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이 죄인들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를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 죄과를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기시고 우리가 일한 것 없이 우리의 공로가 없을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이 시간도 주께서 말씀으로 저희와 함께 하시며 주의 성령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스려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볼 텐데요, 먼저 말라기 보겠습니다.
(말 1장)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말라기에서 말하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은 어떻게 오해했을까요?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더러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합니다. 말라기가 구약 마지막 책인데, 그렇다면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 채로 끝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가?.. 그 사랑을 모르고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성경 본문을 찾으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죠. 그런데 세상이 알고 있고 기대하고 있는 사랑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사랑이에요.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런데 성경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성자 예수를 죄인들에게 내어주신 사랑이에요. 이 사랑만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 교회에 기독인들에게 기대하는 사랑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사랑이란 말이죠. 여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성자 예수를 죄인들에게 내어주신 그 사랑만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들의 서신서도 빠지지 않고 이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인간들끼리 서로 토닥이고 정을 나누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더구나 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요일 4장)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복음의 시작이고 창조의 근원입니다. 이 사랑으로 이 세상 천지 만물이 창조되었고, 창조의 시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겁니다. 본래 없음인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희생이 있어야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세상이 반드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입에 문 채 태어나고 나 있음에서부터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서 시작된 사랑을 사랑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인간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라는 말라기의 말씀과 같습니다. 접점이 없어요.
그럼 왜 세상은 그 사랑을 오해하고 싫어하며 자기들의 사랑을 남발할 수밖에 없는가?.. 그럼에도 그 사랑은 어떻게 세상에 감추어져 있고 또 세상 끝까지 실행되는 사랑인가?..
제가 젊었을 때는 여자 주인공이 죽는 슬픈 사랑의 영화가 많았습니다. 주로 백혈병 같은 불치의 병과 관련된 사랑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이라 생각하고 울면서 보곤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유행가도 그렇습니다. 제가 최근에 재미있는 유행가를 알게 됐는데, 그 제목이 ‘사랑도 모르면서’입니다. 류기진이라는 가수인데, 노래 제목부터가 복음적이에요. 이런 노래는 교회 주일 예배 전에 한번 부르고 시작하면 좋은데. 가사가 이렇습니다.
‘사랑은 믿는 거라고 무조건 믿는 거라고 달콤한 말로 나를 꼬드기고 작별의 인사 없이 떠나가 버렸나 사랑은 통속한 잡지에 밑줄 치는 낙서가 아니야 사랑도 모르면서 사랑도 모르면서 내 이름은 왜 또 불렀소’
이게 오늘날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 세상 교회의 현실입니다. 모이기만 하면 “주여” 삼창을 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사랑도 모르면서 내 이름은 왜 또 부르냐, 새벽부터.. 그 이름은 내가 죽을 이름인데, 그렇게 죽어서 살아나는 이름인데, 그 이름도 모르면서 무조건 살아보겠다고 사랑도 모르면서 사랑해달라고, 나만 사랑해달라고 달콤한 말로 꼬드기는 가짜 신랑한테 속아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내주고 이거 아니구나 싶을 때는 이미 늦었단 말이에요. 또 이런 사랑 이야기 옛날 유명한 노래가 있잖아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홍도야 우지 마라)’.. 오늘날 세상 교회가 제가 보기에는 모두 ‘홍도야 우지 마라’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온 세상이 오해하는 그 사랑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은 과연 어떤 사랑을 받았는가? 또 그 사랑을 어떻게 살아내었는가?.. 이것을 보여주는 시범 조교로 불려 나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고난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사랑이에요. 이스라엘 전체 역사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내어버려 둠’입니다. 미워하고 해코지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어버려 두는 게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다른 말로 고난이라 하고 징계라고 합니다.
(히 12장)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 하지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불러내신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게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기 때문에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은 하나님의 선택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뜻, 자기 약속이 무엇인가를 보이시기 위해,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불러내신 사람들이 이스라엘인 거예요. 바울의 말처럼 혈통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선택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자주 잊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실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을 다 살아내야 하는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했고, 또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즉 자기들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알았어요.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다 줄 수 있는 하나님, 자기들이 섬기는 만큼 보상해주시는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그 이스라엘의 상태가 구약 선지서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 1장)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7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8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이게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겔 11장)
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하나님이 쫓아내셨는데, 쫓아내신 그 자리에서 그들의 성소가 되신다는 거예요. 이건 뭐예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사랑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렇게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도록 두드려맞고 상하고 터지게 내버려 두시면서 사랑했다. 이게 사랑입니까?
왜 이스라엘은 역사 내내 마치 하나님께 버림받은 백성처럼 그런 고난을 살아내야 했는가?..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에 하나님의 진짜 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까지 그들은 한 번도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증거를 남겨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말라기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말 4장)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구약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지자 엘리야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영원한 단절이라는 말입니다. 사랑 없음! 끝!
이렇게 구약 전체가 하나님이 불러내신 이스라엘을 통해 인간 세상에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돌이키게 할 어떤 희망도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끝이 납니다. 그분이 오시지 않으면, 그 엘리야가 오시지 않으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사랑을 돌이키게 할 수 있는 분을 기다려야 한다.. 이게 구약의 결론입니다.
그런데도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해보겠다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목숨 걸고 온갖 종교 행위, 율법 행위를 다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얘기했듯이 전쟁이 나도 안식일엔 도망을 안 갈 정도였어요. 그렇게 하나님을 섬긴 결과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해버린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해버렸다니까요. 아버지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게 하려고 오신 예수, 그 엘리야를, 그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 오신 그분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렸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 죽음에서 시작됩니다. 그 죽음이 하나님의 영원 전 약속의 성취임을,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실제상황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반드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거예요. 그 죽음 안에서 영원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밝히 드러났다.. 그래서 이제는 그 죽음을 모르면, 그 죽음에 참여되지 않으면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일 4장)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심판을 이기는 게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 언약의 피를 흘리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믿으면), 그래서 그 사랑이, 씨 심은 죽음이 부어진 자는 하나님과 하나 된 자다.. 기노스코.. 하나님을 남편으로 알게 된 자다.. 세상에는 없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심판을 이긴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자,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못하여 자꾸 율법 행위를 내놓고 선악 행위에 집착하는 자는 두려워하는 자요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충분하지 못하니까 한마디로 믿지 못하니까 자꾸 믿음 대신 행위를 요구하는 거에요 주일 성수 해라, 십일조 해라, 교회 봉사해라 충성해라 성화된 모습을 보여라 그런데 히브리서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자기 일을 쉰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일을 쉬는 거예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어요. 그렇게 사랑은 생명과 함께 주어진단 말입니다. 사랑이 부어지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나는데, 그들만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의 하나님되심을 아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뭘 알아야 사랑할 게 아닙니까? 죽은 시체들이 누구를 사랑하겠어요?
그렇게 사랑이 부어져서, 바꾸어 말하면 예수의 피가 부어져서 살아난 자들이 바로 사랑의 아들들이에요. 그 사랑 안에서 서로 사귐이 있는 상태를 성경은 구원이라 하고 영생이라고 합니다.
(요일 4장)
9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이 어디에 있다고? 생명이 어디 있다고? 화목 제물로 보내신 아들 안에 있는 거예요.
(요 15장)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그의 말씀 안에 있는 자고, 영생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을 사랑하는 거라고
누구나 한글만 알면 성경 다 읽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말씀을 아는 건 아니죠. 그럼 누가 이 말씀을 진리로 아느냐? 말씀의 사랑을 받은 자들만 아는 거예요. 그들을 말씀 안에 있다고 하고, 진리에 속한 자로 진리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말씀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신학 공부를 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졌어도 그들은 말씀을 주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유튜브 이름이 ‘말씀 사랑’인데, 말씀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한 사람들, 말슴 안에서 생육한 자들, 그렇게 말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주의 사랑을 받아 주를 사랑하게 된 자들 곧 피로사신 교회입니다.
(요 18장)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않고 너희들이 나의 사랑 안에 있도록 지켜줄 것이다..
(요 13장)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사랑이란 말이에요. 이 사랑이 지금 어떻게 실행된다고요? 시도 때도 없이 말씀이 우리를 찾아오고 말씀에 의해 우리의 육이 해체, 곧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고후4:16) 우리가 말씀을 연구하고 찾아가는 게 아니라... 머리 속에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면 뭐 합니까 주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 있지 못하면 그 지식으로 망하는 거에요 우리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 많잖아요 어떤 목사 설교 열심히 듣고 따라 하면 자기도 그 목사처럼 되는 줄 아는데 주님과의 관계성은 우리의 선택도 우리의 열심도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있기도 전 영원전의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영생인 거에요 우린 그 약속에 어떤 요청도 협조도 할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것부터 바로 알아야 해요 물론 그분의 개입이 있는 인생만 알게 되겠지만
(롬 5장)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언제 확증했다고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이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에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계속 죄인일 때, 우리가 끝까지 죄인일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사랑을 확증하셨기 때문에 이 사랑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 바뀔 수 없는 사랑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히려 그 약속으로 인해 성도의 삶은 죄인의 괴수로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오직 그 사랑(긍휼)만 온전히 남게되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의 언약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에 우리를 품에 안고 함께 아버지께 드려졌다.. 그것을 영원전에 확정된 사랑이라고 해요. 그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도 우리에게 함께 나누어졌다.. 언제? 창세 전에. 그래서 계시록은 ‘창세 전에 죽임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온전히 나타난 것입니다.(요17:1-10) 다른 영광은 없어요. 수천억짜리 예배당 지어서 헌당식 하는 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약속의 하나님을 욕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은 인간들이 흉내 내거나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랑 안에서만 서로 나누어지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되지 않은, 즉 그 죽음이 나누어지지 않은, 그 죽음에 연합되지 않은 자들은 몰라야 하는 사랑이에요. 미련하고 거리끼는 사랑이란 말입니다. 그게 십자가라는 사랑이에요
길에서 밥이나 퍼주고 연말에 구세군 냄비에 돈 넣고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돼요. 아프리카에 가서 평생을 그들과 함께 살았던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는 죽을 때까지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정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안 믿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도 그런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 있어요. 소위 말하는 인류애, 휴머니즘이죠. 사랑을 모르면서 그런 거 얼마든지 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몰라도 그런 인간들끼리 서로 사랑, 홍익인간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상이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데, 세상이 아는 원하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게 기독교라면 다른 종교도 얼마든지 사랑의 종교라고 할 수 있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보다 다른 종교인들이 그런 사랑은 더 잘합니다.
세상 교회들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모르고 세상과 똑같이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세상으로부터 욕을 얻어먹잖아요. 교회가 사랑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심지어는 개독교라는 말도 듣습니다. 왜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세상보다 더 돈 밝히고 세상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느냐는 말이지요. 교회가 진리로 인해 욕 먹고 예수로 미움을 당하면 그게 진짜 교횐데 이 시대의 세상 교회들은 세상보다 더 세상다우니까 교회라고 할 수가 없는 거죠
교회,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불려 나온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분명히 그 세상과의 경계선을 쳐놓으셨는데, 그 경계선이 없어지면 그냥 세상입니다. 그 경계선은 진리, 다른 말로 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남기고 가신 그 피가 세상과의 경계예요. 그래서 그 피를 모르면 아무리 정통 교단이라고 간판 달아도 그건 교회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피 안에만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랑도 모르면서 주의 이름도 모르면서 맨날 모여서 주여 삼창 한다고 교회되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의 사랑, 언약의 피라는 사랑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그 피가 없는 곳, 그 십자가 복음이 없는 곳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여름 캠프에서 고린도전서를 할 텐데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서두에서부터 이렇게 교회를 정의 합니다.
(고전 1장)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그의 피로 거룩해졌단 말이에요. 교회의 거룩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착합니까? 윤리 도덕적으로 더 깨끗해요? 교회의 교회 됨, 교회의 거룩은 피에 있다는 것을 바울이 고린도전서 시작부터 미리 못을 박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그냥 주여 삼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자들 그분과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모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피의 사랑 그 거룩을 모르면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곳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또 살해해버릴 사단의 회당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사랑, 진리의 사랑, 피의 사랑으로 인한 세상과의 구별 그 경계가 없으면 반드시 미혹의 역사로 인해서 거짓 것을 믿게 됩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사랑을 좇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처음에 말씀드린 내어버려 두심의 심판인 거예요. 주께서 직접 우리의 인생에 개입을 안 하시면 그 믿음 안에 있지 못하면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 우리가 믿고싶은 예수만 좇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 말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서에 기록된 말입니다.
(살후 2장)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주되심, 다 이르심을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자기 의를 고집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서 난 모든자들은 ‘하나님처럼’의 DNA를 가집니다. 절대 자기 주체성, 자기사랑을 부정하지 못해요. 비록 부족하긴 해도 구원받을 만한 가치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아니면 존재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비존재는 그 자체로 악입니다)그래서 성경에서 의란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가 아니면 그 살ㅇ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며(고전13:1-3) 그런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의롭다 하심을 면목없이 빈손으로 받는 상태를 의 라고 합니다. 반대로 불의는 그 은혜와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내 것을 보태려는 것을 불의라고 합니다. 나 있음 내 존재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에요. 초대교회에 침투한 거짓교사들이 가르친 교회의 교회 됨으로 할례, 세례, 성찬 안식일, 절기 지키기 등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그 다른 복음이란게 한마디로 사람을 좋게하는 복음이에요 인간의 가능성과 가치를 챙겨주는 복음 그런데 오늘날 세상 교회가 그들과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들을 향해 바울처럼 분노하고 사도처럼 아니요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