한 간첩에게 속아서 자신들을 공산독재에서 구원해준 이승만 초대대통령을 쫓아낸 부끄러운 국민이라고 했다.
둘째 좌파들에게 속아서 자신들을 가난에서 구제해주고 국가 발전의 기틀을 세워준 박정희 대통령 가족 전부를 매장시킨 매정한 국민이다.
문재인 정부시대에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과 교육감 지방 단체장들 중에서 친북, 친중이 아닌 자가 누군가? 이게 과연 정치적 안목과 애국심이 있는 국민인가?
사실 대선전까지만 하여도 윤석열 바람이 불면 “와”하고 따라갔다가 지금은 대통령 취임 1년 반이 지났는데 윤대통령의 여론조사를 보면 36% 정도인 것을 보면 그가 한 말이 그냥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한국인들은 하늘이 내려 준 인복은 다 차버리고 마지막엔 쓰레기들만 끌어안고 지도자가 없다고 한탄만 한다. 솔직히 저들 중에 대한민국을 맡길 자가 누군가? 바보 국민이 바보 대통령을 만든다. 잘 알 듯이 오늘날 북한 핵무장을 하게 만든 자가 김대중이 아닌가? 그가 준 수조원을 가지고 북한이 핵무장한 것을 모르는 자들은 없을 것이며 얼마전 퇴임한 문재인은 평창올림픽 때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을 신영복이라고 전세계인들에게 말한 것을 본다면 문재인이 공산당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신영복은 1968년 북한노동당의 지령으로 남한에 남파된 간첩에 의해 만들어진 "통일혁명당"에 가입하였고, 통혁당은 결정적 계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다 일망타진된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던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무기징역 그리고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1988년에 "전향서"를 쓰고 출옥하였던 자를 존경한다고 문재인이 공개선언하였다면 그가 간첩이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인가! 제발 애국하는 심정으로 올바른 정치적 안목 좀 키우고 역적들에게 부화뇌동 당하여 자신들을 살려준 대통령을 내쫓고 나중에는 정권까지 넘긴 당신들 중 누구라 할 것없이 더러운 정치 야망꾼들을 빨아대며 애국자인척 하지 말고 정신들을 좀 차리라는 탈북자 김태산 전 북한 체코대사의 글이 마음을 찡하게 한다. 금년 78번째 맞이하는 8.15 광복절은 35년 동안 일본 식민지로 있다가 빛을 되찾은 날이다.
1. 해방과 건국을 포함한 8.15 광복절의 유래
78번째 8.15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아직도 8.15를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로만 알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데 ‘광복절-건국절’ 논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김구와 이승만이다.
1948년 4월 김구는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만나면서 김구는 북한군이 남침 할 것을 알았으면서도 4월 30일 평양에서 발표한 성명서에는 외국군의 철수를 요청하는 대목에서 소련군 혹은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미군뿐이라는걸 알면서도 미군 철수를 동의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것을 떠나서 김구가 김일성에게 이용당했다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여기 있는 것 아닐까? 김구는 독립투사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그가 보여준 열렬한 애국심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지만 적어도 해방공간과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보여주셨던 김구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는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49년 6월 감구는 자기의 수행비서인 안두희에게 암살당한다. 안두희는 김구에게 총을 겨누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김구는 없어져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구 암살을 둘러 싼 배경이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그의 행적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하다. 누가 통일정부를 원치 않겠는가? 그러나 김구는 당시 치안과 행정과 정치가 일사분란하게 이룩한 북한 김일성의 의지대로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가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가 암살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행적을 보인 인물이 이승만이다. 1946년 이승만은 당시로 보면 ‘ 일제 패망 이후 미소가 신탁통치하는 조건에서 남북 두 개 정부 수립은 어쩔 수 없었고, 미군이 정부를 주둔하는 38선 이남에서 선거를 치르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던 이승만이 ‘참다운 선각자’, ‘고독한 영웅’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이로 인해 미군정이 끝나면서정국의 혼란중에도 대한민국이 탄생하기 위해 1948년 5월 10일 단군이래 5000년 만에 역사적인 총선을 통해 국민들이 국회의원들을 선거하게 되었다. 남한에서는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은 선거 참여를 보이콧하고 테러 방화 등으로 선거가 치러지는 것을 방해하였으므로 헌법상의 국회의원 정수는 200명이었으나 제주도에 배정된 2명이 1948년 4월에 일어난 제주 4.3 폭동 사건으로 인하여 선거가 치러지지 않아 198명이 선출된 것이다. 그리고 5월 31일에 제헌의회가 열렸습니다. 5천 년간 왕이 다스리는 군주 정치가 드디어 백성들의 대표가 헌법을 만들고 백성들이 뽑은 대통령이 다스리는 민주 정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1948년 5월 31일에 열린 국회를 〈제헌의회〉라 합니다. 제헌의회의 첫 순서인 임시의장을 선출하는 순서에서 이승만 박사가 선출되었고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는 단상에 오르자 역사적인 발언이 대한민국관보 1호 1면에 다음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반만년 길고 유구한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민주주의 시대를 개막하고 국회를 열게 된 것은 사람의 힘과 사람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을 사랑하사 대한민국을 탄생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어서 의장 이승만이 말하기를 〈이윤영 의원 앞으로 나오시오.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려 주시오.〉이윤영 의원은 종로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이자 목사였습니다. 북한에서 목회하다 공산당에 쫓겨 월남하여 남산감리교회를 창립하고 목회하는 중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하나님께 기도로 국회를 개원한 것을 알 수 있다. 1948년 5월 30일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의원들에게 인사말로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대통령이 말하자 이윤영의원은 기도문을 다음과 같이 읽었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이 기도문이 국회가 처음 열렸을 때 하나님께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기도를 한 후 국회에서 처음으로 헌법과 국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어떻게 당시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5%도 안되는 때에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었겠는가? 당시 2차 대전 후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하였지만 우리나라처럼 대통령과 국회가 먼저 하나님께 일어나 기도하면서 국가운영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세계 어디서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실제 있었다고 국회속기록에는 기록물로 남아 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국회의원 총선거와 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이승만 대통령이 선출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드디어 해방된 날인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대한민국의 건국을 국내외에 알리게 되었으므로 8월15일은 해방된 날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건국기념일인데 주사파인 문재인은 이 나라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자 대통령이 되자마자 상해 임시정부수립일인 1919년 4월 22일을 건국일로 발표하며 올해가 건국102주년이라고 미치광이소리를 하니 한마디로 나는 주사파라는 것을 공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건국을 하려면 땅과 국민과 주권이 있어야 국가를 건국하는 것인데 임시정부 때 주권은 일본이 갖고 있는데 어떻게 1919년도에 나라를 건국하였다는 문재인 머릿속에서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국가헌법을 훼손하는 대통령이라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러므로 매년 맞이하는 8월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아울러 건국을 포함하는 우리만이 갖는 고유한 광복절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8.15가 해방과 독립을 어우르는 광복절이 되었는지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독립기념일이란 다른 나라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된 날이 독립기념일이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1945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이지만 우리나라는 해방과 동시 미소의 신탁통치가 끝난 후 국민총선거로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국회의원들이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들이 법을 제정한 후 광복절이 된 8.15기념일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건국기념을 아우른 것이다. 그러므로 1948년 이전인 1946년과 1947년의 8.15 행사의 공식명칭이 "해방 기념식"이었던 것을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듬해인 1949년 8.15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설 제1회 기념일인 오늘을 우리는 제4회 해방일과 같이 경축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한 표현은 아주 정확한 표현이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8.15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국회에 제출된 초안의 명칭이 "독립 기념일"에서 "광복절"로 수정 통과된 것은 해방과 건국을 아우른 절기로서의 "빛(光)을 되찾(復)"는 광복절을 제정한 것이었다.
한편 기독교인으로서 "광복"이란 의미를 다른 차원에서 한번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잃었던 빛을 되찾는다"라는 "광복"이란 말속에는 그 어떤 단어에서 맛볼 수 없는 훨씬 심오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실로 오랜 세월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의 해방의 감격은 두말할 것도 없이 어둠에서 빛을 되찾은 광복과 상통하는 바이며 신앙적인 면에서도 신사참배의 강요와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빛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회복된 날이기도 하다.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사건은 시내산에서의 율법 제정 사건으로 보다 더 주도적이고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우리의 가슴에 남겨진 것처럼 대한민국의 해방과 3년 후 건국을 볼 때 분명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주도하신 역사의 한 페이지이라고 생각된다. 실로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들 중 "해방"이나 "독립" 그리고 "건국"대신에 우리나라처럼 "광복"이란 표현을 쓰는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면 참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광복 곧 빛의 회복은 곧 참빛으로 오신 주님의 구원의 복이 아닌가!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의 해방과 건국이 지금껏 "광복"으로 불리게 된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와 사명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 과제와 사명은 북녘 동포들을 비롯하여 눈먼 자들을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고 저들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하라는 사명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의 해방이 내용상으론 반쪽의 독립이 되었으나 이미 해방을 통해 광복으로 임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건국이래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한 광복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역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대한민국 건국이전 이 땅에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데 그 기원을 한번 살펴 보고자한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즉 해방에서 건국까지 3년의 역사적 사건들은 오늘날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한번 재조명해 본다면 당시 남한에서 백성들을 선동하는 정치가들로는 공산당에 뿌리를 둔 박헌영과 여운형이 가장 앞서 갔었고 그들보다 한발 늦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념으로 국가를 세우겠다는 이승만과 마지막으로 남북한을 통일하겠다는 김구 등이 있었지만 해방직후 미군정이 오기 전 남한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세력은 여운형과 박헌영이 주도하는 좌익정치세력들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요?
해방된 8월 15일부터 미군이 진주하기 전 9월 초까지 우리나라는 무정부 상태로 당시 상해에 있던 김구나 미국에 있던 이승만 등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하기까지는 두 달 이상 소요되었는데 이 틈을 타 국내에 있던 박헌영(북한 총리겸 외무상)과 여운형은 1945년 9월6일 오후 7시 경기여고 강당에서 건국준비위훤회(건준) 주최로 전국대표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여운형 임시의장 주재로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는 새로운 정부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직하고, 이승만, 김구, 김원봉, 조만식 등 해외와 이북에 있는 정치지도자 55명의 전국인민위원을 발표했는데 대표는 박헌영이었다. 명분은 미군과 협의할 정부 형태였지만 실상은 미군이 진주한 이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남로당을 조직한 박헌영이 일본인 명의의 적산(적의 산업)과 토지 등을 강제 몰수하여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고 국민들을 선동하자 남한국민의 78%가 남로당을 지지하여 대한민국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조선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갈 뻔 했다. 당시 국내 정국의 주도권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박헌영에게 있었다. 박헌영은 1925년부터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으며 해방후에는 남로당을 창당한 뼈속까지 공산주의 사상으로 꽉 들어찬 자로 이미 1945년 8월 18일에는 일제강점기 때 해산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좌익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수립을 선포했다. 다음 날 서울 시내에는 조선인민공화국 탄생에 제하야’란 전단이 뿌려졌다. 우익진영은 즉각 ‘한민당 발기인’ 명의로 “조선인민공화국 정부를 배격하는 내용의 결의문으로 대응했고 우파인사들은 9월 7일 해외의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해 ‘인공’에 맞섰다. 그러자 좌익진영은 9월 11일 정오 동대문 경성운동장에서 건준 주최로 대규모 인공 수립을 지지하는 ‘인민대회’를 개최했는데 사실상 조선공산당이 주도하는 해방 후 첫 대규모 집회였다. 이로써 국내 정치세력은 ‘인공’을 지지하는 좌익과 중경 임시정부 지지를 표방한 우익으로 양분된 것이 오늘날 진보와 보수의 씨앗이 되었다고 본다면 틀림없다. 미군정은 ‘인공’ 선포 초기부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9월 13일 미군정 정보부장은 “현재 조선 내에는 미군정부 이외에는 여하한 정부도 있을 수 없다”며 “조선인민공화국 운운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뜻을 비공식적으로 밝혔다. 10월 18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여운형을 불러 “1국내에 2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으니 38도 이남 조선에 있어서는 군정청이 유일한 정부인즉 조선인민공화국정부는 해소함이 마땅하니 즉시 해소하고 정당으로 존재할 수 있다”라는 내용의 ‘권고 공문’을 전달했다. 하지 사령관의 최종 입장이 나오면서 좌파진영의 ‘인공’ 수립 시도는 허망하게 종막을 고했는데 여기 까지 오는 동안 남한은 하마터면 조선인민 공화국이 될 뻔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후 남한의 대표적인 박헌영은 공산당 활동과 남북통일과 관련하여 1945년 10월부터 1946년 10월 이후 그가 북한으로 월북할 때까지 김일성과 여섯 차례 비밀회동을 가졌었는데 비밀회담에서는 남북의 좌익들이 공동보조를 취하자는 투쟁전략을 세워야 할 필요성에서 주로 논의한 것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나온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운동과 토지무상분배의 전략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북한은 1946년 3월에 토지개혁이 시작되면서 남한에서도 인민위원회 정권창출, 토지개혁 실시의 구호가 등장함으로써 박헌영은 김일성과의 비밀회동에서 논의한 대책을 서울에서 이북과 마찬가지로 토지개혁으로 전국민에게 무상분배등을 내기에 이르렀다. 이후 박헌영의 남로당이 일으킨 사건이 제주 4.3사건, 여수반란사건과 대구폭동사건이며 그 맥이 유지되는 것이 오늘날 민노총에서 나온 진보당이며 오늘날 진보라는 것은 이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문재인 정부를 주사파라는 것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사모한다는 말로 해방 후 남로당의 씨앗이 이 땅에 뿌려졌던 것이 지금은 결실이 되어 이 나라는 다시한번 위기를 맞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때도 막아 주셨듯이 이번에도 윤석렬을 대통령으로 세우면서 이 나라를 지켜주셨다고 생각한다. 해방된지 78년이 지나서 이나라 국민이 반일을 외치고 일제상품을 불매하고 일본으로 여행안가는 것이 마치 애국자처럼 선동하는 문재인 정부가 반일운동을 통해 한일관계를 불통으로 막은 것이다. 사실 대일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북한의 핵무기인데 핵무기가 세상에 처음으로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되었을 때 피어오르는 버섯 구름을 보면서 핵무기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 1941.12.7 일요일 일본은 미군 함대가 있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2000명의 장병을 사망케 하고 수많은 함정과 항공기들을 파괴하였던 것이 진주만 기습작전으로 처음에는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드디어 미국은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 투하하여 사망자만 히로시마에서는 90,000-166,000명 9일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투하로 사망자는 60,000-80,000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사망자의 절반은 원폭투하 당일에 집계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2차 피해 후폭풍으로 건물의 무너져 죽은 사람도 많았고 원폭 후유증도 대를 이어가면서 발생한다는 것이므로 우리는 북한의 비핵화에 목숨걸고 있는데 이는 핵무기의 위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8.15해방을 맞이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명해 봅시다.
3. 8.15 해방은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대한민국을 영어로 코레아로 부르며 이 코레아를 히브리어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란 뜻이므로 대한민국 즉 코레아란 말 속에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마찬가지로 지금부터 78년전 1945년 8월15일은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처음으로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채 35년간 나라없는 고통에서 해방되었던 것도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젊은이들은 대동아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위해 총받이로 죽어갔고 일반사람들은 탄광이나 군수공장에서 노동했고 젊은 여자들은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짐승같은 삶을 보냈고 남아 있는 사람들 역시 절망과 배고픔으로 지쳐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암울한 상황에서 누가 왜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에게 해방을 주었을까? 물론 독립을 위해서 독립군도 있었고 상해에 임시정부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독립군이나 임시정부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은 것이 결코 아니라고 단언하건데 우리가 해방된 것은 오직 우리민족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셨다고 확신한다. 한일합방 후 온국민이 나라 잃은 절망과 분노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미국을 통해 선교사들을 보내주셔서 무지한 이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고 복음을 들은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나라를 찾을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는데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여년 동안 종살이 하다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역사임을 알게 되었을 때 교회는 나라를 잃어버린 분노와 슬픔을 토해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고 교회로 나온 사람들은 출애굽말씀을 들으면서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기도응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6:6-7)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주니라.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내가 그들의 속박에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고 내가 뻗은 팔과 큰 심판들로 너희를 구속하리라. 7 내가 너희를 취하여 내게 한 백성으로 삼고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는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당시 한국교회가 교회에서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소망이 넘쳐났을까? 출애굽 이야기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었던 그런 이야기다. 히브리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그들은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기 위해 벽돌 찍어 성을 쌓는데 전 생애를 바치면서 또 육체적 학대를 받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이 노예생활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 하였을까?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지도자로 보내사 그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였던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나라 교회와 성도들도 해방 전까지 적어도 10년 동안은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1938년 장로교회가 평양 정기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매월1일을 애국일로 지정해놓고 예배 전에 국민의례 후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국민의례를 시작했을 때는 강단에서 종을 치면 일장기에 경례하고, 동쪽을 향해 황궁요배를 하고, 국가(기미가요)를 부른 후 천황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황국신민서를 암송한 후 예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신사참배예배를 벗어나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드리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기 때문에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미국을 통해 우리나라를 해방시켜 주신 것이라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해방과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은 시간적 간격은 크지만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방되기 전만 하여도 일본이 미국에게 이렇게 패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했어요. 왜냐하면 중일전쟁에서도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승리하였고 또 대동아전쟁에서도 일본은 버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닥치는 대로 먹어버렸으며 또 마지막은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도 일본은 미군 함대가 있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2000명의 장병을 사망케 하였던 진주만 기습작전이 처음에는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 투하를 9일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과 동시에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선배들이 나라 잃어버린 설움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해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마치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통당했던 이스라엘백성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셨고 출애굽했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출3:7)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그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는 것을 내가 들었나니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아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음을 듣고 자신의 백성들을 노예에서 구출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듯이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며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 해방도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신 하나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여러군데 있습니다.
(시 50:15)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셨고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이와 같은 약속된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8.15 광복절도 이스라엘 출애굽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우리나라도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한 것이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출발한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될 수 있으며 해방된지 3년 후에 대한민국을 건국한 지도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준비시킨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출애굽할 때 모세를 예비하신 것과 같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 예비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전세계가 K-팝, K-푸드, K-편의점, K-방산같은 한국문화를 무조건 좋아하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그분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또 독재자라는 이름으로 그를 잘못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승만 대통령을 한번 살펴보자. 이미 1925년부터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고 왜정시대 때 공산주의에 동의하는 것이 곧 반일운동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졌기 때문에 1946년 미군정이 8000명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에 찬성한다는 여론이 국민의 78%정도가 공산주를 옹호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고 자유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속에 사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만 해방당시 가장 귀에 편하게 들었던 정치이념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였다.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상황에서 이승만 홀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한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이러한 국내외 정서속에서 나홀로 반공을 외쳤던 용감한 지도자가 되었던 것은 공산주의를 목도한 이승만은 국민을 보호하고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선 공산주의에 반대해야 한다면서 여러 친공세력과 맞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승만의 국제정세를 보는 눈과 올바른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용기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제라는 굴레속에 살아야 했던 국민에게 역사상 자유선거권을 부여하고 농지개혁과 교육개혁을 단행해 국민에게 땅을 유상으로 분배하고 교육을 시킴으로써 일부 계층만 갖고 있던 특권을 전국민에게 나누어 준 장본인이 이승만이다. 공적만 놓고 보면 건국의 아버지로서 손색이 없는데 오늘날 진보라는 좌파들은 이승만을 냉혹한 독재자로만 선전하며 이승만이 장기 집권을 도모하고 부정선거를 자행해 민주주의를 유린한 인물이라고 폄훼한다. 또 박헌영이가 주도한 좌파세력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제주 4.3사건이나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강제 진압한 것을 두고 대규모 민간학살을 주도한 전쟁범죄자라고 비난한다. 이승만의 삶속에 공과가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과가 있다고 공까지 묻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역사책속에서 이승만의 공은 사라진듯하다. 불과 반세기만에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이라고 입에 오르기만 해도 주사파 문재인정부에서는 친미 친일 주의자로 매도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승만을 부정하는 것은 곧 1948년 건국을 부정하는 것이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현대교과서에는 대한민국을 독재정부라고 표현한 말이 13회 나오는데 3대 세습국가인 북한을 독재국가로 지칭한 교과서는 한군데도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초.중.고 역사교과서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월한 체제라는 것을 인식시키며 공산주의를 미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정도로 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유언을 알리고자 한다. 마지막 삶을 하와이에서 보내면서 마지막이 오면서 기도와도 같은 그의 유언에는 남은 가족이 아닌 대한민국에 대한 걱정이 담겨져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유언기도>
“하나님, 저는 너무나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민족을 위해서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소서.
정말로 이러한 지도자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조선인민공화국이 아닌 대한민국국민으로 산다는 것이 누구 때문인지 알기나 하는가?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대한민국의 건국지도자로 보내주셨기에 해방 후5년만에 일어난 6.25 한국전쟁에서 북한은 남한을 침략해 수도 서울이 3일 만에 점령당하였고 200만명이라는 인명을 살상하고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6.25전쟁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확실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세워졌고 이를 뒷받침하고자 한미동맹을 체결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이나라 국민이라면 알아야 될 줄 믿습니다. 한미동맹을 체결안했으면 주사파들이 득세한 이나라는 이미 조선인민 공화국이 되기에 충분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이나라는 6.25전쟁 후에도 여러번 북한군의 만행을 막아 주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1968년에는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에 침투시켰고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있었고, 전두환대통령때는 부총리등 16명의 장차관이 순직한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 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며, 2010년 3월26일엔 백령도 천안함 침몰로 승조원 46명이 전사하였고 2010년 10월 23일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남북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78년 동안 남북이 분단되어 북한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일본압제보다 더 무서운 북한 공산주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요즘 같이 남북이 서로 대치하는 이 때에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8.15 해방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실 줄 믿어야 합니다.
5.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섭리를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에서 해방된지 3일째 되는 날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앞에는 홍해와 뒤에는 이집트군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홍해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고 이집트군들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보다 더 큰 은혜를 베푸셨던 것은 바로 출애굽한지 석달만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출19:6) 또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 말들이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서 만민 가운데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주신 것도 우리만을 위한 해방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대한민국이 열방을 향하여 다시 오실 예수님을 선교하는 국가로 세우기 위해 우리나라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대한민국을 택하셨다는 말씀을 찾아 볼까요
(벧전2:9) 너희는 진정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24:16) 땅의 맨 끝 지역에서부터 나오는 노래가 우리에게 들렸으니 곧 의로우신 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노래라.
(사41:2) 누가 동쪽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을 일으키고 그를 불러 자기 발앞에 이르게 하였으며 그 앞에 민족들을 주어 그로 하여금 왕들을 다스리게 하였느냐?
성경은 땅의 맨 끝지역 또는 동쪽으로부터 한 나라를 불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셨는데 바로 그 나라가 한국은 아닌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방만 주신 것이 아니라, 3만 교회와 7백만 성도로 부흥하게 해주셨습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빛입니다(마5:14상). 우리 모두 세상의 빛답게 모든 족속과 나라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과 세상 끝날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8.15 해방을 주신 것도 대한민국을 하나님 백성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하지 않습니까? 애국가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어느 나라가 또 있을까요?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더라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나라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민족이나 택하신 백성은 복이 있다(시33:12)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나라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전략가이신 이승만 건국아버지의 이야기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탁월하였던 전략가를 생각한다면 조선의 이순신, 과 대한민국의 이승만입니다. 우리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하여 너무 과소평가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륜과 전략이 아니었더라면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뿌리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승만의 내력부터 알아봅시다. 청년 이승만은 1899년 한성감옥에서 사형수로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영어를 배우려고 선교사가 세운 배제학당에 다니는 동안에 그의 천재성을 눈여겨보았던 선교사가 옥중에 있는 그에게 성경을 반입시켜 주면서 성경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십자가에서 죽음 당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통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을 읽는 중에 믿음이 생겨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이 된 후로 그에게는 2가지 소망이 생겼습니다. 첫째는 이 나라가 어떻게 하면 국민들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로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였고 둘째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하면 기독교 국가로 세울 것인가 하는 목표였습니다. 그가 사형수에서 풀려난 것은 선교사들이 고종황제에게 탄원하여 무기수로 감형되었고 그가 영어 구사에 능숙하였기에 고종에게 발탁되어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 사절로 가게 되었는데 그가 도착하기도 전 나라는 이미 일본의 손에 떨어졌고 그 후 그가 초대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자취는 실로 눈물겹도록 좌절과 유랑의 세월 속에서 자주 독립국을 세우는 경륜을 기르고 자유민주주의 건국의 전략을 키웠습니다.
어떤 국사학자는 이승만 박사를 미국의 앞잡이라는 식으로 매도하지만 사실은 미국이 이승만을 몹시 싫어하였습니다. 때로는 미국에 강력히 맞서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철수한 이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인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싫어하여 귀국하는 비행기편조차 마련해 주지 않는 정도였습니다. 미군정청의 입국 방해를 받던 이승만은 평소에 절친하던 맥아더 장군에게 부탁하여 장군의 전용기로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그렇게 어렵사리 귀국하고 보니 해방 직후의 나라 사정이 심각하였습니다. 북한은 소련군이 해방군이란 이름으로 진군하여 소련군의 현역 대위였던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 전체를 장악하였고 남한에는 박헌영을 대표로 하는 조선공산당의 세력이 번창하여 당원 수가 거의 백만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미군정 시절 여론 조사한 기록에서는 새로 세워질 나라를 공산주의를 택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택할 것인가에 대한 조사에서 무려 78%가 공산주의로 가야한다는 결과가 나왔던 상태로라면 남한에 박헌영을 수반으로 하는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질 태세였던 상황에서 이승만 박사는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불굴의 신념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략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나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 전략가 이승만 *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입니다. 유학 중에서도 백인들로 조선독립후원회를 조직하여 기부금을 모아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보내곤 하였을 때 하루는 후원회 회장이 육군 소령인 자기 사위를 소개하였습니다. 〈미스터 리, 최근 딸이 결혼을 하였는데 사위가 육사 수석으로 졸업하고 지도력이 뛰어나 장래성 있는 소령이니 인사를 하고 앞으로 교제를 나누세요. 앞으로 도움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승만이 소개 받은 장교가 바로 훗날에 맥아더 장군이 된 군인이었습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에 비범한 인물임을 서로 알아보고 교제가 깊어졌습니다. 이렇게 관계를 쌓았기에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미군 태평양 지구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 맥아더 사령관이 즉각 수원 비행장으로 날아와 전선을 시찰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가 토지개혁입니다. 건국 직후 우리나라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단군 이래 처음으로 소작인들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게 한 업적입니다.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야겠는데 소작인들이 이렇게 많아 경제가 일어나지 못하고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농림부 장관이던 조봉암에게 토지개혁팀을 꾸리게 하여 지주들의 농토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을 착수하였습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지만 남한의 토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였습니다. 거기에다 결정적인 차이가 북한은 농민들에게 토지 경작권만 주었고 토지소유권을 정부 소유로 하였습니다. 남한은 지주들에게도 값을 치르고 회수하고 소작인들에게도 값을 치르게 하되 5년간 농사지은 수확에서 갚게 하였고 토지를 받은 소작인들에게 소유권까지 주었습니다. 토지개혁을 완성한 시기가 6.25 전쟁이 일어나기 2달 전인 1950년 4월 20일에 토지개혁을 완수하였기에 2달 뒤에 일어난 6.25 전쟁에서 공산화되지 아니하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토지소유자들인 농민이 토지소유권을 지키고자 나라를 구해낸 것 입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남긴 최대 업적은 5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일과 한미 동맹을 성사시켜 훗날에 국가 안보의 기틀을 닦은 업적입니다. 미국이 이전에는 타국과 군사 동맹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나 한국 같은 소국과 군사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한미 동맹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의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6.25전쟁을 끝내고자 휴전 회담이 열리게 되었을 때 사생결단하고 휴전을 반대하였던 이승만을 미국이 꺾을 수 없게 되자 미국 측이 휴전 후 한미 동맹으로 한국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약속으로 이승만을 설득하면서 한미 동맹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한미 동맹이 있었기에 박정희 시대에 경제 건설도 한강의 기적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한미 동맹을 흔들려는 악질진보들이야말로 역적 중의 역적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중에서 가리워져 있는 2가지 큰 업적이 있습니다.
교육입국과 과학입국의 업적입니다. 건국 초기에 우리나라 사정은 문맹률이 90%에 가까웠으나 지금은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의 시작이 이승만 박사의 교육입국전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먹을 것도 없는 시대에 건국하자마자 맨 처음 실시한 것이 의무 교육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의 기초에는 이승만 통치 시대부터 시작한 교육입국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잘 알려지지 않는 업적 중의 다른 하나는 과학진흥에 대한 열정입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 기술은 세계 1위를 자랑합니다. 그 기초를 이승만 대통령이 닦았습니다. 6.25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직후인 1956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하고 해마다 십여 명의 유학생을 미국으로 보내어 한국 원자력 기술이 오늘의 수준에 이르는 기초를 닦게 하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이승만을 한국국민이 건국대통령으로 모셨다는 것은 행운중의 행운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코레아를 생각하면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