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일으키는 성도가 되라(요5: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8-9)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삼십팔년 동안 앓고 있던 병자를 고치신 것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지상사역 기간 동안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절름발이, 맹인, 벙어리, 손 마른 사람, 혈루증 여인, 죽은 청년과 소녀, 무덤에 있는 나사로 등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서 정상적인 일상을 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시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자비를 베푸시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비를 원하십니다.
2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뜻이 좋은 말들을 상호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뜻과 의미대로 살려는 의지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아 이름을 지어 줄 때에도 아이의 일생에 대한 기대가 담긴 의미로 작명합니다.
‘자비의 집’인 베데스다에 자비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살벌한 경쟁만 있었습니다. 행각 다섯 개에 다양한 병자들이 천사들이 내려와 연못에 파문을 일으키는 광경만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언제 그러한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릅니다. 그곳은 적막감과 초조와 긴장감이 감돌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 속에 생활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있었습니다. 그 병자는 상태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시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불쌍한 형편을 보시고 자비를 베풀고자 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애’(헤세드חֳסֳד)는 자비를 말하며, ‘베데스다’(ב׳תחֳסֳד 벧 헤세드)의 뿌리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자비의 화신으로서 자비를 원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불쌍한 그에게 자비의 화신(化身) 되시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삶을 주시고자 하신 것이며,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곁을 떠나 멸망의 길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형편에 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연못가에서 물이 동(動)하기만을 기다리는 그들은 연못에 한 번도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운 좋게 물이 동한 후에 처음으로 연못에 들어간다고 해도 병이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비’가 있어야 할 연못가에 남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 먼저 들어가려는 살벌한 경쟁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겨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무한 경쟁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자비를 베풀기는 어렵습니다, 자기희생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두를 구원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오랜 세월 질병으로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었습니다. 고장난 인생을 고쳐주셨습니다. 망가진 인생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죽은 인생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둘째, 이기적인 경쟁이 문제입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자비의 집인 베데스다에 자비가 없다는 것이 비정한 현실을 보여 줍니다. 그곳에는 자비라는 말은 있어도 자비로운 행위는 없었습니다. 오직 이기적인 경쟁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먼저 내려가야 산다’는 생각이 굳어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내려가는 사람이 있다면 발목을 잡아 세우고 자신이 먼저 내려가려고 하겠지만, 그도 또 다른 사람에게 제지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기심의 뿌리를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이기심은 자신만을 이롭게 하려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물론 살벌한 생존경쟁의 세상에서 필요한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경계하십니다. 오죽하면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제사에 드리는 제물의 양과 질이 중요한 것이라면 더 많은 양의 희생제물과 가장 좋은 제물을 드리기위한 무한경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와 힘 있는 사람들에게 밀려 가난한 사람은 희생제사를 드릴 기회조차 얻지 못 할 것입니다. 제사의 근본을 상실한 형식적인 제사를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기심은 하나님의 생각과 어긋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기까지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자비의 화신이십니다. 이기심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기심을 깨고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란 말이 있습니다. 놀부심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이웃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고, 내가 얻지 못할바엔 남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심술입니다. 반면에 ‘이웃 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서로간에 어려운 일을 도우며 해결하고, 좋은 일은 함께 즐기는 미풍양속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혼자는 살 수 없고,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도우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질서는 우선순위를 기본으로 합니다. 우선순위는 차례대로 혜택을 누리는 것이며, 상황에 따라 순위가 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필수입니다. 긴급환자를 위한 구급차와 응급실이 그런 의미로 운영되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양보와 희생을 요구하지만 그에 대하여 누구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 많은 병자들 중에서 스스로는 불가능한 처지에 놓인 그에게 살벌한 생존경쟁만이 존재한 상황에서 남을 위한 양보와 희생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셋째, 낮은 곳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5절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베데스다 못 가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고, 그곳에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등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 중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서른여덟 해를 앓고 있던 병자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가장 약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당시 그 병자는 크게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의셨을 때에 그는 동문서답을 하였습니다. 그는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희망을 잃었으나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찾아가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주님처럼 낮은 곳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혜자는“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잠29:7)라고 하였습니다. 낮은 곳을 찾는 것이 의롭고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마음. 즉 낮은 사람을 찾으시고 치료하시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즐겨 찾으려고 합니다. 이는 자신의 신분을 높이고 그 사람을 통하여 유익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찾으면 체면손상을 입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간혹 전시행정을 펼치고 과시하기 위하여 수행원을 대동하고 거창하게 북치고 장구치며 요란하게 행차하며, 사전에 언론기관에 알려서 자신의 선행을 홍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하루 세 번의 기도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많이 지나는 곳에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경건한 신앙생활을 자랑하려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을 받으면 반드시 보답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받은 대접보다 더 융숭한 대접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이러한 호의를 베풀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가셔서 그곳에서 절망 가운데 있는 병자를 찾아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넷째, 자비와 은총에 기적이 따른다
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낮은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시고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고, 이에 병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이 병자에게 임했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자비와 은총에 기적이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느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5-36).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의 실천이었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은총이 기적을 이루는 원천이었습니다.
바쁠수록 기도하라는 역설적인 말이 있듯이 힘들수록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추위 속에서 죽어가던 사람을 업고 감으로 둘다 살 수 있었던 선다싱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혼자 걷기도 힘든데 병자를 엎고 추위에 산을 오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지나는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했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희생을 감당한 선다싱은 목적지까지 무사히 갔지만, 그를 비웃고 조롱하며 혼자 걷던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얼어 죽었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고, 배곱은 사람에게 따뜻한 밥상 차려주고, 병들어 신음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좌절과 실의 빠져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부드러운 위로의 말은 고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내 입은 옷을 벗어주지 못하고, 내 몸을 불살라 구하지 못하지만은 내 손에 있는 작은 것으로 자비를 베풀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사람이 나아서 일어나 걸어가더라” 우리도 귀담아 듣고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예수사랑선교회 임 웅 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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