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시. 어둠이 노래하는 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지직거림. 그곳에서 나를 밖으로 종용했다. 떠나는 두려움은 시작이 가져다주는 그것과 같이 주저를 낳는다. 나에게도 그 주저의 시간은 상당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동이 트고 기로에 가만 서서 잠시 명상에 잠겼다. 그래 떠나는 거다. 미련 없이 며칠간 현실을 등지는 거다. 그런 막연함으로 내가 서있는 곳은 09시49분 장항선 열차를 기다리는 영등포역 대합실이었다. 갑자기 힘이 났다. 미지를 둘러본다는 설렘이 두려움을 지배했다. 서울역을 떠나온 무궁화호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섰다. 3년만에 떠나는 즐거움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두 시간 후면 나는 낯선 곳에 서있는 나를 만나게 된다. 잠을 못 잔 탓인지 정신없이 꿈속으로 파고들었다. 기차에서의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는 산산조각이 난 채...ㅋㅋ.. 정오. 광천. 두 발이 딛는 첫 목적지였다. 몇 해전 여행 중 차를 얻어 타고 이곳을 지날 때 토굴새우젓을 얘기하시던 아저씨가 생각나서 결정된 목적지이자 출발점이었다. 새우젓과 바다를 연관시켰던 나의 계획이 처음부터 삐그덕을 알리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방이 산이요. 멀리 보이는 서해안고속도로만이 '서쪽'을 알리고 있었을 뿐이다.
[무념무상]
이번 여행 제일의 목적은 서해, 남해, 동해를 둘러보는 것. 더불어 가보고 싶던 절 답사.. 부산.. 7번 국도.. 등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늘 그리던 코스라 발길 가는 곳마다 기대를 더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내 차를 가지게 된다면 조그만 여유의 사치를 부려볼 수 있으리라는 상상과 함께 남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차 한가지 중요한 목적을 빠뜨렸다. 신나게 걸어다니기. 돌아가는 날 약간은 홀쭉해진 나를 상상해보며.. ^^ '대천, 서천'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두 시간 여를 하염없이 무념으로 걷기만 한 것이 아마도 그 의지를 시험해본 것이리라. 떠나 홀로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무념무상을 안겨다 줄 것을 믿었기에 형용할 수 없는 목적을 위한 언어도용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선명하게 내 믿음을 긍정해주었고, 그래서 돌아오는 내 모습에는 '나'라는 정의를 다시금 내려보기에 이르렀으니..ㅎㅎ
[국제종합주방기구]
순간순간의 새로움은 사람을 만나는데도 여지없이 설레임의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국제종합주방기구(주)'라고 쓰여진 스티커를 어지러이 싣고 있던 트럭이 첫 히치였다. 직접 운전까지 하며 배달하는 사장님이셨다. 홍성에서부터 목적지는 무창포. 달리는 중에도 연신 주문전화가 왔다. 부여, 서천 등등 충남전지역에서 주문이 왔다. 대천시내를 지나면서 지나는 식당 간판들을 가리키며 열에 아홉은 자기회사에서 식당세팅을 했단다. 서천 한산에서까지 온 전화통화를 들으며 혀를 내둘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은 '바다'에 간다는 막연한 나의 목적지에 무창포까지 함께 갈 것을 권유했다. 사실 대천은 몇 번 왔었지만 말로만 듣던 무창포는 내겐 처음이었다. 대천아래 해수욕장쯤으로 생각했던 무창포는 은근히 멀었다. '길'을 생각하지도 못했던-지도상으론 길이 없다.- 내게 무창포에서 조금만 더 가면 전라도란 얘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대천보단 조금 덜 발전된 무창포해수욕장은 그래서 더욱 깨끗한 느낌이었다. 막 개업한 횟집에 냉장고가 배달거리였는데, 일 좀 도와주고 밥을 먹고 가라는데 거절할 리가 없었다. 먹고 가라는 '밥'이 초밥에 광어, 우럭, 해삼, 멍게였으니 선택은 탁월했던 것이었다..ㅋㅋ
[무창포]
배를 채우고 드디어 바다 앞에 섰다. 목요일 낮3시 사람들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해수욕장을 따라 멀리 등대를 향해 걸었다. 탁 트인 바닷가를 걷는 자체는 내게 숨통을 트이게 하는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이제야 떠나왔다는 실감을 하게 되었다. 방파제를 걸어 등대아래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봄기운 가득 담은 햇볕에 찰랑이는 파도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한없는 풍족함에 젖어들게 하였다. 바다를 등진 두 시간의 강행군을 예고치 못한 채.. 무창포를 떠나오는 아쉬움을 안아 바다에 인사를 고하고 돌아서 나오는 길은 굽이굽이 언덕길이었다. 한참을 걸어 고개에 올라섰을 때 바다는 이미 저 멀리 아득함이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무창포-웅천 사이의 도로는 간간이 덤프트럭이 지나갈 뿐이었고, 웅천 읍내를 통과할 때까지 내 앞에 서주는 차는 없었다. 내심 전라도의 인심을 기대하며 금강을 건널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재촉]
웅천을 막 빠져 나올 때 히치한 차로 서천에 이르렀다. 4년 전 우용이와 걸었던 길을 거꾸로 타며-그땐 군산에서 하구둑을 건너 서천, 대천쪽으로 상경 중이었다.- 군산으로 향했다. 1차선 도로에 갓길조차 없었다. 조바심이 났다. 그 순간에도 조바심이 났던 것은 욕심을 부릴 힘이 남아있음이었고, 그것은 점차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잠시 서서 히치 불가 판정을 내린 후 논을 가로질러 올라선 곳은 서천우회도로였다. 예상대로 단번에 군산까지 가는 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때라 하구둑을 걸어서 건너겠다는 기대는 과욕이 되었다. 달리는 차안에서 바라본 붉은 노을에 만족해하며 하구둑입구에서 내려 군산-익산으로 이어진 도로 위에 섰다. 전라도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어둠을 뚫고 익산역에 도착한 나는 시각이 9시밖에 되지 않았음에 스스로를 재촉한 나에게 잘못을 부여하였다. 다음날 일정을 생각해본 뒤에도 자정을 넘어 새벽 2시까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다가, 세시간여 선잠을 청한 뒤 새벽 4시50분 익산역을 출발했다.
[아침] 2003/5/16
낯선 이는 개가 알아본다고 하였던가. 이른 새벽 '해우'를 위한 빈 주유소에서 개가 짖어댔다. 하지만 여행객으로서의 뻔뻔함으로 유유히 그곳을 빠져 나와 걷기 시작했다. 한시간을 걸어 익산과 김제의 경계에 이르렀다. 여섯시도 되지 않은 시각. 막연한 시도와는 달리 운 좋게 택시영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아저씨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새벽기운을 안고 달려 만경강, 동진강을 단숨에 넘어서 부안읍에 도착했다. '선운사'. 막연히 고창이라는 생각에 터미널에 들어갔다. 5000원. 난 터미널을 돌아 나와 걷고 있었다. 아직 7시. 목적지에 연연하지 않기로 하였다. 한적한 시골 속으로 들어가니, 사방은 막 깨어난 아침기운을 담고 있었다. 한시간여동안 평화로운 시골길을 걷다 '송정' 버스정류장에 섰다. 정류장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버스가 곧 오려나보다. 사람들이 제법 몰려든다. 버스시간이 가까워졌나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버스가 반대편에서 오고 있는 것 아닌가. -부안읍으로 들어가는 버스였다.-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앞에 섰다. 마침 등교시간이라 학생들도 꽤나 탔다. 방학중에나 돌아다닐 법한 무전여행객을 보는 그들의 시선과 그러한 그들의 일상을 담아가려는 내 스케치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대기하던 이들을 모두 태운 버스가 유유히 시야에서 벗어나자 고요가 찾아들었다. 한동안 멍하니 푸른 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버스가 멀리 먼지를 일으키며 덜덜덜 달려왔다.
[선운사]
부안과 고창을 잇는 중간쯤에 위치한 줄포에 내렸다. 한시간 동안 또다시 버스를 기다리며 허기진 배를 빵과 우유로 살짝 달랬다. 버스를 타고 십분 여만에 흥덕에 들어서자 차라리 걷지 못한 시간이 아쉬웠다. 이내 선운사 표지판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트럭과 승용차로 조금씩 선운사로 다가가며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10시. 익산출발 다섯 시간만에 선운사 경내에 들어섰다. 아침이라 다른 객의 흔적도 드물어 조용히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산에 어우러져 안겨있는 모습에 눈이 먼저 취해 버렸다. 강당 한턱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목을 축이고 다리 주무르기를 잠시 목탁소리와 예불소리에 귀가 취해가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살며시 선운사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에 온 정신을 내어놓고 있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를 착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찰나 어디선가 타인의 소리에 꿈은 하늘로 사라졌다. 돌아 나오는 길은 무척 아쉬웠지만 이미 관광버스 몇 대는 온 듯한 참배객들이 몰려오고 있었기에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었다. 구수한 사투리가 흥건한 버스에 몸을 실어 나오는 길에는 고향의 향기와 잡념을 맞바꾸고 있었다.
[정체]
고창읍내에 들어서 잠시 길을 찾았다. 지방도로가 이어진 것이 난코스가 예상되었다. 읍내를 벗어나 멀리 고창읍성을 바라보며 길은 잡았지만 지나가는 차들이 없었다. 휴양림을 알리는 표지판은 이내 산고개의 존재를 알리었고, 역시나 곧 오르막 차로 앞에 섰다. 나아가지 못한 채 서서 삼십여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장성으로 가는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자기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는지 나이를 묻는다. '스물 넷.' 그러자 자기는 몇 살로 보이느냐고 묻는다. '...' 스물 두 살이란다. 속으로 약간 놀랐다.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들 앞서가는 듯한 사람과의 만남 속에 나의 신경세포가 일제히 주춤거린다. 아울러 이제 이런 여행도 많이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성은 광주의 위성도시쯤 되는 도시였다. 장성에 들어서며 1번 국도를 접하는 순간 눈앞이 깜깜했다. 담양으로 난 국도를 찾아 걸어나갈 생각이 아득했다. 역시나 담양으로의 24번 국도는 1번 국도와 상당한 거리를 함께 이어갔다. 장성에서 담양으로 가는 길은 무등산자락을 뒤로하며 달리는 길이었다. '허걱. 무등산이라니.' 섣불리 지리산을 예상했던 내 뒤통수를 한껏 내리치는 격이었다. 지리산은 동으로 몇 십리는 더 가야 있다하니 한참을 잘못짚은 것이었다. 지루한 정체 끝에 다다른 담양은 이미 모든 사고를 포기한 채 버스에 오르게 만들었다. 남원에서의 광한루도 넘겨다봄직 했지만 이미 '화엄사'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어쩌면 지리산 탐독을 미리 못한 탓이 더 클 수도 있다. 노고단, 화엄사, 쌍계사를 막연히 그리고 있었기에...ㅡ.ㅡ; (노고단은 차를 타고 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보았던 '구례, 곡성' 표지판에 대한 막연한 기대심리였으리라.)
[화엄사]
담양-남원-구례간을 비몽사몽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지도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헉..-.-;; 이미 시간은 6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매표소 직원들은 퇴근 전이었다. 게다가 곧 퇴근이라고 가방을 맡아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1km 전방 산 속에 화엄사가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잴 것 없이 걸어 올라갔다. 웅대한 지리산자락으로 들어가는 길은 외경심마저 들었다. 그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찾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저 자연의 위대함에 탄식을 자아낼 뿐이었다. 나는 어느새 화엄사경내에 들어서고 있었다. 국보, 보물로 가득한 화엄사. 그 느낌은 어스름한 분위기, 위엄의 분위기와 어울려 한 폭의 수묵화를 지켜보는 장대함이었다.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보며 여느 곳의 그것보다 위엄 있는 보물들을 접하며 황홀경에 이르게 하는 순간 7시 예불을 알리는 의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엄숙하고도 고요했다. 북소리, 종소리.. 모두가 하나같이 단아하고 청명했다. 여기저기서 스님들이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절도 있고 품위 있는 그들의 모습을 한 귀퉁이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반야심경. 역시 절에서 직접 듣는 맛이 제법이었다. 날이 저물어 가는 중이라 지리산-화엄사-'나'는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나는 이미 모든 만족을 안고 있는 듯 하였지만 어찌 지리산의 장엄함을 이에 비할 수 있겠는가.
[야행]
아직 산과 하늘이 구분을 지어내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또 다른 행복을 찾아 나섰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지리산 계곡이란 말인가. 이미 두발은 아직 차가운 계곡 물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정말 시원하고 깨끗했다. 그곳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더욱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어갔다. 하지만 흰색 점퍼를 입은 계곡에서의 움직임이라는 나를 상정하자 순간 공포에 휩싸였다. 밀렵꾼에게 비명횡사해도 아무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계곡에서의 추억은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산 길은 이미 해가 지고 피아구별이 되지 않는 깜깜한 지리산의 밤이었다. 일주문을 지나쳐 주차장을 뒤로하자 칠흙같은 어둠만이 존재했다. 구례-하동 국도를 만나기엔 6km가 넘는 행보가 불가피했다. 하지만 시간은 아직 여덟 시밖에 되지 않은 터라 여유가 있었다. 달무리를 보고 다음날 날씨가 걱정되기도 하였지만 당장은 지리산의 기분을 만끽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삼거리가 보이려는 찰나에 종혁에게 전화가 왔다. 종원이 지리산에 간다고 했다는 것이다. 잘하면 객지에서 지인을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종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기차를 탄다고 하였다. 아침에 진주에 도착한다니 잘하면 시간과 코스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섬진강]
진주땅에서의 상봉을 기대하며, 하동으로의 히치가 시도되었다. 야밤히치는 우용이와의 새벽히치 기억으로 별로 부담이 되지 않았다.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각. 간간이 비추는 헤드라이트에 손을 흔들어대던 나에게 갑자기 후진해오는 한 대의 지프가 있었다. 상당히 터프해 보이는 누님이었다. '이 시간에는 버스도 끊기고 차들도 별로 없어서 한참 서서 기다리며 고생할 것 같아서'라는 말과 함께 태워주었다. 히치를 하면 항상 그렇지만 그 중 더 고마우신 분들은 시간을 내주시어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돌아가시는 분이다. 이 누님은 10분이면 집에 가실 것을 하동까지 30분 거리를 일부러 태워주시고 돌아가셨다. 정말 고마운 마음뿐이다. (물론 시속 130km의 구불구불 행진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구례에서 하동까지 내려가는 길은 섬진강 강변을 따라 내려가는 국도다. 항상 섬진강을 그렸던 나로선 어둠 속에 그 모습을 완연히 볼 수 없는 아쉬움이었지만, 새색시같이 살짝 불빛에 내비친 섬진강의 모습에 연신 감탄사를 뱉어내고 있었다. 낮에 달렸다면 또 다른 맛을 선사해줄 것을 의심치 않으며 꼭 다시 그 길을 행하리라 다짐했다. 한편은 어마어마한 산줄기요, 다른 한편은 아름답게 수놓인 강줄기이니 섬진강 가에서 시 구절이 저절로 읊어졌다는 것이 가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10시. 섬진강이 감싸 두르는 하동에 도착하여 역을 찾아가니 예상대로 중간급 역이었다. 이곳에서 묵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우선 대합실에서 짐을 풀었다. 꿀맛 같은 라면(일명 뽀글이)을 끓여먹고, 잠잘 옷을 갈아입었다. 1시. 막차가 지나갔다. 대합실에서 가족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모두 가족을 만나 함께 나갔다. 역장이 오더니 잘 데가 없냐고 한다. 나가야하느냐고 물으니 불을 끌 테니 그냥 자라한다. 그날 하동역 대합실에서의 꿈나라는 짧지만 정말 단맛이었다.
[만남] 2003/5/17
새벽 5시에 눈이 떠졌다. 전날 종원이가 7시쯤 진주에 도착한다고 하여 만나기로 하였다. 아침 기운은 아직 찼으나 지체할 수 없었다. 하동-진주 50km.(아마도 하동을 지나는 첫차가 종원이가 탄 기차인 듯 했다. 하동에서 기차를 탔다면 좀더 극적 만남이었겠지만 차비는 나를 50km의 행보 위에 올려놓았다. ^^;) 30여분을 걸어 하동읍이 바라다 보이는 고갯길에 올랐다. 이른 새벽 간간이 오는 차들이 바로바로 태워주어 종원이 탄 기차와 얼추 맞추어 갈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눈은 지리산 남쪽줄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북천'에 내려서 걷고 있는데 무궁화호 열차가 북천을 정차했다 서서히 출발 중이었다. 얼른 종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예상대로 그 열차 안에 타고 있었다. 혼자서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는 참에 트럭한대를 세웠다. '진주'. 열차에 뒤쳐지는 순간 다행히도 진주까지 가는 차를 얻어 탄 것이다. 진주는 근래 몇 번 가게 되어 조금 낯익은 도시다. 진주 입구에서 내려서 터미널까지 버스를 탔다. 7시30분 드디어 종원을 만나게 되었다. 여행중의 만남이라니 아직은 어리벙벙했다. 어쨌든 덕분에 진주성 구경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일석이조였다. 우리는 촉석루에 올라앉아서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의암에서 사진 한 컷을 남기고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는 이내 헤어져야했다. 종원은 8시30분에 지리산 대원사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한시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낯선 곳에서의 낯익음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으로 묘한 기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종원이가 마지막에 던진 한마디 '삼천포 등대'의 영향으로 나는 삼천포로 가는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삼천포에 빠지다]
일전에 진주-사천-고성으로 다녀서 정작 코앞에서 삼천포에 빠져보지 못한 시도를 이번에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삼천포항에 들어서자 색다른 바다, 남해가 펼쳐졌다. 여기가 삼천포구나! 라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으로 남해한구석의 나를 발견했다. 바다에 떠있는 배들과 섬들과 등대를 한 폭의 그림 속에 집어넣었다. 그 어우러짐에 취해 홀로 가만히 앉아 한참을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며 웃음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삼천포는 삼천포였다. 너무 많이 빠져있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야 했다. 고성 상족암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그러나 한참을 헛돌았다. 역시 지도가 없는 틈을 타 머릿속에서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이었다. 돌아가는 지름길은 보리밭을 관통하는 길이었다. 주위 아저씨께 물어보니 맥주보리란다. '어쩐지 색깔이 진하더라..' 보리밭 벌판 한가운데서 더위를 못이기고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누가 본다한들 어떠리..' 결국 한시간을 헤맨 끝에 길을 찾아 히치에 성공할 수 있었다. 삼천포에 발 도장을 찍고 나가는 순간이었다.
[상족암]
삼천포를 나와 고성의 상족암을 보고 부산으로 가는 것이 이날 남은 일정이었다. 상족암은 상다리를 닮은 기암괴석이었는데, 공룡발자국과 함께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삼천포의 남해와는 다른 분위기의 남해를 접할 수 있다는데 더 이끌렸다. 병풍바위가 말해주듯 근처 바위들이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어 더욱 가관이었다. 해변으로 나아가 공룡발자국들이 밀집해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김밥 한 줄로 점심을 해결했다. 발자국에 쏙 들어앉아 밥을 먹으니 억만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공룡의 숨결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아쉽게도 상족암은 멀리서 바라보는데 만족해야했다, 공룡들의 발자국들이 쉬이 놓아주지 않았고, 게다가 충분히 바다내음에 매혹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오는 길에서 얻어 탄 차에서 삼천포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읍내까지 갈 수 있었다. 가장 기억나는 대목은 "삼천포 사람들은 '삼천포에 빠진다'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는 것"이다. ㅋㅋ
[부산입성]
고성에서 부산까지 가는 길은 사실 큰 고비가 많을 것 같았다. 마산, 창원, 김해 등등 쟁쟁한 시내들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이 좋았는지 고성에서 단번에 부산에 가는 차를 히치할 수 있었다. 큰 행운이었는데, 잠시 새벽히치를 떠올리게 하는 아찔함도 함께 기록된다. 출발은 좋았다. 아저씨가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개의치 않고 탔다. 얘기를 들어보니 며칠 밤을 샌 것 같다. 방금 통영에서 새벽낚시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란다. 부산까지는 막히지 않으면 한시간반, 막히면 두시간 정도를 예상했다. 두 시간 여를 달려 '사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문제였다. 고가를 탔는데 길이 꽁꽁 막혀 꼼짝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토요일 오후 '부산'이라는 대도시는 입구에서부터 그 위세를 톡톡히 자랑하고 있었다. 길이 막히자 아저씨가 졸기 시작했다. 급정거를 반복하며, 之자 운행을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나 또한 엄청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같이 졸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저씨가 잠을 깨려는지 연신 전화를 한다. 내용은 '지금 졸음운전 중'...ㅡㅡ;; 결국 세시간을 꼼짝없이 차에 앉아 떨고 있던 나는 부산의 강남이라는 서면에 내리게 되었다. 롯데월드, 백화점.. 부산의 중심지이긴 한가보다. '서면'.. 부산지하철 1, 2호선의 유일한 환승역이다.
[범어사]
부산 금정산에 위치한 범어사로 가기 위해 지하철에 올랐다. 토요일 오후라 무척 붐비었다. 무엇보다 시장통 같은 그들의 일상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여기저기서 싸우는 듯한 사투리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쳐다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부산'이 실감났다. 서울의 낯선 이들과의 부대낌과는 다른 독특한 맛의 이방인이 된 짜릿한 경험이었다. 범어사역에서 내려 코앞에 범어사가 자리하길 바랬다면 큰 오산일까. 범어사는 금정산 중턱에 자리잡은 절이었던 것이다. '범어사.' 부산에 여행을 가게 되면 꼭 가고 싶었던 곳이다. 아마도 '범어사역'이 가져다주는 묘한 이끌림이었던 것 같다. 범어사의 첫 인상은 많은 사람들. '부산의 불교신자들은 여기 다 모였나'라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약간은 관광지느낌을 풍기면서, 아울러 금정산고속철도관통의 논란 속에 절의 기풍은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에 휩쓸려 경내에 들어섰다. 크긴 크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삼국유사를 끄집어내기에는 내 능력의 한계가 금방 드러났다. 조용히 난간에 기대어 감상에 젖어보려는데, 마침 예불을 알리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날이 불공을 드리는 날인지 수십 명의 불자들이 우르르 몰려 그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다들 북소리와 종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도 없이 뒤로 간신히 빠져 나왔다. 더 이상의 아늑함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아쉬웠지만 돌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자갈치시장]
범어사역에서 40분 정도 지하철을 타고 부산항 자갈치시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자갈치시장'. 막연히 자갈치 아지메를 기대하며 시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자갈치시장뿐 아니라 별의별 시장이 다 있었다. 그러나 자갈치 시장을 먼저 보았던지라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부두를 따라 길 양옆 진열대에 올려진 생선들이 정말 신선했다. 특히 유난히 반짝거리는 갈치가 몇 무더기씩 가판에 쌓여 있었다. 이때 내 마음은 이미 산꼼장어를 구워내는 포장마차에서의 소주한잔으로 기울고 있었다. 시장 끝에서 끝까지 걸어볼 속셈으로 마음껏 구경하며 걷고 있는데 저 앞에 '자갈치시장'이라 적힌 간판의 건물이 있었다. TV에서 보던 그곳이었다. 포장마차거리와는 대조적으로 이미 다 팔고 파장에 들어가고 있었다. 아차! 역시 이곳이 진짜 자갈치시장이었다. 소주한잔에 혹하여 겉만 보고 갈 뻔했다는 마음을 쓸어 내렸다. 노량진수산시장과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 중에서 대게가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저거 한 마리에...쩝..;;' 시장구경을 얼추 마치고 부산의 밤바다 경치를 맛보기 위해 부둣가로 나갔다. 큰배들이 나란히 정박해 있어 탁 트인 구경은 못했지만 검은바다는 그 자체로 고요와 적막을 안겨주었다. 한시간 동안 이리저리 시장과 부두를 누비며 구경을 마치고 소주한잔을 위하여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산꼼장어구이에 소주한병. 23,000원.
[태종대] 2003/5/18
부산역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오전6시 태종대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가는 길에 버스에서 '동삼동패총' 표지판을 봤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며 위치라도 알아놓고 싶었는데.. '바닷가 어디쯤이겠지' 하며 바다 쪽을 바라보는 순간 멀리 말로만 듣던 오륙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 정말 기이하게도 일렬로 놓여진 섬들을 보는 순간 이들을 돌아가던 연락선들이 머리 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태종대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6시20분. 이른 시간이라 입장료는 받지 않았다. 하지만 태종대는 이 지역사람들에게 산책, 조깅 코스인 듯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태종대에 오르고 있었다. 한 시간쯤 순환도로를 걸으니 전망대가 보였다. 아마도 태종대 최남단인 듯 했다. 가만히 서서 아침해가 뜨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뻥 뚫려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사진기를 가져가지 못한 게 더욱 아쉬운 순간이었다. 부산갈매기를 담아야 하는데.. 전망대를 지나 좀더 오르니 신선바위, 영도등대로 가는 길이 있었다. 하지만 영도등대는 보수공사 중이었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고, 절벽 아래로 내려갈수록 보이는 것은 거센 파도뿐이었다. 그러던 중 자갈마당에 들어서게 되었다. 거센 파도에 모가 깎여 둥글둥글해진 수석들이 엄청 많았다. 파도가 한번씩 칠 때마다 쓸려 내려가는 돌들이 내는 소리는 무엇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시원시원했다. 그 소리를 전하기 위하여 많은 이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절벽에 가로막혀 성공하지 못하였다. 절벽 아래에서 올라와 영도등대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내려오는데 '태종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와 같은 경우로 태종대 근처의 가게이름에는 '태종'이 들어간 이름이 참 많았다. 태종△△, 태종○○, 태종◇◇... 혼자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해운대]
두 시간반의 태종대 기행을 마치고 해운대로 가기 위해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역에 도착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역 근처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바닷가로 나갔다. 해운대는 이번 여행일정의 정점을 이루는 곳이다. 남으로남으로 행진은 이를 기점으로 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때문이었다. 주말의 해운대 해수욕장은 계절과 상관없이 붐비는 듯 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모래사장에는 꽤 많은 인파가 모여 휴일의 한낮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나마 한적한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이르러 맘껏 여유를 부리며 누워 있을 참이었다. 잠시 달맞이 고개를 오를까 생각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모래밭에 누워버렸다. 태양은 그런 나를 한껏 더 누르고 있었고, 난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부산 구경도 이것으로 일단락 되는 것이었기에 더더욱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1시20분 '덕하'로 가는 통일호 열차를 타기 위해 모래사장을 빠져 나왔다. 부산도 빠이∼
[착오]
1,200원 짜리 통일호로 울산아래까지 가는 선택은 옳아 보였다. 하지만 그 판단이 틀렸음을 알아차리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덕하'는 울산시내에 들어가는 길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마침 역에서 울산 지도를 구하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해운대에서 취한 기분이 덜 깼는지 이리저리 길을 헤맸다. 부산가는 차를 잡고 포항 가자는 격이었다. 사실 예상과는 달리 '덕하'는 울산공업단지와 상당히 가까운 거리인 듯 했고, 곧 울산시내임을 알리는 시내버스 행진은 히치 불가판정을 내리게 하였다. 울산은 광역시였다. 버스를 타고 울산시내에 들어가니 더욱 막막해졌다. 지도를 보고 7번 국도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해 걸었다. 하지만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논길을 찾는 꼴이니 쉽사리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간신히 시내에서 북쪽 7번 국도로 나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종점은 모화였고, 그곳은 이미 경주시에 접한 곳이었다. 원원사지 표지가 있었으니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게다가 그대로 길을 따라가면 불국사란다. 실수다! 7번 국도를 막연히 해안도로로만 생각했던 탓이 크다. 7번 국도는 경주, 포항을 지나서야 비로소 해안도로로서의 모습을 갖춘다. 울산-감포-포항 계획은 수정작업에 들어간다.
[경주]
경주를 히치여행에서 빼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차를 잘 태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경주로 들어가는 외길로 들어서 버렸으니 앞길이 깜깜했다. 결국 토함산을 넘는 쪽을 선택했다. 불국사 입구에는 새 길이 나있었는데, 불국사까지 거의 직진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 길 입구에 섰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는데도 차들이 서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승용차 한 대를 세울 수 있었다. '감포'에 가신단다. '일단 토함산부터 넘자.'는 생각으로 올라탔다. 그러나 경주로 들어온 이상 대왕암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물론 또 다른 목적은 동해! 토함산을 넘어 감포와 울산으로 갈라지는 '양북'에 내린 것이 여섯 시 반. 그곳에서 다시 히치를 하여 대왕암에 가는데, 감은사지 두 석탑은 여전히 그 위용을 뽐내며 고즈넉이 서있었다. 동해는 이미 해를 넘겨주고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왕암 앞 모래밭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서해, 남해와 달리 끝없는 푸르름에 온정신을 던질 수 있는 동해다. 7시가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호미곶은 다음날로 미루어지고 하룻밤은 감포로 결정되었다. 감포 9km. 차로 달리면 15분 남짓한 거리다. 그러나 이곳은 해안도로였다. 나 같아도 데이트하는데 방해받기 싫었을 것이다. 나는 결국 히치를 포기한 채 야밤 횡사나 면하기를 빌며 해안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덕분에 밤바다는 한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걷다가 잠시 바닷가 바위에 걸터앉아 외로움을 노래했다면 오바일까. ㅋㅋ 어둠이 만드는 검음과의 유일한 구분이라면 파도가 지어내는 흰 물거품이 전부였다. 10시가 넘어서야 조그만 어촌 '감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읍내에 있는 게임방 하나가 이날 밤을 지낼 유일한 곳이었다. 터미널에서 05시50분 첫차를 확인한 후 게임방에 들어갔다. 5,000원어치 5시간을 충전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두 시간이 못되어 이내 잠들어버렸다.
[호미곶] 2003/5/19
5시경에 게임방을 나왔다. 혹시나 일출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방파제로 나갔지만 구름이 잔뜩 낀 날씨였다. 방파제 위에서 몸을 풀고 다시 행군을 위한 마음을 다잡았다. 어제의 악몽을 떨치며.. 감포에서 구룡포를 거쳐 호미곶에 이른 시간은 8시. 해맞이 공원에는 이른 아침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그곳에는 상생의 손이 마주보고 있었는데, 정말 큰 손이었다.(모델이 누구였을까..ㅡㅡa) 하나는 육지에 하나는 바다에 세워놓은 것을 보니 상생의 뜻을 알 것 같았다. 호미곶. 우리나라 최동단에 서있는 자체로 마음속에 하나의 이정표가 새겨졌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 아쉽게도 등대박물관은 관람하지 못하였다. 그저 어마어마한 호미곶 등대에 위안을 두었을 따름이다. 바다는 나를 부르는데... 나는 대보-구룡포-포항터미널로 나왔다.
[강구항]
'청하'. 아마도 지명에 혹했으리라. 포항에서 7번 국도로 나가기 위해 내릴 곳을 '청하'로 택했다. 포항을 빠져 나와 7번 국도를 20여분을 달리자 '청하'라는 곳에 이른 것 같았다. 그러나 간이터미널이라도 있을 줄 알았던 내게 '청하'는 너무 빠르게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부랴부랴 운전기사 아저씨께 물어보니 아무도 내리지 않는 것 같아 서지 않았단다. 덕분에 몇 km 북쪽으로 위치한 '송라'라는 곳에 내리게 되었다. 어차피 북으로 올라가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2000년 겨울답사 때 울진에서 포항으로 7번 국도를 따라 달릴 때도 바다의 모습은 간간이 비추었기에 실망은 일렀다. 그때 영덕으로 가는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15분 정도를 달리는데 우측으로 '그대 그리고 나 촬영지' 간판이 서있었다. 그곳에서 내려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강구'였다. 막연히 영덕을 가려 했는데, 강구항이 차라리 나았다. 바다를 따라 항구 쪽으로 걸어가니, 대게는 보이지 않고 대신 뜨거운 햇볕 아래 엄청난 양의 새끼가자미들이 말려지고 있었다. 일하고 계시는 아저씨께 용도를 물으니 고추장에 찍어먹는 술안주란다. ㅋㅋ. (몇 마리 챙기려다가 말았다.^^;) 멀리 '오포등대'를 향해 잔잔한 파도가 치는 모래사장을 걸으며 '그대 그리고 나'의 마지막 장면을 연출했다. ㅎㅎ 한시간여 바다마을 '강구'를 구경한 후 다시 7번 국도 위에 섰다.
[경찰]
7번 국도 위에서 히치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순찰차가 멀리서 다가온다. 아마도 내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러더니 나의 앞길을 가로막고 행선지를 묻는다. '서울이요' 의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가. 99년 여름에도 새벽1시경에 홍성-서산을 걸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새벽 순찰 중인 경찰이 우리의 행선지를 물었었다. '태워주지도 않을 거면서...' 위험의 당부를 받고 다시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 경찰들 몰래 영덕까지 입성할 수 있었다. ㅋㅋ. 내가 걷겠다고 하는데 누가 나를 말리랴. 그러나 영덕에서 또 다른 경찰(?)을 만났다. 바로 카드체납자들을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두 명의 삼성카드 직원이었는데, 마치 덤앤더머를 보는 것 같았다. 내 나름대로 파악한 경상도 남자의 특성은 무뚝뚝 아니면 수다인 두 부류였다. 그들은 정말 쉴새없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나더러 혼자 다니느냐고 물은 한 분은 자신은 혼자서는 심심해서 절대 다니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 '후포'. 체납자 명단을 가지고, 동사무소로 가더니 등본을 뗀다. 그리고 번지수만을 가지고 막무가내로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중화요리, 분식집은 주소를 물어보기에 딱 좋은 곳이다. 길가는 티켓다방 아가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읍 하나를 수없이 오가며 수소문하더니 간신히 체납자의 직장을 찾아낸다. 이미 굳게 문을 닫은 카드대행회사였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자주 간다는 다방을 알아낸다. 다방주인에게 물어보나 자세히 알려줄 리가 없었다. 명함은 주고 나왔으나 알아도 연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들의 추측이었다. 내가 이들의 차를 타고 '후포'라는 조그만 읍내를 돌며 소일하는 일에 동참한 것은 그들에 대한 내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란 생각을 하며 바쁘면 내리라는데도 괜찮다는 대꾸를 했다. '후포'에서의 수색작업을 실패로 마친 그들은 또 다른 체납자 수색을 위해 '울진'으로 향했다. 허탈함은 허기짐으로 이어졌는지 어묵 몇 개로 허기짐을 달랬다. 울진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강원도였다. 함께 하는 세시간 동안 카드회사직원들의 체포작업은 볼 수 없었지만 나로선 특별한 경험이었다. 울진 북면에 나를 내려준 덤앤더머는 다시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갔고, 나는 또 다시 길 위에 섰다.
[별난 가족]
길을 걷다가 잠시 해변으로 들어섰다.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해변의 사색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부구'에 있는 나곡해수욕장의 끄트머리였다. 바위에 걸터앉아 으스름한 해질녘의 바다를 만끽하며, 세차게 부는 바닷바람에 마지막 고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기에 머릿속엔 강원도의 밤바다를 그리고 있었다. 전날 감포와 같은 만약의 야밤 행진에 대비하여 길가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7시가 가까워서야 나를 강원도에 옮겨줄 봉고를 얻어 탈 수 있었다. 부부와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딸 하나가 타고 있었다. 이 가족은 서울에 간다고 했다. 삼척에서 오징어를 사서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계획이었다. '흠, 서울이라..' 서울로 가려는 맘은 가득했지만 아직은 강원도의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울진에서 삼척으로 가는 길은 드디어 7번 국도다운 절경을 안겨다주었다. 꼬불꼬불 도로를 달리며 저 아래 펼쳐진 동해와 기암절벽들의 모습에 한참 감탄하고 있던 찰나에 이 가족들은 앞차의 추월을 얘기하고 있었다. '아빠, 저 차가 우리를 앞질렀어..' '그래? 그럼 다시 앞질러야지..' '...;;' 앞에 엄청난 목재를 싣고 가는 트럭을 보며, '저런 차들은 알아서 길을 비켜준다고, 오히려 저런 큰 차들이 더 친절하다고..봐봐' 커브 길에 심하게 중앙선을 이탈하자, '어? 이거 왜이리 밀려..길이 미끄러운가' ' 그러게 아빠, 살살해' '....;;' 나는 손잡이를 꼭 붙잡고 어두워져 가는 바다를 감상해야 했다. 삼척을 지나는데 딸이 지도를 보더니 항구를 지나쳤다 한다. '그래? 그럼 다음 항구로 가면 되지..' 나는 이런 식으로 동해를 지나 강릉까지도 가겠다싶었다. 가족들의 머릿속엔 항구에 가면 오징어자판이 있고 신선한 오징어를 언제든지 살 수 있으며, 그러면 곧장 서울로 갈 수 있는 것이었다. '다음 항구는 동해인데.' 나는 최대한 북쪽으로 갈수록 좋은 것이었으니 묵묵히 그들의 무모에 응해주었다. 동해에 들어가는 길에 '동해항' 표지판이 보인다. 그러나 이미 지나치고 있었다. 딸이 그런다. '아빠 지나쳤어. 돌아가야 해..' '뭐야? 또? 그냥 서울 가서 오징어사자. 그게 그거일거야.' 그러나 거기까지 올라온 것이 아쉬웠는지 항구를 찾아 차를 돌린다. 그러나 동해항으로 가는 길은 깜깜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던 듯 싶다. 길가는 아저씨에게 묻는다. '오징어 사려고 하는데요.' 그랬더니 동해항은 화물전용 항구란다. 여객선도 없고, 생선을 파는 곳도 없단다. 조금 더 가면 또 다른 항구가 나오는데 거기엔 있을 것이란다. 나는 묵호항을 얘기하는 것 같아서 가족들에게 묵호항을 알려주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징어'를 샀을 것이다. 동해시내에서 내린 나는 그들이 꼭 오징어를 사서 서울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노숙]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강릉까지의 50km는 부담이 되었다. 무엇보다 전날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에. 결국 마지막 밤은 묵호역 근처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묵호역에서 구한 강원도 지도를 펼쳐놓고 다음날 서울로의 일정을 생각했다. 강릉, 태백, 정선의 도로를 살피다가 정선 쪽을 택했다. 강릉에서 나오는 새벽첫차를 타고 사북 다음 역인 증산에서 내려 걷는 것이었다. 거기까지가 기본요금(4,400원)이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정선-평창-제천-원주로의 귀경길을 그리며, 시간 보낼 일을 생각했다. 항구에서 밤바다나 구경할까 하고 바다 쪽으로 걸어나갔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인데 인적이 드물었다. 파도소리를 따르는 기분으로 어느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아가씨들을 별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길이 막혀있어 돌아서는 순간 나를 부르는 한 마디. '어디가 오빠, 이리와, 예쁜 영계있어.' 순간 '아차' 하고 바다 생각을 뒤로하고 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덕하'에서 보았던 종류의 간판들이 눈에 띄었을 때 간파했어야 했다. ㅡㅡ;; 12시. 묵호를 지나는 마지막 열차가 떠나자 문이 잠겼다. 이렇다할 대처도 못한 채 다만 4시쯤 다시 문을 연다는 정보만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역 앞 벤치에서 별을 보며 선잠을 청하였다. 눈을 떠보니 새벽 2시가 조금 넘었다. 게임방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다가 역에 들어섰다. 4시. '조금만 자고 일어나야지'라는 안이한 생각과 함께 의자에 앉아 눈을 붙였다.
[물거품] 2003/5/20
그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린 시간은 5시30분. 이미 첫차는 한참 전에 흔적을 감춘 뒤였다. 누구에게 하소연하리. 어젯밤에 표를 팔던 직원누나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표를 반환하고 무턱대고 역을 나와 강릉으로 걸었다. 순간 모든 힘이 빠져버리며 고속도로에서 서울 가는 차를 얻어 탈 심산이었다. 그러나 5시 첫차는 놓쳤지만 시간은 여전히 새벽이었다. 결국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이성을 되찾고 사태파악에 들어갔다. 다음 기차를 기다리기엔 세시간의 상실이 너무 컸다. 강원도를 그어내는 국도들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언젠가는 꼭 내 흔적을 남기리라 다짐하며 07시26분 청량리 행 표를 샀다. 서울로 간다는 생각에 모든 긴장이 풀렸는지 배가 고파왔다. 역 앞 식당에서 해장국 한 그릇을 비워낸 나는 서울로 갈 일만을 생각하며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청량리-강릉 기차는 몇 번 탔지만 깜깜한 밤기차라 구경은 별로 못했기에 산 구경이나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몸은 이미 완전히 나사 풀린 상태였다. 해안을 달리며 바다구경을 마치자마자 꿈나라에 찾아갔다. 그리고 잠결의 기억으로는 사북역, 원주역이 전부였다.
[일상]
드디어 서울이다. 100% 목적을 달성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어떠한 형태로든지 얻은 것이 있을 것이다. 가슴 한구석에 추억이란 이름으로 고이 묻어 놓으며, 나는 일상으로 복귀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내 안을 비워내고 새로움을 채워 넣어보았다. 가끔은 내가 어디 서있는지 모를 기억으로, 가끔은 본래 내 모습으로 다녔지만 그 모든 모습들은 결국 '내모습'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상탈출은 계속될 것이다. 나와 또 다른 나의 전쟁터의 현장으로..
첫댓글 한글로 12장인데, 일로 옮겨보니 상당히 기네..^^; 여름여행도 빨리 떠야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