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군지(1998)와 법경헌의 기록으로 읽어보는
우리고향 이야기(총괄)
읽기 전에 : 영광군지(1998)의 기록(검정색 글)에 법경헌의 기록(파란색 글)을 부기함. |
제 10절 법성면(法聖面)
■ 면사무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37.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13jKc%26fldid%3D3LhO%26dataid%3D54%26fileid%3D1%26regdt%3D20070705071653%26disk%3D25%26grpcode%3Dbsp7373%26dncnt%3DN%26.jpg)
▲ 법성면사무소(1992.05) |
(1) 위치 및 규모
위 치 |
건물동수 및 연건평 |
부 지 |
건 축 년 월 일 |
법성면 법성리 631 |
1동 2층 180평 |
558평 |
1990. 12. 15 |
(2) 연혁
o 사무소의 소재지는 조선 중종 9년 (1515) 수군의 진이 건치 된 이후에는 수군첨절 제사가 진양면의 일반행정까지를 도맡게 되자 첨사의 집무소이던 동헌이 진양면의 사무소가 되었다. 그곳이 지금의 이 인상가 일대인 진내리 205번지이다. 그 이전 다시 말해서 현재의 법성포에 수군의 진영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창이 고법성에 잇(있)었으니 관아도 그곳이었을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사무소가 지금의 법성극장 자리에 있었으나 6.25동란 때 소실되었다. 그후 여러 곳을 떠돌면서 면정에 임하다가 1958년 12월에 이르는데 전에는 일인 소학교 자리였다. 현재의 직원 수는 36명이고 부서는 총무, 재무, 호병, 산업개발, 복지 5계이다.
법경헌 기록
(2) 연혁
ㅇ고려시대 이전에는 진개(陣介)부곡이라 이라 하였고, 고려 성종 11년(992)에 입암리 고법성에 조창(漕倉)(※부용창)이 건치되어 세곡(稅穀)을 수납하고 조운(漕運)하다가, 고려 말에 일시 중단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전라도 지역의 3대 조창의 하나로 복창되어 진내리로 이설하여 법성창으로 바뀐 곳이다. 고려와 조선 2대 왕조에 걸쳐 9백여 년 동안 국가재정의 중추기관인 조창과 더불어 조선 개국 초기부터 수군(水軍)진영(鎭營)(※법성진)이 자리했던 곳이다. 조선 중중 9년(1514)에 진성(鎭城)(※법성진성)을 쌓아 서해안의 군사요충지가 되었고, 조선 정조 13년(1789)에 본 군에서 분리되어 전라감영의 직할지였다가 일제강점지인 1914년, 지방행정조직 개편에 따라 본 군으로 다시 이속되었다. 조선시대 일반 행정은 진내리 200번지 일대의 동헌에서 관장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지금의 법성파출소 뒤편에 청사를 마련하여 면정을 수행 하였는데, 625전쟁 때 소실되어 여러 곳으로 옮겼다가 1958년 12월에 현 위치에 있던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의 고등소학교 건물을 청사로 사용하다가 1990년 12월에 지금과 같이 새로 청사를 마련하여 면정에 임하고 있다. 현재의 직원 수는 36명이고 부서는 총무, 재무, 호병, 산업개발, 복지 5계이다. (법경헌 주 : 밑줄 부분은 1998년 현재 영광군지의 기록임.) |
(3) 직원현황
계 |
직 급 별 |
성 별 |
5급 |
6급 |
7급 |
8급 |
9급 |
기능직 |
경노무 |
남 |
여 |
15 |
1 |
5 |
3 |
2 |
1 |
1 |
2 |
14 |
1 |
(4) 역대면장
대 수 |
역 임 기 간 |
법경헌
사진자료 |
성 명 |
비 고 |
법경헌 주 |
1 |
1945. 11 |
![](file:///C:/DOCUME~1/법경헌.MYCOM/LOCALS~1/Temp/Hnc/BinData/EMB0000013cb123.jpg) |
신명철(申明哲) |
사망 |
미 군정청 임명 (당시 43세) |
2 |
1946. 2 |
|
남궁배(南宮裵) |
〃 |
“(당시 66세) |
3 |
1948. 7 |
|
박대서(朴大緖) |
〃 |
임명(이승만 정권)(당시 43세) |
4 |
1950. 3 |
![](file:///C:/DOCUME~1/법경헌.MYCOM/LOCALS~1/Temp/Hnc/BinData/EMB0000013cb122.jpg) |
나찬형(羅瓚 ?) |
〃 |
나질순(羅瓆淳)의 오기, 이승만 정권
625 당시 면장 (당시 65세)) |
5 |
1950. 11 |
|
신석범(申錫範) |
〃 |
임명(이승만 정권)(당시 55세) |
6 |
1951. 6 |
|
나원문(羅垣文) |
〃 |
나환문(羅桓文)의 오기
(이승만 정권)(당시 43세) |
7 |
1952. 5 |
|
김영철(金永喆) |
〃 |
5.10 지방선거에 의한 민선 면장
(이승만 정권) (당시 35세) |
8 |
1953. 11 |
|
김경곡(金暻穀) |
〃 |
김경의(金暻毅)의 오기
(간선) (이승만 정권)
(당시 34세) |
9 |
1955. 2 |
|
이기호(李棋濠) |
〃 |
(이승만 정권) 간선 (당시 40세) |
10 |
1955. 7 |
|
조문환(曺文煥) |
〃 |
(이승만 정권) 간선 (당시 43세) |
11 |
1960. 12 |
|
김영철(金永喆) |
〃 |
(장면 정권) 민선 (당시 45세) |
12 |
1965. 7 |
|
김영철(金永喆) |
〃 |
(박정희 정권) 민선 (당시 50세) |
13 |
1971. 1 |
|
김공성(金恭誠) |
〃 |
(박정희 정권) 임명 (당시 52세) |
14 |
1980. 7 |
|
이두원(李斗遠) |
|
(전두환 정권) 임명 (당시 55세) |
15 |
1983. 4 |
|
김태동(金兌東) |
|
(전두환 정권) 임명 (당시 53세) |
16 |
1992. 1. 1 ∼ 1997. 1. 6 |
|
이관신(李官信) |
|
(노태우 정권) (당시 56세) |
17 |
1997. 1. 20 ∼ 현재 |
|
이창주(李昌柱) |
|
(깅영삼 정권) |
⊙ 법성-면(法聖面) 『면』영광군 3읍 8면의 하나, 본래 영광군에 딸린 진개부곡(陳介部谷)
인데, 조선조 때 진량면(陳良面)이라 하여 검산(檢山)이라 하여 검산(檢山), 중리(中里), 내리(內里), 외리(外里), 후장동(后庄洞), 좌우진(左右鎭), 상리(上里), 하리(下里), 천년동(千年洞),화선동(花仙洞), 성재동(聖才洞), 저경(■耕), 언목(言木), 복용(伏用), 화천동(化泉洞), 신덕동(新德洞), 신흥(新興), 장전(長田), 신봉(新峯), 지장(支庄), 복흥동(伏興洞), 마천(馬川), 입암(立岩), 입전(立田), 두호(斗湖), 부귀동(夫貴洞), 장수촌(長水村), 덕평(德坪), 장자동(庄子洞), 서당촌(書堂村), 신산(新山), 산하치(山下峙), 화장동(化庄洞), 월계(月桂), 백옥개(百玉介), 성촌(成村), 신기(新基), 아양동(阿陽洞), 용동(龍洞), 선동(仙洞), 용현(用峴), 구암(九岩), 발산(發山), 덕산(德山), 신계동(新溪洞), 도장(道庄), 삼미천(三尾川), 당산(堂山)의 50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내면(道內面)의 주록리(走鹿里), 와진리(臥■里)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크게 번창한 법성포(法聖浦)의 이름을 따서 법성면이라 하여 법성, 진내, 화천, 대덕, 덕홍, 입암, 신장, 월산, 용성, 용덕, 삼당의 11개
리로 개편 관할함. 맛이 좋기로 유명한 "영광굴비"의 집산지인 법성포가 있음. 동쪽은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남쪽은 영광읍, 서쪽은 바다건너 백수읍 북쪽은 홍농읍에 닿음.
법경헌 기록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38.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13jKc%26fldid%3D3LhO%26dataid%3D54%26fileid%3D2%26regdt%3D20070705071653%26disk%3D6%26grpcode%3Dbsp7373%26dncnt%3DN%26.jpg)
▲ 법성면 관내도 |
⊙ 법성-면(法聖面) 영광굴비의 원산지로, 하나의 도계와 3곳의 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즉, 동쪽으로 전북 고창군 공음면, 남쪽으로 영광읍, 서쪽으로 백수읍, 북쪽으로 홍농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50여 자연부락들을 5개리(상리, 중리, 하리, 내 리, 외리)로 구획하여 법성진 진량면이라 하였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에 인접하 고 있는 도내면 주록리와 와룡리 일부를 편입하여 11개리로 구획하고 법성면으로 행정지명을 바꾼 곳이다,
리명(里名) |
자연부락
(自然部落) |
班
數 |
현 황 (現 況) |
행정
(行政) |
운영
(運營) |
家口 |
人口 |
법성
(法聖) |
法聖1 |
석암(石岩),<독암(獨岩)이 바른 표기임.>
농장(農長),<농장(農場)이 바른 한문 표기임.>
연동(連東)<연등(煙燈)이 바른 표기임.> |
5 |
264 |
834 |
〃2 |
옹기(甕器)<이런 지명이 없음.> |
8 |
218 |
671 |
〃3 |
동지제 (東地堤)<동짓재가 바른 표기이며 한문으 로는 동령(東嶺) 또는 동치(東峙)라 표기하여야 함.> |
7 |
138 |
423 |
〃4 |
호대동 (湖大洞)<호장(虎莊)동이 바른 표기임.> |
3 |
38 |
135 |
〃5 |
|
3 |
236 |
804 |
〃6 |
석암(石岩)<독암(獨岩)이 바른 표기임.> |
2 |
223 |
803 |
〃7 |
|
2 |
44 |
154 |
진내
(鎭內) |
鎭內1 |
비각(碑閣)<비각(碑閣)거리가 바른 표기임.>
진골(鎭骨)<한문표기가 없는 지명임.>
동문(東文)<동문(東門)이라 한문 표기하여야함.> |
12 |
219 |
719 |
〃2 |
현장(現場)
서문(西文)<서문(西門)이라 한문 표기하여야함.> |
10 |
188 |
679 |
〃3 |
|
2 |
41 |
156 |
화천
(化千) |
化千1 |
석장리(石庄里)<석장(石場)리라 한문 표기하여야
함.>
천년동(千年洞)
숙구지<한문표기는 宿狗地로 하여야 함.> |
3 |
71 |
213 |
〃2 |
신두석(新斗石)<신두암(新頭岩)이 바른 표기임.>
만년동(萬年洞) |
3 |
58 |
200 |
대덕
(大德) |
大德1 |
언목(言木)<언목(堰木)이 바른 표기임.>
소언목 (小言木)<소언목(小堰木)이 바른 표기임.> |
3 |
70 |
207 |
〃2 |
성재동(聖才洞)<성제동(聖齊洞)이 바른 표기임.> |
2 |
44 |
153 |
〃3 |
복룡동(伏龍洞) |
1 |
77 |
238 |
덕흥
(德興) |
德興1 |
신덕(新德), 신흥(新興),
오봉(五奉)<오봉(五峯)이 한문으로 바른 표기임.> |
3 |
77 |
238 |
〃2 |
지하(支下)<이런 지명은 없는 것 같음.>
지장(支庄)<지장(芝庄)이 한문으로 바른 표기임.>
장전(庄田)<장전(長田)이 한문으로 바른 표기임.> |
3 |
79 |
266 |
입암 (笠岩) |
笠岩 |
입정(笠亭)<입전(立田)이 바른 표기임.>
입안 (笠岸)<입암(立岩)이 바른 표기임.>
마촌(馬村)<마천(馬川)이 바른 표기임.>
고법성(古法聖) |
5 |
77 |
203 |
신장
(新庄) |
新庄1 |
서당(書堂)<서당(書堂)촌이 바른 표기임.>
송고(松古)<송고지(松古地)가 바른 표기임.>
부귀(富貴)<부귀(夫貴)가 바른 표기임.> |
3 |
59 |
188 |
〃2 |
여술(餘述)<한문 표기가 없는 마을임.>
장수(長水)<장수촌(長水村)이 바른 표기임.> |
2 |
53 |
158 |
〃3 |
장자(庄子), 신선(新仙) |
2 |
53 |
149 |
월산
(月山) |
月山1 |
월계(月桂)
화장(花庄)<화장(花莊)이 바른 한문표기임.> |
4 |
93 |
314 |
〃2 |
산하치(山下峙), 덕평(德坪) |
2 |
46 |
134 |
용성
(龍城) |
龍城1 |
성촌(城村), 백옥(白玉) |
3 |
62 |
184 |
〃2 |
기동(岐洞)<기동(基洞)이 바른 한문표기임.>
신기(新奴)<신기(新基)가 바른 한문표기임.>
장복(獐伏) |
3 |
41 |
126 |
용덕
(用德) |
用德1 |
용현(用峴)<용현(龍峴)이 바른 한문표기임.>
구암(九岩)<구암(龜岩)이 바른 한문표기임.>
발막(渤莫)<발막(發幕)이 바른 한문표기임.> |
4 |
80 |
241 |
〃2 |
신계(新鷄), 덕산(德山) |
2 |
34 |
136 |
삼당
(三堂) |
三堂1 |
수왕(首汪)<수항(水項)이 바른 표기임.>
학산(鶴山), 당산(堂山),
과생목(寡生木)<이런 지명이 없음.> |
5 |
74 |
248 |
〃2 |
삼미(三尾) |
2 |
31 |
84 |
계 |
29 |
|
108 |
2,809 |
9,141 |
법경헌 주 : 위 표는 1998년 영광군지 발행 당시 현황이며, 앞으로 지명의 순서는 가나다 순에 따라 기록되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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