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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о김연아선수о³°″´·. 스크랩 1부 김연아!!! 고난과 역경,투쟁으로 점철된 21년간의 기록들
마음지기 추천 0 조회 968 11.08.11 16: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한민국 피겨의 역사

<피겨의 힘찬 태동이 꿈틀되기 시작하다> 

  세계피겨의 역사가 시작된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600년대 부터 이미

스케이팅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세계 최초의 피겨 스케이팅 클럽이 설립된 것은

1742년 영국에서 였습니다.  초기의 피겨 스케이팅은 얼음 위에 일정한 형태의 도형을

그리는 것이었으며, 현재 우리가 흔히 피겨 스케이팅 하면 떠올리는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음악에 맞춰하는 연기와는 크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통을 바꿔놓은

인물이 바로 잭슨 하인즈였습니다. 그는 발레 무용수 출신으로 현재 우리가 즐기는

피겨 스케이팅의 주요한 기본을 만들어 '현대 프리스타일 피겨스케이팅의 아버지'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뒤를 이어 스웨덴의  액셀 파울젠이 1882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린 세계스케이팅

모임에서 1회전 반의 점프(일명 악셀점프)를 성공시키며 보다 다양한 기술들을

피겨스케이팅에 도입시키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또 한명의 스웨덴인, 울리히 썰코우

1901년부터 1911년까지 모두 10번의 세계선수권 타이틀을 보유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으며, 그 또한 '살코점프'를 창시하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 'Lutz jump(러츠점프)도

창시자인 선수의 이름을 따서 이름 붙여졌으며 이는 여성의 스포츠 참여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 전반적으로 늦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구식의 스케이트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영국의 왕립 지리학회 최초 여성 회원

이었으며, 1894년~1897년 사이 한국에 머물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그의 저서

"조선과 이웃 나라들"에서 경복궁 향원정에서 열린 스케이트 파티에 초대를 받아 갔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 이렇게 도입된 스케이트는 1910년 들어서면서 일반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고 1924년 1월 일본에서 유학 후 귀국한 이일의 주도로 <피규어 스케잇

구락부(F.S.C)가 탄생하게 됩니다. -   1890년대 중반 '빙족회'라는 이름으로 경복궁

향원정 못 위에서 '얼음 위를 나는 기술'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던 고종과 명성황후를 위해

외국인들이 시연을 한게 최초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대한민국 피겨스케이팅이 한국에 들어온 때는 1927년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동계스포츠  빙상종목이 도입된지는 110년 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이중 피겨

종목은 - 올림픽 피겨종목 출전 선수들은 남자선수:이광용,추재형,정성일, 이규현,

여자선수:이현주,김혜경,장명수,윤효진,신혜숙,김혜성, 변성준,이은혜,이윤정,

박빛나 - 1968년 제10회 그레노블(프랑스) 동계올림픽에 한국이 처음으로 피겨스케이팅

선수 3명의  출전을 시작으로  1972년 제 11회 삿포르(일본)대회에서 장명수 선수가 정규

18위,자유 19위,종합 19위에 오르며 한국은 본격적인 피겨 정상 도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1976년 인스부르크(독일)대회에서 윤효진이 총점 159.64점으로 17위를 마크해 

연아양의 벤쿠버올림픽 직전까지 최고 성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1988년 캘거리(캐나다)

대회부터는 쇼트프로그램에서 컷 통과 제도가 생긴 뒤 한국은 벤쿠버올림픽 이전 대회까지 단 한 명도 프리 스케이팅에 진출하지 못하는 부진을 계속하게 됩니다. 과거 한국 피겨의

열악한 사정과 현실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대목이 있어 언급할까 합니다.

  

홍용명 여사님

대한민국 최초 남자 스케이터 이해정옹님(연아양의 우측)

 

  65년전 조선의 김연아라 불리우는 홍용명(78)여사님, 한국 최초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며

피겨역사의 산증인 이기도 합니다. 6.25 동란이 끝난 53년도에 얼어붙은 한강에서 남자 선수 이해정(옹)과 페어 연기를 맞춰보다 '풍기문란'으로 조사를 받기도 한 사실을 아십니까?

  이렇게 대한민국은 초기에는 열악하였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피겨의 풀뿌리에서 부터 싹을 틔우기 위해 110년의 고요한 침묵 지키지만  본격적인 대한민국 피겨의 태동이 꿈틀

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대한민국에도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여싱의

절대지존, 절대여신,절대여왕이 긴 잠에서 깨어납니다. 아주 조용하면서도 힘차게

말입니다

 

피겨의 길... 험난하고도 극한의

가시밭길을 예고하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이웃 일본의 피겨는 1989년 세계선수권에서 이토리 미도리가 동양인

최초로  우승을 하며 피겨에 대한 일본의 시각을 180도 바꾸게 되는 전환점이 됩니다.

피겨는 그동안 문화선진국,경제강대국,그리고 나아가 군사강대국들만이 가졌던, 오로지  

유럽 열강의 국가들만이 가질 수 있었고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인식이 팽배한  스포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경제대국의 일본으로서는 그간 아시아에서만 누렸던 경제강국으로서의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문화적 측면에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던 일본으로서는

이토 미도리의 세계선수권 우승은 문화선진국의 목마름 해소에 단비와 같았고 일본이

추구하고 바라는 열망에 불씨를 당기는 밑거름이자 원천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토미도리(아사다마오선수의 왼쪽)

 

  그리하여 일본은 장기적인 피겨 마스타 플랜을 세우게 되는데 년간 10조원을 투자

육성하는 프로젝트"얼음폭풍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피겨의 중흥에 정부가

발벗고 나서는 계기가 됩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나카노유카리,아라카와시즈카,

안도미키,아사다마오라는 인물입니다. 세계선수권에서 동양인 최초이자 일본최초의

금메달 수상자인 이토미도리선수는 단지 점프만 잘하는 점프머쉰의 이미지만 있었지

외형적으로나, 인물의 미(美)적으로는 그다지 일본정부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거리와는

멀었고 일본국민들의 사랑도 그렇게 많이 받지를 못하는 그저 그런선수로 전락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얼음폭풍 프로젝트 이후 일본이 추구하는 이상향에 그리고 구미에

딱 맞는 선수가 나오게 되는데 그 중심에 있는 선수가 아사다 마오라는 인물입니다.

  점프도 이토미도리처럼 트리플악셀을 구사하고 귀여운 외모에 항상 밝은 얼굴,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운 몸매까지도, 그야말로 일본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그렇게 찾던 

인물이 아사다마오선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에 저버리지 않고 각종 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며 일본의 기대에도 절대 부응하는, 일본이 문화강대국으로서 진입하고자

하는 입맛에 딱 맞는 그런 선수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낌없는 지원광고계약

통한 후원, 그리고 매스컴을 통한 아사다마오선수 알리기와 같은 이미지 만들기에 온 힘을

다 하는 인물이 됩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아사다 마오 선수가 있었다면 조용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에는

대한민국 피겨 110년 역사의  오랜 침묵을 깨고 조용한 잠에서 깨어나 향후 피겨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절대강사로서 그리고 절대 피겨의 여왕의 지존으로서 감히 일본은 상상도 못한 일이 한국에서 일어나게 됨을 일본도 몰랐고 대한민국도 몰랐으며 세계 피겨인들도

대한한국에서  피겨역사 이래 가장 위대한 선수가 나오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을 못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소녀는 바로 1990년 09월 05일 경기도 부천시에서 어머니 박미희(씨),아버지

김현수(씨) 의 둘째 딸로 태어난 김연아(金姸兒) 란 이름으로서 말 그대로 금빛처럼

아름다운 소녀라는 뜻 그대로......  대한민국에 기적과도 같은 가히 피겨의 혁명가

만한 인물이 태어납니다.

연아양과 어머니(박미희 여사)

  이 소녀는 7살 때 부모님을 따라 집 근처에 있던 과천빙상장에 놀러를 갔다가 취미를

가진 스포츠로 여기지만 연아양의 자질과 향후 큰 선수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진 

코치의 추천으로 선수의 길을 걷게 됩니다. 피겨선수로서 길을 걷게 되는 연아양의 그

이면에는 피겨는 지극히 개인의 운동이라 비용이 많이 듦으로 이에 운동을 하려면 집안에서 많은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데 이것이 가능한가라는 걸림돌이 있었지만 연아양의 엄마는

하루를 심사숙고 하고 재차 코치에게 반문을 하며 정말 소질이 있는가, 혹시나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그리고 습관적으로 해주는 립서비스 차원의 말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고 이것이 아닌 코치의 솔직한 속내를 확인하고는 피겨맘으로서 그리고 열성엄마,

극성엄마로서 연아양과 같이 피겨의 길을 걷게 되지만 이것이 가시밭길이요,고난의

길이요,고통의 길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채 길고도 험난한 피겨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연아양이 걷게 되는 피겨의 길이 곧 대한민국 최초의 피겨 길임을 모른채 오로지 딸을

위해 그리고 딸의 꿈을 위해 가족의 운명과 맞바꿀 정도의 위기를 가진채 말입니다.

  그리고 연아양은 코치가 예언한데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게 됩니다. 초등학교때 이미

트리플 5종을 마스터 했으며 중학교 1학년때 이미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고, 이러한 실력으로 국내무대를 석권하게 되며 심지어 쥬니어의 자격이지만 시니어대회에 참가를 해서도

우승을 하게 되는, 이미 국내에서는 적수가 없는 연아양의 천재적인 피겨 자질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로 비상하는 연아양을 보게 되는데  2002년

슬로베니아 트리글라브 트로피대회 노비스(13세 이하) 부문에서 우승을 하고, 2003년

11월에 열린 크로아티아 골든베어 대회 노비스 부문에서도 우승을 하면서 장차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2004년 국제무대에 주니어로 데뷔하게 되는데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대회인 ISU주니어

그랑프리에서 각각 2위,1위를 차지하였고 결승인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여

2위를 기록하게 됩니다. 이는 대한민국 피겨 사상 최고의 성적이었으며,이듬해인

2005년 3월에 열린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3회전 토룹+3회전 토룹

연속점프를 성공시키며 2위를 기록하게 됩니다.

  2005년에 열린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3회전 5종류(러츠,플립,토룹,룹,살코)의

점프를 모두 성공시켜 금메달을 차지하며 이듬해인 2006년 1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토리노

동계올림픽에는 나이 제한;에 걸려 출전하지 못하게 되지만  3월에 열린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아사다마오선수를 누르고 큰 점수 차이로 1위를 차지하였으며 이로써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됩니다만, 이 때 집안 사정으로

여분의 부츠가 없어서 투명테이프로 부츠를 감싼채 경기에 임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며

선수생활을 지속할 지 고민에 빠지게 되며 실제적으로 은퇴를 하려고 마음을 먹는 계기가

되지만 빙상연맹의 설득으로 선수생활을 계속하게 됩니다. 

 

  한 때 아사다마오선수가 실수를 해야 만이 연아선수는 우승할 수 있다는 설이 연아양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말이 되었지만 완벽한 점프와 예술적 연기로서 이를 극복하고

라이벌은 아사다마오선수가 아닌 연아양 자신이 라이벌이라는 인식이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본정부나 일본연맹에서는 연아양을 주목하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연아양 흠집내기와 이미지 실추에 온갖 음해를 가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국내에서는 트리플악셀을 구사해야 만이 아사다마오선수를 이길 수 있다는 여론

조성이 되고 끊임없이 연아양에게 트리플악셀을 연습할 것을 부추기고 종용하게 되며,

연아양의 기록과 업적에 흠집을 내는데 다른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 국내 방송과 국내

기자들이 앞장을 서서 연아양 흠집내기와 깍아내리기에 너도 나도 혈안이 되는 시기

이기도 합니다.

  한때 연아양도 트리플악셀을 연습을 하였다는 발언을 하게 되는데 다른 기술들이

무너질까 싶어 그만두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다르게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피겨의 훈련은 따뜻한데서 해야만이 정상적인 훈련이 되는데 우리나라 피겨

환경이 절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추운 링크장에서 점프연습을 한다는 것은 아직

몸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시도를 하게되면 부상의 위험이 그 만큼 더욱 더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연아양이 제일 마음에 들어 한 링크장이 롯데월드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왜 좋냐는 물음에 단지 따뜻하다는 것, 그리고 그 곳에서 새로운 점프기술을 익히기도

했었다는 말로 보아 피겨 연습장내의 온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수가 있는 대목이

아닐까 합니다 .

 

  이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열악한 피겨환경에서 그것도 입김이 나올 정도의 차가운

온도에서의 점프훈련으로 인해 허리부상을 달고 다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발에

맞지 않는 부츠로 인해 발의 부자연스러움이 발목이나 발의 뼈에 이상이 생겨 점프

자체를 시도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일반 시민들도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은 발도 아프고 잘 걷지도 못하는 상황을 경험해 보았다면 피겨선수는 점프를 해야되는

상황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으로 허리에 무리가 가고 그것이 결국에는 고질적인 허리부상을

2008년까지 가게되는 이유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연아양의 점프 비거리나 높이를 본다면

결코 연아양으로서는 트리플악셀도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선수로 도약하게 된 연아선수이지만 아직까지도 후원사나 광고계약

들어오지 않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 당시 연아양의 메니저먼트사는

IMG라는 일본자본계 회사로서 아사다마오선수도 이 회사 소속입니다. 아마 이러한

연아양의 피겨소질에 위협을 느낀 일본으로서는 자국 선수를 위해 연아양을 결코 곱게

키우지는 않으리라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비용 때문에

한때 피겨의 길을 그만두고 싶다는 연아양의 말로 비추어 볼때 이 이 회사의 속셈을 알 수 있는 부분이고 이런 노림수가 숨어있다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뒤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연아양의 피겨 자질을 일찍 눈치챈 많은 기업들이 후원

광고계약하겠다는 요청이 있었지만  후원계약이나 광고출연 그 어떠한 것도 성사가

되지를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는 선수였지만 피겨에 필요한 최소의 경비가 없어 한 때 피겨를 그만두겠다는 안타까운 말이 나오게 됨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록산느탱고의 충격적 데뷔,그리고 종달새의 비상

<그 화려한 비상을 시작하다>

  첫 시니어 무대에 등장한 연아양은 시즌중 트로피 에릭 봉파르에서는 대한민국 국적

최초로 시니어 대회 우승 차지하게 됩니다.  아직 완전한 몸 상태가 아닌 연아양이

허리에 파스를 온통 붙인채 2007.03.23일 일본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대회, 쇼트프로그램

에서 영화 물랑루즈의 음악 <록산느의 탱고>에 맞춰 연기를 펼쳐,71.95점이라는

세계신기록점수를 수립하면서 화려하게 시니어 무대에 데뷔를 하게됩니다. 당시 허리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연기를 펼쳐 시니어 데뷔후 나간 첫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역대 최고 신기록을 내 전세계를 놀라게 한 것입니다. 이는 이전 까지 최고 기록 이었던 미국의

샤샤코언이 2003년 세운 71.12점보다 0.83점 높은 기록이었습니다.

  다음날 열린 프리스케이팅에서는 <종달새의 비상>에 맞춰 연기했으나 점프중 2차례

넘어지는 실수로 인해 종합 3위를 차지, 첫 시니어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따며 시즌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어린 종달새의 힘겨운 날갯짓을 통한 비상을 아주 잘 표현하였으며

이것은 마치 연아양이 종달새로 변신한 듯한 느낌이 드는 프로그램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비록 허리부상으로 인해 완벽한 프로그램 수행은 하지 못하였지만 마치 한마리의 어린

종달새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힘겨운 날개짓,그리고 높은 창공을

비상하려는 어린종달새의 높은 꿈, 어린 종달새가 꿈꾸는 이상을 가장 잘표현한 프로그램

이었지만 만약 허리부상만 아니었다면 세계신기록 작성의 기쁨을 넘어 첫 시니어 데뷔

세계선수권자도 될 수 있었던 대회였기에 너무나도 안타까운 프로그램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팬들은 연아양의 모든 작품들이 명품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다시 보기를 많이

망설이게 하는 프로그램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그리고 그 연기가

너무나도 애처로워서.....

  이 시즌의 성과라면 점프요소에서 2점대의 가산점을 받은 세계 최초의 여자선수라는

것과 시즌 동안 참가한 모든 경기의 쇼트와 프리에서 연아양의 전매 특허인 오프닝점프

3F-3T 연속점프를 100% 성공한 유일한 선수라는 것입니다.

  이 시기  악연이었던 일본자본업체 IMG(메니저먼트사)와 결별을 하고 아이비와 새로운

계약을 하게 됩니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IMG와 소송에 휘말리게 됩니다. 연아양에게는

메니저먼트사로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던 회사, 그리고 후원계약과 광고계약이 섭외가 들어왔다는 사실도 숨긴채 메니저먼트사로서의 기본업무조차 이행하지 않는 회사가

적반하장식의 보복을 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연아양에게 있어서는 악의축과도 같은

존재가 연아양이 일방적으로 계약파기를 했다는 이유로 갖은 협박과 가족에 위해

가하겠다는 말도 서슴치 않은채, 그리고 2007 년 중순경 한국에서 열릴뻔한 아이스 쇼도

인부 직원의 실수로 피겨링크장이 불이 나 열리지 못하게 된 것을 두고 연아양을 마치

죄인인양 매스컴과 언론에 노출을 시키며 흠집을 내고도 모자라 소송을 취하하면 없던 일로 하겠다 라는 어이없는 발언과 불손한 입장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스 쇼 취소로 인해 초대자의 한사람일 뿐이였고 출연자의 한사람일 뿐이었던  연아양이 직접 사과회견과 

롯데링크장에서 사과공연까지 하게 되는 결코 있어서는 안될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결국에는 이 일이 IMG와 결별을 하게 되는 이유가 되고 새로운 에이전트 회사인

아이비와 계약을 하게 되지만...., 비록 재판에서는 승소를 하게 되나 연아양의 명성에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크다란 흠집을 남기게 되는, 연아양으로서는 처음으로 겪게 되는 이

시기까지의 최악의 시련을  연아양의 여린 가슴에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건일 것입니다.

 

  영웅의 자리는 화려한 자리가 아닌 외로운 자리이고 혁명가는 투쟁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그 누가 그랬던가요?     

 

박쥐,미스사이공

<세상의 불공평에 온 몸으로 맞서다>

  2007년 5월부터 안정되고 체계적인 훈련을 하기 위해 연습 거점을 캐나다 토론토로

옮기게 되며 여기서 코치인 브라이언 오서와 함께 훈련하게 됩니다.특히 11월 24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컵 오브 러시아에서는 아사다마오가 가지고 있던 프리 종전 세계기록인 133.13점을 넘어서는 133.70으로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2008년 2월 대한민국 고양시에서 열린 4대륙 선수권대회에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어렸을

때 부터 척박한 환경에서 무리한 연습으로 쌓인 피로 때문에 생긴 고관절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후에도 부상의 여파가 지속이 되어 2008년 03월17일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 겨우 참가를 하게 되나 너무나도 부상의 크기가 커 도저히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진통제 주사를 맞고 얼굴이 퉁퉁 부은채 경기에 나서

투혼을 보이지만 완벽한 연기를 펼치지 못하고 세계선수권에 징크스라도 있는 듯 

2007년에 이어 또 동메달에 머물고 맙니다.

  그러나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이 대회는 피겨의 추악함으로 얼룩진 대회가 아닐까

합니다. 피겨팬들은 미국에서 열린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스캔달(일명 소금사건)

이후 최악의 오심으로 기록될 대회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  <소금사건: 피겨종목  페어

경기에서 제이미 세일&데이비드 펠레티어(캐나다)조가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펼치고도

착지에서 실수를 범한 엘레나 베레즈나야&안톤 시카룰리제(러시아)조에게 금메달을

빼앗긴 뒤 동구권 심판들의 담합의혹이 제기되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ISU의 요청에

따라 이례적으로 공동 금메달을 결정하게 되며 이로 인해 IOC로 부터 경고를 받고 개선이

되지 않을시 동계올림픽 종목에서 퇴출시키겠다는 압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구채점제

에서 신채점제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 그것은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아사다마오선수가 점프를 시도하다 넘어지게 되고 그 후 10초 이상을

연기를 하지 않게 되며 이것은 피겨룰에 의하면 감점을 받는 요소이지만 감점은 커녕

가산점까지 챙기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팬들은 이 장면보다는 연아양이 프리 연기를 마친 뒤 키스앤크라이존에서

점수발표를 기다리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우리 팬들로서는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연아양의 표정이 아닐까하기 때문입니다. 예상보다 적게 나온 점수에 싸늘히 변해버린 얼굴, 그러나 웃음으로 마무리를 하던 연아양의 모습에서 피겨 변방국으로서 가져야 했던

설움과,고뇌가 교차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마지막 연아양의 얼굴에 비친 모습은 피겨 변방국으로서,그리고 피겨 약소국으로서 연아양이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많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며 그것은 설움의 표출이며,

분노에 대한 표현의 방법이었으며,인간 본연의 약한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연아양은 종교(천주교:세례명:스텔라)에 의지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며

영원히 가슴에 마음의 상처로 남는 대회가 됩니다. 많은 피겨팬들은 시상식 장면을 다른

이미지 사진으로 대처하여 연아양이 챔피언이다라는 무언의 항의를 한 대회이기도 하며

연아양으로서는 불공평에 대한 설움과.분노,그리고 울분을 온 몸으로 맞선, 너무나도

가슴시린 기억으로 남아있는 대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아양의 존재가 더욱 더 또렷이 세계피겨인들에게 각인되는 순간

이기도 했습니다.   3F+3T 연속점프의 경우  세계 최초로 3개 대회 연속으로

+2.00의 가산점을 받았으며, 이는 남녀선수를 통틀어 김연아선수만이 받은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즌에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상위권 랭킹의 선수 중 유일하게 잘못된 엣지

판정을 받지 않았으며 점프의 회전수 부족(다운그레이드)판정을 받지 않는 등 완성도와

정확성 면에서 가장 뛰어난 점프 기술을 보여준 시즌이기도 합니다.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김연아선수만이 스핀,스파이럴에서 모두 최고난도인 레벨 4를 받은 선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공평한 편파 판정에도 불구하고도 연아양의 피겨는 잠시도 쉬지를 않고

발전하며 이미 피겨의 중심에 선 연아양이지만 드디어 세계피겨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이는 세계 피겨 역사에 새로운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절대여왕의 자리를 마침내

차지하게 됩니다. 세계 피겨는 전율을 느끼고 연아양의 외로운 독주가 시작됩니다.......

 

2부에서 계속.....

 

목련

<꽃말:고귀함>

 

눈물짓지 말아요

하늘 향해 고고히 올려보던 눈빛도

지고 보니 별 것 아니었다고

 

눈부신 목련 잎새가

혼 나간 여인의 치마처럼

얼룩져 내릴 때

 

아름답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한 거짓이었는지

 

꽃 진 자리에 서서 바라보면

사랑도 눈물도 같은 말인 걸

 

2003년 '꽃의 결별' 시집에 담긴 <꽃 진 자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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