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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발해 역대 왕
봉우리 추천 0 조회 10 11.09.05 07: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발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만주의 옛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바다에 대해서는 보하이 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발해
渤海
698년 ~ 926년
Balhae-Territory in 830.JPG
830년 경의 발해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인구구성 고구려인, 말갈족
수도 구국, 중경, 동경, 상경
정치체제 군주제
행정구역 5경 16부
성립 698년
멸망 926년 1월
초대 군주 고왕(대조영)
698년 ~ 719년
최후 군주 대인선
906년 ~ 926년
성립 이전 고구려
해체 이후 후발해, 고려, 동단국,
정안국, 흥요국, 대원국

발해(渤海, 존속 기간: 698년 - 926년)는 당나라신라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를 계승하여, 228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8년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기반을 둔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세력이 힘을 합쳐, 대중상대조영이 만주에서 당나라 세력이 쇠퇴해진 틈을 노려 건국하여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의 한 축이 되었다가 926년 1월에 기마대를 이끌고 침략한 요 태조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발해의 건국으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는 강한 군사력과 발전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계승을 명분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의 북한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에 걸친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목차

[편집] 국호

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연표) v ? d ? e ? h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환인
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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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진국
삼한

 



 
 
 


 
 
 


   

   
 


고려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삼별초의 항쟁
? 홍건적의 고려 침공
조선
?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건국할 당시 스스로 나라의 이름을 대신국(大辰國), 또는 대진국(大震國/大振國)이라 칭하였으나 이후 발해로 바꾸었다.

사료에 따르면 713년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의 국왕에 책봉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는 이 책봉 이후로 진국이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고 하며, 북한 학계에서는 진국이 스스로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는데 당나라가 이를 추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편집] 역사

[편집] 건국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을 평양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 고왕)도 그의 아버지 대중상(大仲象)과 함께 요서 지방의 영주(營州)(중국어 간체: 朝?, 정체: 朝陽, 병음: Ch?oy?ng 차오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1] 기슭에 진국(震國 혹은 振國)을 세웠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직을 수여하였는데, 이로부터 나라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편집] 발전 과정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무예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정하고,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시키고 만주 북부 일대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 나라들을 긴장시켰다. 가령 당나라는 발해 북쪽의 흑수부 말갈(흑수말갈)이 연합하여 대응해 나갔다. 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 문제를 둘러싼 외교 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족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여 등주(登州)[2]급습하여 순식간에 점령하는 한편, 요서의 마도산(馬都山)에서 대문예가 이끄는 당나라 군과 격돌하였다. 이후 당나라가 신라에 지원을 요청하면서까지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발해의 성장은 거칠 것이 없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文王)에 즉위하여 대흥(大興)·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왕도 영토 확장은 계속되어 동북 방면의 말갈 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

그 무렵 발해의 고민 또한 커지고 있었다. 우선 면적에 비해 발해의 자연 환경은 너무 거칠었다. 모진 추위와 눈으로 덮히거나 얼어붙은 땅은 농사를 어렵게 하였고, 사냥이나 가축을 기르기가 발해의 산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늘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발해의 두 번째 고민은 여러 종족을 잘 통합하여 국력이 하나로 일치된 나라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넓은 만주 지역에는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훗날 여진족 혹은 만주족으로 불리는 말갈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고구려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느 정도 고구려인이 된 세력이 있었던 반면, 이때 새롭게 정복된 세력도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욱 컸다.

오랜 고민 끝에 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선 756년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상경에 자리잡은 뒤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그밖에 3성(三省)[3]과 6부(六部)[4]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 힘을 쏟음으로써 거친 자연 조건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발해는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었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고, 762년 당나라는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한편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5]로 천도한 적도 있으나, 성왕(成王)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그것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대원의(大元義)·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喜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국력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일시 약화되었다.

9세기 전반, 간왕의 종부(從夫)이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渤)의 4대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에 즉위하였다. 선왕은 발해를 중흥시켜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으며, 또 요동 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 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兎州)를 설치하였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지방에는 부 밑에는 여러 개의 현을 두었고, 부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다. 5경은 당시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편집] 멸망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부 학자는 비슷한 시기에 분화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의 멸망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916년 거란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년 - 926년, 재위 : 907년 - 926년)는 부족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 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 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925년 12월 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요나라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발해는 보름여 만인 926년 1월 15일에 멸망하였다.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발해고지(渤海故地)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요나라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 유민들의 부흥 운동1116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으며, 아울러 한민족은 주된 활동 무대의 일부였던 만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편집] 연표

연도 성명 연호 설명
668 고구려 멸망. 대중상, 식구를 이끌고 영주로 거처를 옮김.
698 대조영 인구 10여 만호, 군사 정예군 수만 명으로 대진 건국. 고왕 즉위.
713 국호를 발해로 고침.
719 대무예 고왕 붕어. 무왕 즉위, 연호 인안.
732 인안 14년 장문휴를 보내어 해군으로 당의 등주를 공격.
733 인안 15년 당 현종,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 공격. 신라도 협조하였으나 폭설로 중지.
737 대흠무 인안 19년 무왕 붕어. 문왕 즉위, 연호 대흥.
756 대흥 20년 상경으로 천도(遷都).
793 대흥 57년 문왕 붕어. 동생 원의가 즉위했으나 수 개월 후 사망.
793 대화여 성왕 즉위, 연호 중흥.
794 대숭린 중흥2년 성왕 붕어. 강왕 즉위, 연호 정력.
809 대원유 정력16년 강왕 붕어. 정왕 즉위, 연호 영덕.
812 대언의 영덕4년 정왕 붕어. 희왕 즉위, 연호 주작.
817 대명충 주작6년 희왕 붕어. 간왕 즉위, 연호 태시.
818 대인수 태시2년 간왕 붕어. 선왕 즉위, 연호 건흥. 신라를 공격, 북쪽 부락을 공략.
830 대인수 건흥13년 선왕 붕어.
831 대이진 건흥14년 대이진 즉위. 연호 함화.
857 대건황 함화27년 대이진 붕어. 대건황 즉위.
871 대현석 ?15년 대건황 붕어. 대현석 즉위.
894 대위해 ?24년 대현석 붕어. 대위해 즉위.
906 대인선 ?13년 대위해 붕어. 대인선 즉위.
906 ?7년 신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음.
924 ?19년 거란의 발해 침입, 요주자사를 죽이고 백성들을 빼앗음.
925 ?20년 발해인 장군 500여 명 고려로 망명. 12월, 거란이 발해에 침입.
926 ?21년 거란군, 부여부 점거. 발해 멸망. 국명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거란 세자가 지배.

[편집] 정치

발해는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하였다..[6] 중앙의 정치조직은 3성(三省)[3]과 6부(六部)[4]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체제를 구성하였다. 3성 6부 밑에는 5감(五監)·9시(九侍) 등의 기구를 두었다.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고구려의 전통을 살려서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 외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중정대, 서적 관리를 맡은 문적원, 중앙의 최교교육기관인 주자감 등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는데(오늘날의 광역시에 해당), 국도(國都)인 상경(上京)과 중경(中京)[7]·동경(東京)·남경(南京)[8]·서경(西京)을 가리킨다. 상경은 당의 장안성(長安城)과 그 규모를 같이하여 외성(外城)[9]·내성(內城)[10]을 두고 시가지를 바둑판같이 구획하였다. 지방행정의 중심인 15부에는 도독을 두어 지방 행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부 아래에는 62주를 설치하여 자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 다시 현을 두고 현승을 파견하였다. 지방행정의 말단인 촌락은 주로 말갈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장을 매개로 지배하였다.[11] 최근 러시아연해주에선 발해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발굴되면서 연해주가 발해에 속해있었음을 증명하게 되었다.[12]

[편집] 고구려 계승의식

발해의 귀족 및 지배계층은 고구려 유민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2대 무왕은 일본에 보내는 국서를 통하여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라고 주장하며 고구려 계승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3대 문왕 역시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 자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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