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선생의 타살의혹이 밝혀질 것인가.
최근 장준하 선생의 이장과정에서 두개골에 외부의 충격으로 생긴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발견됨에 따라 박 정권 하 또 하나의 만행이 드러나게 될 지 주목을 받고 있다.
장준하 선생이 1953년 창간한 ‘사상계’가 1970년 김지하의 시 ‘오적’을 게재하였는다는 이유로 폐간되자마자 바로 그 해 함석헌 선생에 의해 ‘씨알의 소리’가 창간되었다.
그 씨알의 소리에 소개되었던 한 글을 소개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윤반웅 목사는 장준하 선생과 한 때 동학했던 분이다.
《인물탐구》
윤반웅 일화십선(逸話十選)
<씨알의 소리> 2002년 9~10월호
조 항 철(조항철은 윤 목사가 시무하시던 동녁교회<예전에는 신흥교회> 목사이다)
이 나라에 유신과 군사독재로 민주 인사들이 탄압받던 때가 있었다. 사회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올바른 정치를 세우고자 노력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초를 겪었다. 그 중에는 성직자들이 많이 있었다. 윤반웅 목사는 그들 중 하나였다. 대단한 분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드러내기는 꺼려진다. 윤반웅 목사 스스로도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다. 상대적으로 남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그의 숨겨진 일화들을 캐내면서 훨씬 추켜세우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다. 대쪽같은 그의 성품, 폭발음 같은 정의의 부르짖음, 능력 있는 조용한 기도!
윤반웅 목사는 1910년 7월 1일 함경남도 신창에서 8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윤익준은 한학자였다.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윤반웅 목사도 목회현장에서 부친으로부터 얻은 한의학 기초 지식과 기술을 자주 활용했다. 유교적인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기독교를 동경했다. 기독인 독립투사, 민족지사들의 혁혁한 활동을 가까이에서 목격했다. 그러던 중 장공(김재준 목사)을 만났다. 큰 스승을 만난 것이다. 장준하와 함께 장공에게 신학을 배웠다.
그는 함경북도 웅기에서 목회하다가 전쟁이 일어나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충청도, 제주도, 전라도에서 피난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후 서울에 두 개의 교회를 세웠다, 월곡교회와 신흥교회(지금의 동녘교회). 특히 동녘교회는 윤반웅 목사의 얼과 같다. 여기에서 불의와 맞섰다. 여기에서 ‘아모스’가 되었다.
본래 일화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떠난 사람의 묻힌 이야기다. 그렇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캐내면 곧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리고 우리 가슴에 파고든다. 이제는 우리 마음에 계속 살게 하자.
개종자의 마음
윤반웅 목사는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기독교로 개종하고 싶었지만 반대가 심했다. 부모를 간곡하게 설득했다. 마침내 허락했고, 식구들도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조상들에게 여전히 제사를 지냈다. 철저한 개종은 아닌 셈이다. 윤반웅 목사는 제기(祭器)들을 모아다가 깨뜨리고 불살라 버렸다. 이 일로 심한 꾸중을 들었다. 그러나 얼마 후 마음을 한 곳에 두기를 바랐던 그의 깊은 뜻을 알고 모두 세례를 받았다.
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두 가지의 종교성이 그 마음에 얼마간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다. 그리고 가끔씩 돌아갔으면 한다. 양자 사이에 닮은 것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윤반웅 목사는 가족들의 이런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양다리’신자여서는 안 된다. 그는 한 가지 마음, 분명한 고백, 투명한 선언, 이런 것을 좋아했다.
기도하는 예언자
신학교 다닐 때였다. 주기적으로 배가 아파서 힘들었다. 신장결석 증세로 여겨진다. 장공(김재준 박사)이 매우 염려해 주었다. 수업시간이라든지 청소할 때 가끔 어디론가 없어졌다. 통증이 오면 표시 내지 않으려고 나가는 것이다. 한 번은 청소하다 말고 사라졌다. 덮어주면 좋으련만, 영문을 모르는 친구들이 “청소하기 싫으니까 도망갔구나.”라며 사람 없는 표시를 내고야 만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 보니 그는 기도하고 있었다. 이 기도는 통증이 왔을 때부터 병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하기로 작정한 ‘금식기도’였다. 그는 기도의 위력을 확신했다. 병은 나았다. 이후 복통 증세는 한 번도 없었다.
윤반웅 목사는 기도하는 예언자였다. 일찍이 체험도 있었거니와 기도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출입을 금하고 기도했다. 유신 시절 형사들이 찾아왔다가 “목사님 기도중이십니다.”라고 전하면 그 길로 돌아갔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리고 고난 주간이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며칠씩 금식기도를 했다.
기도 모임에 나가면 서슴지 않고 마음에 담았던 기돗말을 토해내기도 했다. 목요기도회에서 윤반웅 목사는 이렇게 기도했다. “박정희 도당을 오늘 당장 물리쳐 주옵소서.” 당시 ‘박정희 도당’이라는 말은 대화에서도 쓸 수 없었다. 말을 함부로 하면 잡아가던 시대였다. 그런데 기돗말로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 그만이 이렇게 할 수 있었다.
청와대 조찬기도 모임에서 말끝마다 ‘각하’를 연발하는 ‘거룩한’ 목사들의 기도를 이 한마디로 무너뜨리는 듯했다. 게다가 “물리쳐달라.”는 말까지 덧붙이니, 그것도 오늘 당장! 아마 같이 기도하던 목사들이 불안해서 실눈을 뜨고 기도했을 법하다. 우연인지 기도의 응답인지, 그 날 밤 궁정동에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박정희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십계명대로 삽니다
일본 점령 말기, 웅기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전도사였다. 신사참배를 방해하고 공산주의를 퍼트린다는 혐의로 고등계(지금의 정보계)에서 성직자들을 붙잡아갔다. 감리교, 성결교의 목사들이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위압감 속에서 묻는 여러 질문을 대부분 부정했다.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도 했다. 협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잘못되면 교회가 문을 닫을 수도 있고 감옥에 가거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윤반웅 전도사의 대답은 의외였다. 담대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나는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십계명대로 삽니다.”
신사참배든 공산당이든 신앙에 어긋나는 것은 안 한다는 얘기다. 심문하던 사람들이 ‘이 사람은 어디에 내놓아도 믿을만한 사람’이라면서 윤 전도사를 풀어 주었다. 오히려 그들이 감동을 받은 것이다. 같이 끌려갔던 목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이후 어느 누구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
신앙을 무엇으로 바꾸랴. 어떤 위협으로 꺾으랴. 어떤 회유로 빼앗으랴. 윤반웅 목사는 ‘이것이 신앙적인 행동이다’라고 확신하면 어떤 것 앞에서도 결코 굽힐 줄 몰랐다. 단순한 고집이거나 만용이 아니었다. 그는 신앙과 말과 행동이 하나였다. 그리고 강직했다. 언제나 그랬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것도 강직한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잘 피해서 가십시오
전두환이 선심성 정책으로 해제시키기 전까지 ‘야간 통행금지’라는 게 있었다. 자정부터 새벽까지 다닐 수 없도록 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윤반웅 목사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떤 모임에 나갔다가 그만 ‘통행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어머니가 병약한 터라 외박하는 것은 아들로서 온당치 못하다.
그렇다고 지금 길로 나서면 도중에 파출소에서 묵게 된다. 어차피 사이렌이 울린 이상 똑같은 결과다. 사람들도 아침에 일찍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만류했다. 그래도 일어나 집을 향했다. 예상대로 방범이 호각을 불며 다가와 말했다.
“통행시간이 지났는데 어떻게 이렇게 가고 있습니까?”
윤반웅 목사가 대답했다.
“아, 내가 알고 있소. 그러나 노모가 계셔서 가봐야 되겠소. 나를 보내 주시오$$$”
방범은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러면 잘 피해서 가십시오.”
법이라도 이렇듯 아들의 어머니 위하는 마음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허수아비도 새를 쫓는 법이야!
목요기도회 가는 날, 준비하고 집을 나서는데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형사가 물었다.
“목사님, 어디 가십니까?”
“그건 왜 물어? 목요기도회에 가오.”
“목사님, 순서를 맡았습니까?”
“아니오.”
“그럼 들러리구만요.”
“이 사람아, 허수아비도 새를 쫓는 법이야.”
형사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나서는 모퉁이까지 배웅하였다.
순서를 주지 않으면 모임에 나가지 않는 목사들의 생리를 잘 알고 은근히 비웃는 말이었는데, 그래서 창피해 할 줄 알았는데, 자기가 무안을 당하고 말았다. 또 순서에 넣어주지 않는 것을 보니 목사들 사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꼬집으려는 말이기도 했다. 사실 순서를 놓고 목사들은 신경전을 벌인다. 설교를 맡았느냐 기도를 맡았느냐를 놓고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행사를 치르는 입장에서도, 무슨 예식이나 예배가 있어서 존경하는 목사를 모시려고 할 때는 “목사님 이번에 설교 맡으셨는데, 꼭 오셔서 좋은 말씀 해주십시오.”라고 초대해야 한다. 참석만 해달라고 초청하는 것은 왠지 상대가 불쾌해 할 것 같은 예감을 하게 된다. 글쎄 이것이 격에 맞추는 것일까?
윤반웅 목사에게는 바리새인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순수하고 초연하다. 순서를 맡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해하거나 무시당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순서를 맡게 되면 수줍어했고, 그때가지 긴장을 풀지 않고 준비했다. 성실하게 임했다. 목요기도회가 탄압을 받았을 때 장소를 도봉산으로 옮겨 산행기도를 한 적이 있다. 예배 인도 ‘당번’이 되었다. 배낭에 양복과 넥타이를 넣어 가지고 가서 갈아입고 예배를 인도했다.
그는 이끌고 가는 지도자이기보다는 따라가 주는 지도자였다.
법정일화
1976년6월 5일 긴급조치 9호 명동구국선언 사건 관련 재판정에서 검사의 논고를 변호사가 피고에게 묻고 확인하는 대목이다.
이○○ 변호사: 설교 또는 기도를 통해 박정희씨와 그 일당이 물러가야만 살 수 있다. 이 나라는 말도 못하게 하고, 무슨 법을 만들어서 목사가 설교도 못하게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국가를 만들려는 인사들을 못살게 하고 있다. 박정희씨와 그 일당은 마음대로 기도를 못하도록 방해해 왔고, 대학 교수들의 목을 베고 대학생들을 감금하고 또 여러 사람들을 구속하고, 이들을 원수로 여기니, 이런 학정을 하는 박정희씨와 그 일당을 조속히 몰아내고 이 나라를 옳게 세워야 한다. 그리고 신문에 옳게 기사를 못 내게 하고, 방송보도도 못하게 하니, 이런 인권 억압하는 통치자를 우리는 원치 않는다는 등의 발언을 한 일이 있습니까?
윤반웅 목사: 인정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한 것입니다. 또한 박정희씨와 그 일당이라는 말은 옳고, 조속 몰아내 달라고 하는 말도 옳습니다. 이때까지는 물러가기를 호소했지만,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몰아 내달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내가 이 악한 사람을 ‘하나님이’ 몰아 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누구를 선동하거나 누구를 동원해서 나라를 세우자고 어떻게 한 것은 아닙니다. 검사는 내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가지고 내가 사람을 선동한 것처럼 죄를 뒤집어씌우는 논고를 썼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박정희씨를 몰아내 달라고 기도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학정도 이런 통치자도 원치 않습니다. 또 대통령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홍○○ 변호사: 여기에 박 ○○씨는 누구입니까?, 대통령을 말하는 것입니까?
윤반웅 목사: 박정희씨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나는 모르나 공소장을 만든 검사가 박정희씨라고 기록하기가 곤란하니까 박○○씨라고 그랬겠지요. 박○○씨라는 이름이 있으니 박정희씨로 보아야 되겠지요.
이○○변호사: 제가 듣기에는 피고인께서 여러 번 연행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몇 번이나 되는지요?
윤반웅 목사: 중앙정보부에 일곱 번, 청량리 경찰서에 아홉 번, 중부경찰서에 두 번, 동대문 경찰서에 세 번, 중간 중간에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일주일만에, 8일만에, 5일만에, 3일만에 $$$$$.
유신 때에, 피고로 재판을 받으면서 이런 모습, 이런 표현을 거침없이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당시는 ‘각하’가 통치하는 시대가 아닌가? 이 표현 때문에 재판이 집중이 안 될 지경이었다. 판사와 검사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고 다시 묻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사람이 대화할 때 호칭, 특히 존칭이 예상되는 분위기에서 기대가 빗나가면 여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대화 내용을 놓치기가 일쑤다.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는 그였다. 청량리 경찰서에 붙잡혔을 때, 그는 “너희는 ‘박정희에게’ 얼마나 충성하려느냐?”고 호통을 쳤다. 이 말을 듣고 형사가 손찌검을 했다. 성직자에게 손을 대다니? 그는 얼마 후 중병을 앓았다.
그리고 이것은 표현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념이요 신앙이었다.
설교일화
다음은 1982년 5월 30일 주일예배 설교 중 마지막 부분이다.
“한국 기독교 장로회 서울노회가 향린교회에서 나라와 갇힌 자를 위한 기도회를 한다고 해서 지난 금요일 날 저녁에 가봤는데, 나는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뭘 놀랐느냐? 한국에 몸이 굵은 사람을 모두 형사로 채용했나 봐요. 키도 나보다 배나 되고 몸도 나보다 배나 되는 사람들이오.
그런 사람들이 수 백 명이 와 있어요. 아주 전투 작정을 했어, 전투. 불끄는 사람들도 불끄는 옷을 입고, 불붙는 마당에 가는 것 같이 거기 와 있어요. 아마 한 4-5백 명쯤 되는 것 같아요. 교회 골목 양쪽에 쭉 늘어서서 ‘죄인들이’ 나가면 낚아채려고 이렇게 벽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향린교회에 가 보신 분은 알겠지만, 거기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골목이 있는데, 그 골목 전체가 꽉 찼어요. 교회가 기도회를 한다는데 이렇게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건 전두환의 정치를 알 수 있는 겁니다. 속임수를 해 먹으니까, 속임수를 해 먹으니까, 자기 마음이 편안할 수 없으니까, 이래야 자기가 살 줄 알고 이 짓을 하는 겁니다(여기서 목이 메인다).
그야말로 날강도요! 이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날강도 짓을 하는 거요. 그렇지 않으면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참말로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다가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올해 예산이 10조라는데, 1조 이상은 그 사람들을 먹이고 운동시키는 이런 정보비와 그따위 장난에 다 써 버린다는 얘기요. 그래서 미국이나 일본보다 3배 이상 됩니다.
이 밖에도 엄청난 사실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아요. 강단이니 말을 삼갑니다만, 그런 ‘개놈의 새끼들이’ 어떻게 정치를 한단 말이요. 여러분, 목사를 공산당하고 결탁했다고 잡아넣고, 학생들을 고문하는 거요. 자기들의 안일을 위해서 이 굵은 사람들을 돈을 주고 뽑아 오는 거요. 이럴 수가 있겠느냔 말이오. 이게 정치란 말이오?
여러분 이제 우리가 오늘부터 현 정부가 광주책임, 장영자의 책임을 지고 물러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애매히 고난 받는 사람들이 다 석방되게 해 달라고, 우리 교회가 여기 세워져 있는 이상 이 받은 사명을 다 하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는 꼭 기도해야 합니다. 다 같이 기도하시오. 몰아 내달라고 날강도 같은 놈들 몰아 내달라고$$$$$.”
설교 한편의 한 도막을 가지고 윤반웅 목사 평생의 설교를 말할 수는 없다. 그건 결례다. 다만 느낌이 강하다. 강단 아래 누가 와 있더라도 그의 준비된 설교는 수정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교회가 탄압을 받는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요원들이 끊임없이 교회를 들락거리면서 설교를 감시했고 교회를 탄압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계훈제 선생이 피신 차 윤반웅 목사를 찾아 왔다. 계선생은 중앙정보부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몇 날을 묵었을까, 주일을 앞에 두고, 주일이면 요원들이 온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즉 주일은 안전하지 못하니 다른 곳에 잠깐 가 있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계선생은 목사에게 피해 왔으니 마땅히 예배를 드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위험했다. 그래서 다락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교회 구조상 가능했다. 쭈그리고 앉아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설교시간 내내 ‘대관절 내가 지금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붙잡히러 왔구나!’라는 생각만을 했다고 한다. 계선생은 그의 설교에서 참 예언자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박정희 도당’, ‘전두환 도당’, ‘이순자 도적년’이란 말은 윤반웅 목사만이 할 수 있었다. 그는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기도일화
앞에서 기도일화 하나를 소개했지만, 그의 기도문을 직접 대해보는 것이 어떨까? 그의 기도일화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교인들은 윤반웅 목사를 회고하면서, 설교하는 목사로 떠올리는 것보다 기도하는 목사로 더욱 떠올린다.
다음은 1982년 5월30일 주일예배 때 드린 기도 일부다.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서 정치하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주옵소서. 속임수를 버리고 국민을 우롱하는 행동도 다 버리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게 해 주시고, 특별히 전두환 그 사람을 회개시켜 주시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오늘이라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몰아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가 바로 되고 이 국민이 살 것입니다.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부디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또한 광주 피해 가족들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 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의 피의 소리를 들으셔서 이 나라를 바로 잡아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으로 남북이 하나되고 이 남한의 복잡한 것, 이 억압을 없애 주시고 국민의 자유를 빼앗고 억압하는 자를 오늘이라도 다 몰아 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애매히 고생하는 남$여 학생들, 모든 민주 인사들, 최규식 신부 일행들을 다 석방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앞으로도 이 나라가 그런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 전두환이 그대로 앉아 있으면 그런 일이 앞으로 더 많을 터인데 아버지 하나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아무쪼록 하나님이 같이 하셔서 전두환이를 몰아 내주시고, 그 일당도 다 몰아내 주시고, 이 나라가 평정하게 해 주시고, 경제도 회복되는 길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참으로 구국을 위한 집념의 기도이다. 이런 기도는 어쩌다 특별한 날에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주일마다 반복되었다. 교회에서만 드리는 기도도 아니었다. 장소가 어디든, 어떤 성격의 예배나 집회든 나라를 위한 구국의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윤반웅 목사는 묵상기도로 더 유명하다. 회중 대표기도가 아닌 개인기도는 예외 없이 조용히 묵상하는 기도였다. 교회에서, 방에서 그리고 산에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묵상하는 모습을 많은 이들이 목격했다. 기도요청을 받고 심방을 가서 기도할 때도, 또는 교인들이 직접 찾아왔을 때에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만 잔잔하게 기도했다
. 그러나 능력 있는 기도였다. 기도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았다. 피부병, 열병,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모두 나았다. 교회가 심한 탄압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지만 이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어 지금까지도 교회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교인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에도, 남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어떤 이는 큰소리로 거들먹거리며 기도하다가 공개적으로 심한 꾸중을 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모 대학 교수의 부인인데, 이렇게 창피를 줄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 버릇을 고치지 않고 오히려 항변한 것이다. 얼마 후 그녀는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모여서 기도할 때 통성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7-80년대 한국교회는 통성기도 전성기였다. 그런데 이때에 통성기도를 못하게 한 것이다. 기도도 유행을 타는 것일까? 지금은 점점 묵상기도를 선호하는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조용하지만 집중하는 기도를 강조한 것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라
지도자란 최종적인 결과와 책임에 기꺼이 나서는 사람이다. 일을 그르쳤을 때 지도자인척 하는 사람과 정말 지도자가 가려진다. 지도자인척 하는 사람은 수하의 무능력을 드러내지만, 훌륭한 지도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본다.
윤반웅 목사는 교회 봉사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라.”
“나머지는 내가 하마.”
이 말이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큰 위안과 용기가 되었다. 한 청년 자매가 매사에 신중하다 보니 일을 맡는데 많은 부담을 느꼈다. 적은 일이라도 기피하곤 했다. 그러나 윤반웅 목사의 따뜻한 이 한마디에 자신감을 회복하고, 교회 일에 앞장섰다. 언제나 뒤에서 못 다한 일을 책임져 주는 든든한 손길을 생각하면 더욱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매는 날이 갈수록 윤반웅 목사를 큰 스승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며느리가 되었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라!
양평을 조금 지나면 지축역이라는 간이역이 나오는데, 여기 근처에 윤반웅 목사의 묘소가 있다. 철마가 쉬어 가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한 시대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건만 묘소는 그저 소박하다.
그리고 그 옆의 묘비에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고 적혀 있다. 그의 삶의 철학이요 신앙의 선언이다.
그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 글귀다. “예”해야 될 때 “아니오”라고 부인한다든지, “그건 아니오”라고 거부하지 못해서 침묵한다든지 “나를 끌어드리지 말라”는 회피적인 태도라든지, 중용을 내세우는 소위 중도파 등의 무리에 속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겼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하고 그에 따른 행동도 분명했다. 유신과 군부 정권 하에서 이렇게 살다보니, 교회도 식구도 감시와 탄압이 그칠 날이 없었다. 탄압에 못 견디어 교인들 중에는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빈번하게 생겼다. 그리고 가까운 동지들 중에도 한 걸음 떨어져 걸으려는 이들이 생겼다. 그래서 강직한 삶은 외롭고 쓸쓸한 길이 아닌가! 그러나 이 좁은 길에서 단 한번도 외도하지 않은 그의 삶, 과연 강하고 담대하여라!
맺는 말
얼마전 이 글을 쓰기 위해 윤반웅 목사를 회고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암울한 고통의 시대에 그가 파 놓은 샘에서 함께 샘물을 마시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샘을 파 놓은 그는 갔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샘에서는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아마 오래도록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그를 그리워하며 그 물을 마시고 있다. 입을 모아 그들 모두의 스승이요 아버지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남을 대놓고 칭찬하지 않기로 소문난 장공은 윤반웅 목사를 공공연하게 “윤이 진국이오.”라 했다는데, 이 말이 딱 맞다.(목사 동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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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내가 겪어보았던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다.
가까머리가 성명서 전달
그러니까 까까머리 시절, 고교 평준화가 도입되어 연합고사를 치른 뒤 마냥 놀고 있던 중3때였다. 교회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목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동근아, 이것 동아방송에 가 보도국장에게 이것 전해주고 오너라”
동아일보 백지광고사태가 있던 즈음, 동아방송에서는 동아일보탄압 규탄 성명이 줄을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것이 성명서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바 있었던 목사님은 당시 민주수호기독자회 회장을 맡으신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하얀 편지봉투에 담긴 그 내용을 보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된다는 중압감이 나의 호기심을 지긋이 눌러 포기하고 말았다. 광화문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려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아직 해가 남아있는 이른 저녁이었지만 동아일보 사옥에 있던 동아방송의 어둔 복도는 나의 무거운 가슴을 더욱 짓누를 정도로 침침했다.
노크를 하고 보도국장에게 봉투를 내밀자, 그는 매우 놀란듯 목사님께 확인전화를 하고는 건네받았다.
1910년 생인 윤반웅 목사님은 나의 조부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다.
윤목사님과 체구도 비슷하셨던 조부는 3·1운동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조모 치마속에 감추는 등의 방법으로 각처에 배포하였고 안성, 김포, 고양 등에서 현지인을 선동해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사라지는 등 신출귀몰한 행동을 보였으며, 33인에 대한 옥바라지를 책임지고 독립운동의 자금책으로도 활동하셨고 2차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일경에게 자금의 흐름을 추적당해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자 주변의 권고로 상해로 망명하셨다.
당시 이갑성이 18세였고, 36세이던 조부는 이상재, 이승훈, 함태영 등과 깊은 교류를 해온 것으로 비춰볼 때 3·1운동때 조부의 역할은 매우 지대하였으나 사료로 남은 것이 없음은 매우 유감이다. ‘기독교 100년사’에 조부께서 3·1운동 거사 이전부터 깊이 관여하신 내용이 일부 나타나 있고, 기독교 대표로 한성임시정부수립의 실질적인 산파역을 하셨고, 신간회 안성지부장을 했다는 정도가 기록되었을 뿐이다. 조부는 광복후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위원, 기독신민회 초대회장을 거쳐 1953년 기독교장로회 총회장,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 이사장 등을 지냈다.
조부께서 현역에서 은퇴하신 뒤 신당동에 거주하던 시절 무슨 일이 있으면 윤 목사님을 부르셨고, 목사님은 기꺼이 달려가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부께서는 아예 윤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회기동 신흥교회(현 동녘교회) 앞으로 이사하셨다.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 윤 목사님은 매년 추도식을 주재하셨다. 장황한 설교가 계속돼 추도식이 끝나려면 1시간이 넘는 경우도 많아 나는 잘 차려진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어머니 무릎에서 잠이 든 적도 여러번 있었다.
“박정희를 죽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한 뒤 열린 주일예배.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도입부인지 중간인지 어디서부터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하나님 아바지, 박정희를 몰아내달라고 했는데 죽여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셨다. 그순간 나의 다리가 갑자기 사시나무 떨리듯, 경련이 인 듯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대입 재수생이었던 나는 어떤 두려움보다는 이 정도의 강한 멘트를 의연히 감내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떨고 있다는 알량한 자존심과 괜한 수치심으로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런 엄청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기도가 끝난 뒤 “아멘!”을 외친 사람은 목사님 한 분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목사님은 박정희가 사망하기 전까지 “북에서는 김일성이가 독재를 하고, 남에서는 박정희가 독재하고 있으니 하루 빨리 이들을 몰아내주십시오”라고 매주 기도하였다.
아멘을 하지 못하는 목사들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목요일 열리는 목요기도회라는 것이 있었다.
74년 7월 18일 민청학련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어 한때 당국의 탄압으로 중단된 적도 있었다.
목사님이 기도하면 ‘그 강도 센 표현’ 때문에 참석했던 다름 목사님들조차 아멘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목요기도회가 열리는 목요일 오후 5시에는 검은색 짚이 교회 앞에 도착했다.
안기부 요원인지, 경찰관인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목사님을 태우고 인근 태릉갈비나 한적한 교외 음식점으로 모시고 갔다가 목요기도회가 끝날 때쯤 교회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목사님은 설교때 이 말씀을 하시곤 “대접 잘 받았다”고 조크 아닌 조크를 하셨다.
사찰형사가 수양아들을 자청
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76년 3·1민주국국선언 등 주요 시국사건에 주모자로 연루돼 당국의 주목을 받은 줄곧 목사님은 관할 경찰서인 청량리경찰서 정보과 형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중의 어떤 형사는 목사님을 품격과 위엄에 눌려 흠모하게 되었는데, 사찰업무가 종료된 뒤에도 매년 설에 세배를 하였으며 명절때마다 사과상자를 들고 교회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나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머리가 벗어졌지만 체구도 크고 강단있게 생긴 헌헌장부였다.
안기부 2차장도 새로 부임하면 목사님을 방문하여 “좀 조용히 계시라. 잘 부탁합니다”라고할 정도였다.
어떤 해 겨울에는 교회 앞에 드럼통을 설치하고 고구마를 파는 중년의 남자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고구마를 지나치게 싸게 팔아 주변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고구마를 하나 더 달라고 하면 2~3개를 흔쾌하게 봉투에 넣어주곤 해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청량리서 정보과 형사였다.
반토막난 신도들
박정권의 압제가 심해질 수록 그에 따른 목사님의 발언 강도도 높아졌다.
매주 대예배시엔 맨 뒷자리에 정보과 형사가 앉아 설교나 기도 내용을 적었다. 그러면 목사님은 “이 말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적어 보고하시오!”라고 호통치면 형사가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빼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해에는 모든 교인의 직장으로 형사가 찾아가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나의 중학교때 친구의 아버지는 별을 단 군인이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다니던 그도 어느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교회를 떠나 출석교인(성인 기준) 대략 100명 중 50명이 교회를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개척교회 시절부터 함께 했던 교인들이거나 행상, 자영업자 등이었고 당시 장로이던 OO산업 임원 등 극히 일부 교인이 경찰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교회를 지켰다.
몰려든 당대 명망가들
걸핏하면 투옥돼 목사님의 공백이 장기화 되자 당시 전도사 한 명조차 없던 어려운 형편 때문에 목사님의 지인들이 무료 설교를 자청하고 나섰다. 처음에는 전경연 목사(한신대 교수 출신)가 주로 강단에 섰으나, 나중에는 문동환 목사가 임시 당회장을 맡고, 문익환 목사 그리고 두 분의 아버지인 문재린 목사, 이우정(서울여대) 이문영(고려대) 등 두 명의 해직교수가 번갈아 주일설교를 맡아주셨다. 이 분들과는 우리 가족과 인연이 있었다.
문재린 목사 부자는 조부와 깊은 교류를 하지 않았지만 만날 때마다 늘 조부를 존경한다고 말씀하셨고, 특히 문동환 목사는 한 때 어머니와 함께 찬양대에서 활동하던 인연도 있었다고 들었다. 문동환 목사는 미국 유학 시절 만난 15년 연하인 문혜림과 결혼하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상당한 미인었다.
부인도 아이들이 큰 이후에는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두레방 운동을 하는 등 사회활동을 하다 투옥되기도 하였다. 문 목사 가족은 아들, 며느리 할 것 없이 감방을 수시로 들락거려야 했다. 문동환 목사는 79년 신신백화점 앞에서 종이 피켓을 들고 단독으로 카터 방한 반대시위를 하다 구류 29일을 살기도 했다. 지금은 1인시위가 합법이지만, 당시 경찰도 감옥에 넣기는 고민스러웠던지 최장 구류처분을 한 것이다.
이 다섯분들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보배같은 존재들이다.
이들은 하나 같이 모진 고문을 받고 여러차례 영어의 몸이 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어도 얼굴에는 항상 온화한 미소를 품고 있었음을 기억한다. 간혹 사자후를 토하거나, 격정적인 발언을 한 적도 있었지만 차분한 어조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하늘에 호소했다.
하나님, 제발 저를 버리시옵소서
어느날, 교회에서 우연히 한 유인물을 볼 수 있었다.
「학원안전법 반대…」
유인물의 정확한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1985년 당시 학원탄압을 위해 비밀리에 제정할 예정이었던 소위 ‘학원안정법’을 결사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유인물에는 오타인지, 평소 안기부를 의식했기 때문인지 ‘학원안전법’이라고 써 있었고 말미에는 한국정치범동지회, 민주수호기독자회 회장 윤반웅이라고 돼 있었다.
그 유인물은 목사님의 며느리가 소위 ‘가리방’이라고 불렸던 철판에 파라핀 종이를 놓고 철필로 써 등사한 것이었다. 목사님은 그 이전에도 아들 내외에게 간혹 성명서를 건네 등사를 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교회 인근 경희대 앞에 문구점을 하던 교인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경희대 인근 한 주택에서 먼 친척의 가사도우미였는데, 늦장가를 가 그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일종의 행랑아범격이었다. 그 집 주인은 꽤 잘사는 편이어서 70년대 초 제법 값비싼 미제 피아노를 교회에 기증할 정도였다. 집주인이 미국으로 이민간 뒤 집을 관리하다가 어찌어찌해서 문구점을 차렸다. 그 당시 문구점에는 대형 복사기를 설치하여 서류복사를 통해 수입을 올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목사님께서 그에게 성명서 복사를 부탁하셨다고 한다. 말이 부탁이지 그건 명령이었다. 평소 목사님의 언행을 익히 보아왔던터. 교회에 나온지 몇 년 되지도 않은 그는 성명서를 복사기를 수십번 망설여야 했다고 한다.
사연은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지만 그 때 우연히 내가 그 문구점을 들러 그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복사를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학생이 볼세라, 행여 경찰이 들이닥칠까 두려워 하면서도 거부하지 못한 그 마흔 넘은 사내의 가슴은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십자가를 진다는 것
1976년,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다. 목사님은 틈만 나면 동일방적 똥물사건을 피맺힌 목소리로 토로하셨다. 아니, 나약한 여공들에게 노조를 했다는 이유로 깡패들이 똥물을 퍼부어? 신문에 한자도 나지 않은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그 내용이 잘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귀가 아프게 들어온 인혁당, 통혁당 사건…. 박정희가 문제 있는 것은 분명한데,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불편한 진실들. 민청학련, 동일방적, 통혁당, 인혁당, 긴급조치 등 골치아픈 단어들이 내 내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는 틈을 타 나는 그 이후론 교교를 졸업할 때까지 채 어둠의 세계를 도피처로 찾아 공부를 내동댕이 치고 술과 담배, 방탕한 삶에 빠져들었다.
1년여 지난 어느날, 장로님이 나를 부르셨다. “아니 아직도 세례를 받지 않았어? 세례를 받아야지…”라고 권유 아닌 강요에 이끌려 목사관에 들어갔다. 나는 유아세례만 받았을 뿐 세례는 받지 않은 상태였다. 유아세례자도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에 따라 그동안 나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
당시 임시 당회장은 문동환 목사였다. “에라, 모르겠다. 세례가 별거냐? 다들 날라리 상태에서 받던데…” 즉석에서 세례문답에 들어갔다. 질문 몇 개가 던져진 뒤였다. “그대는 예수님이 지고가던 십자가를 질 것이고…”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목사님과 같이 바른 말하고 감옥에 가라는 것이 아닌가? 아니, 감옥 가는 것은 좋은데 나는 대학부터 먼저 가야했다. 재수생 주제에 얼마나 족팔릴까? 서울대생은 못되어도 어디 뱃지 달기 족팔리지 않은 대학생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그방 방을 뛰쳐나왔다. 그 이후에도 나는 세례를 받지 못했다. 정학히 12년이 흐른 뒤 나는 ‘입교’라는 형식을 빌려 세례에 갈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