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시의 센트럴 파크는 뉴요커들의 휴식공간이자 활력소다. 1856년부터 만들어진 101만평의 넓은 부지에는 호수와 숲, 산책로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있고, 동물원과 운동장, 야외극장도 유명하다. 이웃 일본의 도쿄에는 우에노 공원이 있다. 도쿄 시민들은 63만평여 평의 광활한 면적에 조성된 숲과 문화공간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이곳에는 콘서트나 오페라를 공연하는 도쿄 문화회관, 도쿄 국립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도 있다.
세계의 다른 주요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영국 런던에는 하이드 파크가 있고, 파리에는 블로뉴 공원이 있다. 하지만 수도 서울에는 이렇다할 넓은 도심공원이 없었다.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팽창으로 도시의 녹지공간은 빌딩과 아파트가 차지해 버렸다. 시민들은 인공의 회색도시 서울에서 매연과 자동차, 답답한 공기와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서울에도 센트럴 파크나 우에노 공원 못지않은 거대한 면적의 도심 공원이 생긴다. 용산의 미군기지가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 전국 4천805만평이 우리 국민들의 품으로
2006년 8월 24일 용산 민족역사공원 건립추진위원회는 ‘용산기지 공원화’를 선포했다. 이곳의 미군기지 80만평은 시민들의 녹지공간으로 바뀔 예정이다. 1987년 미국에 처음 제안한 이래 보류와 협상재개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20여 년 만에 미군기지가 이전하게 된 것이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 군대가 진출한 뒤 124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경기도 파주·의정부시, 부산시 등 미군기지가 있었던 지역에서는 한창 반환기지 활용방안을 세우고 있다. 파주시는 반환 미군기지를 이화여대와 함께 교육연구단지로 활용할 계획이다. 부산의 대표적인 미군시설인 하얄리아 부대 자리에는 ‘부산의 센트럴 파크’가 조성된다. 부산시는 16만4000여 평의 땅에 공원, 문화시설을 만들기로 했다. 미군부대가 많은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도 반환기지가 주민 편의·문화시설, 공원 등으로 꾸며져 시민들의 주거환경이 대폭 개선될 전망이다.
미군기지 이전사업은 세 가지 측면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먼저 서울 용산은 물론 전국 반환기지를 활용하여 국토의 균형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서울은 수준 높은 문화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됐다. 기타 반환지역에서도 도시기능과 문화기능이 확충된다. 두 번째는 주한미군의 안정적인 주둔여건을 보장해줌으로써 한반도 안보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국내 건설경기활성화와 고용창출 등 경제적 효과가 지대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 주한미군은 용산 시대를 마감하고 평택의 새로운 기지로 이전할 예정이다. 평택주변의 항만과 철도, 오산 공군기지를 활용하여 육로·해상·공중에서의 작전수행 여건이 보장되며 전국의 군소기지를 통폐합함으로써 신속한 지휘가 가능하게 된다.
경기개발연구원은 평택이전으로 지역 경제에 연간 4400억 원의 생산유발, 3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안보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기지이전이 긍정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 비용문제·북핵 등으로 표류하다 참여정부 이후 본격화
정부차원에서 용산기지 이전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1987년부터다. 다음해인 1988년 미 국방장관이 방한했을 때, 우리 측이 미국에 공식 제안했다. 서울 중심부에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점과 국민적 자존심 회복을 고려한 제안이었다. 1990년에는 한미 양국 간에 기지이전에 관한 합의각서(MOA)가 체결됐다. 하지만 기지이전 비용 등의 문제를 두고 이 사업은 계속 보류됐다.
1994년 발생한 1차 북핵 위기는 용산 미군기지 이전사업을 무기한 연기시켰다. 문민정부 시절인 당시, 한미 양국은 안보문제를 이유로 이전사업 연기에 합의했다. 미국도 주한미군 철수를 중단했다. 양국간의 협의가 재개된 것은 2001년 12월.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면서 용산 기지 이전이 본격화된 것이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5월, 한미정상은 미군기지 이전을 재추진하기로 합의했다.
2003년 6월, 미 측의 요구로 경기 북부에 산재한 미 2사단을 한강 이남으로 이전하고 평택 등에 최종 재배치하는 방안이 양국간에 합의됐다. 용산기지 이전과 병행해서 새로운 이전기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국회는 2004년 12월, 용산기지 이전과 미 2사단 및 군소기지 이전 계획을 담은 기본합의서(UA)와 연합토지관리계획(LPP) 개정안을 비준했다. 미군기지 이전 사업에 국민적 합의와 법적 정당성이 갖춰진 것이다.
그 후 정부는 평택 편입 지역 주민들에 대한 이주와 설득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용산기지 이전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일부 시민단체들은 기지이전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과거에 “용산기지 이전”을 요구했던 단체들은 정작 용산 기지 이전이 결정되자 평택 이전 반대로 돌아선 것이다. 용산의 미군기지도 안되고, 평택의 미군기지도 안된다는 것이 이들 단체들의 주장이었다. 이들 주장대로라면 남은 길은 미군철 수밖에 없었다.
■ 주민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설득 노력
정부는 평택 편입 지역을 주민들과 협의 하에 2006년 1월까지 총 349만평 중 275만평을 매입했다. 나머지 12%는 법원 공탁으로 소유권 이전을 완료했다. 신규로 제공되는 미군기지는 평택 지역 349만평과 대구·포항 지역 13만평 등 362만평이지만, 일부에서는 미군기지의 “확장·이전”이라는 잘못된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지이전 사업으로 전국의 미군기지는 과거보다 4800여 만평 줄어들게 된다.
평택지역에 대한 새로운 발전구상도 제시됐다. 건교부는 2005년 12월 평택시 모곡, 서정, 장당, 지제동과 고덕면 일원 539만평을 국제화 계획 지구로 지정 개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20년까지 9개 분야 89개 사업에 18조8천억 원을 투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지역은 서울과 수원, 행정중심복합도시와 근접한데다 항만까지 갖춰 활발한 도시성장이 예상되는 곳이었다. 건교부는 이 지역을 ‘국제화의 전략적 거점 도시’로 육성한다는 것을 목표로 국제업무센터, 종합행정타운, 첨단지식 연구단지를 유치할 계획이다.
미군기지 이전 사업은 한미 양국간의 조약에 기초하고 안보적 중요성을 지닌 국책사업이지만, 정부는 지역주민의 협조와 동의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2004년에는 범정부 차원에서 주한미군대책 기획단을 꾸려 반대주민들을 중심으로 설득과 협상을 하고, 지원대책을 마련했다. 2006년 말까지 160여 회 이상 간담회를 진행했고, 설명회, 서신 발송 등을 통해 정부 대책을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노력을 지속했다.
정부는 주민들을 강제집행으로 이주시킬 수 있는 법적조치인 ‘인도단행 가처분’에서 승소했음에도, 이를 시행하지 않고 대화를 통한 해결을 모색했다. 언론에는 부각되지 못했지만 정부는 법적인 조치로 갈등을 빚지 않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주민들의 입장을 최대한 수용하면서 대화우선의 원칙을 견지했다.
정부는 평택 편입지역에 대해 주민들이 추천한 감정평가사에 감정을 의뢰해 평당 15만원~18만원의 보상가를 지급했다. 이 보상액은 최근 몇 년동안의 시세를 상회하는 금액이었다. 기지 이전을 반대하는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 지역 반대주민들의 보상금은 평균 6억원이었다. 이중에는 10억원 이상 보상을 받은 주민도 21명이나 됐다. 이 지역주민들에 대한 특별지원대책도 마련됐다. 이주정착 특별지원금, 생활안정특별지원금, 생계비 지원금도 지급됐다.
물론 평생 농사를 지어온 주민들이 다른 일을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정부가 서산지역에 대체농지를 확보, 이주민들에게 알선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주민 57세대가 서산 간척지 83만평 농지에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했다. 주민들은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대체 농지를 매입했다. 다른 사람의 농지를 임차해 농사를 짓던 이주민 43세대는 이 같은 지원을 통해 자신의 땅 41만평에서 영농을 할 수 있게 됐다.
정부는 반대주민에 대한 설득노력과 함께 2006년 5월 행정대집행을 시행했다. 이는 공병으로 구성된 건설지원단과 경계병력을 운용해 철조망을 설치하고, 군사시설 보호구역을 설정하는 작업이었다. 국책사업으로 진행되는 미군기지 이전 사업이 차질을 빚으면 외교적 신뢰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측량 및 지질조사, 환경영향평가 등 사전준비 작업을 못해 사업이 지연될 경우 이전사업비는 1000억 원 이상 늘어날 수 있었다. 이는 고스란히 국민부담으로 전가될 수밖에 없었다.
■ 기우에 불과했던 ‘안보불안 우려’
행정대집행이 끝난 뒤인 2006년 5월 12일 한명숙 국무총리는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호소의 말씀”을 통해 주한미군 기지 평택이전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한 총리는 “폭력과 투쟁이 아닌 평화로운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난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또 하나의 사례를 이뤄내자”고 호소했다. 미군기지 이전사업은 우리나라 안보와 경제를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해 우리 정부의 자주적 요구에 의해 시작된 일이었다.
2007년 1월 현재 미군기지 이전 사업은 반대단체들의 시위와 이주거부 등으로 소요기간은 다소 변동이 있을 것으로 예측되나 사업준비는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2007년 10월까지 시설종합계획을 완성하고, 사업관리용역업체를 선정하게 된다. 2006년 12월 현재 이주대상 220세대 중 159세대가 자발적으로 이주를 마쳤고, 61세대만이 남아 있다. 2007년 1월 2일 아직 이주하지 않은 주민들과 정부간의 대화가 다시 시작됐다.
문제가 되고 있는 반환기지 환경오염 문제는 한미양국간의 협상과 SOFA 절차에 의해 해결해 나가겠다는 것이 국방부의 입장이다. 한미양국은 2006년 6월부터 반환기지 환경오염 치유협상을 해왔다. 환경부와 국방부에서 미 측과 협의, 조사하고 치유문제를 결정하게 된다. 반환예정인 59개 기지에 대한 환경조사가 완료돼야 치유 비용이 산출될 것으로 보인다.
주한미군 기지 이전에 대해서는 당초 안보불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이전사업이 진행되면서 이 같은 우려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 사업은 한미간에 충분한 논의를 통해 결정된 사안이었다. 더구나 현대전에서는 지리적인 위치보다는 기동성과 정보력이 더 중요하다. 한강 이남으로 옮기는 것만으로 안보공백이 생긴다는 우려는 기우라는 얘기다. 주한미군 측에서도 기지 이전이 되더라도 한미동맹은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미군기지 이전 사업을 통해 한미안보 동맹이 더 굳건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동시에 국토의 균형발전, 시민의 휴식 공간 확보, 국민적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한미 양국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사업인 것이다. 특별기획팀 (webmaster@korea.kr) | 등록일 : 200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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