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九章 사(死)의 유산(遺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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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원탁(圓卓)에 각기 다른 기도를 가진 초로의 노인들
이 모여 앉았다.
유삼(儒衫)을 입은 노인은 청수하다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고, 눈빛이 맑았다. 키도 큼직했고,
신체의 각 부분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해남도 서남부를 장악하고 있는 유가주 유질(劉窒)이다.
별호는 적검유사(赤劍儒士). 향년 오십 팔 세.
사십 년 전, 열여덟이란 어린 나이에 십일 대 해남오지가
되었고, 이십 년 전 십이 대 해남오지에게 직위를 물려주면서
정식으로 유가주가 되었다.
환(幻), 섬(閃), 강(剛), 공(空) 네 단계로 나눠지는 비천
검법(飛天劍法) 칠십이 초식을 극성으로 익혔다.
검공(劍功) 자체만으로는 해남 제일이나 검에 정(情)이 담겨
있어 서열 오위로 밀린다는 인물.
그는 탁자에 놓인 차를 들어 천천히 음미하는 중이었다.
유가주의 옆에는 작달막한 키에 머리가 벗겨진 대머리가 앉
아 호위무사에게 무엇인가를 귓속말로 들었다.
그는 대머리라는 점보다 뚱뚱하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키가 작아서 그런지 옆으로 퍼진 모습이 더욱 부각되었다.
마치 돼지 염통에 바람을 넣은 듯, 의자에 앉아 있지만 너무
뚱뚱하고 작아서 앉아 있는지 서있는지 애매한 지경이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매서웠다.
해남도 동북부를 휘어잡은 암암검객(暗巖劍客) 석중(石仲)이
다.
석가에는 두 가지 검법이 있다.
암암검(暗巖劍)과 무음검(無音劍).
석가 무인들은 별호를 모두 자신이 소유한 검법에서 따온다.
석중은 은밀하기로 유명한 암암검을 익힌 무인들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검을 소유했다는 평을 들었고, 암암검을 가지고
남해삼십육검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과거, 해남 장문인 한민(韓敏)에게 수굴일지라는 자리를 놓
고 가장 강력하게 도전했던 사람.
그는 자신의 장자가 시신이 되어 돌아왔는데도 비통한 표정
을 떠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석가 무인들의 특성처럼 여겨지고
있는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석중의 옆에는 구릿빛 피부가 썩 잘 어울리는 사내가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팔뚝과 가슴이 환히 드러나는 단삼(短衫)을 입었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거친 뱃사람. 그렇다. 그는 꼭 거친 뱃사람
과 똑같은 인상을 풍겨냈다.
바로 해남도 모든 선박을 소유하고 있는 범가주 범장(凡帳)
이다.
그는 일가의 가주라는 고귀한 신분에 있으면서도 미천한 사
람들이나 하는 뱃일을 직접 하곤 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배를 수선하는 일, 배를 모는 일, 배를 건조하는 일……
만약 그가 가업에 전념하지 않고 무공에만 몰두했다면 십일
대 수굴일지는 향방을 가를 수 없었으리라.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범위가 무공에 전념할 수 있도
록 가업에서 완전히 배제시켰다.
범장의 별호는 광풍사랑(狂風死郞).
나이는 사십 대로 보이지만 환갑을 훌쩍 넘어선 예순 두 살
이었다.
범가의 무공은 바다에서 생활하는 가문답게 모두 바다에서
파생되었다.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창안한 해랑검법, 사어( 魚:상어)의
공격방식에서 계시를 받은 사검법( 劍法), 망망대해의 기운을
받으며 수련하는 대검법(大劍法), 삼백 년 전 당시 가주였던
범문(凡文)이 창안하여 홀로 해적을 소탕함으로써 검법의 우위
를 입증한 해광검법(海光劍法), 좁은 선상에서 다수의 적을 상
대로 싸워야 한다는 필요에 따라 창안된 단각검법(斷角劍法).
하나같이 일절(一節)이었다.
그 중에 범장 자신은 단각검법과 해광검법에 조예가 깊었지
만 좀더 강하고 광명 정대한 검법을 익혀야 수굴일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범위에게는 해랑검법과 대검법을 전수했다.
범장은 우람한 팔뚝을 교차하여 팔짱을 낀 채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범장 옆에는 깡마른 노인이 범장과 마찬가지로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높고 날카로운 코, 얄팍한 입술.
얼굴에 살점이 붙지 않는 체형인지 흡사 머리뼈에 가죽 한
장을 덮씌운 듯한 인상이었다.
키도 좌중에 모인 인물들 중에는 가장 큰 듯 했다.
단지 앉은키만으로도 뒤에 서있는 호위무인과 엇비슷해 보였
으니.
해남도 동남부 만주(萬州)를 기점으로 오지산 초입(初入)인
경중( 中)까지 가는데 전가(田家)의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대부호이자 해남파를 이끄는 주축 중 일인인 전가주 전
팽(田澎)이다.
좌우로 백 팔십여 리, 동서로 다시 백 팔십여 리.
해남도 동남부 주민들은 전가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전가의 무공은 폭이 넓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폭(步幅)도 넓고, 검을 휘두르는 반경도 넓다. 그런 만큼
위맹함에서는 단연 앞서지만 세기(細技)에서는 확실히 뒤진다.
전가에서는 치명적이랄 수 있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검신(劍
身)을 반 치 가량 늘리고 검폭을 좁혔다.
중원에 널리 알려진, '검이 길고 검폭이 유난히 좁다''검을
기울여서 검법을 전개하는데 상리(常理)에 어긋난다' 등등의
말은 바로 전가의 검법을 견식했기에 나온 말이다.
일참검법(一斬劍法), 일혼검법(一魂劍法), 일망검법(一望劍
法)은 대대로 이어져 왔으나, 팔십 년 전 구 대 해남오지였던
전화(田華)가 세 검법을 융합하여 쇄각대팔검(鎖角大八劍)을
창안해 냈다. 만약 쇄각대팔검이 없었다면 전가는 강성오가에
합류하지 못했으리라.
전팽 역시 십일 대 해남오지였으며, 바둑을 워낙 좋아하여
기검노야(棋劍老耶)라는 작호를 따로 얻었다.
오지산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나머지 땅을 넷으로 갈랐을
때 동남, 서남, 동북 그리고 해상을 관할하는 주인들이 모인
것이다.
가운데 자리는 비어있었다.
해남파 장문인이자 강성오가 한가의 가주인 뇌공검(雷空劍)
한민(韓敏)의 자리다.
제 십일 대 해남오지 중 수굴일지.
적노검법(寂鷺劍法), 일지검법(一枝劍法), 환우검법(環雨劍
法), 건곤검법(乾坤劍法), 대념검법(大念劍法)을 최극성까지
익힌 고수.
아마도 그만의 검법을 따로 창안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며 남해삼십육검 중 최강자로 거론된 사람.
한민은 남의 일에 끼여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해남도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란 점은
이미 인정한 터였고, 그가 얼마만큼 강해질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좌중은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모두들 자신의 생각에만 몰두할 뿐 다른 사람과 말을 주고받
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는 호위무사들에게까지 전
해져 숨소리조차 크게 쉴 수 없는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뚜벅! 뚜벅……!
회랑(回廊)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뇌공검 한민의 발걸음 소리는 유난히 투박하고 크다. 가죽신
밑에 어린아이가 힘겹게 들어올릴 무게의 철판을 붙인 까닭이
다.
좌중에 앉은 사람 중 눈을 감은 사람은 눈을 떴고, 유가주는
마시던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하하하! 오래 기다렸지요. 마무리짓고 올 일이 있어서……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대청으로 들어선 사람에게서는 만인
을 압도하는 위엄이 물씬 풍겨 나왔다.
해남파 장문인은 중원 대문파의 장문인과 조금 다른 점이 있
다.
왕(王).
해남파 장문인은 해남도를 지배하는 왕인 것이다.
물론 나라가 있고, 경주지부( 州知府)가 존재하여 치민(治
民)하고 있으나 해남도에서 가장 높은 관리라 할 수 있는 경주
자사( 州刺史)도 해남파 장문인의 뜻을 거슬리지 못하는 형편
이었다.
경주자사의 봉록(俸祿)이라고 해봐야 겨우 쌀 이백 팔십 팔
석에 불과할 뿐인지라 웬만큼 대가 곧은 사람이 아니고는 해남
파에서 제공하는 금품(金品)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
다.
또한 해남파는 수군(水軍)과 싸울 수 있을 만큼의 병선(兵
船)을 보유했으며, 관군(官軍)을 일거에 몰아낼 만한 무력(武
力)도 지니고 있다. 거기에 해남도 전역을 통제할 수 있는 경
제(經濟)를 움켜쥐고 있지 않은가.
해남도에서만큼은 관의 영향력이 극히 미미했고, 조정(朝廷)
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경
주지부에 부임하는 관리들은 해남파의 도움을 받아 중앙관료
(中央官僚)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부심했다.
그것이 해남 관료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진시황의 이주정책에 따라 해남도에 한인이 들어오고, 해남
파라는 방파(幇派)가 탄생하면서부터 이어져온 밀약(密約)이었
다.
나라가 바뀌고, 해남도를 관리하는 관리들의 명칭이 바꿔도
해남도는 변한 게 없었다.
뇌공검 한민이 해남파 장문인을 맡은 게 올해로 꼭 사십 년.
그만큼의 세월동안 해남도를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몸에 벤 위엄은 예사로울 수 없었다.
한민의 뒤에는 중년쯤으로 보이는 무인 다섯 명이 따랐다.
십이 대 해남오지다.
오는 중양절에 십삼대 해남오지에게 직위를 물려주고 각 가
문으로 돌아갈 사람들이지만 아직까지는 정식 해남오지였고,
가문보다 해남파를 위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일반적인 직무는 십삼대 해남오지에게 물려주었다.
십이대와 마찬가지로 십삼대 해남오지도 강성오가에서 배출
되었기에 직무를 물려주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가깝
게는 조카, 멀다고 해봐야 사촌(四寸)에 불과하기에.
물론 아직 십삼대 해남오지가 정식으로 출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 보름에 걸친 비무대회를 통해 선발된 사람들이고,
중양절 이취임식(離就任式)도 별다른 파란(波瀾)없이 진행되어
왔기에 부임 전 직무를 물려주는 것은 통상적인 관례였다.
십이 대 해남오지, 그들은 이십 년 동안 해남파를 위해 크고
작은 일들을 주관해왔지만 지금은 제반 업무에서 손을 떼고 두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십이가주 회합에나 참석하는 실정이었다.
십이대 해남오지 뒤로는 만인의 축복을 받고 있는 십삼대 해
남오지 다섯 명이 들어섰다.
한광, 범위, 석불, 전혈, 그리고 유소청.
그런데 이상했다. 해남오지로 선정된 사람은 향후 몇 년간은
언제 어디서나 안광(眼光)을 빛내기 마련인데 이번에 선발된
다섯 명은 왠지 복잡한 신색을 지었다. 역대 해남오지들에게서
는 보지 못했던 기이한 현상이다.
해남오지와 가주들 간에 가벼운 눈인사가 오고 갔다.
대청에는 이들 외에 들어선 사람들이 또 있다.
추운단(秋雲團)이라 부르는 장문인의 호법(護法)들.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장문인이 들어서면서
분명히 대청에 들어섰을 테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
리한 눈길을 빛내고 있을 것이다.
어디에 숨어있을까? 지붕 위에? 대들보 위에? 아니면 봉창
(封窓) 뒤에? 몇 명이나 숨어있을까? 한 명? 두 명? 열 명?
우화가 극성을 부리면서 장문인을 살해하고자 하는 기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한민의 지척까지 이르지 못했다.
아니 십 장 안에 들어서지도 못했다.
살수가 암습으로 평생을 산다면, 추운단은 숨어있는 쥐새끼
들을 찾아내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둔 사람들이다.
추운단이 몇 명으로 구성되었는지, 무공이 어느 정도인
지…… 추운단에 관한 정보는 오직 장문인만이 알고 있다.
해남오지의 직무를 수행하는 중에 추운단의 통령(統領)도 사
년 간이나 맡아보지만 추운단 통령이 접촉할 수 있는 추운 단
원은 단 네 명뿐이다. 추운사광(秋雲四光)이라 부르는 부단장
(副團長)들.
뇌공검 한민이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십이 대 해남오지와 십삼대 해남오지는 원탁을 호위하듯이
둥글게 둘러섰고, 그 뒤로 각 가주들이 가문에서 데려온 호위
무인들이 뒤를 막았다.
정례적인 십이가주의 회합이 아닌 강성오가의 비밀회합은 늘
이런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짐작들 하시고 계실 거예
요."
한민은 고집이 쌔어 보였다. 각진 얼굴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눈, 양쪽 입가가 움푹 파이도록 꽉 다문 입술이
그랬다. 음성도 나직하면서 힘이 넘쳤다. 조금은 작아 보이는
듯한 키와 육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청년도
따를 수 없는 단단한 몸이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영식(令息)의 변고는 안 됐어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
요. 조의(弔意)를 표합니다."
한민은 정중하게 말했다. 고개까지 숙여 보였다.
"무인의 생사(生死)는 하늘에 달린 것. 갈 때가 되었으니 간
것이지요. 본문에 번거로움을 끼쳤습니다."
석중도 마주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자식을 잃은 슬픔 같은 것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무인의 죽음은 가문의 치욕이다.
자식이 죽었다는 사실보다도 타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중
요하다. 그렇기에 모두들 조의를 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다.
석가에서 정식으로 부고(訃告)를 보내오기 전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무인의 도리였다.
석두의 시신이 해남파로 보내졌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외관영 영주다운 장례를 치르게 될 것이고, 해남파 문
도를 살상한 징계조치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럼 본론을 이야기합시다. 송사리 한 마리가 흙탕물을 휘
젓고 있어요.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자 회의를
소집했어요. 의견이 있으신 분은 기탄 없이 말씀해 보세요."
가주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현 상황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
야 최선인가.
"아무도 말씀이 없으시니…… 그럼 내 의견을 말해 볼까요?
왕년에 약삼가에 불과했던 비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중오가로
뛰어오르는 것을 우리는 모두 보았어요. 만약 무공만 충실했다
면 중오가가 아니라 강육가로 발돋움했을 게고, 지금 이런 자
리에는 여섯 명이 앉아 있을 겝니다."
장문인의 말이 옳았다.
현재 황담색마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해남도 제일이었다.
한가의 벌목작업은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다. 범가도
마찬가지다. 바다를 장악하고 있지만, 해남파의 일원으로 뱃삯
을 마음대로 받을 수가 없다. 또한 승선하는 물품이나 승객들
도 한정되어 있다.
유가는 사정이 더욱 나쁘다.
소금이란 나라의 전매품(專賣品)이다. 해남도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관부에 납품(納品)해야 한다. 관
부는 사들인 소금을 개인에게 되팔고 막대한 이윤을 얻는다.
경주자사가 뇌물에 꼼짝 못하는 처지인지라 광동, 광서 지방
에 조심스럽게 소금을 풀어도 괜찮을 성싶은데. 유가가 공자의
법도를 따르고 있는 한 그것도 가당찮은 이야기다.
유가주는 고지식하게 가업을 꾸려나가고 있고, 가주가 생각
을 바꾸지 않는 한 유가는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있다.
전가의 농장도 상당히 곤란하다.
농장이란 원래가 손이 많이 가는 노동인데, 우화가 부쩍 기
승을 부림으로써 여족인들이 술렁거리고 있다. 그런 현상은 곧
바로 수확저조란 결과로 나타났다. 본보기로 몇 놈을 잡아 따
끔하게 혼찌검을 내주면 군소리 한 마디 하지 않고 머리를 조
아리던 놈들이.
여족인들이 일을 열심히 한다해도 사정이 나쁘기는 매한가지
다.
해남도 동남부 지역에 농장을 만들만한 땅은 모조리 파헤쳤
기 때문에 더 이상 농장을 넓힐 수 없다. 다른 가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은.
석가도 가세를 팽창시키지 못한다.
바다가 드넓다지는 진주를 캐는 곳은 한정되어있다. 좋은 진
주를 캐내는 것도 기대할 수 없다. 현재, 경해에서 생산되는
진주는 중원 전역을 통틀어 최고가(最高價)에 팔리고 있으니
까.
그러나 현재만으로도 강성오가는 충분하다.
사실 현재 가지고 있는 가업만으로도 부(富)는 넘쳐나고, 할
일이 태산처럼 밀려있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포기가 쉽지 않다.
강오가 중 한 가문이라도 황담색마의 종부에 성공하면 일약
초거대가문으로 올라설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문은 역시 가주가 장문인으로 있는 한가였다.
한가에서 황담색마를 얻는다는 문제는 자식이 죽은 것에 비
할 바가 아니다.
"뇌주에서 황담색마 일곱 마리가 들어왔어요. 우리가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말…… 어때요? 일곱 마리라면 재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요? 과거 비가는 황담색마 두 마리로 시작했어
요."
비가는 몰락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이라면 가능하다. 적엽명은 어려서부터 상재(商材)
로 소문난 놈이고, 황함사귀도 말에 대해서는 귀신이다.
"생각을 해 봤어요. 비가주가 운명하면서 남기고 간 황담색
마는 모두 일곱 마리였어요. 그런데 일 년이 지난 지금 몇 마
리나 있느냐."
씨도 불명확한 육삭둥이 비건이 나서니 고민이다.
적엽명 비건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으니 표면으로 비해
를 내세우겠지만 예봉(銳鋒)을 피하고자 하는 뻔한 수작.
씨가 불분명하여 무신년(戊申年) 사건을 일으켜 일곱 명을
죽이고 여섯 명을 불구로 만든 놈인데. 그런 놈이 해남도를 제
집처럼 활보하고 다니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유가, 석가, 전가, 범가에서 각기 한 명, 한가에서 두 명.
죽은 자들의 원혼이 아직도 구천에서 떠돌고 있지 않은가.
비록 팔 년이라는 기한이 지나 공식적으로 징계할 입장이 되
지는 않지만, 비공식적인 비무를 통한 살해는 얼마든지 가능하
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부터 적엽명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혈족(血族)들이 검을 곧추세우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해남도에 들어오자마자 외관영 영주이자 석가의 장
자인 석두를 베어버리다니. 아무리 정당한 비무였다 할지라도
용서할 수 있는가? 놈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처럼 제 죽을 줄 모르고 날뛰는 풋내기……
"일곱 마리예요. 단 한 마리도 늘지 않았어요."
뇌공검 한민은 일곱 마리라는 부분에 특히 힘을 주어 강조했
다.
"수컷이 세 마리. 암컷이 네 마리. 그런데 한 마리도 늘지
않았다니. 똑같은 말이고 똑같은 목부가 관리했는데 결과는 달
라요. 뭔가 잘못 됐어요."
여족이 모인 것도 문제다.
만약 재건에 성공이라도 하는 날에는 해남도 전체가 들썩일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동족에게 내침을 당한 사귀는 하루아침에 영웅으로 부상할
것이고, 그에 자극 받은 여족인은 똘똘 뭉치리라. 그리고 그들
만의 경제권을 형성한다면? 그것까지는 괜찮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역부족임을 알고 다시 기어들어 왔으니까. 하지
만 우화와 합류한다면? 여족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불상
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우화 때문에 골치가 아
픈 판에
"왜 새끼를 낳지 못하고 유산만 하는지……"
장문인은 본론을 꺼내지 않고 겉돌기만 했다.
제거하려면 지금 해야 한다.
마음만 먹으면 적엽명과 사귀 정도는 팔을 비틀 것도 없이
누구에게 죽는지도 모른 채 시체로 나뒹굴게다. 석두마저 당한
마당이니 그를 죽이고자 하는 검광은 들불처럼 피어나리라. 비
무? 비무를 원한다면 비무로 상대해주지.
그러나 그렇게 되면 황담색마의 명맥은 끊길 것이다.
"황담색마의 종부비법을 강성오가가 고루 습득할 수 있는 측
면에서 말해보겠어요."
장문인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이번 달부터 다다응달까지 종부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간이
에요. 비가는 이 기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겝니다. 당
연히 종부를 하려 할 테고. 이렇게 합시다. 종부를 할 때 말을
잘 아는 목부로 하여금 지켜보게끔."
거기까지도 생각했다.
비가가 무너지자마자 강성오가는 비가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목부들을 데려오려고 혈안이 되었다. 누가 뛰어난 목부인가 하
는 점은 논외로 하고 어느 가문에서 얼마나 많은 목부를 데려
가느냐에 주안점을 두었다.
결과는 모두 쓰디쓴 고소(苦笑)를 베어 물었다.
황담색마가 아무리 뛰어난 명마라 할지라도 일개 말에 불과
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부들은 종부를 시키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종부는 시켰으되, 망아지는 얻지 못했
다.
주인의 의도를 스스로 살필 줄 아는 황담색 마지만 임신을 했
다하면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만큼 신경이 예민해졌다. 먹
는 것도 종잡을 수 없었다. 어떤 놈은 극심하게 식탐(食貪)했
고, 어떤 놈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힘없이 눈만 뒤룩거렸
다.
그제야 알았다. 황담색 마만은 비가주가 직접 관리했다는 사
실을. 믿을 수 있는가!
일가의 가주라는 신분으로 마구간에서 말똥을 치우고, 건초를
날랐다니.
적엽명이 돌아오고, 비가를 재건한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바로 장문인이 말한 내용이었다.
비가에 사람을 파견해서 종부를 직접 관찰하면 어떨까?
비가에 목부를 상주시키는 방법은 염려하지 않는다. 장문인
의 오른팔이나 진배없는 하파는 해남도 제일의 지자이니 벌써
무슨 방법인가 마련했을 게다. 아니, 지금 장문인이 말하는 내
용조차 그의 머리에서 나왔을 지 모른다.
"공공연하게 모든 행동을 감시하게 될 거예요. 종부를 시키
는 모든 여건, 말의 영양 상태에서부터 종부시간, 종부기간 중
에는 무슨 사료를 먹이는지 등등 모든 것을 빠짐없이 파악하게
되겠죠. 가주들께서는 비가에 파견할 목부를 선정하셔서 알려
주세요."
"가만! 지금 비가에 파견할 목부를 선정하라고 했습니까?"
전가주가 급히 물었다.
"그래요. 본문에서는 목부를 파견하지 않습니다. 목부를 파
견하는 곳은 각 가문. 한가에서도 목부를 파견하겠지만 그건
본문의 위치가 아니라 일개 가문으로써 참여할 거예요."
"으음……!"
"독자적으로 행동해도 좋고, 서로 상의를 해도 좋겠죠. 종부
과정을 옆에서 자세히 관찰한다면 필시 파악해 낼 수 있을 거
예요. 종부비법을 어느 가문에서 얻느냐 하는 문제는 하늘에
맡깁시다."
"으음……!"
가주들은 신음을 터트렸다.
지금 장문인은 스스로 우선권을 포기한다고 말하고 있다.
"각기 가장 자신 있는 목부를 비가에 보내도록 하세요. 비가
에 상주하면서 종부비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들로."
마음에 들었다.
남은 일은 말에 대해서라면 무불통지(無不通知)라고 자부하는
목부를 구하는 것이다. 가장 운이 좋은 경우는 자신의 가문
에서만 종부비법을 알게 되는 것이고, 가장 운이 나쁜 경우는
자신의 가문에서만 종부비법을 모르게 되는 경우다.
가주들은 가장 운이 좋은 경우만 생각했다.
"오가 중 어느 한 가문에서 종부비법을 얻은 게 확인되면 미
루었던 일을 마무리 지읍시다."
장문인 한민은 일침(一針)을 박듯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미루었던 일.
적엽명에 대한 징계다.
모르긴 몰라도 석가는 지금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게다. 뜨내
기에게 무음검법이 깨졌다는 불명예를 씻기 위해서. 장문인은
그 모든 일을 다음으로 미루자고 제안한 것이다.
"노부는…… 장문인의 말을 따르겠소."
암암검객 석중이 담담히 말했다.
겉으로는 무심히 말하지만 그의 내심은 무섭게 들끓고 있으
리라. 부모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아무래도 장남보다 막내
가 귀여운 법이다. 하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
가락이 어디 있으랴.
장남 석두가 죽었다.
그런데도 복수를 뒤로 미룬다.
이는 힘든 결정이었다.
석가주가 찬성하는데 다른 가주들이 이의를 제기할 리 없었
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