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욱-旅窓筆滴- -1989년 중국 편.
중국 여유기(中國 旅遊記)
24.서태후(西太后: 1835∼1908)
(The Empress Dowager CiXi': Cixi' Tàihòu)
1989.5. 쓴 것(脫稿)을 2009.03. html로 재편집.
空慧
청말(淸末) 자금성(紫禁城)에는 2사람의 여주인이 있었다.
즉 동육궁을 거느린 함풍제(咸豊帝: 1831-1961)의 황후이신 동태후
(東太后) 자안태후(慈安太后: 1837-1881)와 서육궁을 거느린 서태후
(西太后: Cixi' Tàihòu)이다.
삼궁육원(三宮六院)에서 동태후(東太后)이던 자안태후(慈安太后)가
거처하던 종수궁(鍾粹宮)과 서태후(西太后)가 빈(嬪)의 신분인 의빈
(懿嬪)이었을 때, 후에 동치제(同治帝)가 된 재순(載淳:1856-1874)을
생산했던 여경헌(麗景軒)은 엇비슷해 보이지만 왜인지 묘한 기분
으로 비교가 되었다. 여성으로 아이를 생산 못하는 것도 여성으로
서는 한(恨)매치는 설음인데, 후사(後嗣)를 못 갖는 황후의 비통함은
얼마나 애통하랴만 운명까지 달리하게 만드는 비정함이 황실이다.
자안태후는 만주 출신으로 성은 니오후루씨(紐鈷錄氏: 뉴고록씨)이며
벼슬을 한 집안에서 태어나 매우 정숙하고 단아한 분이었다.
니오후루씨(紐鈷錄氏)는 만주어에서 늑대를 의미하는 Niohuru를
뜻한다. 본시 청나라가 만주족이 건설한 나라로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는 아이신주에로(Aixin Jueluo: 愛新覺羅)이다.
서태후는 산서성의 가난한 한족(漢族) 농부 왕(王)씨 소생의 이름은
소겸(小謙)이었다. 청나라 식 즉 만주족 이름은 예허나라(葉赫那拉)!!
그러나 그가 한족인지 만주족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4살 때 송(宋)씨 집안의 양녀가 되었다가 12세 때 어느 집안 시녀로
들어가 옥란(玉蘭)이란 이름을 받았고 난아(蘭兒)라고도 불렸다.
그 후 궁녀로 되고 노래를 잘 불러 경극(京劇)을 좋아하던 함풍황제
(咸豊皇帝)의 눈에 들어 아들을 생산하여 의귀비(懿貴妃)로 되었고
이내 태후까지 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은 여인이다.
만주족은 청태종(淸太宗: 아이신주에로 누루하지:Aixin Jueluo Nurhaci:
:愛新覺羅 努爾哈赤:1592~1643)가 만든 군사조직인 8기제도(八旗制度)
라는 계급의식(階級意識)이 있었다.
즉 정백(正白)에서 용청(龍靑)까지 8개의 깃발(旗幟)과 복식이 있었고
상3기(上3旗)는 귀족 계급에 속하고 하5기는 신하계급에 속하는데
서태후는 상3기에 속한 집안 출신이라는 일화도 있지만 근거가 희박
하고 신빙성이 없다.
짜이톈(載淳: 재순)을 생산한 덕분으로 20세 때 귀비로 된 서태후!!
그 6년 후 함풍제(咸豊帝: 1831-1861)는 1860년 영국군이 중국을
침략 했을 때 병약함을 기화로 열하(熱河)에 피신요양하였다가 병사
하고 말았다. 그때 서태후는 시체(屍體)는 놓아둔 채 옥새(玉璽)를
감추고 급거 자금성으로 올라와 당시 섭정왕(攝政王)이던 시동생
공친왕(恭親王)과 모의하여 6세인 자기 아들 재순(載淳) 목종(穆宗)을
동치제(同治帝: 1856-1874)로 즉위시키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신하들은 인자하고 단아한 자안태후를 존경하고
따르므로 함풍제의 세력들을 무참하게 제거 살해하고 질투와 야심을
품고 실권을 잡게 되었으니 청나라는 서쪽바람에 약한 모양이다.
서풍이 동풍을 몰아내어 실권을 잡더니 서풍 때문에 몰하여 망국의
비운을 격게 되었으니 과연 흰도깨비들의 서풍이 좀 세긴 한가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말을 이런 맥락으로도 쓸 수 있을게다.
↑ 서태후(西太后: 1835-1908)
동치제(同治帝:1861~1874)가 6살 되던 해부터 청나라는 황후들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동치제가 18세 때 천연두(天然痘:small-pox)로
사망하자 11대 광서황제(光緖皇帝)로 황위는 계승되었다.
광서황제는 서태후의 여동생과 서태후의 시동생이 낳은 아들이니
조카인 셈이다.
↑ 청말(淸末) 어가(御駕) 행렬
19세기 말엽은 제국주의 팽창기였기로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청-
나라는 몰락의 시기였다. 밖으로는 영.불.독(英.佛.獨)등이 침입하고
안으로는 내란이 준동(蠢動: arise)하였으니 양무운동(洋務運動:1861–
1895)이다.
1900년 8월 의화단(義和團)이 자금성으로 침입하려던 때에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대동하고 서안(西安)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런데 광서제
(光緖帝)가 총애하는 진비(珍妃)가 이를 말리자 교묘한 구실로 진비를
우물 안에 던져 죽게 한 것이 서태후다.
그 진비가 죽은 진비정(珍妃井)은 어화원 격기각(景祺閣) 뒤쪽에 있다.
↑ 1880 光緖帝(청나라의 제11대 황제(재위 1874∼1908)
↑ 13세의 광서제(光緖帝(左)와 동치제(同治帝(右)
↑ 동치제(同治帝)
↑ 양무운동 때 수입한 19세기말 벨지움(Belgium)제 기관총.
개혁에 불타던 광서황제(光緖皇帝)는 말만 친청(親政)일 뿐
수구파인 큰어머니 서태후와 집요한 싸움 끝에 1908년 죽고 이어
다음 해에 48년간 집권을 하던 서태후도 74세를 일기고 이질(痢疾:
적리(赤痢: dysentery)로 세상을 떠났다.
청나라가 도리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우러졌을 때 3세인 황태자가
제12대 제위(帝位)에 오르니 부의(溥儀:fugi: 1906~1967)인 선통제
(宣統帝)다.
↑ 부의(溥儀)
사가(史家)들은 말하기를 역사는 한나라가 망할 때 반드시 그
시대에 상응하는 상징적인 인간상으로 동장시킨다고 했다.
부정한 권력이 자아내는 갖가지 겉치레, 허욕과 냉혹 교활 어리석음
그런 것들을 가춘 상징적 존재가 여성일 경우 더욱 더 그러하단다.
밖으로는 양쿠이즈(洋鬼子: 서양 도깨비)들이 연합하여 침략해오고
국내에는 갖가지 유적(流賊)과 사교(邪敎)집단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데도 그 허구 많은 긴 세월인 근 50년간을 자기 일산의 영달
과 사치로 호사만을 일삼던 서태후!! 배포라고는 없어보여서
불면 날아갈 듯 한 그는 여걸(女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교활하고
얕은 권모술수의 어리석은 여자였고 음산하고 앙칼진 독기 마져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듯하다.
Ps:
-洋務運動(양무운동:Self-strengthening movement): 1861–1895 중국
청나라에서 일어난 근대화 운동. 태평천국의 난과 애로호 사건 등으로
중국 관료들이 자극을 받아 군함 구입, 군수설비와 공장설치, 선진국에
유학생 파견, 과학 서적 번역 등 자강운동을 하였음.
-痢疾(이질)=赤痢(적리: dysentery: mucohemorrhagic colitis): 그람 음성균인
serpilina(Treponema) hyodysenteriae 감염에 의한 점액출혈성의 결장염.
설사를 계속하다 혈변이 나오는 증세의 심한 설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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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즘 세계 정치 돌아가는 모습이나 청말의 정치 모습이나 별 다를게 없어 보입니다.
얼마전에 미주판 한국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 중국 여행기 비슷한 중국 투어 안내가 나와서요.. 사진도 비슷하고..
참..징한 마지막 황제의 영화 였습니다.
그 징후들이 다 서태후가 만든 예고된 불행한 역사의 시작 같더라구요
음기가 지배하면 끝이 안좋아여
여성은 생명의 대지여신 이미지로 ...음기는 아니고 생기이지요^^
^^........... 달님같이 속에 꽉 찬 분들은 동감하지만....
설익은 여성운동가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생각 안하나봐요...남녀 차별이 아니라 남녀는 유별한데도....^^
세상의 역사엔 항상 여자가 ....서태후 그래서 그런지 심술궂어보이네요...
^^.....인간둘이 엮어낸 역사..참 재미 있어요.....^^
어두어져 가던 역사의 뒤안길 이네요......
대청국이 힘없이 찢어발겨지는 종이호랑이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