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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영성 관리
목회자들의 상황과 영성 관리
1장 목회자들의 상황과 영성 관리
1. 목회자들의 고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목회자들의 최종적인 영적싸움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목회자가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영적 싸움을 벌이는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롬 12:2) 올바른 목회를 펼쳐 나가기 위함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목회 경력이 쌓여질수록 육체의 현상과 비슷하게 영성이 유연하기보다 석회질이 되어 경직되어 가는 '영적 침체감'이다. 이러한 영적 침체 상태에서 벗어날 해법을 찾지 못하고 영성 관리의 한계에 봉착하게 될 때 결국 영적 위기를 느끼고, 영적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이때 목회자는 목회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된다. 결국 자신의 영성과 목회에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영적 침체 및 위기의식과 정체성의 불확실성에 대한 혼돈은 우리보다 훨씬 오래 전에 기독교문화의 토양을 이룬 서양에서도 목회자들이 자신들 나름대로 이와 같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헨리 나우웬(Henh Nouwen)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그의 책, 「예수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세속적인 사람들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있어. 하나님도 필요 없고 교회도 목사도 필요 없어.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단 말이야.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게 하도록 더 열심히 해야 해. 문제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감이 없는 거야. 만일 아프다면 유능한 의사가 필요할 테고, 가난하다면 능력 있는 정치가가필요하지. 또 기술적 문제가 있다면 유능한 엔지니어가 있어야 하고, 전쟁이 일어났다면 능력 있는 협상가가 필요하겠지. 하나님, 교회, 목회자가 지난 수 세기 동안 무능력의 골을 메워 왔지만 오늘날 그 골은 다른 방법으로 메워지고 있어, 그러기에 우리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영적인 대답은 필요 없어."
이런 세속화의 풍토 속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점점 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외곽으로 밀려나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계속 성직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으로 회의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사역을 하면서 경험하는 가장 큰 고통은 자존감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됩니다. 아주 바쁘게 보내지만 그들은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노력이 별 성과 없는 듯 보입니다. 출석 교인들이 점점 줄어들기도 하고, 심리학자들이나 정신과 의사, 가정생활 상담자, 의사들이 목회자 자신들보다 더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을 자주 보기도 합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현실은 그들의 뜻을 따르고 그 뜻에 매력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목사가 되거나 그런 신분에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생명을 바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칭찬의 소리는 거의 없고, 비판의 소리만 가득 차 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그 누가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오랫동안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2. 한국교회의 실상과 교회 안의 목회자 현실
목회자의 영성 관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달리 구별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100년이 넘어 여기까지 달려온 한국교회가 현실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 그리고 당장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한국교회 안에서의 목회자의 현실과 이러한 상황 앞에서의 목회자의 영성 관리에 대해 제한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영성'의 범위는 개혁교회 신앙 안에서의 기독교 영성으로 국한하여 말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시금 한국교회의 실상을 고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신문과 성경을 동시에 균형 있게 보기 위하여 프란시스 쉐퍼의 라브리(L'Abri) 신조대로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우리 스스로 묻고 찾아야 한다. 이는 앞으로 우리의 영성이 사변적으로 흐르지 않고, 목회현장 위에서 현장중심의 영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1) 양극화 현상
갑작스런 경제발전에 따른 교회성장과 이에 대한 대처능력의 부실함으로 교회 역시 사회처럼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여,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기에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더욱 악재로 작용하고 있어 결국 정치판의 공공연한 이용물로 대치되는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2) 성장논리와 경쟁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회가 성장논리에서 성숙의 차원으로 전환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하여 사회의 성장논리와 맞물려 급기야 교회의 본질과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교회성장주의의 병폐는 결국 교회 간 경쟁력을 내세우게 되어 외형적 위세로 성전건축에 열을 올리게 되었고, 부채를 안고 시작한 성전건축으로 말미암아 이를 채우기 위해 교회 간 교인쟁탈전이 시작되었으며, 교인은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수평이동을 쉽게 하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치리(治理)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려 교회의 기강이 흔들리게 되었고 강단 위에서의 설교는 선지자적 메시지보다는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한 '값싼 은혜'에 머무르게 되었다.
교회들 간의 이러한 경쟁은 목회자들 간의 개인적 경쟁을 불러오게 되었고, 목회자들 역시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교회를 선택하기 위해 경쟁력 강화의 수단으로 학위와 같은 스펙 등에 매달리게 되어 영성의 향상을 학문적인 것에서 찾는 경향을 가져왔다. 최근에는 대형교회들이 후임자를 이른바 국외 유학파 중에서 선택하는 풍조로 말미암아 앞으로 목회자들 간의 경쟁력 조건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적으로 경쟁력 수단의 하나로 성전 건축을 강행하는 일이나, 개인적으로 목회에 필요한 그 이상의 학위에 연연하는 것 모두 막대한 재정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결국 교회도, 목회도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다는 '돈과의 전쟁'을 겪어야한다. 영적 싸움이 돈과의 싸움으로 변해 영성 관리가 재정 관리의 능력 여부로 판가름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부합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은 자괴감에 빠지고, 외형적 기준으로 인한 자존감의 약화로 스스로 무기력, 무능력의 침체에 빠져들게 되었다.
3) 영성의 약화
목회자들의 영성을 방해하는 여러 요인들이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 깔려 있고, 교회는 이러한 영성의 방해요소들을 제거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태에 처해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른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사상이 시대사조를 이끌어 가고 있는 21세기에는 진리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질 뿐더러 절대 진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오직 예수' 신앙을 내세우는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편협하제 보일 수밖에 없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벧후 3:4) 하고 초대교회가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현재 한국교회가 비아냥거림을 당하고 있고, 교회 안에서의 기도와 말씀의 약화로 인해 미혹하는 영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고후 11:4)을 들고 들어와 때로는 "큰 이적과 기사로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도 미혹케"하는(마 24:24) 영적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영적 아노미 상태에서 목회자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 밖으로는 물질만능주의의 바벨론과 같은 세상의 유혹들, 그리고 과학문명을 앞세운 과학주의의 도전과 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가시화시키려는 잘못된 신비(은사)주의와의 싸움에서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를 목회자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3. 현대 사회에서 목회자가 씨름해야할 주요 과제
1) 목회자 영성 관리의 핵심주제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십자가 신앙'
기독교 신앙의 핵심원리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이 핵심원리가 역동성을 갖고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의 영성이 이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소망은 부활이며, 부활의 삶이다. 그리고 이 부활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에 사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썩어지는 하나의 밀알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연관된다. 목회자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로서의 십자가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적 침체, 그리고 목회자의 영성 저하는 무엇보다 십자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붙들어야 할 십자가를 놓치고 있기 때문에 엉뚱하게 잡다하고 불필요한 비본질적인 것들에 의해 시달림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새 힘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첫 번째 것은 욕심을 버려 자기를 부인하고, 다음으로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십자가'를 다시 찾아 붙드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 일에 앞서,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영적 분별력을 잃고 영적 불감증에 빠져 있다는 데 있다. 목회자의 영성 관리의 시작은 여러 형태가 있겠으나 궁극적으로 이 모든 훈련은 십자가를 향해, 십자가 아래에서, 그리고 십자가를 통한 훈련이어야 한다.
현대에 목회자로 하여금 십자가를 잃어버리게 하는 주요한 요인은'스트레스'이다. 십자가와 스트레스를 분별하지 못하기에 영적 분별력을 잃고 영적 불감증에 빠지게 된다. 영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혼돈이 목회자의 영성을 흐리게 한다. 최근 현대 의학의 연구 발표대로, 정신분야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신체분야에 있어서도 스트레스는 현대 모든 질병 요인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현대인의 싸움은 한마디로 자신에게 맞닥뜨려져 있는 스트레스와의 전쟁이다.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첫 번째 할 일은 욕심을 버리는 일이다. 욕심은 욕심을 부른다. 욕심을 품고 있는 한 이것을 이루어 내기 위한 스트레스는 점점 더 가중된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 그러므로 죄의 씨앗인 욕심을 버려야 한다. 물론 욕심의 기준은 모두 다르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기 위해 비어 있는 마음으로 기도함이 좋다.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두 번째 할 일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다.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며, 형편없는 존재인가를 인식하고, 인간으로서 내세워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해야한다. 무익한 종의 고백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어린양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저히 인식하며 자기를 부인함으로 십자가 은혜 아래에 들어갈 수 있다.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높이며 주님만을 인정하는 길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세 번째 할 일은 십자가를 붙드는 일이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십자가를 다시 찾아 신앙의 순수함과 그 열정을 회복하는 일이다.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우리 현대인의 일상생활에 많이 사용되면서 상대적으로 적게 쓰이는 단어는 '십자가'이다. 스트레스와 십자가의 공통점은 둘 다 모두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이다. 반면 스트레스와 십자가의 다른 점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법과 출처가 다르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거의 대부분 우리 안의 욕심으로부터 기인한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을 것을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에서 얻어지는 열등감으로부터 시작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하게 됐을 때의 상실감, 자괴감 등이 자신을 부대끼게 하기도 하고, 자신의 욕심을 빨리 채우고자 하는 조급함으로 안달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특별히 목회자로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중적인 삶의 생활 태도 등이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이와 반대로 십자가는 자신의 욕심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개입과 간섭과 주장하심과 역사하심이 필요하다. 어차피 십자가는 내 힘으로 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십자가 앞에 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것들을 주님 앞에 맡기고 그것들이 십자가 아래에서 다루어지게 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외부적 환경의 모든 관계 면에서 주어지는 문제들을 부정적인 면으로 내 안에 담고 있을 때 그것들이 스트레스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다시 그것들을 내 안으로부터 외부적 환경에 그대로 놓이게 한 채 주님께 의지했을 경우, 이제 그 문제들은 내게 새로운 의미에서의 십자가로 다가온다. 내가 맡긴 그 문제들을 주님께서 직접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속량하시고, 필히 우리에게 연단의 과정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주님의 허락하에 그 십자가를 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십자가를 피하게 되는 이유는 십자가를 통해 맞닥뜨려야 할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은 고독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십자가 밑 고독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십자가는 죄를 직시하게 하고, 죄를 대적하게 하며, 죄를 이길 능력을 준다. 그리고 십자가의 승리를 통한 기쁨을 맛보게 한다. 내 모든 짐이 십자가 위에서 풀렸으므로 십자가가 더 이상 힘든 것으로 다가오지 않고 기쁨으로 달게 십자가를 지게 만든다. 이 십자가의 비밀을 목회자가 먼저 체험하고 증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동안 내가 '잃어버렸던 십자가'를 다시 찾아 나서는 여정의 훈련이 필요하다. 자신의 잃어버린 십자가를 발견하고 붙들게 될 때 내 안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죄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며 모든 스트레스에서 자유하게 된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때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한 목회의 본질적인 열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경쟁사회 속에서 자신의 성취욕을 이루고자 하는 야망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비본질적인 분주함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 모두를 더욱 지치게 할 수밖에 없다. 마틴 로이드존스(D. Martyn Lloyd Jones)는 그의 저서 「의학과 치유」(Healing and Medicine)에서 스트레스의 문제를 다루며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이 모든 현상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이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은 길밖에 없습니다. ‥‥‥ 때로는 매우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여러분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서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십시오. 여러분께서는 반드시 시간을 내야 합니다. 다른 일들은 보류해 놓고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절대 성급하게 성경을 읽지 마십시오. 조용하고 평온한 마음을 가진 다음에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에서는 전반적인 기독교 철학과 삶에 대한 참된 안목을 얻게 될 것입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길은 가만히 있으면서 관조하는 듯한 소극적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를 찾아나서는 적극적 방법이어야 한다. 십자가 그늘 아래 참 안식이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목회자를 공격한다. 비본질적인 것들로 인해 고통 받을 때 그것은 스트레스가 된다. 그러나 본질적인 십자가로 인한 고통은 오히려 기쁨과 새로운 활력을 준다. 이것이 십자가 신앙의 본질적 영성이다.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내 욕심으로 인한 스트레스인가? 아니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위한 십자가인가?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어디에서 나의 십자가를 발견할 것인가?
이웃과의 관계로서의 '부활의 삶'
십자가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회개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부활은 회개의 십자가를 통해 속죄 받은 자의 기쁨이 넘쳐나는 천국의 삶이다. 즉, 진리 안의 자유로운 삶이다. 십자가만 강조되고 부활이 없을 경우, 복음은 은혜가 가려진 채 율법주의 신앙으로 경직될 수 있으며 '밝은 영성'이 되지 못하고, '어두운 영성'의 부정적인 면만이 강조될 수도 있다. 십자가를 통한 회개와 속죄의 구원 이후에 따라오는 부활신앙의 삶은 밝은 아침과 같고, 청명한 가을하늘처럼 투명한 삶이며, 소망이 가득 찬 활기 있고 생기가 넘치는 삶이어야 한다. 이 모습이 신앙과 생활의 균형과 조화를 이룬 가장 건강한 신앙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생활이 따로따로가 아닌 하나의 단어로 집약되어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월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신앙과 생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부활의 삶을 "생기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에는 생기가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대다수도 또한 그렇다. 입고 있는 것부터가 그렇다. 생활 태도마저 생기가 없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종교는 윤기가 없는 것, 부정적인 덩어리 같은 것으로 되어 버리고 있다. 마음으로부터 인생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옆에서 보아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좀 더 많이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유대 랍비의 말에 이런 것이 있다. "마지막 심판 때, 사람들은 인생의 모든 좋은 일을 왜 즐기지 않았느냐고 하나님으로부터 꾸짖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에는 많은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세상의 마지막에 다음 사실이 명백하게 될 것이다. 곧, 매력에 의해 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끈,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이 지으신 훌륭한 세계에서 기쁨과 노래로써 산, 이를테면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와 같은 그리스도의 호인다운 명랑한 기사들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창백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생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휘황찬란한 훌륭함을 다시 볼 수 있게 되기까지.
그러므로 온전한 영성, 올바른 영성, 건강한 영성, 밝은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앙과 생활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함과 그 성육신의 의미를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사건이야말로 '영의 육화(肉化)'라고 말할 수 있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영성의 모범을 발견할 수 있다.
온전한 영성은 단순한 깨달음으로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에 멈추는 영성은 '행위 없는 죽은 믿음'(약 2:26)과 같은 것이기에 이는 필시 반쪽의 영성에 그칠 뿐이다. 영성은 깨달음에 그치지 아니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생활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영성의 육화'이다. 생활화되지 않은 영성은 하나의 '의식'(意識 또는 儀式)에 그칠 뿐이며, 이럴 경우 오히려 바리새인의 위선과 독선이 되기 쉽고 교만의 악취를 풍기게 되기 쉽다. 모르면 가만히 있는데 문제는 알고 있다는 착각으로 머릿속 생각으로만 다 해 버리는 지식적, 사변적 영성의 오류를 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다 성숙되고 조화된 신앙과 영성은 삶과 일치된, 삶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영성이어야 한다. 그 '삶 속'이란 말은 쉽게 말해 '사람들 속'이란 말과 같다. 사람을 떠나서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을 피해서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목회자가 삶의 현장을 떠나 사변적 사고의 틀에 갇히게 되면 양들과의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을 돌아볼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만 잠시 이웃과 떨어져 있을 뿐(고전 7:5), 언제나 양들의 삶의 현장 속에 함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하여야 한다.
부활의 삶은 자신을 십자가 아래 숨기는 삶으로부터 빛의 자녀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삶이다. 자신 안에 있는 어둠들이 빛 가운데서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증거하는 삶이다. 자신의 의인됨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드러냄으로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삶이다.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드러냄으로써 주님의 완전하심을 선포하는 삶이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 무능함을 노출시킴으로써 주님의 도우심이 전적으로 필요함을 알리는 삶이다.
자신과의 관계로서의 '영적 분별력'
목회자 영성 관리의 핵심원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근간을 이루고 있는 '십자가와 부활'을 토대로 한다. 그러나 이 원리들을 실제 목회현장에서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기 위해 절대 필요한 것이 목회자의 영적 분별력이다. 목회자는 선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예언자의 눈을 가져야 한다. 헨리 나우웬은 다음세대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첫 번째 덕목으로서 '내면세계의 일들을 정확히 표현할 줄 아는 지도자' 임을 말한다. 그래야 이웃의 마음을 분명히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여 세대 간의 소통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culture)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새롭게 경작함을 뜻하며, 이 문화의 출발은 언어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 나라의 기독교문화는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언어인 성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규범이 되며, 이 규범은 오늘 다원화된 현대사회의 문화와 복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모든 판단과 선택 및 결정의 기준점(canon, 잣대)을 제시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선지자적인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 시대를 분별하고, 예언자적 영적 안목으로 그 시대가 살아가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문화의 흐름을 정확히 간파하여, 복음으로 말미암아 동시대 사람들의 문화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영적 분별을 말씀에 근거하여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세상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세속사와 구속사의 흐름을 분별하되, '기록된 하나님 말씀'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한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속단하거나 입을 열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훈련을 스스로 쌓아야 한다. 우리 눈으로 보는 일시적인 현상적인 것들로 인해 요동하지 말 것이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앞날을 열어 가야 한다.
또한 영적 분별력을 이분법적으로 천상에서나 있을 법한 신령한 일이나 우리가 잘 알 수도 없는 미래의 일들을 예언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참다운 비전은 미래를 알아맞히는 신비한 능력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현실에 닥친 일들 속에서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모방의 천재이다. 그에게는 창조능력이 없기 때문에 항상 모조품을 명품처럼 만들어 진품으로 착각하게 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최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차선책을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최선의 예배가 아닌 '적당히 대충대충 넘어가는' 예배와 마음 자세로 안위감을 갖게 한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의 '평온을 구하는 기도'가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목회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하나님,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하여 행동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2) 교회 안에서 영적 분별을 필요로 하는 것들
말씀 선포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교회의 세속화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물이 교회 안에까지 넘쳐 들어와 세상에 먹힌 꼴이 된 상태이고, 이미 유럽 교회들이 그러한 쇠퇴 현상을 보여 주었다. 교회의 세속화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여, 하나님 말씀을 사람의 기준에 맞춰 세상과 타협하려 드는 잘못된 설교에서 일차적으로 기인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인본주의적 바탕 위에서 인간의 행복과 번영만을 생각하게 하는 이른바 '번영신학'(prospehty theology)을 지양하고 참다운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한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긍정의 힘'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관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이 십자가 없이 이루어지는 것들이라면 우리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영적 안목이 부재하게 되고, 결국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심리적 요법으로서의 자기 계발의 한 방법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능력을 통한 부활의 기쁨, 그리고 이에 따른 천국 소망을 강조하여 전해야 한다.
기도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기(氣)사상이 지배해 왔다. '기'는 한마디로 에너지이며, 이것은 보이지 않는 힘이다. 기가 기독교 관점에서 문제가 되어 경계를 요하는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힘' 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왜곡되어 한국교회 안에 잘못 정착된 것이 성령님과 기도에 대한 오해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祈禱)'가 잘못 이해되어 기(氣)가 흐르는 통로로서의 '기도(祈禱)가 되어 버린 듯하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인격이신데, 우리는 성령님을 기(氣)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의 에너지로 잘못 인식하는 데서 "성령의 불 받아라!" 하고 성령님을 내 맘대로 명령하여 주는듯한 오류에 빠진다. 이러한 오류로 말미암아 '성령폭발 대성회'같은 웃지 못할 부흥집회의 명칭도 생겨났다. 성령님을 다이너마이트처럼 큰 위력으로, 폭발하는 힘의 에너지로 오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내 의지를 그 앞에 굴복시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겠다는 절대 순명의 행위다.
찬양
말씀 없는 기도가 무당의 주문(呪文)과 같듯이 말씀 없는 찬양은 무당의 푸닥거리와 같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감정에 취하여 감상적으로 드려지는 찬양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을 낭송함같이 말씀이 곡조 있는 기도가 되어 드려지도록 해야 한다. 흔히 찬양 사역자가 저지르는 실수 중 찬양예배 중에 찬양 인도자가 개인적인 차원의 불필요한 멘트를 섞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찬양은 해설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곡조 있는 기도로 드리는 것이다.
교육
주일학교에서의 어린이 교회교육이 신앙적 요소보다 심리적 요소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때 그곳에는 '예수님을 위한 어린이'가 아닌 '어린이를 위한 예수님'만 드러나게 된다. 교육은 새로운 것을 알아 가는 것도 있지만, 이미 잘 알고 있는 것들을 계속하여 반복 훈련함으로써 그 교육적 목표와 효과를 기대하게 된다. 신앙교육은 수 세기를 걸쳐 내려온 성경말씀에 대한 반복 훈련이다.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들으라, 이스라엘아." 하면서 쉐마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머리 쓰다듬어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소 아이들이 힘들더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도록 믿음과 인내의 교육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 안의 청소년 교회교육에서는 세상에서의 일류대학과 천국대학의 다른 점과 그 목적을 명쾌하게 인식시켜 주고, 그에 따른 신앙교육을 하도록 해야 한다. 분명한 가치관의 정립과 더불어 우선순위의 문제를 올바르게 교육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대학 입시철에 교회가 주선하여 합격축하를 기원하는 '특별 기도회'는 삼가야 한다. 세속적 성공관을 부채질할 뿐이고, 교회마저 세상 가치관의 일등만 부추기는 경쟁심을 돋울 뿐이다. 오히려 대학에 진학하지도 못한 채 실업계 학교를 나와 곧바로 사회의 일원으로 일하게 되는 사회진출반 학생들을 더욱 용기와 위로의 말로 북돋아 주는 기도회를 갖는 것이 훨씬 더 신앙적 방법론일 것이다.
축사론과 천사론
성령님의 능력을 입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사실 귀신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영과의 싸움은 영으로서 대결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에 적극적으로 의지하고 귀신과의 영적 전쟁은 성령님을 의지하며, 천군 천사의 도움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귀신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교회 안에는 귀신론이 판을 치는데, 천사론이 약하므로 우리의 신앙이 위축되거나 또는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제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귀신보다는 밝고 긍정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천사를 떠올리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가 성도들 앞에서 영적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을 제압하는 것으로 영적 교만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보다는 겸손히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비성경적 프로그램의 도입
무의식 세계 안에 묻혀 있는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인간의 삶을 유익하게 하자는 서구의 합리적 교육이론들이 동양의 신비주의와 만나 동앙의 심령기술을 다소 변형하여 인간의 행복 증진에 기여한다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것은 대체로 뉴에이지(New age) 기법에 속하는 요가, 선(善), 최면술, 초능력, 초월명상, 마인드 컨트롤, 자기 암시 등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교회 안에서 버젓이 프로그램화되어 움직이는 것은 성령을 의지하기보다 인간의 심리적 기술에 의지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방법들이다. 기도회 대신 이런 프로그램들이 운영되는 것은 당장 그 효과(?)면에서 빠른 응답이 보이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도 외에는 기적과 같은 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으며, 기도 외에는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3) 영적 침체 극복과 신앙의 매너리즘에서 탈피
그리스도의 첫사랑에 대한 순결함과 신앙본질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습관적으로 교회 나오고, 습관적으로 예배드리고, 또 습관적으로 개인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종교행위는 결국 우리의 믿음을 형식적 믿음으로 고착시켜 외식적인 신앙인, 명목뿐인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게 한다. 습관화와 '형식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따로따로 가지 않고 동시에 함께 움직이게 된다. 이때 우리가 깨어 있어 경계해야 할 것은 습관화 뒤에 따라오는 형식화이다. 이것은 목회 현장의 일선에 있는 목회자부터 먼저 자신과 싸워야 할 이유이다. 너무 분주한 나머지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한 생각들로 일의 효용성도 떨어뜨린다. 심지어 예배 중에 찬송을 인도하다가 다른 생각에 갇히는가 하면, 성경을 읽는 중에도 말씀에 몰입되지 못함으로 인해 '신앙의 행위'만 남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언제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신앙의 본질을 그대로 유지하되, 목적이 아닌 방법상의 문제나 또는 내용이 아닌 형식상의 요소들은 과감하게 분위기를 바꿔 항상 새로운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예배 순서에서부터 설교 형식의 틀, 그리고 다양한 독서의 폭과 새로운 이웃들과의 교제를 통해 새로움을 익힐 필요가 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의 주민자치센터를 비롯한 복지관 및 여러 봉사 단체에서의 간단한 봉사 활동을 통해 교회 밖에서 벌어지는 내 이웃들의 삶을 살펴볼 수도 있다. 잠시 일상생활의 틀에서 벗어나 가보지 못한 곳을 여행한다거나 새로운 운동을 시작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모험과 이에 대한 도전으로 신체적인 면에서나 영적인 면에서도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감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구호들이 도움이 되기 바란다.
"스트레스는 버리라. 그러나 적당히 긴장하라!"
(No stress, but strain!)
"일은 쉽게 하려 하지 말고, 대신 간단하게 하라!"
(No easy, but simple!)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No worry, but pray!)
4) 영적 무기력 회복을 위한 종말 신앙의 강화
이것을 보다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천국에 대한 소망'이 보다 현실화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종말론' 신앙이 아주 약해졌다. 그것에 대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직접적으로는 불발탄으로 끝나 버린 '시한부 종말론'과 같이 잘못된 종말론 신학(신앙)으로 인한 부작용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며, 간접적으로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한 육적 풍요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 먹고살만한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의 이 세상에서 쉬 벗어나고 싶어하기보다는 좀 더 그 안락함을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종말론이 약해질 때 천국론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목회자의 영성에 따라 교회는 움직인다. 목회자 개인의 영성훈련의 목표가 그 교회의 영성훈련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점을 고려할 때 목회자가 영적 무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강화해야 할 훈련이 있다. 바로 종말 신앙이다. 신앙생활에서 어느 정도 필요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깨어있어야 함에도 종말 신앙이 약해짐으로 인해 천국에 대한 기대감과 목표의식도 없이, 신앙의 핵심을 잃어버린 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되어, 현세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고, 교회는 세속화의 파도에 휩쓸리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목회자는 영적 침체의 늪에 빠져 영적 무기력의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 영적 무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목회자 스스로 종말 신앙으로 영적 위기의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마라나타의 신앙을 회복하여 영원한 본향인 천국에 대한 소망을 붙잡아야 한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후 세계에 관한 대답을 제시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이 사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분명한 내세관을 제시해야 하며, 기독교는 바로 이 소망을 극명하게 나타내야 한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세상을 도피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의 유한성을 깨닫고 더욱 이 세상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랑하고 가꾸어 나가는 분명한 삶의 목적을 깨닫게 한다.
이 세상은 천국시민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장이다. 목회자의 영성관리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을 소유하고 또 그것을 양들에게 전하는 소임을 다할 때 생기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며, 밝은 영성으로 주변을 환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를 위해 아주 간단하고 실제적인 훈련방법이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늘 보기' 훈련을 습관화시키는 일이다. 졸린 눈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기라도 하는 듯한 기대감과 설렘에 찬 눈빛으로 한 5분 정도(이것도 길게 느껴지면 2-3분 정도라도)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그냥 하늘만을 응시해야 한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야곱이 꿈꾸었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야곱의 하늘 사다리(창 28:12)를 그려 보라. 또한 스데반이 순교 당시 우러러 주목하였던 열린 하늘(행 7:56~57)을 떠올려 보라. 그리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순간이라도 세상의 모든 욕심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끼며, 차분하고 깨끗한 마음이 되어 정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될 것이다. 하늘은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지를 생각나게 해 준다.
5) 육적 함정의 덫(자아본능) 다스리기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본능적 욕구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식욕'과 '성욕'이다. 이것은 우리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본능적 욕구이다. 문제는 이 자아 본능을 절대 필요한 만큼만 적절하게 사용해야지,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이것으로 인해 그 인격체는 망가지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서의 삶이 인생본분의 첫째임을 알아야 하고, 이 존재 이유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에 필요한 '소유'들을 말할 수 있다. 항상 기억해야할 것은 '주 안에서'이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의를 구하는 것이다.
신명기 20장에서 하나님은 적군과 싸우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려는 군인들 중에 면제 대상자들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새 집을 건축하고 락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그야말로 이해심 많으시고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이시다. 신명기 24:5에서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자상한 아버지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동료들은 전장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는데 새로 장가들었다고 일 년 동안이나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새로 맞이한 아내와 더불어 신혼생활을 즐기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기본적 본능 욕구를 제어하시고 차단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주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풍족하게 허락하시며 자녀인 우리가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시는 아버지이시다. 전쟁은 우리의 일이기 전에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이 믿음이고, 주 안에서 누리는 참다운 자유의 평안이다. 인간 죄의 근원은 욕심이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약 1:15). 탐심(貪心)은 부당한 욕심, 과도한 욕망(undue desire)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탐욕으로부터 연유된다. 탐심을 다스려야 한다.
돈을 다스리는 문제에 있어 목회자는 자신의 문제보다는 가족의 문제로 인해 세상적 방법과 타협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단호하게 그 제자도를 말씀하고 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하나님의 요구는 바로 오늘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사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주의 부르심을 받고 소명의식에 따라 신학교에 입학할 때 이미 돈의 올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세와 가치관을 갖고 출발한 사명자들이다. 그러나 삶의 현실에 있어서 자녀 문제만은 하나님과 대립될 때가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말씀에 따라 이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야 함에도 자녀 문제만은 이 시대의 교육풍조 속에서(특히 한국사회의 교육풍토) 그 흐름에 편승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 대립은 부한 자나 가난한 자 모두 돈과 연결되고, 자녀 문제로 인해 돈의 올무에 걸려든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목회자들은 믿음의 선구자가 되기 위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서 주어졌던 하나님의 시험(백세가 되어 약속으로 받았던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앞에서 정직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단편적으로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돈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시금석이요 출발점일 수 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라는 말씀이 믿음과 소망의 근거가 된다.
돈에 대한 목회자 자신의 개인적인 훈련도 필요하다. 가능하면 필요 이상의 것을 구입하지 않도록, 가능하면 그날 필요한 것은 미리 계획하여 쓸 만큼만 돈을 가지고 외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때로 교통비 이외의 돈을 소유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도 믿음의 훈련이요, 돈에 대한 목회자 자신의 영성 관리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의 말씀을 기억함이 좋다.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눅 9:3).
인간의 필요를 위해 돈을 사용하되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 가장 명쾌한 답을 제공한 자크 엘룰(Jacques Ellul)은 그의 저서 「하나님이냐 돈이냐」(L' homme et L' argent)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사회생활로부터 도피하는 은신생활이 아니며, 부자가 되어 돈의 권세를 장악하는 길도 아니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매매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거저 주는 삶을 실천하는 길이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상의 방법은 어떻게 하면 경제체제를 고쳐서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에게 좀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방법은 어떻게 하변 가난하게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것이며,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의 대열에 직접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돈의 문제보다 성적인 문제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실제로 돈을 많이 갖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고 해서 죄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지만 그것이 악의 뿌리로 시발점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해서 그 생각 자체를 악이나 죄로 단정 짓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적인 문제는 그렇지 않다. 실제적인 육체의 접촉으로써의 간음뿐만 아니라 "‥‥‥‥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형태이든 혼인관계 밖에서 성적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생각자체만으로도 이미 그 마음에 간음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비롯한 혼외의 실제적인 간음행위는 기독교 사회뿐만 아니라 일반 윤리적으로도 금기시되고 있는 사항이다. 현재 성 상담학을 다루는 많은 사람들은 성 윤리에 있어서 기독교윤리의 잣대를 대기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 자신이 일반 사회윤리와 달리 성경에 기초하여 기독교윤리에 입각한 설교와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명한 논리 설정이 되어 있지 않으면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동성애를 비롯하여 관음증 등의 혼인관계 외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적 행위는 직접적인 간음행위가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과 생각의 간음에 속하는 것이고, 이를 성경은 간음행위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남녀 모두 이성과의 개별 만남에 있어 배우자의 이해와 동의가 필요하다. 이성을 만나게 될 경우, 항상 자신이 목회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명심하고 자신의 힘든 마음의 상태나 사적인 고민들을 내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능한 대로 공적인 이외의 말은 하지도, 듣지도 않도록 주의함이 현명하다.
무엇보다 공식 석상이 아니면 외출은 가능한 한 부부 동반이 좋다. 배우자 이외의 이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가장 강력한 대안은 배우자가 아내이기 전에 한 여성, 남편이기 전에 한 남성인 점을 명심하고 서로에게 멋진 파트너가 되기 위해 서로가 스스로를 가꾸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젊어서 취한 배우자를 더욱 사랑하는 일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또 그 나이에 걸맞도록 배우자를 내가 좋아하는 개성과 매력이 넘치는 이상형의 모습으로 가꾸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누가 뭐라하든 적어도 내가 배우자에게 있어서만은 가장 멋진 이성으로 다가서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마음뿐만 아니라 몸 관리도 잘해야 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 때문이다. 특히 목회자는 일반인과 달리 자신이 원하는 바 대로 시간조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운동이 가능하다. 원만한 부부관계 역시 건강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알고 건강하며 밝은 영성, 깨끗한 영성으로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사랑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의 배우자와의 사랑에 있어서도 건강한 영성을 통해 건강한 사랑의 역동적 즐거움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회의 비밀이요, 신부의 비밀이며, 침실의 비밀이다.
고린도전서 7:5은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부부생활의 철칙이다.
6) 영성 관리의 모델 인물 설정
목회자가 최종적으로 본받아야 할 신앙의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전적인 인간으로서의 모델이 자신의 영성 관리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다. 가능하면 자신이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신앙의 모델이 좋다. 자신의 영성 관리를 위해 영성지도를 해 줄 수 있는 멘토와 같은 신앙의 선배, 영적 지도자가 좋다. 그에게서 구체적으로 신앙의 모델을 배울 수 있고, 세밀하게 영성지도를 받아 영성 관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회개를 위한 실제적 훈련 모델(예시 : 기독교마리아자매회
의 삶) - "빛 가운데 교제"
독일의 '기독교마리아자매회'는 1947년 독일의 폐허가 된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독일의 잘못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독신 여성들이 모여 성경공부로 시작된 기독교의 유일한 독신여성 수도 공동체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이들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고 온 생애를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공동체 삶 가운데 '빛 가운데 교제'는 끊임없이 불화를 겪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새로운 빛을 던져 줄 수 있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회개기도'가 하나님 앞에서의 수직적인 기도라면, '빛 가운데 교제'는 수평적 관계에서의 참회와 용서를 구하는 교제 행위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마음으로나 행동으로 지은 죄가 마음에 걸릴 때 특정한 시간을 정해 모두가 모여 있는 앞에서 서로에게 지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공동체 안에서 그 누구라도 서로 간에 그 어떤 막힌 담이 있지 않도록 한다.
'빛 가운데 교제'는 기독교마리아자매회의 가나안 영성을 대표할 만한 특성이라 말할 수 있고, 이는 우리의 공동체 삶 안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적용 부분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게 생각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마찰과 갈등을 서로 간에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는가를 매우 잘 보여 주고 있다.
'빛 가운데 교제'는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요한일서 1:7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룰이나 공식적 제도 없이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자신들 안에서 일어나는 필요에 따라 리더격 되는 자매들의 회의와 결정을 따라 시행된다. 전체적으로 모여 하기보다 각 공동체(부서)마다 자체적 별도의 모임으로, 언제 어디서나 모여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특히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서로 간 개인의 감정에서가 아닌, 오직 일에 관한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과정에서 일에 관한 것이기보다 개인감정에 의해 상처받은 내용이라고 생각될 경우, 이는 각 개인에게 연결된 멘토 역할의 상담자매에게 찾아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과 연결된 상담자매는 어느 특정인물과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든지 다른 자매로 자신의 상담자매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사실 '빛 가운데 교제'는 상담관계가 잘 되어 있는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열려 있듯 서로에게도 열려 있는 관계이어야 가능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매 주일(필요에 따라 주중에도) 고백성사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고 목회자로부터 직접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인적 상담관계가 통로화 되어 있지 않아, 목회자의 설교를 통한 일방적 해결방식에만 주로 의지하게 된다. 특히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목회자와의 개인적 상담관계가 어렵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기도하여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초신자나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알아 가는 기도의 과정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는 그 어떤 신비한 대답을 속 시원히 듣기 원하여 성경을 끼고도 점집에 찾아가는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물론 평신도 중에서도 믿음이 좋아 충분히 영적 지도를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으나, 대체로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문제 해결을 받기 원한다. 그러나 목회자 자신이 개인적인 상담사역을 꺼린다면, 위에 소개된 '빛 가운데 교제'와 같은 방법이 화해와 용서를 위한 길이 될 수도 있겠다.
목회메뉴얼 제3권 영성목회 (한국장로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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