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다라문인협회 제1회 문학기행을 마치고
雪뫼 徐正浩
만다라문인협회 1주년 모임 자리에서 문학기행을 기획하고 있다는 회장의 의견이 있었을 때 회원들 눈빛은 과연 실천이 되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에 반신반의하였음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빠른 기간에 추진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였다.
5월24일 경남지방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행사 일에 비가 내리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걱정을 하며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화원인터체인지를 지나면서 흐려있을 뿐 비는 내리지 않았으며, 이후 시간은 아주 상쾌한 전형적인 늦은 봄기운을 만끽할 수 있는 기상이었다. 그러나 경남은 종일 비가 내렸다고한다.
안동에 도착하기 전 차안에서 스스로 안동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특별하게 기억되어 있는 지식은 없었으며, 초등학생 정도의 수준이라 생각되었다.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과 그의 학풍을 받은 후학들이 조선시대 벼슬길에 나가 많은 업적과 서책을 남긴 사실, 조선시대 안동 김씨의 정치 참여와 안동 권씨 장씨 양반의 고장 선비의 고장이라는 정도로 기억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각지에서 모인 회원들이 안동 역 휴식공간에서 만면에 웃음 띤 모습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으며, 안동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문인들은 대거 환영인사 차 현장에 나와 주시는 성의를 보여주셨기에 더욱 화기애애한 만남의 시간이 되었다.
2008년 여름호에 등단 한 김명자, 서명숙 시인이 자리를 같이 하여 새 회원을 맞이하는 환영의 마당이었다.
더욱 안동에 거주하시는 협회 문인들이 문학기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사전에 꼼꼼하게 준비를 하여 주셨기에 조금의 기다림이나 지체 없는 일사철리의 진행이 되었다.
회장의 인사말씀을 시작으로 문학기행의 첫 방문지인 임청각 향했다. 사실 공사관계로 임청각에 들리지 못하여 주변의 풍광을 살피고 난 다음 드라마 왕 건 촬영 세트가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하였다. 임청각은 세종 조에 좌의정을 역임한 용헌공(容軒公)의 손자인 참판공(參判公)의 삼자인 임청옹(臨淸翁)께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1549년(중종 14)에 창건한 목조 건물이다. 처음 최대 규모인 99칸으로 건축되었으나 임진란과 일제 때 소실되고 현재 60여 칸이 보존되고 있다. 예전에는 정문 2층 누대에서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에 낚시를 하였다 한다.
왕 건 세트장은 차량으로 드라이브를 하며 살펴보았지만 경북 문경의 드라마세트장과 같이 밀집되어 건축되어 있지 않았으며 건물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데 관광객이 많이 들리지 않아 상행위를 하는 시설이 없어보였다. 짧은 일정에 여러 곳을 방문하기로 계획이 되어 있어 바삐 자리를 이동하여 일행은 안동민속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안동민속박물관 옥내박물관과 야외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옥내박물관은 안동지방 문화의 특징인 유교문화 특히 관혼상제를 중점적으로 전시하고, 아울러 이 지방 특유의 민속놀이를 모형전시하고 있으며, 영상 관람을 위하여 영상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옥외박물관은 보물인 석빙고를 비롯하여 안동댐 건실시 수몰지역에 산재해 있던 전통 고가옥등 중요 생활문화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의례를 중시한 조선시대의 양반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강행군이다. 다음 들린 곳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을 향사(享祀)하는 도산서원이다.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강을 끼고 마사로 되어 있는 길바닥이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안동의 문인들이 마련한 떡으로 배를 불리고 오이로 목을 축이며 걷는 길이 그렇게 편안하고 즐거울 수 없었다.
선생은 1561년(명종 16)에 도산서당을 건립하고 학문연구와 인격을 도야하였는데, 선생이 타계하고 난 다음 문인들의 발의에 의해 서당이 있던 자리에 서원을 건립되었다고 한다. 1574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576년에 완공하였으며 도산서원이란 이름은 선조임금께서 현판을 사액하였으며, 현판의 글씨는 당시 명필로 손꼽히는 석봉의 글씨라고 하였다.
퇴계 이황의 학풍을 이어받은 인물로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송암 권문호, 한강 정구 등 조선의 역사를 좌지우지 하신 인물이 한 두 분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선생의 가르침은 거울처럼 받들어 모셔지고 있으며, 그 뜻을 기려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도산서원 앞강을 건너 너른 들판에 수몰관계로 지대를 높게 쌓아 다시 옮겨 지은 정자가 있는데 이곳이 과거시험을 시행한 곳이라니 흰색의 두루마기를 입은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치르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지방에서 과거를 시행한 곳인데 전국에서 7000여 명의 선비들이 모여 과거를 보았다고 한다.
다음 들린 곳은 민족시인 이육사 문학관과 생가를 찾았다. 자라면서 중․고등학교에서 이육사의 시를 접하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활(李活, 1905-1944)이나 옥고를 치를 때 죄수 수의 번호가 264번이라 이육사로 불려졌다고 하며, 독립투사로 16회의 옥고로 옥에서 순직하신 민족독립 운동가이며 시인이다. 전시되어 있는 연보의 내용이 자신의 영달 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태어나신 분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였다. 생가는 도산면 원천리에 있던 것을 1976년 안동댐 수몰로 안동시내로 옮겨왔다. 생가와 문학관 앞에 펼쳐진 들판을 휘감아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물은 나라 잃은 설음을 이고 산 시인의 애국심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오늘도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강행군의 열기도 식힐 겸 피곤을 풀기 위해 가송협곡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였다. 청량산의 푸른 녹음이 5월의 절정을 달리고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한담을 나누는 시간의 즐거움이 지금도 전해온다. 쉼 없이 오고가는 이야기 한 마디 한 마디가 처음 만난 분도 있고 여러 차례 만난 분도 있지만 깊이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들어 내 보이기에 알알이 들어서 새기고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뿐이었다. 특히 천종기 만다라영남지부장의 삶의 지혜를 더하는 많은 이야기는 삶과 사랑이 넘치는 정담이었다.
박준해 시인님도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분으로 젊지만 만물박사 같다는 생각이며 유영호 시인님의 사진작가적인 안목은 시심에도 영향이 미칠듯하여 부러움이 있었다.
김경숙, 홍경숙 두 경숙 시인님 안동의 홍보대사가 되어 안동 자랑이라기보다는 안동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알려드릴까 하여 고심하셨고 만다라 회장님은 두말 할 나위 없는 안동이 고향이라는 자부심이 대한한 분이었다.
다음은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종택을 방문하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역시 강물이 종택 앞을 흐르고 있어 풍광으로 봐서 어디 한 곳 빠지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농암은 중종 때의 문신이자 작가로 1498년(연산군 4)과거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곧은 성품으로 직언을 하여 안동으로 유배되는 등 정치적으로 기복 있는 생활을 한 분이시다. 강호지조의 대표로 꼽히는 <어부가>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시조를 남겨 국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분이다.
종택을 어디에서 관리를 하는지 모르지만 경제적인 여력이 부족한 연유인지 관리에 소홀함이 보여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 하루해도 저물고 피곤하여 쉴 곳을 찾아 가야하는데 그 곳이 광산김씨 종택을 한 곳에 모아둔 군자마을이다.
안동댐이 추로(鄒魯)의 고장으로 일컫는 예 예안지경에 자라하게 됨으로 하여, 많은 문화의 유산(遺産)이 막심한 겁운 겪게 되는 가운데서, 유서 깊은 사대부 마을들이 송두리째 물 속에 잠기게 됨으로 외내(鳥川) 광산 김씨 문중에서는 오백년 세거의 터전이 물속에 잠기게 되자, 주거는 뿔뿔이 나뉘었지만 와룡면 새 외내 호수 언덕에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여, 그 종가를 비롯한 유서 깊은 옛집들을 고스란히 한 자리에 옮겨, 옛 모습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마을은 산기슭에 다양한 방향으로 제 각기 자태를 뽐내며 세워져 있고 하나 같이 단정한 차림을 한 여인의 모습같이 단아하고 아름답고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경북 경주시를 석조건물의 보고라고 한다면 안동은 목조건물의 보고라 할 수 있단다. 헤아릴 수 없는 목조건물이 있었지만 현존하는 건물만 하여도 170여 동이 보존 관리되고 있다하니 과연 목조건물의 본 고장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봉정사에 있는 극락전은 우리나라 목조 건물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자랑하였다.
군자마을을 관리하는 관장이 상주하고 있으며 종택을 놀리지 않고 외부 손님들이 예약을 하여 찾아오면 맞이하여 숙박을 겸하여 편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샤워시설 양변기 온방장치가 되어 있어 도시 어린이도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잘 되어 있고 밤에는 하늘에 금방 별이 떨어져 내릴 것 같이 총총하게 박혀 빛나고 있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쉼터이다.
석식을 마치고 목조건물이지만 최대한 4-50명 수용이 가능한 공동공간이 있어 그 공간에서 원형으로 빙 둘러앉아 회장의 행사에 대한 취지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안내 그리고 김경숙 시인의 다와 예절에 대한 안내 시간이 있었으며, 그리고 안동의 양반과 선비정신에 대한 안내, 관장의 광산김씨 문중에 대한 대략적인 안내와 문인들 서로 주고받는 대화 속에 군자마을의 밤은 깊어갔다.
안동에 거주하는 문인들은 자택으로 돌아가고 남은 이들은 잠자리 준비를 하였다.
코 골이 때문에 서로 조심하고 잠자리 장소까지 양보하고 서로 조심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적인 조건반사를 어떻게 제어하지 못하니 웃음 꺼리가 되었다. 자고나서는 서로가 자신은 코를 골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이 코를 골았다고 하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기상을 하니 사방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였다.
안동 댐이 다목적을 이루는 기능을 하고 있는지 확인 할 수 없으나 아침 안개를 보면서 자연생태계에 변화를 가져오고 사람의 생활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는 점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다. 매사 다 좋을 수는 없는가 보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온돌을 돌리지 않아 밤새 춥게 잠을 자서 그랬는지 아침에 방을 따뜻하게 만들어 놓고 이불에 발을 묻고 다시 잠을 자려고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자택으로 갔던 안동에 사는 문인들이 이튿날 행사를 위해 일찍 돌아왔다. 그런데 박준해 시인은 밤 1시까지 작업을 하여도 다하지 못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작업을 하여 선물(竹紙婚淸風明月)을 만들어 오셨는데 그 기술이 대단하여 모두 감복하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튿날 기행이 시작되었다. 연미사 제비원으로 향하였다. 연미사는 사찰의 규모면에서는 아주 적은 모습을 보였으나 역사로 봐서 신라(선덕여왕 3) 명덕(明德)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연미사와 관련한 전설 같은 이야기는 듣고도 기억에 남지 않아 안타까움이 있다. 이천동 석불(제비원미륵불) 일명 제비원 석불이라고도 불리는 마애석불이다. 서쪽으로 향한 높은 암벽에 조각된 불신위에 불두를 따로 제작하여 올린 특이한 형태의 마애불로 머리부분이 손상된 것 이외는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연미사를 나와 멀리 떨어져서 보는 이천동 석불을 그 크기가 대단하고 웅장해 보였다.
다음 들린 곳은 봉정사다. 봉정사의 창건 설화를 문화해설가의 안내를 들으며 한바퀴 돌았는데 삼층 석탑 뒤편에 있는 극락전이 우리나라 목조건물 가운데 제일 오래된 것이라는 안내가 있었다. 이 봉정사는 박준해 시인님이 소리공양을 하며 자주 들린 곳이라 잘 알고 있어 세세한 것 까지 안내를 하였기에 더욱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아담하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는 아사 직전에 박준해 시인이 나무를 관리하는 기술이 있어 목 주사를 하여 살려낸 나무라하여 다시 한번 더 자세히 보게 되었으며 수형이 아주 예뻤다.
김경숙 시인이 우리 일행을 생각하여 집에서 정성들여 만들어온 봉정사 입구에서 마신 음료의 향기는 5월의 더위 속에 강행군을 하는 문인들에게 강한 힘을 발휘하는 주사를 한대 놓아준 기분이었다. 더 힘을 내어 하회마을을 향해 차는 달리고 있었으며 차내는 웃음과 환담이 오가고 있었다.
하회마을은 물이 돌아 흐른다고 하여 물도리동 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산은 물을 얼싸안고 물을 산을 휘감아 돌아 산태극 수태극의 절묘한 지형을 빚어냈고 풍수지리로는 마을의 생긴 모양이 물위에 활짝 핀 연꽃과 같다고 하여 현화부수형이라 하며, 짐을 가득 실은 배가 떠나려고 하는 행주형이라고 한다. 초기 마을의 형성은 가장 먼저 입촌 하여 터를 잡은 허씨들에 의해서이다. 허씨들은 화산자락의 따뜻하고 양지바른 거먹실골에 자리 잡았으며, 그 뒤를 이은 안씨는 향교 있었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전한다.
현재와 같은 하회마을의 모습은 고려말 조선 초에 이르러 풍산류씨 공조전서 류종혜 공이 풍산 상리에서 길지를 찾아 이곳으로 옮겨온 후부터라고 한다. 마을을 휘감아 물이 흐르고 목조건물 마다 택호가 붙여져 있으며 잘 지어진 목조건물이 있는 곳과 볏짚으로 이엉을 이어 덮은 초가가 있는 마을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마을의 대표적인 인물은 대유학자인 겸암 류운룡(1539-1601)선생과 임진왜란시 영의정으로 국난극복에 큰 공을 세우신 서애 류성룡(1542-1607)선생 등 수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영남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자리 잡았다.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양반들이 놀았던 선유불줄놀이로 양반문화와 서민문화가 서로공존하고 있었던 흥미로운 곳이다.
안동은 가는 곳 마다 목조건물이 즐비하다. 이는 아마 나의 견해로는 인재는 교육을 통해 육성되는 것으로 다른 지방과 달리 도산서원 병산서원 임천서원 서산서원 역동서원 등 작고 큰 서원과 서당을 세워 인재를 길러 벼슬길에 나가게 하여 사대부로 길러낸 결과로 벼슬길에 나갔다가 또 후학을 기르기 위해 낙향하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관계로 그 들이 기거할 거처를 건립하면서 지금 현존하는 목조건물 같은 건물을 세웠던 관계로 생각된다.
안동은 곳곳을 돌아봐도 안동웅부라는 글귀를 자주 접할 수 있으며 다방에 들어가서도 옛 사람들의 글귀와 한문 글귀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아직도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양반과 선비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 기행목적지인 병산서원을 향해 차량은 달리고 있다. 병산서원에 가면 아마 놀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들어가는 입구에 길이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차가 갑자기 덜컹거리며 이리저리 흔들리고 불편하게 하였다. 흔들리는 차안에서 들려준 천종기시인의 노래는 더운 열기를 식혀주었는데 아마 젊은 여류 분들께 적극 권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꾀꼬리 같은 목청으로 들려주는 노래를 들어봐야 했었는데 말입니다.
내가 우둔하여 그런지 도산서원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병산서원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이 후학들을 기른 교육기관으로 아마 지금의 고려대 연세대 정도 수준의 사학으로 누군가 비유하여 설명을 해주었다. 들어가는 문이 복례문이며 그 다음 만대루가 있고 그 다음 교장과 선생님이 거처하는 현재의 교무실 같은 건물이 있으며 그 다음이 서애 류성룡 선생을 모시는 건물이 있다.
느낌은 이렇게 목조건물로 선비들이 공부할 수 있는 교실 같은 공간을 아주 넓게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아마 도산서원의 공간에 비하면 네 배 정도는 될 넓은 공간이며 주변의 풍광이 아주 아름다웠다.
영국의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곳을 방문하기 위해 추천한 곳이 하회마을이며, 미국부시 대통령이 방문한 곳이 병산서원이었다. 결과적으로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에도 한눈팔지 않고 옛것을 지키며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 안동이라는 말로 해석이 된다.
그래서 그런지 안동은 공기가 맑고 산과 물이 어우러져 있어 쾌적한 곳이라는 생각이다.
만대루 위에서 회장의 인사말을 듣고 서로 인사를 나누며 차로 안동 역으로 이동하면 바로 헤어질 순간이다.
1박2일 바쁜 사회생활에 짧은 시간을 낸다는 일도 어려울 정도로 급박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전혀 그믐밤과 같았던 안동의 냄새를 겨우 조금 맛은 셈이다. 연규월 발행자님과 하규용 주간님은 안동이 첫 방문이라고 한다. 대단한 소득을 올렸을 것으로 생각되어 기쁜 마음이다.
안동은 우리가 이번에 문학기행을 하며 다닌 곳 이외에 더 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는 고장이다. 다시 방문하는 기회가 있으며 더 많은 곳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방문하는 회원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사랑 실은 봉사와 협조를 아끼지 않은 안동에 거주하시는 문인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말씀을 올리며, 이번 행사를 위해 기획하고 조정하신 운영진 여러분께도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회원 여러분 위치한 곳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실 것으로 믿으며 기행문의 문을 닫습니다. 끝.
|
첫댓글 서시인님, 장문의 기행문 읽느라 눈이 아프네요... 너무 상세하게 소개를 잘 하셔서 마치 제가 그 곳을 다녀온 느낌입니다. 다음에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기도 하네요...요즘 제가 안팎으로 너무 바빠서 사실 여유가 없습니다.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 느긋한 평화를 자유를 같이하지 못하여 안따까운 마음입니다. 건강하시고 현직에 충실하시긱 바라며 현직에 열심이면서도 자신의 생의 즐거움 찾으세요 많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 버리시기를
물흐르듯 지루함없이 종장까지 읽고나니 안동을 다녀온듯 눈에 선합니다 인사드리며 머물어 갑니다
감사합니다. 함께 하였으면 너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입니다.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보람 가지시고 즐거운 날 되시길 희망합니다.
사진찍으시면서 발길 닫는 곳곳마다 어찌 이리도 세세하게 기록하시어 좋은 글로 엮어 주셨는지요. 그날의 행적들이 다시금 고스란히 현상되어 나오는 것같습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으로 안동을 가게 되었는데 너무도 좋은 인상을 받고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서명숙 김명자 시인님은 봄호 등단이 아니고 이번 여름호 등단 시인입니다.)서정호 시인님! 좋은 글 감명 깊었습니다. 늘 건안하세요.
감사합니다.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아 죄송할 뿐입니다.
마치 안동문학기행을 함께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 세심히 살펴주셔서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친구되시는 분께서 직접 찾아오셨으니 얼마나 정시인님께서 관심을 가지셨나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요 함께 하지 못하고 저희들만 좋은 시간 보내어서 죄송합니다. 다음 기호에 꼭 같이 시간을 같이 하도록 희망합니다.
훗날 좋은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서시인님 수고하셨습니다. 코 고는 분들 사이에서 제가 밤새 시달렸습니다.
주간님 저는 얼마나 조심을 하였는데요 김재원 시인님이 저는 코를 골지 않았다고 증인으로 서주었으니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ㅎㅎㅎ
아주 세세하게 기행문을 써주시고 게다가 사진까지 곁들여 비록 가보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안동에 문학기행을 다녀온 기분이며 아주 좋은 추억의 기념물이 될것 같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감사합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감사합니다 더 잘 하지 못한 점 더 자상하게 안내를 드리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건강하시고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