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읽기 (2) : <마의 산> : 마법으로 마법에 대항하기 (보충)

[kundera]

토마스 만, <마의 산>, 곽복록 옮김, 학원출판공사, 1993

Tomas Mann, Magic Mountain, translated by John E. Woods, Randomhouse, 1996 (Vintage book edition)
* 의심스럽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나 문장은 J. E. 우드의 최신 영역본과 대조해 병행 표기한다.

* 번역본에 대하여: <마의 산> 번역은 3가지가 있다. (번역자에 대한 소개가 없는 홍신문화사, 일신서적공사 번역본은 제외한다) 이효상 번역, 곽복록 번역, 홍경호 번역이 바로 그것들인데, 이중 여러번 재출간되어 널리 읽힌 것은 곽복록 번역과 홍경호 번역이다. 곽복록 번역은 옛날 동서문화사에서 나와(1978) 한동안 읽히다가, 90년대에 들어서 <학원사판 세계문학전집>과 <계몽사판 세계문학전집>에 다시 들어갔다. 이중 <학원사판 세계문학전집>은 비교적 기존 번역을 양호하게 담고 있지만, <계몽사판>은 자위적인 편집으로 기존 번역이 심각하게 회손되어 있다. 홍경호 번역은 두 종류가 있다.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에 실려있는 것과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범우사판 세계문학전집에 실려 있는 것이 그것인데, 놀랍게도 이 두 번역은 매우 차이가 난다. 원문에 상당히 충실한 금성판 <마의 산>과 달리 범우사판 <마의 산>은 인위적인 단락 나누기, 오역(임의적인 추가/삭제) 등이 가끔 눈에 띤다.
해서, 추천할 만한 번역본은 학원사판 곽복록 번역과 금성판 홍경호 번역인데, 아쉽게도 이 책들은 단행본이 아니어서 구하기가 힘들다. 헌책방에서도 이들은 희귀본에 속한다. 금성판 전집은 금성출판사가 아직 건재한 관계로 재고가 헌책방 시장으로 흘러나오지 않고(이 전집은 아직도 정가대로 팔리고 있다), 학원판 세계문학 전집은 헌책방에 자주 보이나 이들은 대부분 90년판이다. 학원판 전집은 90년판, 93년판이 있는데 이 두판은 거의 비슷하지만 새로 추가/삭제된 작품들이 있다. <마의 산>은 93년판에만 있다.

* <마의 산> 기본 참고 문헌:
헤무트 코프만, <소설의 곡예사: 토마스 만, 그의 문학과 세계>, 류은희 편역, 문학과지성사, 2000, 3장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2): 허구 이야기에서의 형상화>, 김한식/이경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0, 4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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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으로 마법에 대항하기:

(<마의 산>의 교양소설적 아이러니)

1. 장편소설의 본질
슐레겔이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를 읽고 열광한 것은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즉, 잡다함)때문이었다. 이것은 곧 장편소설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편소설이 장편소설일 수 있는 조건은 복잡한 스토리들이 공존에 있다. 독일 낭만주의가 반기를 든 것은 괴테로 대표되는 독일 고전주의가 아니라, 라신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고전주의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빌헴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라신과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힘겨루기를 기억하자. 군더더기가 없음을 그 특징으로 하는 라신의 비극과 달리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군더더기 자체가 매우 중요한데, 이는 소설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참고로, 셰익스피어와 세르반떼스는 동시대인으로 같은 해에 사망했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두 장르가 완전히 다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왜냐면, 장편소설이란 단편소설이 모여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두 장르의 차이는 소재 자체(또는 스토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선적 스토리>로 이루어져 있느냐 <스토리들의 충돌들>로 이루어져 있느냐에 있다. 단편소설의 본질은 스토리 자체로 결정된다. 하지만, 장편소설의 본질은 스토리 자체로 결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 간의 충돌이다. 해서 장편소설을 해석한데 있어 중심 줄거리에 비중을 두고, 삽입 에피소드를 보충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이다. 다시 하번,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토리들이 아니라, 스토리들 간의 이질성에 있기 때문이다.
난 이전에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대해 수수께끼같은 소설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사실 장편소설 전반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도 하다. 물론, 독일 전통의 장편소설(괴테, 토마스 만)과 프랑스 리얼리즘 소설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순 없다. 독일 전통의 소설이 비교적 세르반떼스의 소설(또는 셰익스피어)과 가까운 반면, 프랑스 소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의 <적과 흑>과 <마담 보봐리>를 상기해 보자) 하지만, 발자크의 <인간희극>과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를 떠올려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2. <마의 산>을 읽는 방법
장편소설 <마의 산>은 매우 잡다한 작품이다. 원래 <베니스의 죽음> 정도의 중편분량으로 구상되었던 이 작품은 10여년의 창작기간을 걸쳐 산(山)같은 소설이 되었다. 이 소설을 읽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바로 교양소설적 접근으로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부분은 <7장> "눈" 절이다. 하지만, "눈"절 이후에도 소설은 아직 1/3 정도 더 남아 있고, 이 나머지 부분은 바로 "눈" 절을 부정하고 있어 앞서 서술된 부분보다 더 중요했으면 더 중했지 덜 중요하지 않다. 교양소설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은 주인공의 애매성에서 발생한다. 도대체 그가 받는 교육의 성과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어느 정도 인물의 성숙단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성장소설과 분명히 갈라지는 지점이다.
해서 양식적 접근보다 발생론적 접근이 이루어지곤 한다. 헤무트 코프만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바로 그러한데, 하인리히 만과의 형제 콤플렉스는 물론, 쇼펜하우어/슈펭글러와의 영향관계를 추적하고 <마의 산>과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정치논문집 <한 비정치인의 고찰>에서 해석의 열쇠를 구하기도 한다. 이는 분명 토마스 만 소설을 깊게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대체로 토마스 만 소설의 일반적 특징을 지적하고 구분하는 선에서 그치고 만다. 예를 들어 그가 유머적 소설과 아이러니적 소설을 구분하려고 할 때 그러하다. (물론, 코프만도 이런 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성을 잘 인식하고 있다)
리쾨르는 <마의 산>을 일단 시간소설을 보고 "어떤 점에서" 시간소설인지를 문제삼는다. 그는 소설의 진행을 차근차근 따라가면서, <마의 산>의 핵심 주제인 시간/ 질병/ 문명비판이 어떻게 융합되고 있는지 논한다.

이제 <마의 산>이 시간의 재형상화에 어떠한 잠재적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 소설에서 시간의 아포리아에 대한 사변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그 아포리아를 한 단계 높이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는 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이 이미 소멸되어버린 극단적인 상황을 자의적으로 설정했다. 이런 시험으로 인해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수련 과정은 사유의 경험이 되는데, 그것은 이러한 시간의 무중력 상태의 조건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난 극단적인 상황의 모순을 보여준다. 시간소설·질병소설·질병소설·문화소설을 결합하는 서술 기법은 이런 탐구에서 필요로 하는 명석함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기 위해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용매인 것이다.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2), 269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의 산>이 "아포리아를 한 단계 높이기"에 멈춘다는 것이다. 즉, 토마스 만 특유의 "아이러니"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하나로의 결합이 아닌, 스토아 학파의 아타락시아에 가까운 불안정한 승리에 그치고 만다. "불협화음은 결국 화음을 이긴 셈이다. 하지만 불협화음의 의식은 한 단계 '높아'졌다." (271쪽)

< 다보스에 있는 한 호텔 >

3. 중심의 유익한 어려움
'중심의 유익한 어려움'이란 표현은 토마스 만의 에세이 <괴테와 톨스토이>에 나오는 구절로 이 말만큼 <마의 산>이란 소설을 잘 설명해주는 말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어려움'이란 넓게 말하자면 장편소설이 가진 복잡함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어려움을 낳는 요인은 바로 "중심의 파토스, 즉 아이러니"때문이다. 물론, 화자나 주인공이 세템브리니에게 호의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스에게 있어 그 역시 나프타와 마찬가지로 비꼼의 대상이 된다. 한데,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이 작품은 낭만주의를 극복한다. 낭만주의 극복이란 어느 편에 서는가가 아니라, 중심의 유익한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의 산>는 "마법에 사로잡힘"이란 중심모티브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마법이란 질병, 또는 죽음과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럼, 마법과 병, 죽음은 서로 어떤 형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선 우린 이 소설의 맨 첫부분에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story)는 아주 옛날 이야기로서, 말하자면 가장 멀고 먼 과거의 시칭으로 서술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역사에 의해 녹이 슬어 버린 그런 이야기이다.
이것은 이야기 그 자체를 위해 불리한 것이기보다 오히려 유리한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지나간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것일수록 그것은 이야기로서의 성질에 알맞고 또 속삭이듯 과거를 일깨워주는 작가에게도 좋겠기 때문이다. (...) 이 이야기의 과거성은 사실 한 마디로 말해 시간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 이 이야기가 아주 오랜된 옛날 이야기라고 하는 까닭은 이 이야기가 어떤 전환점, 즉 우리들의 생활과 의식을 심각하게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는 한계선 이전에 일어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야기의 과거적 성격은, 그 이야기가 <옛날> 것일수록 더 깊고 완전하고 동화(fairy tale)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우리의 이야기는 그 내면적 성질로 보거나, 그 밖의 점으로 보거나 동화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11-12쪽: 강조는 인용자)

화자는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앞으로 할 한스 카스토르프에 관한 이야기가 시간과는 무관한 과거에 대한 이야기로 일종의 '동화'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화자의 사후적 입장을 암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몰시간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부재하는 동화 또는 이야기엔 모든 것이 결정적으로 주어져 있다. 물론, 등장인물의 유동적인 성격이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결정된 상황내에서, 그 상황에 흡수될 때 일어나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말해, 몰시간적인 상황에서 결정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 자체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 즉, 공간에 먹혀버리는 형국이다. 마법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루카치는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을 분석하면서 '시간의 승리'를 말했던 것이다. (<소설의 이론>을 참조하라) 여기선 그 어떤 절대적 과거나 이야기가 없다. 아니, 시간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시간의 압도적 우의, 이것은 사실 프랑스 리얼리즘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한데, 괴테의 영향 하에 있는 <마의 산>은 처음부터 이를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마의 산>이 가지고 있는(또는 토마스 만/ 괴테가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왜냐면, 시간은 아이러니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그것은 시간을 거부함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 이틀만 지나면, 인간은 - 아직 생활에 그 뿌리를 굳게 박지 못한 젊은 사람에게는 특히 그러하지만 - 자기가 여느때에 의무, 이해 관계, 근심, 희망이라고 부르던 모든 것으로부터, 즉 일상 생활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의 힘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공간은 인간을 갖가지 관계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로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옮겨 놓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공간은 고루한 속인까지도 순식간에 방랑자와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시간은 망각의 물이라고 하지만, 여행중의 공기도 그러한 종류의 음료소인 것이다. 그리고 그 효력은 시간의 흐름만큼 철저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만큼 효력은 빠르다. (14쪽: 강조는 인용자)

< 다보스 가는 길 >

기묘한 전도. 여행(또는 휴가: 순전히 시간적인 일상으로부터의 일탈)는 흔히 시간적인 관점에서 인식된다. (크게 보아 휴가 역시 일상의 일부분이기에) 하지만, 여행(일시적 이탈)이 여행이 되기 위해선 공간적 속성(즉 변화)에 크게 의지해야 하는데, 여기서 시간은 오로지 여행의 종말(한스에겐 3주)을 의식함으로 겨우 유지된다. 그럼, 왜 인간은 여행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망각, 그것도 빠른 망각을 위해서인데, 이 망각은 곧 자연상태로의 귀환, 또는 시간-속-인간에의 거부를 의미한다. 자연은 공간으로만 존재한다. 이런 도발적인 발언은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루소 논쟁에 있어 묘한 역전을 보여주는데, 우선 여기에 주목해 보기로 하자. (비밀 공제조합 지부장, 시민적 공화주의자, 공화제적 자본주의자 현세적 시민주의자: 모두 소설 속 표현이다)인 세템브리니와 (스콜라 학파의 우두머리, 교회적 세계동포주의자)인 나프타가 충돌하는 지점은 루소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에서 발생한다.
우선 나프타는 루소의 "자연회귀"가 동물화, 비인간화를 지향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성은 건강에 있는 게 아니라, 병(즉 정신)에 있다고 주장한다.(387쪽) 즉, 계몽주의의 반대편에 선 나프타가 루소의 비계몽주의적 입장을 비판함으로 반계몽주의의 입장에 서는 논리의 뒤틀림이 일어나고 있다. 또 그에게 있어 진보란 병든 천재가 주는 그 무엇이다. 나프타가 루소의 보편-의지를 부정하는 방법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일단 루소가 말하는 자연상태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전쟁의 종말 역시 신이 준 인간의 본능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320쪽)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에게 있어 진보란 불가능하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병을 통해서이다. 사실, 계몽주의자 세템브리니와 스콜라 학파 나프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그럼, 어디서부터 둘은 갈라지는 것일까? 난 그게 루소 해독에 대한 차이라고 생각한다. 세템브리니의 경우, 시간(진보)를 위해 공간(자연)을 가정한 반면, 나프타는 공간을 위해 시간을 가정하는 형국이다. 즉, 이 둘의 싸움은 결국 기억과 망각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법은 과거의 소멸에서부터 시작된다.
병은 여행과 같다. 회복가능성을 망각한 병이란 시간성을 상실하고 그 자체가 강력한 망각위에 세원진 조상이 되고 만다. 산밑-세계에 대한 망각은 곧 병에 대한 만성화를 의미하고 그 자체로 진보(엄밀한 의미에선 퇴보)를 시작하는데, 물론 그 종착점이란 죽음이다. 나프타가 강조하는 삶에 대한 병/죽음의 우위성은 세속적 삶엔 진보가 없다는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인식없이(부정으로) 이루어진 '진보'란 결국 통속적인 시민정신에 갖히게 되고 만다(결코 보편의지에 이를 수 없다)는 생각이다. 해서 이와 같은 나프타의 논리는 진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진정한 진보(즉 천재로 인한 진보)를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테러리즘에까지 이르게 된다.
나프타의 논리: 죽음, 그것은 곧 영원(즉 무한)으로 나아감이다. 한데, 영원은 곧 시간의 부재를 의미하며, 시간의 소멸은 현상을 정지시킴으로 절대-진리(나프타에겐 신의 의지)에 다다를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리얼리즘이다. 한데, 리얼리즘은 곧 니힐리즘이라는 순환논리에 다다른다. 왜냐면, 신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로 제로(0)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은 사실은 니힐리즘이라는 인식에 이를 것이다. 왜 니힐리즘이란 말인가? 이유는 간단한 것으로, 무한에 비하면 아무리 큰 것이라 해도 무와 같기 때문이다.(580쪽)

해서, 나프타가 세템브리니와의 대결에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눈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페페른코른의 자살 이후 퍼진 마성은 그의 논리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것 뿐이다. 한데, 아무도 그걸 예견하지 못했는데 이는 곧 아이러니적 무관심이 갖고 있는 한계로, 스스로 마성을 극복하지 못하고(모순적으로 보이겠지만, 교양에 대한 불신은 교양소설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외부의 힘에 의해서 겨우 빠져나오게 된다. 결국, 중심의 유익한 어려움이란 아포리아를 한 단계 높이기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4. 마법과 교육
그럼, 우린 이런 "미약한" 능동성인 중심의 유익한 어려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는 곧 작게는 <마의 산>, 넓게는 토마스 만에 전체에 대한 평가, 또는 교양소설이란 양식에 대한 평가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빌헬름과 <마의 산>의 한스는 다르다. 한스의 경우 벨헬름보다 상대적으로 능동적이고 약삭빠르다. 하지만, 자의식이 그다지 없이 끌려다니는 벨헬름과 달리 한스는 나프타는 물론, 세템브리니로부터도 스스로 능동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빌헬름 앞에 펼쳐진 네 가지 세계(시민사회를 대표하는 베르너, 이상적 공동체주의의 로타리오, 하프를 타는 노인과 미뇽의 낭만적 비극, 종교적인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 저자)가 한스 앞에서 두 가지 세계(베르너와 로타리오의 세계가 결합된 세템브리니의 시민적/이상적 공동체주의와 낭만적 비극과 종교주의가 결합된 나프타/페페르코른의 병적 쾌락주의)으로 변한다. (물론, 이들 간의 결합에 논리적인 관련은 조심히 주장해야 할 것이다.)
<마의 산>은 괴테 소설보다 극단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마법에 걸린 사람이 교육받는 자에 국한되어 있는데 반해, <마의 산>은 모두가(심지어 교육자조차) 마법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난 도스또예프스끼의 <백치>를 논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돈 끼호떼가 세상에 나가자, 세상은 마법에 걸려버렸다. 한데, 미쉬낀 공작은 러시아에 돌아와 이미 마법에 걸려있는 러시아를 발견한다. 해서, 미쉬낀은 수많은 러시아의 돈 끼호떼들 중 한 명으로 축소되고 만다. 그는 환상을 전파하고나 깨우는 게 아니라, 순진함으로 개개의 환상을 더욱 곪게 해 마침내 터지게 만든다. 이물로서의 공작 역할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환상의 제국에 들어왔고, 환상 바깥에 대해선 사고할 줄 몰랐다."

한스는 마법에 걸려있는 러시아에 도착한 미쉬낀 공작과 같다. 물론, 그는 미쉬낀처럼 환상을 극대화하여 파열시키진 않는다. 단지, 마법의 성 안에서 스스로를 적응시켜나간다. 아우얼바하는 <햄릿>과 <돈 끼호떼>의 광기를 비교하면서, <돈 끼호떼>의 광기는 치료가능하지만, 햄릿의 광기는 치료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아우얼바하, <미메시스>(근대편), 김우창/유종호 옮김, 35쪽) 여기서 아우얼바하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햄릿의 광기가 가지고 있는 복잡성 자체이다. 하지만, 여기서 <마의 산>과 <백치>를 추가해 보면, 햄릿의 광기가 가진 복잡성(치료불가능성)이란 그나마 단순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왜냐면, 햄릿의 광기란 결론적으로 말해 시대적 광기에 대한 저항(전체주의적 마법에서 벗어나기)위한 가면에 불과한 반면, <마의 산>과 <백치>는 바로 이런 <광기에 사로잡힌 세계> 자체가 문제시되기 때문이다. <햄릿>의 교정-가능성이 암시되고, 또 죽음을 통해 그것이 실현된다. 하지만, <백치>에선 미쉬낀 공작 스스로가 파멸당할뿐 세계는 끄떡도 하지 않고, <마의 산>에선 요양소에 걸려있던 죽음의 마법이 전세계를 사로잡게 된다. 세계는 더 이상 교정대상이 아닌 것이다.
돈 끼호떼와 햄릿의 공통점은 그 스스로가 마법에 걸리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해서, 그들은 미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편력을 떠나고 복수를 한다. 물론, 이런 그들의 행위가 세계의 입장에서 미친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한데, 미쉬낀 공작은 이들과 다르게 세계는 결코 마법에 걸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그에게 있어 마법에 걸린 세상은 교정되어야 할 대상이기보다는 세심하게 감싸지고 치료되어야할 병(곪아터저야 할 병)으로 여겨진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마법 속에서 마법 풀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마의 산>에 고스란히 이어진다. <마의 산>의 마법은 죽음의 형태로 등장한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면 <햄릿>에서 죽음은 마법의 풀림을 의미하지만, <마의 산>에선 죽음은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주인공 한스는 바로 이 마법(죽음)을 통해 교양적 성숙을 이룬다.

죽음에의 공감이 타락한 낭만주의가 아닌 것은 죽음이 신성하고 성스러이 삶 속에서 받아들여지는 대신, 독립적이고 정신적인 권력으로서 삶에 대치될 때뿐이겠는가? 죽음과 병, 병리학적인 것, 몰락에 대한 관심은 인문 의학부가 증명하는 것처럼 단지 삶과 인간에 대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생물학적 유기체와 생명에 관심 있는 자는 특히 죽음에 관심을 가진다. 죽음의 체험은 궁극적으로 삶의 체험이며, 이러한 체험이 결과적으로 인간으로의 복귀를 보여주는 것은 교양소설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을 위한 기념 연설> 중에서, 코프만의 위의 책, 124-125쪽에서 재인용: 밑줄은 인용자 강조)

이 같은 토마스 만의 발언은 정확히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중간에 서있다. 체험의 대상으로서의 죽음은 나프타의 입장이지만, 그것의 극복은 세템브리니의 주장이다. 죽음을 통한 교양의 획득은, 마법은 마법 안에서만 풀린다는 역설을 낳는다. 이런 역설은 마법의 극복이라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법과 교육의 경계를 무너뜨릴 위험 역시 존재하는데, <마의 산>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불협화음은 결국 화음을 이긴 셈이다. 하지만 불협화음의 의식은 한 단계 '높아'졌다. 아이러니의 전략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아이러니는 결코 마법을 타파하지 않는다. 왜냐면, 근대시민사회에서 마법은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탈-마법은 마법을 통과할 때만 일어나고, 이때의 탈-마법 역시 새로운 마법에 휩싸인다. 완전한 탈주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이는 <토니오 크뢰거>에서 도달한 깨달은 문학의 자기긍정 과정과도 같다.
그럼, <마의 산>에 있어 교육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만약 <마의 산>의 교육이 비록 불협화음이 이겼지만, 그 의식은 한 단계 '고양'(니체에게서 빌려온 토마스 만의 용어)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이 '고양'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진정 그것은 변화, 또는 성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의 산>에서 이런 변화는 "연금술적 교육"으로 표현되고, 여기서 이룩해내는 질적 변화란 죽음을 통한 것이라고 정의내려진다. 죽음, 그리고 새로운 탄생. 이런 이중성을 체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바로 페페르코른이다. 그는 "힘이야말로 물질 세계의 전부"(483쪽)로 독이나 약같은 개별적 본질을 부정한다. (매우 니체적인 이런 발언은 토마스 만의 니체 극복 대상으로 설정된다)

물질 세계는 모두 삶과 죽음의 두 가지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어떤 물질이나 약으로 되기도 하고 독으로도 됩니다. (483쪽)

사실, 한스가 페페르코른에게 압도되었던 것은 바로 그에게서 이런 힘의 작용을 느꼈던 것이다. 이런 그에 비해, 나프타나 세템브리니는 '약과 독'이라는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힘이야말로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후에 이런 "힘"마저도 독으로 파멸될 때야 그는 어렴풋이 깨달을 뿐이다. 페페르코른이 죽고 쇼샤부인마저 요양소를 떠나자 베르크호프엔 "둔감"이란 분위기에 강력하게 지배당한다.

이때까지도 불길하고 미친 것 같은 영향을 오랫동안 심각하게 끼치고 있었던 악마가 드디어 권력을 장악하여, 이제는 공공연히 무제한의 지배권을 선언하고 신비스러운 공포를 불러일으켜 도망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그 악마, 그것은 둔감(stupor: 무감각, 마비)이라는 이름의 악마였다. (...)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무서운 악마적인 현상뿐이며, 그는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을 잊은 생활, 걱정도 희망도 없는 생활, 표면상으로는 분주한 것 같지만, 내부는 침체되어 있는 방종한 생활, 죽어 있는 생활이었다.
그런데 이 죽어 있는 생활이 분주한 것이어서 모든 종류의 활동이 동시에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그 중의 한 가지가 미친 듯이 유행으로 번져 모두가 그것에 열중하여 버리는 것이었다. (527쪽)

연금술적 교육의 목표는 바로 이런 '희미하고 감정적인 사람'(a man of fuzziness and fellings: 487쪽/p.573)인 페페르코른과 이로 인해 생기는 '둔감'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페페르코른과 같은 선상에서 한스를 잡아끄는 것은 쇼샤 부인과 히페이다. 그럼, 이런 둔감과 감정을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래 세계(즉, 요양소에 온 뒤 한스가 잃어버린 시미정신)에서는데, 이는 <2장>에서 자세히 서술되고 있다. 한스가 본격적으로 마법에 걸리기 전, 시민정신의 대표자인 한스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이것은 근대 시민의 마법에 대해 총괄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는 보수적이고 실리적이며 완고한 할아버지에게서 시민계급의 자세를 배운다. 머리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위해 턱을 당기는 모습은 청교도 시민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한스는 이를 무의식적으로 이어받는다.(30쪽) 한데, 그는 할아버지의 모습, 또는 '증증증'라고 올라가는 세대의 무한함 속에서 '죽음'의 모습 또한 발견한다. 이런 할아버지를 통한 시민사회에 대한 이중적 인식은 그가 근대시민사회의 마법에서 영원히 풀려나올 수 없음을 암시한다.
한스에 대한 교육은 나프타와 세템브리니의 대결로 서술이 끝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마저도 그로 하여금 마법에서 풀려나오도록 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교육은 실패했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 죽음을 통한 탄생, 또는 '한 단계의 고양'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은 결코 마법으로부터의 탈주가 아니라, 마법에 대한 인식 그 자체가 아닐까? 근대의 마법은 양면적이다. 즉, 마법에서 벗어나왔다고 하는 것 역시 또다른 마법에 걸려있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법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페페르코른의 최후는 '한 단계의 고양'이 갖는 의미를 명백하게 해준다. 근대사회에서 중심의 유익한 어려움은 다른 말로 근대사회의 극단의 용이함(자유)를 지적하며, 그것이 다다른 막다른 골목을 경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시간의 아포리아에 대한 사변적 해결책이 아니라, 아포리아를 한 단계 높이기인 셈으로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유머이다.

유머는 거리를 취하고 리얼리티의 극복을 지향하는 어떤 것을 정립한다. (...) 유머는 알레고리적인 표현에 가까우며, 서술적인 알레고리들 속에서 유머러스한 세계 관계가 표현된다. (코프만, 위의 책, 238쪽)

물론, <마의 산>에서 주도적인 것은 아이러니이다. (토마스 만의 <한 비정치인의 고찰>에서 아이러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이러니란 본래 그 자체에서 벗어나 스스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오로지 중간 위치로서 특징지어지는 행동 형식이다.) 하지만, 곳곳에 깔려있는 유머나 익살을 잊지 말아야 한다. <1장> 시작부터 한스는 베렌스와의 첫만남에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2장>에서 한스의 어머니는 웃자마자 죽었고, 한스의 할아버지 시신 위를 파리가 날아다니고, 특히 <3장> [근엄하게 찌푸린 얼굴]절에서 비극의 여배우로 표현되는 둘다 부인과 러시아 부부의 신음소리가 극명히 대조된다.
이런 유머의 기능은 리얼리티의 혹독함을 극복이며, 이것이 바로 아포리아에 대한 한 단계 높이기이다. 마법에 빠진 세계를 마법으로 풀어헤치기.

(보충) 마성과 마법

그럼, 여기서 우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마법이란 무엇인가? 마법에 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과 소설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마법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성(Damon:a에 움라우트 추가)에 대해선 꽤 중요하게 언급한다. 우선, 루카치가 인용하고 있는 괴테의 글을 보자.

마성적인 것은 신적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마성적인 것은 인간적이지도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오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성적인 것은 악마적이지도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착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마성적인 것은 천사적이지도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때때로 남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마성적인 것은 우연과도 유사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떠한 결과도 증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성적인 것은 신의 예견과도 유사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상관관계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제한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마성적인 것에 의해 상호 침투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것은 우리들 현존재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들을 제마음대로 제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성적인 것은 시간을 단축하고 공간을 확대한다. 마성적인 것은 단지 불가능한 것에만 만족을 느끼고, 가능한 것을 경멸하면서 그 자체로부터 밀쳐내어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루카치, <소설의 이론>, 반성완 옮김, 심설당, 111-112쪽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루카치는 괴테가 이야기하는 마성의 개념을 자신의 논의에 그대로 도입한다. 마성이란 추방된 신성으로 항상 총체성(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는데, 루카치는 이것이 주인공의 심리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서사시에선 연약한 신성으로 존재하는 마성은 비극에는 설 자리를 잃고 마는데(신성도 마찬가지다), 비극의 세계엔 맹목적인 사건의 집단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성과) 마성은 영혼이 사건을 운명을 바꾸고 연극적 의미가 완성될 때야 겨우 등장한다.

루카치는 소설의 구조상 특징으로 "내면성과 모험의 분리"를 이야기하는데, 비극엔 이 같은 내면성과 모험이 부재한다. 왜냐면 비극의 사건이란 영혼과 접촉하면 운명으로 변할 사건들만 존재하기에, 영혼과 세계 사이의 적대적인 이원성에 대한 인식인 내면성이 존재할리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분리가 소설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여기서 루카치가 중요하게 사용하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러니"이다.

작가의 아이러니는 신이 부재하는 시대의 부정적 신비주의이다. 아이러니는 의미에 대한 '유식한 무지'의 태도이자, 마성적 힘의 호의적이면서도 동시에 악의적인 마성적 영향력을 표현하는 태도이며, 또 이 영향력 이상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아이러니는 형상화에 의해서만 표현할 수 있따는 분명한 확실성이다. (위의 책, 116-117쪽, 강조 인용자)

루카치는 아이러니를 "마성적 힘의 호의적이면서도 동시에 악의적인 마성적 영향력을 표현하는 태도"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의 우세(좀더 정확한 말로는 이상의 무게)에 짓눌린 영혼이 가지고 있는 내적 문제성을 의미한다. 즉, 세계와 영혼의 부딪침에서 생기는 모험과 내면성은 필연적으로 마성에 이끌릴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마성은 아이러니와 항상 붙어다닌다. 즉,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세계가 신에 의해 충만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능력"(위의책, 119쪽)인 아이러니가 발견하는 것은 마성의 초주관성뿐이다.

위에서 우린 괴테가 마성이 시간을 단축하고 공간을 확대한다고 언급한 걸 보았는데, 이는 <마의 산>에 정확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마성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기 위해선 공간이 시간을 압도해야 한다. 시간은 마성에 가장 큰 적이다. 해서 소설은 엄밀히 말해 시간과 적대적인 장르이다. 그러나 이것을 소설이 본질상 시간을 부정하는 장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왜냐면, 소설은 시간 위에 설 수 밖에 없기때문이다. 바로 이런 시간 안에서 시간과 싸운다는 역설이야말로 아이러니다.

그럼, 마법과 마성은 같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마성은 세계(또는 의미)에 대한 이중적 태도에 불과하지만, 마법은 세계에 대한 전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마법은 미약한 마성에 대한 강한 마성의 비웃기이다. 해서, 마법은 아이러니를 넘어선다. 마법은 아이러니를 극한으로 몰고 가 '신이 부재하는 시대의 부정적 신비주의'를 '강한 신에 대한 긍정적 현실주의'로 바꾼다. 이제 리얼리티에 기댄 총체성에 대한 동경은 그 자체로 삭제되기에 이른다.

유머는 총체성에 대한 조롱이다. 돈 끼호떼가 편력을 시작할 때, 세계는 마법에 걸린다. 이 리얼리티가 삭제된 세계에서 마성의 악의적이면서 호의적인 영향력이 거주할 곳이 없다. 왜냐면, 이곳엔 세계와 영혼의 적대적 이원성 또한 부재하기 때문이다. 모험이 수많은 사건들로 파편화되는 것처럼 내면성 또한 분산된 그 자체로 자족적이다.

5. 죽음/에로스

세템브리니는 죽음이 가지고 있는 음탕함을 비판하는데, '세템브리니'란 말이 옛날 베니치아 말로 '동성연애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건 의외이다. 죽음에 관한 책인 <마의 산>이 에로스에 관한 책이기도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프란츠 펜촐트는 <치료 백과사전>에서 작품의 실제 무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다보스 광장과 마을: 해발 1, 560미터 고지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요양지. 겨울에는 바람이 잦고, 여름에는 바람이 거세다. 먼지가 상당히 많고 그늘이 거의 없다. 정신병원들과 대중 요양소들, 수없이 많은 베란다가 딸린 시설 좋은 호텔들 등등. 그러나 향락의 기회가 너무 많다. 병자들이 쇄도하고 수많은 건물은 마을을 도시로 만들었다. 다보스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로 인하여 파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 결핵 요양소에서 함꼐 사는 것, 영양 과다와 운동 부족은 남녀에게 모두 성적 충동을 쉽게 일으킬 수 있는 요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코프만, 위의 책, 112-113쪽에서 재인용)

<풍성한 식탁, 과도한 음식섭취와 음탕함>

죽음과 영양과다라는 모순적 결합이 만큼 음탕함은 본질적으로 비교육적이다. 왜냐면, 교육이란 일종의 절제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프로테스탄트적 정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교육은 본래 그리스적 공동체 교육에서 나온 것으로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끈끈한 애정이 그 전제로 요구된다. (물론, 그 양상에 차이 또한 존재한다) 토마스 만의 동성애적 경향은 이미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마의 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한데, <마의 산>엔 새로운 동성애적 성향이 들어선다. 우선 연장선상의 의미에서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동성애는 희미하고 감정적인 히폐에 대한 사랑으로 재등장해 쇼샤 부인에 대한 알 수 없는 몰입과 페페르코른에 대한 경도로 이끌린다. 즉, 죽음과 가까운 동성애적 에로스다.
한데, 이와 다른 동성애로 한스와 세템브리니의 관계가 등장한다. 원래 <베네스에서의 죽음>에 대한 풍자적 중편소설로 구상되었던 이 소설이, 원래의 구상을 유지했더라면 이 동성애는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교육"이란 오로지 장편에서만 논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스토리의 내용이 아니라, 스토리 간의 충동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해서 교양소설은 필연적으로 강한 아이러니를 포함하게 된다. 한데, 아이러니는 본질적으로 에로스적이다. 고대 그리스적 동성애를 상기시키는 한스와 세템브리니의 긍정적 동성애적 경향은 이런 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양소설에서 여성은 항상 추상화된 대상에 지나지 않는 반면, 남성이야말로 구체적인 경우가 많다. 아마도 교양소설은 본질적으로 동성애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다.

6. 눈(雪)
이제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눈>절을 분석함으로 이 글을 마무리지어 보자. 요양소 베르크호프를 상징하는 자연물로는 뭐니뭐니해도 눈이다. 이곳 요양소에선 사계라는 자연적 순환이 눈에 완전히 먹혀버린 것 같다. 홀로 스키 모험을 떠난 한스는 결국 눈보라에 고립되고 되고 여기서 그는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다. 물론, 이 깨달음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이 소설, 또는 한스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각성 지점이라고 하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한스에게 눈은 자연을 대표하는 것으로 "규칙적인 육각형의 꽃"(403쪽)으로 표현된다.

생명을 이루고 있는 유기물질은 이렇게까지 정연한 법은 절대로 없고, 생명은 지나치게 균형이 잡힌 그 규칙성에 놀라고 그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것, 죽음의 신비를 감추고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고대의 신전 건축가가 열주의 배치 어디에다 남몰래 그 균형을 조금 틀리게 한 것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399쪽)

그는 눈에서 죽음을 본다. '엄격한 균형과 얼음같이 차가운 규칙성'에서 죽음을 보는 것이다. 삶은 바로 이런 균형과 규칙성을 깨뜨림으로 존재하는데, 눈보라 속 고립을 나프타와 세템브리니 논쟁 속 고립과 동일시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한스는 눈보라 속에서 논리적 균형과 규칙성에서 죽음을 발견하고, 미란 이런 죽음에서 나올 수 없다는 역설적 결론에 이른다. 미란 바로 이런 엄격한 죽음을 뒤틀음으로서 가능한 셈이고, 한스의 교육 역시 나프타와 세템브리니의 엄격한 논리성에 아이러니적 무관심을 유지함으로 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어이없을 정도로 규칙적인 결정체로 몸을 묻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403쪽) "나는 영혼 내부에서 태양이 아들들과 생각을 나누고 나프타의 생각에는 물들지 말도록 하자. 그러나 세템브리니의 생각에도 물들지 않으리라. 두 사람은 다 수다쟁이에 지나지 않는다."(412쪽) 해서, 그는 고립되어 쓰려지는 대신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싸우면서 움직였다. 목적에 맞는 움직임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아무튼 최선을 다했고 심한 찬바람에 사지가 점점 무겁게 마비 상태로 되어 온 것과 싸우면서 계속 움직였다. (404쪽: 강조는 인용자)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 강한 것이다. 사랑만이,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올바른 생각을 주는 것이다. (...) 아, 나는 이처럼 확실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래잡기>를 할 것이다. (...) 이것으로 나는 꿈을 마지막까지 다 꾸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말을 찾고 있었다. 히폐가 모습을 나타낸 장소에서, 발코니에서, 어디에서나 그 말을 찾아 이 눈이 덥인 산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 이 잠과 꿈이 내 생명에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 일어나라, 이러나라! 눈을 떠라! (413쪽)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올바른 생각을 주는 것이다'라는 진부한 결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엄청난 깨달음의 시간이 불과 10분 동안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인물의 성장, 또는 발전이 가지고 있는 이런 아이러니는 시간이란 근대적 마법 앞에선 겨우 아포리아를 한 단계 높힌 것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교양소설로서 <마의 산>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전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