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7/30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동의보감', '안네의 일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 UNESCO)는 30일, '세계기록유산'에 '안네의 일기(Diary of Anne Frank)'를 비롯한 34점을 등재한다고 발표했다. [파리=AFP] (c)AFP 2009/07/31 17:40 발신지:Paris/프랑스 http://www.afpbb.co.kr/article/life-culture/life/2042665/1168168
- Ingmar Bergman - 'Wild Strawberries', 1957
2007 - 스웨덴의 영화 감독 잉마르 베리만 (Bergman, Ingmar) 사망 현대 예술영화의 거장 스웨덴 베리만 감독 별세 칸·베니스·베를린 휩쓴 ‘영상 철학자’ 스웨덴 출신의 명감독 잉마르 베리만이 30일 스웨덴 파로섬에서 타계했다. 89세.
2003 - 초기형 폭스바겐 비틀이 마지막으로 멕시코에서 생산되다 폴크스바겐 비틀(영어:Volkswagen Beetle, 독일어:Volkswagen Käfer폴크스바겐 케퍼)은, 둥그스름한 생김새로 인하여 일명 딱정벌레차 또는 버그라고 불리는 폴크스바겐의 대표 모델이다. 초대 비틀은 1938년부터 2003년까지 생산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군용으로 생산되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국민차 생산 지시로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가 설계한 승용차이다. 따라서 폴크스바겐 비틀은 폴크스바겐 회사와 포르쉐 가문 및 포르쉐 회사를 이어 준 모델이기도 하며, 비틀의 플랫폼으로 전후에 포르쉐에서 356이라는 스포츠카를 만들기도 했다. 2,100만대가 제작되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3위에 속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포드 모델 T, 미니, 그리고 시트로엥 DS에 이어 세기의 자동차(COTC) 4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비틀의 원래 모델명은 폴크스바겐 타입 1이었으나, 1967년 8월 폴크스바겐이 미국 시장에 진입할 때 마케팅을 위해 비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공식 모델명이 되었다. 초대 비틀은 엔진이 뒤에 있었다. 초대 비틀의 디자인을 이어받은 뉴 비틀도 있으며, 앞엔진 앞바퀴굴림이다. * 영화 허비 첫 시동을 걸다에 나오는 자동차 허비의 모델이기도 하다. 후속 모델 * 폴크스바겐 골프 * 폴크스바겐 뉴 비틀 /위키백과
1980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7·30교육개혁조치 발표 [어제의 오늘]1980년 신군부, 과외 전면 금지 ㆍ서슬퍼런 조치도 ‘무용지물’ 예나 지금이나 자녀교육을 향한 부모들의 열망은 끝이 없다. ‘나는 못 배웠어도 내 자식만큼은 원없이 공부할 수 있게 뒷바라지해주고 싶다’는 부모들의 바람은 사교육 경쟁으로 이어졌다. 중학교 입시경쟁이 치열하던 1960년대 말부터 사회문제로 등장한 과외 열풍은 69년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가 생기며 잠시 가라앉는가 싶더니 고교 진학을 위한 중학생 과외 열풍으로 옮아붙었다. 이에 맞서 정부가 74년 고교 평준화 정책을 시행하자 이번에는 대입 과외가 전면에 등장했다. 70년대 사교육은 대부분 그룹과외 형태였다. 몇 명이 무리지어 대학생이나 현직 선생님들한테 과외를 받는 식이었다. 과외시킬 돈이 없어도 부모들은 자녀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허리띠를 졸라맸다. 어떤 입시정책도 사교육 열풍을 잠재우는 데 실패하자, 80년 7월30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통해 ‘7·30 교육개혁조치’를 발표했다. 대학 졸업정원제 실시, 대학생의 과외교습 및 입시 목적의 재학생 학원 수강 금지 등이 뼈대였다. 이는 당시 비싼 과외비를 부담하느라 고통받던 많은 학부모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권재현 기자 jaynews@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7-29 17:49:4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291749445&code=100100&s_code=ap005
1980 - 바누아투[Vanuatu] 독립 19세기 중반에 백단향 판매상들과 유럽 선교사들이 들어왔으며 그후 1868년경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목화 재배업자들이 들어왔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이권다툼은 이 제도를 관리하기 위해 합동해군단을 창설함으로써 해소되었다(1887). 1906년 양국은 공동통치 정부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고등판무관을 임명하여 공동통치 정부의 수도였으며 지금은 바누아투 공화국 수도인 에파테의 빌라에 상주하던 판무관들을 통해 권한을 행사하게 했다. 이러한 공동통치는 멜라네시아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했으나 1914년의 의정서(1922 승인)에 따라 양국은 자국교포들에 대한 책임을 갖게 되었다. 이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중 일본의 침략을 모면했으며 연합군의 주요기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토지소유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지방정치가 시작되었는데, 그당시 뉴헤브리디스 영토 중 1/3 이상을 외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지역별로 정당이 세워진 뒤 대표제의회(1974∼77)를 구성했으나 곧 해체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뉴헤브리디스 대표들이 참석한 1977년의 파리 회담에서 독립에 합의한 뒤 1979년에 선거를 치르고 헌법을 제정했다. 1980년 중반 나그리아멜당(黨) 지도자 지미 스티븐스는 이 제도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에스피리투산토 섬을 독립국가로 세우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뉴헤브리디스는 1980년 7월 30일 '조국이여 영원하라'라는 뜻의 바누아투 공화국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바누아투의 역사) /브리태니커
- Leonid Brezhnev
1975 - 유럽안보협력회의 개최
1974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 탄핵결의안 3항 채택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1972년부터 1975년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권력 남용에서 시작하였다. 그 이름은 당시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 본부(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Headquaters)가 있었던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유래한다. 닉슨은 각종 정치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2년간 대통령 직에 머물러 있었으나 1974년 8월, "스모킹 건"(smoking gun; '확증'을 의미함)이라 불리는 테이프가 공개됨에 따라 그의 마지막 측근들도 그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미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지 4일 뒤인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이로서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 되었다. /위키백과
[워터게이트 사건 일지] 1974.07.27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침입사건 조사방해 관련탄핵결의안 1항 채택 1974.07.29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권력 오용 및 취임선서 위반 관련탄핵결의안 2항 채택 1974.07.30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하원 소환명령 거부 관련 탄핵결의안 3항 채택 1974.08.09 - 닉슨 대통령 사임 1974.09.08 - 제럴드 포드 대통령, 닉선 전 대통령 사면
1971 - 서울외곽에 그린벨트 첫 지정 오늘의 역사 (7월 30일)[1971년] 1971년 7월 30일, 건설부 고시로 서울 외곽지역에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가 처음 지정됐다. 서울 중심부에서 반경 15km를 따라 폭 2∼10km 지역의 서울·경기 땅 454.2㎢(첫 발표 때는 467㎢)의 개발을 묶는다는 내용이었다.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과 토지 투기 억제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공식 발표하지 않고 슬그머니 관보에만 실어 밀실행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 사실이 슬금슬금 알려져 해당 지역의 땅값이 폭락하기 시작하자 토지 소유자들이 사유재산권 침해라며 반발하고 나섰으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부산·대구·광주 등을 시작으로 1977년 전남 여천 일대에 마지막 그린벨트를 지정할 때까지 총 8차례에 걸쳐 그린벨트를 확대해 갔다. 그 결과 전 국토의 5.4%(16억평)가 그린벨트로 편입됐다. 불만이 많았던 만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겼다. 관리근거가 도시계획법 시행규칙에 불과한데도 이를 개정할 때는 반드시 사전 재가를 받도록 해 결과적으로 군사정권 정책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성공사례’로 남았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112_0010
1971 - 아폴로 15호의 착륙선이 달에 착륙 미국의 유인 달 탐사선, 46,723 kg http://www.yushin.or.kr/astro/craft/moon.htm
- 'Friendship 7' Capsule, Feb. 20, 1962
1962년 오늘 사흘 동안의 전시를 위해 우리 나라에 도착했다.
1962 - 이란의 여성운동가 다우라타바디(Dowlatabadi, Sediqeh) 사망 다우라타바디 [Dowlatabadi, Sediqeh, 1882~1962.7.30] Sediqeh Dowlatabadi ................................................................... Featured, Press /Mahnaz Afkhami Mon, Mar 25, 2013 http://www.mahnazafkhami.net/2013/iranian-new-year-2013-celebrate -these-persian-women-who-have-fought-for-equality/
1953 - 역도산[力道山], 일본프로레슬링협회 결성 [역도산 연보] 1924년 11월 14일 함경남도 홍원군 신풍리 출생. 1940년 조선 씨름대회 우승. 일본형사 권유로 일본으로 가, 1941년 스모 입문. 1948년 고무스비(스모4등급) 진출, 1950년 5월 세끼와케 (스모3등급) 경기에서 오오제키 (두번째 강자)가 될 수 있었으나 순위편성에서 제외됨. 1950년 9월 스모 은퇴. 1950년 11월 일본국적 취득. 1952년 2월 도미, 53년 3월 귀국. 1953년 7월 일본 프로레슬링협회 창립. 1954년 2월 ‘역도산-기무라’ VS ‘샤프형제’ 일본 최초 세계태그선수권 시합(무승부), 1954년 12월 ‘역도산 VS 기무라’일본선수권 개최 (역도산 승). 1955년 7월 ‘역도산-아즈마후지’VS ‘프리모컬레나-올데가’시합 (승). 1956년 5월 ‘역도산-엔도’VS‘샤프형제’시합.(승, 세계 태그 챔피언 획득). 1959년 5월 제1회 월드리그 개최, 결승에서 ‘제스 올데가’를 깨고 역도산 우승. 1962년 3월 LA에서 ‘프래트 블라시’를 깨고 WWA 세계 헤비급 왕자 획득. 1963년 1월 서울 방문. 1963년 12월 7일 역도산 마지막 시합. 1963년 12월 8일 클럽에서 칼에 맞아 부상, 15일 복막염으로 사망.
1950 - 6.25 전쟁 참전 캐나다 함대의 구축함 한국해역 진입 국제연합 회원국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로 한 캐나다 정부는 1950년 7월 4일 때마침 유럽 순방을 준비 중인 함대에서 구축함 3척을 선발하여 한국으로 파견하였다. 이 함정들은 진주만을 경유하여 7월 30일 한국해역으로 진입하여 미 극동해군에 배속되었다. 이후 소규모이지만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육군, 해군, 공군 전군을 한국전쟁에 파견한 국가가 되었다. 참전인원은 연인원 25,579명, 주요 전투로는 가평전투(1951년 4월 23일~25일), 운천 자일리전투(1951년 5월 30일), 연천 고왕산전투(1952년 10월23일), 전곡 나부리전투(1953년 5월 2일) 등이 있다. 캐나다 참전 기념비는 경기도 파주군 북면 이곡리 207-4번지에 세워져 있고, 아울러 영국을 비롯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영연방 4개국 참전 기념비가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에 세워져 있다. http://ki.warmemo.co.kr:8101/warmemo/jsp/data/view.jsp?type=1&pkey=COMMT00383
1948 - 스페인 출신 프랑스의 배우 장 르노(Reno, Jean) 출생 르노 [Reno, Jean, 1948.7.30~ ] 장 르노(Jean Reno, 본명 don Juan Moreno y Herrera Jimenez 혹은 don Juan Moreno y Jederique Jimenez, 1948년 7월 30일 -)는 스페인계 프랑스 배우이다.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영어에도 능통하여 영어로도 작업을 한다. 장 르노는 프랑스 보호령이었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를 피해 망명온 스페인계 안달루시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그가 12살이 되던 해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대한민국에서는 1994년 ‘레옹’의 흥행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 대한민국에서 그는 '장 르노'라고 불린다. 이는 프랑스어 발음 규칙을 따르면 맞는 발음이다. 하지만 정작 프랑스에서는 '장 레노'라고 불린다. 참고로 '장 르노'가 내한(來韓)한 횟수는 2회. 1998년 당시 1차 내한때 에는 그의 영화 '로닌' 홍보를 위해서, 2000년 당시의 2차 내한 때에는 '크림슨 리버' 의 홍보를 위해서 왔었다. /위키백과
1947 - 미국의 영화배우, 정치가 아널드 슈워제네거(Schwarzenegger, Arnold) 출생 슈워제네거 [Schwarzenegger, Arnold Alois, 1947.7.30~ ] 아널드 알로이스 슈워제네거(Arnold Alois Schwarzenegger, 1947년 7월 30일 ~ )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할리우드 액션 배우였으며, 현재 38대 캘리포니아 주지사이다. 배우가 되기 전에는 보디빌더였으며, 현재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1986년 유명한 TV 언론인이며, 고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인 마리아 슈라이버(Maria Shriver)와 결혼하여, 4명의 아이를 두고 있다. 슈워제네거는 오스트리아의 탈에서 태어났으며, 1983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보디빌더였던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코난》을 시작으로, 할리우드 영화의 배우로 활약하며 최근까지도 최고의 흥행배우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3년10월 7일, 캘리포니아 주지사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와 당선되었다. 2006년 11월 7일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와 민주당 후보를 56% 대 39%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2010년 11월 2일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 제리 브라운이 공화당 후보 멕 휘트먼 후보를 눌렀다. 슈워제네거는 2010년 12월 17일 LA Times 인터뷰에서, 퇴임후 오바마 행정부에 입각할 의사도 있다고 말했다. * 그의 주지사 출마로부터 거버네이터(Governator)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거버네이터(Governator) = 거버너(governor) + 터미네이터(Terminator) 출연 작품 /위키백과
1941 - 캐나다 출신 미국의 가수 폴 앵카(Anka, Paul) 출생 앵카 [Anka, Paul, 1941.7.30~ ] 미국의 대중가수이자 가요작가로 자작곡 《다이아나》, 《그대는 내 사랑》 등을 발표하여 폭넓은 인기를 모았다. 캐나다 오타와 출생. 고등학교시절부터 그룹을 만들어 노래를 불렀으며, 1957년 자작의 《다이아나》로 레코드계에 데뷔하여 200만 장 이상의 레코드가 팔려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 《그대는 내 사랑》 《크레이지 러브》 등의 자작곡들이 젊은 세대의 환영을 받았으며, 1962년의 영화주제가 《사상 최대의 작전》을 발표할 무렵부터 보다 폭넓은 각층의 인기를 모은 가수로 성장하였다. /naver
1935 - 펭귄북스, 런던서 첫 문고본 출간 [어제의 오늘]1935년 ‘펭귄북스’ 첫선 ㆍ6펜스로 이룬 ‘페이퍼백 혁명’ 1935년 오늘 문고본의 대명사인 ‘펭귄북스’가 영국에서 첫선을 보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아가사 크리스티의 <스타일즈 저택의 미스터리> 등 10권이 첫 시리즈로 나왔다. 가격은 당시 담배 한 갑 가격이던 6펜스였다. 펭귄북스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페이퍼백’(Paperback·종이 표지에다 본문도 중질지 이하의 용지를 쓰는 보급판)의 시초로 꼽힌다. 당시 좋은 책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고가의 고급 양장본을 사든지 도서관을 찾는 것이었다. 가격이 싼 페이퍼백이 있었지만 저급한 통속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7-29 18:08: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291808015&code=100100&s_code=ap005
1932 - 제10회 올림픽 경기대회 개막 (로스엔젤레스) 유럽이 아닌 신대륙 미국에서 2번째 개최된 제10회 올림픽 경기대회는 1932년 7월 30일부터 8월 14일까지 개최, 37개국에서 1,333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세계적인 공황으로 참가율이 저조했지만 주최국의 준비와 운영은 그때까지의 올림픽 대회 가운데 가장 완벽했다. 우선 시설면에서 사상 최대였는데, 세계의 부호 미국은 올림픽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10만 명 수용규모의 스타디움을 건설했고, 인쇄전신기(텔레타이프)가 가설된 프레스센터도 마련했다. 또 거리가 먼 로스앤젤레스까지 여행하는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참가국 선수들의 경비를 절반 이상 부담하고, 하루 2달러로 숙식이 가능한 본격적인 선수촌을 건설하여 모든 선수들이 합숙하면서 고대 올림픽의 정신으로 뭉칠 수 있도록 했다. 경기는 16개 종목, 117개 세부종목으로 열렸으며, 기록면에서는 16개의 세계기록, 2개의 세계타이기록, 33개의 올림픽 신기록이 수립되었다. 미국의 M.디드릭슨은 80m장애물경기·투창·높이뛰기에서 세계기록을 세워 새로운 여성 스포츠 영웅이 되었다. 영국의 T.햄프슨은 육상 800m경기에서, 미국의 B.카는 400m경기에서 46초 2의 기록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아일랜드는 B.티스덜이 400m장애물경기에서, P.한이 투해머에서 우승했고, 일본은 수영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경마종목의 3,000m야외장애물경기에서는 심판들이 회전수를 잘못 세어 주자들을 400m 더 달리게 하는 운영상 실수도 일어났다.
1928 - 미국 조지 이스트먼 최초의 칼라필름 공개 [역사속 오늘] 컬러필름 발명 1928년 7월 30일 미국의 이스트만 코닥사에서 컬러필름을 발명했다. 1826년 최초의 사진이 찍히고, 1838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지 100년 정도 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컬러화면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1861년,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이 3원색을 이용해 컬러사진의 원리를 고안해냈던 것. 그러나 당시의 영상은 너무 흐릿해서 사물의 세세한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단순히 컬러사진의 가능성만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이 실험을 계기로 수많은 연구가들이 컬러필름 발명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레오폴드 고뒤스키와 레오폴드 마네즈라는 두 음악가도 그 행렬에 끼어 있었다. 음악가였음에도 그들의 화학약품을 다루는 실력은 전문가 뺨칠 정도였고, 단순한 광학적 차원에서 벗어나 화학적인 차원으로까지 실험을 새로이 확장시키기도 했다. 가능성을 확신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모든 수입을 쏟아부으면서 실험에 몰두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열정을 지켜본 이스트만 코닥사의 미즈 박사가 이들에게 재정적인 도움과 함께 화학재료까지 지원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고 결국 컬러필름 발명에 성공하게 됐다. 그들의 음악적 재능이 발명에 있어 크나큰 역할을 했다고 하니 발명에 상식이란 것은 없는 모양이다.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매일신문 2004.07.30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7523&yy=2004
- 메이지 일왕 결혼 25주년 기념
1912 - 일본의 왕 메이지(明治) 사망 메이지 [明治, 1852.11.3~1912.7.30] 일본의 제122대 왕인 메이지(明治) 일왕이 1912년 7월 30일 사망했다. 향년 60세였다. 본명이 무스히토인 메이지 일왕은 1867년 16살에 즉위해 왕정복고를 이룩하고 메이지 신정부를 수립하는 이른바 `메이지 유신`에 성공했다. 메이지 왕은 학제개혁을 비롯, 징병제 실시, 지조 개조, 국회 개설, 헌법 반포 등 일련의 개혁을 통해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절대주의적 천황제 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특히 제국헌법(1889년)에도 일왕의 국가통치 대권, 육해공 통수권을 명기했고 교육칙어에서는 일왕이 국민 도덕의 중심임을 밝힘으로써 천황제 국가를 유지하는 2대 이념으로 삼았다. 재위 45년간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한국을 합병해 일본국민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았다. /조선
- 'Family Group'
- 'The Sovereigns' - 'Reclining Figure' - 'Rocking Chair I'
- 'Grosse Liegende, No. 5'
1898 -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Moore, Henry) 출생 무어 [Moore, Henry, 1898.7.30~1986.8.31] 반농반광부(半農半鑛夫)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장학금으로 사범교육을 받고, 1916년 모교의 교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7년 군대에 입대, 프랑스 전선에 출전하였으나 부상으로 본국에 송환, 수술을 받았다. 1919년부터 일찍이 희망한 조각을 배우기 위하여 리즈의 미술학교에 입학, 1921년에는 런던 왕립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 동안 대영박물관에 다니면서 원시미개문화의 조각에서 자연재료에 밀착한 단순한 형체를 연구하였다. 1925년에 장학금으로 파리와 이탈리아를 연구, 여행하여 당시의 전위조각의 동향에 접할 수 있었다. 귀국하여 1931년까지 왕립미술학교의 강사, 1939년까지 첼시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동안 외부의 동향도 소화하면서 독자적인 작풍을 추구해나갔다. 1930년대에는 C.브랑쿠시와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영향 아래 지극히 보수적인 영국 조각계에서 전위적 작가로서 추상적 형체를 조각하여 1930년대 말부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노샘프턴에 있는 성마태성당의 《성모자상》(1943) 등의 구상적 작품, 그리고 전후에는 일련의 독특한 인체상으로 변천하여 유네스코 본부의 《옆으로 누운 사람》(1957∼1958) 등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시종 일관하여 그의 작품에 공통된 것은 재료의 성질을 존중하면서 유기적이고 단순한 원초적 형체로써 대상의 내적 생명을 표출한 점이다. 1948년에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국제조각대상을 받았고 공공 기념비 제작에도 공헌하였다. 만년의 작풍은 순수 추상의 포름도 아니고 재현 묘사의 사실형식도 아닌, 그의 말에 따르면 유기적 구성의 형식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구상적인 형식은 현실의 재현적인 형식이 아닌, 자유롭게 구성된 형체의 표현이다. 조각을 위한 소묘도 많은데, 《런던 방공대피소 풍경》(1940)이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지난 1982년과 1983년에 호암갤러리와 현대화랑에서 작품전시회가 있었던 데 이어, 1995년 11월 포스코센터에서 《모자상》 등 5점이 전시 소개되었다. /naver
1898 - 독일의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Bismarck, Otto von) 사망 비스마르크 [Bismarck, Otto (Eduard Leopold) von, 1815.4.1~1898.7.30] 근대 독일의 초석을 다진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1898년 7월30일 향년 83세로 사망했다. 그는 1860년대 중엽까지 약 40여개의크고 작은 국가들로 나눠져 있던 독일을 통일하고 1871년 독일 역사상 최초의 민족국가인 독일제국 (1871∼1914)을 창건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을 통해서가 아니라 쇠와 피를 통해 결정된다.". 그가 47살 때 프로이센의 총리가 되면서 행한 취임연설의 한 대목이다. 그의 정치원리가 함축되어있는 이 연설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철혈재상이라 불렀다. 1815년 프로이센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프로이센의 관리가 된 20대 이후 늘 프로이센의 통일에만 관심을 쏟았다. 러시아 대사, 프랑스 대사 등을 거치며 국제정치의 안목을 넓힌 그는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을 거쳐 1871년부터 1890년까지 약 20여년간 독일제국의 재상자리를 지켰다. 재임기간동안 총리로서 군비확장을 주도하며 이웃 열강과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기도 한 그에게는 언제나 정치적으로 적과 동지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정치적 행적은 항상 갈등과 대립의 소지를 안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열렬한 찬사와 지지, 다른 한편으로는 강한 혐오감과 거부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비스마르크를 지지한 제국내 보수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은 그를 정치와 사회의 구질서를 보전하면서도 반 세기가 넘도록 지속된 민족통일의 열망을 실현시킨 철의 재상으로 숭상했다. 이들은 비스마르크를 탁월한 경륜을 지닌 현실 정치가로 묘사했고 추앙했다. 이념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입각하여 통일에 대한 국내외의 견제와 저항을 극복하고 신생 민족국가를 유럽열강의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그를 적대시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은 그를 보수 반동의 대변자이자 강압적인 철권 통치를 주저하지 않는 권력 정치가로 낙인찍었다. 이들은 비스마르크를 아돌프 히틀러와 더불어 19세기 이후 독일사의 파행과 굴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인식했다. 이들에 의하면 독일이 20세기에 접어들어 대외적으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대내적으로 나치즘이라는 파행적인 체제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면에는 비민주적인 권력구조와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 전근대적인 가치관이라는 독일제국으로부터 유래하는 역사적 전통이 존재하고 있고, 배경에는 비스마르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1863 - 미국 포드 자동차의 창설자 헨리 포드(Ford, Henry) 출생 포드 [Ford, Henry, 1863.7.30~1947.4.7] 포드는 자동차산업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미국의 실업가이다. 농촌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기계에 관심을 가졌다. 16세 때부터 기계제작소의 도제, 기계수리공 등을 거쳐 1888년부터 약 10년간 에디슨조명회사의 기술자로 일했다. 1903년 포드자동차회사를 설립했고, 1908년에는 이후 20년 가까이 전세계 차량 생산의 절반을 차지한 T형 포드를 선보였다. 1910년대초부터 부품의 표준화 및 일관작업공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어 판매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타사의 2배로 하는 동시에 작업 시간을 줄여 생산비용을 낮추고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높였다. 자동차문화를 일반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1920년대말부터는 완고한 경영방침으로 시장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노동조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어려움을 겪었다. 1936년 포드 재단을 설립해 자선활동에도 힘썼다. /브리태니커
"돈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업이란 한심한 사업이다."
- 헨리 포드
- 'Self-portrait', 1896 - 'Hunters with spears'
- 'Winter landscape with river and bird' - 'Merchants in Ceylon'
1853 - 폴란드의 화가 줄리안 파라트(Fałat, Julian) 출생 파라트 [Fałat, Julian, 1853.7.30~1929.7.9] Julian Fałat, (30 July 1853 in Tuligłowy near Lwów - 9 July 1929 in Bystra Śląska) was one of the most prolific Polish painters of watercolor and one of the country's foremost landscape painters as well as one of the leading Polish impressionists. Fałat first studied under Władysław Łuszczkiewicz at the Kraków School of Fine Arts, and then at the Art Academy of Munich. After several trips throughout Europe and Asia in 1885, Fałat compiled a collection of studies from his voyages which would become useful later in the development of his artwork. Themes typical of Fałat's painting are Polish landscapes, hunting scenes, portraits, and studies from his voyages. In 1886, Fałat accepted an invitation from future German Emperor Wilhelm II to serve as court painter in Berlin. Fałat died in Bystra Śląska on July 9, 1929. A museum in Poland, called Fałatówka, is devoted to him. Out of his three children, Kazimierz (Togo) (1904–1981) continued to paint in watercolour. Some works, having been looted under German occupation, very occasionally reappear in sales-rooms. In December 2010, two such paintings, "The Hunt" and "Off to the Hunt" were seized by U.S. authorities from auction houses in New York City. The works are to be repatriated to Poland's National Museum of Art in Warsaw. Later works by Togo, produced after Togo settled in England, are largely in the hands of his later family. Fałat used to say: "Polish art ought to convey our history and our beliefs, our qualities as well as our defects; it must be the quintessence of our soil, our sky, and our ideals."
1818 - 영국의 소설가 에밀리 브론티(Brontë, Emily) 출생 브론티(브론테) [Brontë, Emily (Jane), 1818.7.30~1848.12.19] 영국 여류 소설가 겸 시인. 필명은 엘리스 벨(Ellis Bell)이다. 요크셔주의 손턴에서 영국 국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났으며, C.브론테의 동생이고, A.브론테의 언니이다. 1820년 아버지가 요크셔의 한촌(寒村) 하워스로 전근하게 되어 에밀리 자매들은 그 황량한 벽지의 목사관(현재는 브론테박물관)에서 자랐다. 1821년 어머니가 죽자 이 자매들은 백모의 손에 양육되다가 1824년 에밀리와 샬럿은 위의 두 언니들과 함께 근처에서 목사의 딸들을 싼 비용으로 맡는 기숙학교에 맡겨졌으나 형편없는 식사로 영양실조와 결핵에 걸려 두 언니들이 이듬해에 사망하자, 놀란 부친은 에밀리와 샬럿을 집에 데려왔다. 이 악덕 기숙학교는 후에 샬럿이 소설 《제인 에어 Jane Eyre》(1847)에서 분노에 찬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1842년에 에밀리는 샬럿과 함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의 여학교에 유학하여 어학을 공부하고 같은 해에 귀가하였다.
1816 - 노르웨이 정치가 스베르드루프(Sverdrup, Johan) 출생 스베르드루프 [Sverdrup, Johan, 1816.7.30~1892.2.17] 노르웨이의 정치가. 노르웨이 벤스트레당(좌파 또는 자유당) 최초의 내각에서 총리를 역임했다(1884~89). 그는 노르웨이 의회에서 내각책임제를 통과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뒤 총리로 임명되었다. 법률을 공부한 뒤 1851년 의회로 진출, 도시지역 자유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야당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1862~69년 하원의장, 1871~84년 의회 의장으로 일하다가 1884년에 총리가 되었다. 재임기간에 그는 1851년부터 준비해온 수많은 개혁안을 시행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선거권 확대(1884)와 배심원제도 및 징병제도의 도입(1887)이었다. 1887년 이후에는 종교의 자유와 교회개혁 및 스웨덴-노르웨이 연방의 문제를 둘러싸고 벤스트레당의 급진 다수파와 사이가 나빠졌다. 교회개혁안은 부결되었고, 1888년 선거에서 절대다수의 지지를 상실했다. 이듬해 의회에서 그의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상정되자 사임했다. /브리태니커
1771 - 영국의 시인 토머스 그레이(Gray, Thomas) 사망 그레이[Gray, Thomas, 1716.12.26~1771.7.30] 영국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시인. 런던 출생. 이튼교(校)를 거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배웠다. 1739년부터 2년 남짓 H.월폴(1717~1797)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고 다녔으며, 귀국 후에는 케임브리지의 기숙사 안에서 은자(隱者)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정신활동의 폭은 넓었으며, 시 이외에 역사·식물·곤충·건축·음악 등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선천적인 우울한 기질로 인하여 세상과의 접촉을 피하였으며, 1757년에 계관시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1758년에 케임브리지의 근대사 교수로 임명되었는데도 강의는 하지 않았다. 작품은 적지만, 친구인 R.웨스트가 죽은 무렵에 쓴 《봄의 노래》 《멀리 이튼교를 바라보는 노래 Ode on a Distant Prospect of Eton College》(1742) 등에서는 자연과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고독감과 무상감이 흐르고 있다. 몇 년의 개고로 다듬은 끝에 완성한 《시골 묘지에서 읊은 만가 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1751)는, 명성도 재산도 얻지 못한 채 땅에 묻히는 서민들에 대한 동정을 애절한 음조로 노래한 걸작이며, 이 작품으로 l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핀다로스풍의 송가(頌歌) 《시가(詩歌)의 진보 The Progress of Poesy》와 《시선(詩仙) The Bard》(1757)에서는 풍부한 역사적 감각을 나타내었고, 또 북유럽의 고시(古詩)를 번역하여, 시대를 앞선 낭만적 경향을 나타내었다. 선례(先例)를 가진 표현을 존중하는 그의 고전주의적 시풍은 난해한 편에 속한다. 사후(死後)에 출판된 일기와 편지는 우수한 산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당시의 전형적인 학자시인의 문체와 생활을 전하고 있다. /naver
1718 - 영국의 신대륙 개척자 윌리엄 펜(Penn, William) 사망 펜 [Penn, William, 1644.10.14~1718.7.30] 영국의 신대륙 개척자. 런던 출생. 해군제독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였다. 1681년 찰스 2세에게 북아메리카의 델라웨어강 서안의 땅에 대한 지배권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자 그 땅을 펜실베이니아(펜의 숲이 있는 지방이라는 뜻)라 명명하고, 퀘이커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로운 신앙의 신천지로 만들었다. 이듬해 현지로 가서 총독과 양원제의회(兩院制議會)에 의한 정치를 실시하고, 그 스스로 총독이 되어 필라델피아를 건설, 인디언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냈다. 1684년 귀국하였다가, 1699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의회와의 대립으로 고투, 1701년 실망 끝에 귀국한 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naver
- 'Courtyard, Uffici Gallery', Florence - 'Adoration of the Magi' - 'Pope Gregory XI and St. Catherine of Sienna', Fresco
- 'Cosimo I with His Artists'
1511 -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 작가 조르조 바사리(Vasari, Giorgio) 출생 바사리 [Vasari, Giorgio, 1511.7.30~1574.6.27]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며 건축가. 미술사가. 1511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Arezzo)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피렌체로 가서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고 미켈란젤로(Michelangelo)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1529년 로마를 방문해 라파엘로(Raffaello)와 그 밖의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하고 고대 로마의 유적을 소묘해 가면서 예술적 영감을 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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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