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 일상을 잊고 찾은 산야 속 작은 농장 그림같은 풍경... "
하얀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어난다. 초여름의 산야는 초록의 물기를 마구 내뿜으며 광합성을 한다. 마을의 끝자락 저수지 아래에 작은 농장이 있다. 그곳은 도시의 문명과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된 공간이다. 온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자유롭다. 좁은 농로를 따라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마치 무릉도원에 들어간 듯 아늑하고 평화롭다. 그곳에 가면 뻐꾸기 소리와 맑은 바람과 햇빛을 자양분으로 나무와 채소가 자라고 있다.
작년부터 나는 지인들과 농장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농사일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태째 그 골짜기를 자주 방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집에서 30분 거리라서 오고 가는 데 부담이 없다. 그러면서도 아주 먼 곳에 여행을 간 듯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산골의 풍경이 펼쳐진다. 또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일상을 잠시 잊어버린 채 자유의 시간을 만끽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농장주의 넉넉한 마음 밭이 내 발길을 그곳으로 이끄는 요인이다.
그곳에 가면 그림 같은 별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농장이라는 팻말도 하나 없는 산골짝의 밭이다. 폐자재를 얻어와 지은 허름한 비닐하우스와 얼기설기 지은 작은 원두막이 시설 전부다.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농장주는 매일 그곳으로 출근한다. 퇴직 후 한 일 년은 사회 여러 단체장을 맡아 남은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나 곧 그만두고 농부가 되었다. 농사에 재미를 붙이자 세상의 일이 그만 시들해진 것이다. 씨앗을 뿌리고 싹이 돋아나고 물을 주고 가꾸는 즐거움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농사에 필요한 연장을 하나씩 샀다. 그리고는 마을주민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거의 대부분 주민을 내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눈에 띄거나 지나가는 사람은 다 불러 커피 한 잔이라도 대접했다. 손님들이 사온 고기나 선물도 아낌없이 나누어주자 아랫마을의 할머니가 제삿밥을 이고 올 정도가 되었다. 어떤 유별난 사람도 그 앞에서는 마음을 열고 이웃이 되었다. 귀농인의 첫 관문을 지혜롭게 통과한 셈이다.
큰길가에 있는 마트에서 구이용 돼지고기와 막걸리 두어 병을 산다. 방문객이 갖추는 최소한의 예의다. 집으로 올 때 바리바리 싣고 오는 답례품에 비하면 약소하다. 직접 재배한 배추와 양념으로 버무린 김장김치는 겨우내 땅속에서 발효되어 맛이 기가 막힌다. 구운 고기와 김치, 밭에서 키운 상추와 쑥갓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인다. 식사를 마치면 각자 필요한 만큼 나물과 꾸지뽕잎을 채취한다. 그 대신 다음 방문객이 가져갈 여분은 꼭 남겨두어야 한다. 그 농장의 규칙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주경야독으로 교사가 되었다. 어느 정도 자신의 꿈을 이루고 퇴직을 하자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나눔이라도 실천하고 싶었다. 연금이 나오니 욕심내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었다. 땀 흘려 가꾼 채소나 수확물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농장의 평상에 둘러앉아 밥 먹는 즐거움을 무엇에다 견주랴. 아침이 되면 밤새 자랐을 새싹이 보고 싶어 눈만 뜨면 농장으로 달려온다. 목이 말라 축 늘어진 상추가 물을 흠뻑 맞고 싱싱하게 살아나는 것을 보면 절로 즐겁다. 척박했던 땅은 기름진 옥토로 바뀌었다. 그의 손길과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그의 농장에서 자라는 것은 모두 튼실하다.
그의 삶은 동료나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해가 뜨면 농장으로 출근해 종일 노동을 하니 심신이 건강하다. 농사일의 지혜를 하나씩 터득해가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는 타고난 농부다. 스무 가지가 넘는 것을 심고 가꾸면서 온 정성을 다한다. 오늘도 나는 지인들과 만찬을 즐기고, 갖은 채소를 한 보따리 사서 돌아왔다. 사람을 좋아해서 누구를 대동해서 가도 반갑게 맞아준다. 남은 생을 흙과 함께 보내는 그는 무척 행복한 노년을 보내며 인생 후반부를 멋지게 살아간다. 그의 곁에서 나도 즐겁다. 그곳에 가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관현악처럼 울려 퍼진다.
이경희 수필가· 경일대 초빙교수
첫댓글 무르익어 가는 계절 마냥 이교수님 글도 무르익습니다. 누구나 노년에 꿈꾸는 곳이지요.
참 살 사신 분의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상추랑 쑥갓의 풋풋한 에너지가 여기서도 느껴지는 듯 합니다.
튼실하게 잘 자란 채소처럼 농장주의 넘치는 정겨움도 가득 담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