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
아모스 6,1ㄱㄴ.4-7 1티모테오 .6,11ㄱㄷ-16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현세의 부유함과 가난함이 각각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의 결과라 믿어 왔던 구약 시대의
이해를 수정하고(19-26절), 회개와 구원의 길이 성경 말씀 안에 있음을 선포합니다(27-31절).
비유 속 라자로는 언뜻 무력하고 수동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그의 이름은(엘아자르: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뜻)
그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가난하고 고된 삶을 성실히 살아 낸 의인임을 드러냅니다.
반면에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면서도 대문 앞 라자로를 계속 외면하였던 부자의 삶은,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기원전 760-750년 무렵 활동)가 꾸짖으며 심판을 경고한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의 향락과 사치를 빼닮았습니다.
부자의 삶은 겉으로는 호화롭게 보이지만, 하느님께서 맡기신 재화를 자신만을 위하여 쓰고
도움이 간절한 이를 외면한 까닭에 영원한 상실과 절망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부자는 자신처럼 향락만 꾀하는 형제들을 돌이킬 유일한 방법이 특별한 이적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또 틀렸습니다. 믿음이 없고 회개할 의지도 없는 이에게 이적은 특이한 체험 정도에 그칠 뿐,
그의 삶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은
이적이 아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곧 성경 안에 이미 들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하느님 말씀을 가슴에 새겨, 거룩한 삶을 다짐하고 실천에 옮기는 그 노력 안에 우리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잠언 19,17)라는
구절을 마음에 새겨 실천한다면, 비유 속 부자와 같은 이기적인 삶은 피할 수 있겠지요.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의로움과 믿음,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며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2022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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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
아모스 6,1ㄱㄴ.4-7 1티모테오 .6,11ㄱㄷ-16 루카 16,19-31
사랑의 눈으로 라자로들을 바라보자
요즘 옛날 얘기하면, “라떼는 말이야-”라고 하면 꼰대라는 말을 듣습니다.
문득 제가 강론을 하다가 저의 어린 시절의 얘기를 하면서 요즘과는 다른 뭔가를 얘기했는데, 생각해보니
삼사십 년도 더 지난 일이라 깜짝 놀라면서 나는 꼰대인가? 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지만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함께’라는 말이 말뿐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실로 함께 서로를 위해주고, 도와주고, 공존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해야 나는 라자로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뭘 해야 내 자신이 변화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거지 라자로는 부자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집 대문 앞에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는 라자로를 보지 못합니다. 늘 그 대문을 지나치면서도 어떻게 그를 보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무관심의 존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와는 무관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여도 보이지 않은 척하며 그냥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이 부자가 조금만 관심을 보여 주었다면, 거지 라자로는 인간답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옛날 예수님이 지어낸 이야기였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나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상황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소외된 이웃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현상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무관심이 아닌 사랑 가득한 관심으로 내 주변을 돌아볼 때입니다.
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이 아닌, 남에 대한 배려를 간직하는 사랑이 나의 구원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사랑의 눈을 통해 자신 주변에 있는 라자로들을 바라보고 나누는 한 주이길 청해봅니다.
광주대교구 이현민 가밀로 신부
2022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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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
아모스 6,1ㄱㄴ.4-7 1티모테오 .6,11ㄱㄷ-16 루카 16,19-31
“신부님의 나라는 부자입니까?”
페루 선교사로 살던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자매 한 분이 뜬금없이 질문을 해왔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의 나라는 잘사는 나라입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 거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처럼 가난한 이들은 모두 구원받을 텐데 말입니다.”
앞뒤 없이 건네는 말에 당황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순간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얘기를 나눈 곳이 마침 무료 급식소였기에, 그곳의 예를 들어 대답했습니다.
“이 급식소를 무료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은 독일에서 후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한 끼니를 잘 먹고 지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단지 부자라는 이유로,
그리고 그들이 부자 나라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면, 여러분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겁니까?”
그 자매는 먹으면서 듣다가 “신부님, 그건 아니죠.” 하면서 더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부자가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시작합니다.
그 부자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대신, 라자로의 비참함에 집중하고
그 점을 잘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후반부에, 부자는 라자로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서 즐기는 것에 여념이 없어서 그 가난한 사람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살아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이는 마치 행복이든 불행이든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런 뜻은 분명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바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어려운 이를 돌보며 본인이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이야말로
자신을 살릴 뿐만 아니라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 행복한 죽음을 원한다면,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라자로를 기억하며
그들에게 사랑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부자나라 독일 사람들의 사랑이
페루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흘러간 것처럼 말이죠.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웃에게 무관심하지 않겠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아멘.
의정부교구 황주원 미카엘 신부
2022년 9월 25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