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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여행자료와 맛집 스크랩 4. 무안국제공항과 목동공원,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야 할 일제격납고를 살피다.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추천 1 조회 428 18.06.09 23: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 무안국제공항과 목동공원,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야 할 일제격납고를 살피다.

(무안국제공항주차장 - 터미널 1- 터미널 2- 주차장 - 창포만도로 - 톱머리항 입구 주차장 - - 톱머리 해수욕장 - 낙지 직판장 -망운면사무소주차장 - 목동공원감목관불망비 - 노거수길공원 - 망운초교 뒷길 - 대운사 - 망운성당 - 망운우체국 - 면사무소주차장 - 현경장례식장주차장 - 4번 격납고 - 주차장 - 방공포대)

 

오늘은 무안국제공항에서부터 시작을 하자.

걸어서 구경을 한다면 더 좋은 일정이 되겠지만 더 많은 곳을 둘러 볼 욕심으로 차량을 이용하고자 한다.

먼저 공항에서부터 시작을 하자.

 “무안국제공항은 무안군 망운면 공항로 970-260 에 위치하고 있다.

1990년부터 개발 타당성 조사를 시작하여, 199812월 공항 개발 사업 기본계획 고시와 함께 공사에 들어가 10여 년간의 공사 끝에 200711월 무안국제공항으로 개항을 하였다.

목포와 광주공항의 대체공항으로 국토서남부의 국제관문이 되는 무안국제공항을 목표로 하였으나 광주공항이 아직 이전 되지 아니하여 현제는 반쪽 공항이다.

현제 국내선은 제주공항을 매일 오전 오후에 각 1회씩 운항을 하고 있으며, 국제선으로는 일본의 삿포르, 오사카, 나고야, 키타큐슈, 중국의 타이페이, 필리핀의 칼리보, 베트남의 다낭과 하노이, 몽고의 울란바타르 등이 무안공항에서 나갈 수 있는 곳이다.


사드 여파로 가장 가까운 중국의 공항이 중단 되어 아쉽다.

. 소아 동반 고객을 위한 우선검색대가 마련되어 있으며,

공항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편의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다.


무안읍과 광주방면으로 가는 대중교통도 11번 게이트로 나가면 탑승 할 수 있고, 바로 옆에는 택시 승강장도 마련되어 있다.

광주 종합버스터미널에서도 무안공항으로 오는 버스가 있으며, 무안 버스 터미널에서도 요일별로 버스가 있다. 시간표를 첨부 한다. (201711월 현제)

무안 버스터미널과 무안공항간의 버스 시간표

( 문의 무안교통 061-454-1040)

버스터미널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

무안공항에서 무안터미널로 가는 버스

구분

1

2

3

구분

1

2

3

4

08:15

09:15

13:00

18:20

20:00

08:15

09:15

12:05

13:0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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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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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

09:1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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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광주 유스퀘어광주버스터미널(31번문)에서 무안공항으로 문의 연 락 처 : 062-360-8114

1

07:30

송정리 경유

무안공항

매일

2

13:10

공항직행

무안공항

, 금요일 만 운행

3

17:10

함평경유

무안공항

매일

 

무안공항의 주차장 요금은 무료이며 대형 54대와 소형 1,829대가 주차 가능 하다.

1층에는 편의점으로 “CU”바젠이라는 두 업체가 들어와 있으며 공공시설로는 유아휴게실관광안내소가 자리하고 있고, 2층은 출국장으로 농협면세점이 입점 해 있다.

 

무안 공항에 내려 가볍게 주위를 관광 할 수 있는 여행자 간편 안내지도가 있으면 유용하게 이용 되지 않을까 잠시 생각 한다.

무안공항을 둘러보았다면 먼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톱머리 해수욕장으로 가보자.

공항주차장에서 목포방향인 후문 쪽으로 나가면 좌측으로 창포만 호수와 너른 갈대밭이 보인다.

공항이 들어서기 전에는 청둥오리, 큰고니 등 겨울철새들이 많이 찾아와 장관을 이루던 곳인데 지금은 비행기의 안전한 운항을 위하여 그 철새들을 못 오게 경계하고 있어서 예전의 철새들의 군무를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도 소형 철새들 중심으로 오리류와 물닭 등이 많이 모여 겨울을 나는 모습이 관찰 된다.

소형 어선을 이용하여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진상품으로 유명 했다는 톱머리 감나무 밭을 지나 해수욕장으로 들어서면 톱머리항 공사장이 나온다.

안으로 들어가면 주차장이 넓지 아니 하므로 여기에 차를 세우고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것이 편하다.

톱머리 해수욕장 역시 울창한 소나무 해송림으로 유명세를 탄 곳으로 식당가와 숙박시설 등이 잘 구비 되어 있다.

이러한 시설물들이 들어섬으로 인해 예전의 시골스런 어촌의 참 모습을 고스라니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편리한 시설과 넓은 백사장은 크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특히 한 여름날의 일몰이 환상적 이다.

공항 활주로 유도로와 바로 연결 되는 곳이라서 내려앉는 비행기를 바로 아래지점에서 가까이 볼 수도 있다.

어쩌면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를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중의 한군데 일 것이다.


창포만을 가로 막은 둑에서는 낚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장관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아울러 조금만 걸어서 공항방향으로 나오면 현지 바다에서 직접 잡은 낙지만을 고집하는 무안낙지직판장도 문을 열고 있어 낙지요리의 진가를 맛 볼 수도 있는 곳이다.

이곳의 낙지를 잡는 어민들은 낙지의 어족자원 보호를 위하여 낙지 산란기에는 금어기로 설정하고 그 기간 동안에는 낙지를 전혀 잡지 아니 한다.

 

이곳의 백사장에서는 특히 모래 갯벌에서 볼 수 있는 대표생물종인 달랑게와 콩게, 사각게, 바위게 등과 집과 산 위에가지도 올라가는 도둑게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곳이다.

참으로 많은 다양한 생물 종들을 만날 수 있다.

전문가의 도움을 얻으면 천년기념물 320호인 수달의 흔적과 멸종위기 종으로 지정 되어 있는 맹꽁이흰발농게도 찾아 볼 수 있다.


주변에는 갯잔디, 나문재, 칠면초, 방석나물, 개메꽃, 순비기, 산딸기, 복분자, 갯질경이, 달맞이꽃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점심을 겸한 낙지요리를 먹고 싶다면 목동공원으로 이동 하는 도중에 무안낙지직판장에 들려 해결 하는 것이 좋다.


이제 비행장 외곽도로를 달려 목동 공원으로 가보자.

목동공원 앞에는 주차가 용의하지 아니 하므로 차는 망운면사무소 주차장을 이용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목동공원이 조성 된 곳은 조선시대 나라에서 기르던 말을 관리 하던 국영목장으로 나주감목관목의 관할지였다가 1891년에 영광감목관으로 이속 된 곳이다.

이 곳 역시 1895년 진관이 폐지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여 오성환 감목관을 끝으로 이후 무안부로 소속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망운면 목동리에 설치되었던 감목관은 종 6품 벼슬로 장산목장 , 압해목장, 자은목장 이렇게 3곳의 목장을 지휘, 감독 하였고, 총 근무하는 목자의 수는 94명이었으며, 말은 약 1,000필 이상을 관리 하였던 곳이다

 이 세 곳에서 수납 된 모든 것들을 송현리 조금나루(당시이름은 송학포.松鶴浦)에서 영광의 목관으로 운송 하였다.

당시 망운 감목관이 근무를 하였던 동헌건물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학교로 사용 하다가 후에 천주교회의 소유가 되었고, 지금은 천주교회 광주교구 망운성당이 되어 있다

 목내의 주위에 심어져 있던 약 200여 구루의 나무만 남아 그 위치를 짐작 해 볼 수 있다.

큰 나무가 심어진 일부 구간은 공원으로 관리가 되고 있으나 대원사 뒤쪽 구간은 관리가 되지 아니하고 방치되어 있어 관계당국의 시급한 대책이 필요한 곳이다.

면사무소에 주차를 하였다면 목동공원으로 내려가 보자. 정자와 기념비, 그중에서도 광주 5.18 민주화 운동 사적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눈길을 끈다.

더불어 공원 내에는 감목관들의 영세불망비와 선정비 등이 세워져 있다. 다음과 같다.

제일 좌측 비 앞면 판독불능 (영조 191743)

監牧官申候大腹善政碑 (신대복, 순조22, 1822)

監牧官姜候愚成永世不忘碑(강우성, 철종111860)

監牧官 安候洵永世不忘碑(안순, 1862)

一堤調永恩府院君金候汶根永世不忘碑(일제조영은부원군김문영 1862)

行監牧官金候東爀永世不忘碑(김동혁, 고종101873)

監牧官金候東爀永世不忘碑(김동혁, 고종101873)

郡守洪公大重永世不忘碑(홍대중, 고종171880)

一堤調金相國偉興根永世不忘碑(김상국)

監牧官尹候可基永世不忘碑(윤가기, 고종221885


이분들 외에도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감목관은 130여분이나 되었다. 표로 만들어 보았다. 더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근무를 하신 흔적이 남아 있겠지만 차차 찾는 데로 보충을 하려 한다.

찾다보니 1891년 나주 감목관에서 영광 감목관으로 이관되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있어 아래 붙여 놓는다.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인 듯 전성옥 감목관은 발령을 받고도 부임을 하지 아니하여 벌을 받은 내력과 이두황감목관은 당시 자은, 장산, 압해목장에서 장부와 맞지 않은 말의 마릿수를 조절한 내용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 이다. 특히 이두황 감목관은 나중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군을 이끌고 난을 평정한 다음 남긴 기록으로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가 남아 있어 그의 약력도 자세히 첨부 한다.

나주 및 영광 감목관 명단

시 기

나주 감목관

출처

기타참고사항

선조29(1596) 96

나덕준(羅德駿)

난중일기

현종8(1667) 820

심보(沈譜)

승정원일기

현종12(1671) 513

유예걸(柳禮傑)

승정원일기

숙종 8(1682) 621

김만종(金萬鍾)

승정원일기

숙종 8(1682) 82

김제건(金悌建)

승정원일기

숙종12(1686) 630

전재제(鄭載濟)

승정원일기

숙종14(1688) 625

노욱(盧頊)

승정원일기

숙종19(1693) 917

조정세(曺挺世)

승정원일기

숙종23(1697) 319

장영필(張榮弼)

승정원일기

숙종25(1699) 77

조중렴(趙重廉)

승정원일기

숙종28(1702) 110

김빙(金?)

승정원일기

숙종29(1703) 719

김진성(金振聲)

승정원일기

숙종30(1704) 726

0(0)

승정원일기

숙종35(1709) 15

원필대(元必大)

승정원일기

숙종35(1709) 110

유두문)劉斗文

승정원일기

숙종37(1711) 421

박상하(朴尙夏)

승정원일기

숙종37(1711) 71

상휘주(尙輝周)

승정원일기

숙종40(1714) 621

김종윤(金重潤)

승정원일기

숙종40(1714) 1221

전도흥(鄭度興)

승정원일기

숙종44(1718) 816

박래태(朴來泰)

승정원일기

경종 2(1722) 916

이세해(李世楷)

승정원일기

경종 2(1722) 921

김윤(金潤)

승정원일기

경종 4(1724) 426

길상의(吉尙義)

승정원일기

영조1(1725) 75

길상의(吉尙義)

승정원일기

퇴거

영조1(1725) 712

김수규(金壽?)

승정원일기

영조1(1725) 810

이형령(李衡齡)

승정원일기

영조4(1728) 13

신영(申塋)

승정원일기

영조12(1736) 321

신제(申除)

승정원일기

영조16(1740) 33

이석삼(李錫三)

승정원일기

영조18(1742) 523

강완(姜梡)

승정원일기

영조19(1743) 927

정최령(鄭最寧)

승정원일기

영조22(1746) 76

이세환(李世煥)

승정원일기

영조25(1749) 221

문진오(閔鎭五)

승정원일기

영조27(1751) 62

김홍노(金弘魯)

승정원일기

영조29(1753) 1027

김성취金聖就

승정원일기

(이룰취)

영조31(1755) 109

장경현(張景賢)

승정원일기

영조35(1759) 16

남학정(南鶴貞)

승정원일기

영조37(1761) 624

오도옥(吳道鈺)

승정원일기

영조39(1763) 1220

김수덕(金守德)

승정원일기

영조40(1764) 418

송요철(宋堯哲)

승정원일기

요임금요

영조42(1766) 1217

이욱상(李旭祥)

승정원일기

영조45(1769) 619

홍탁보(洪鐸輔)

승정원일기

영조47(1771) 126

서돈수(徐惇修)

승정원일기

영조50(1774) 519

송재우(宋載祐)

승정원일기

정조즉위년(1776) 1127

유원(柳源)

승정원일기

정조 3(1779) 42

이경제(李景濟)

승정원일기

정조 5(1781) 917

한종유(韓宗裕)

승정원일기

도화서화원,

정조 8(1784) 426

최치간崔致侃

승정원일기

정조 8(1784) 625

김언국(金彦國)

승정원일기

정조10(1786) 56

강진삼(康晉三)

승정원일기

정조11(1787) 916

윤가기(尹可基)

승정원일기

불망비

정조14(1790) 112

유소(柳?)

승정원일기

정조16(1792) 37

김이행(金履行)

승정원일기

정조17(1793) 79

피재길(皮載吉)

승정원일기

일성록

정조19(1795) 85

조태영(趙台榮)

일성록

주서, 곧 용서함.

정조19(1795) 810

장한(張?)

승정원일기

정조20(1796) 1220

신대복(申大腹)

일성록

1822선정비

정조23(1799) 619

안재술(安載述)

승정원일기

순조 1(1801) 1111

안사언(安思彦)

승정원일기

순조 4(1804) 322

홍오성(洪五成)

승정원일기

순조 6(1806) 1224

김학의(金學義)

승정원일기

순조 9(1809) 43

이중진(李重晉)

승정원일기

순조11(1811) 729

김원(金愿)

승정원일기

순조13(1813) 416

한환(韓?)

승정원일기

순조16(1816) 214

이문철(李文哲)

승정원일기

순조18(1818) 428

김이근(金?根)

승정원일기

순조21(1821) 113

조횡(趙?)

승정원일기

순조24(1824) 126

김춘근(金春根)

승정원일기

순조26(1826) 1211

김화중(金華重)

승정원일기

순조29(1829) 44

김영박(金永璞)

승정원일기

순조30(1830) 47

김건종(金建鍾)

승정원일기

순조32(1832) 525

조승록(趙秉祿)

승정원일기

순조34(1834) 107

조화벽(趙和璧)

승정원일기

헌종 3(1837) 26

박인천(朴寅天)

승정원일기

헌종 5(1839) 66

이도연(李陶淵)

승정원일기

헌종 9(1843) 528

조병찬(趙秉瓚)

승정원일기

헌종11(1845) 411

이하석(李河錫)

승정원일기

헌종13(1847) 811

김종빈(金鍾彬)

승정원일기

철종즉위년(1849) 122

조수영(趙遂永)

승정원일기

철종 3(1852) 48

이완(李琓)

승정원일기

철종 5(1854) 721

윤석범(尹錫範)

승정원일기

철종 7(1856) 126

변형식(卞亨植)

승정원일기

철종 9(1858) 122

강우성(姜愚成)

승정원일기

불망비1860

철종12(1861) 31

안순(安洵)

승정원일기

불망비1862

철종14(1863) 1025

유승주(兪承柱)

승정원일기

고종 2186513

고영진(高英鎭)

승정원일기

고종 4186767

이해준(李海準)

승정원일기

고종 5186812

서대보(徐大輔

승정원일기

고종 7187027

조장하(趙章夏

승정원일기

고종 9187264

김동혁(金東赫)

승정원일기

1873년불망비 2

고종131876811

이장혁(李章赫)

승정원일기

고종15187824

김석구(金錫九)

승정원일기

신병

고종151878216

박창윤(朴昌胤)

승정원일기

고종151878228

이명석(李命錫)

승정원일기

고종211884517

오치옥(吳致沃)

승정원일기

고종231886107

박준용(朴準鎔

승정원일기

고종251888826

이기철(李基徹)

승정원일기

고종2718901021

오영렬(吳永烈

승정원일기

고종281891325

이두황(李斗璜)

승정원일기

고종2818911221

승정원일기

영광감목관으로

고종2918921030

승정원일기

세곳의말수효 탕감

고종311894818

전성욱(全聖煜)

승정원일기

장팔십부과환직파출

고종32189522

오성환(吳性煥

승정원일기

보병참위

 

승정원일기에서 고종 28년 신묘(1891) 1221(신해) 맑음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의정부의 초기로 인하여, 나주(羅州)의 목장(牧場)을 영광군(靈光郡)으로 이속(移屬)하고, 흥양(興陽)의 목장을 낙안군(樂安郡)으로 이속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나주 감목관(羅州監牧官)을 영광 감목관으로 고치고, 흥양 감목관을 낙안 감목관으로 고쳐 하비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고종2918921030

또 사복시의 일제조(一提調)와 이제조(二提調)의 뜻으로 아뢰기를,

방금 영광감목관(靈光監牧官) 이두황(李斗璜)의 보고를 보니, ‘본목(本牧)의 자은(慈恩), 장산(長山), 압해(押海) 등 세 섬의 장부에 올라 있는 말이 1,207필인데, 근년에 줄어든 수효가 매우 많아 현재는 239필밖에 없습니다. 전임 목관(牧官)은 부임 전에 체직되었고, 전전임 목관은 몇 년 간의 재임 기간 동안 어느 것도 조사하여 바로잡지 않고서 장부에 있는 말들을 허위로 작성하였습니다. 피폐한 섬의 형세상 또한 원래의 수효를 맞출 수 없으니, 현재 있는 말의 수효대로 성책(成冊)하여 올립니다.’ 하였습니다. 목장(牧場)을 설치하여 말을 기르는 것은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하는 일입니까. 그런데 법이 오래되어 방탕하고 느슨해져 폐해가 다시 심해지고 있습니다. 세 섬의 말이 근년에 부족해진 것이 거의 1000필에 가까우니, 참으로 매우 놀랍습니다. 참으로 속히 수효를 채우는 데 여념이 없어야 하겠지만, 피폐한 섬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또한 억지로 책임지우기 어렵습니다. 그저 허위로 기재된 장부만 끼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망실(亡失)로 처리하는 것이 나을 것이니 특별히 탕감해 주고, 그 나머지 현재 있는 것은 잘 길러 번식시키도록 특별히 신칙하는 것이 반드시 원래 장부의 수효를 회복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리고 목관에 대한 처리는 전임 목관 오영렬(吳永烈)은 부임 전에 체직되었으니 지금 논할 것이 없고, 전전임 목관 이기철(李基徹)은 몇 년 간의 재임 기간 동안 어느 것도 조사하여 바로잡지 않은 만큼, 거행을 헤아려 볼 때 엄한 처벌을 면하기 어렵지만 이미 죽었으니,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김문근(金汶根, 1801~ 1863)은 조선 후기의 외척으로 철인왕후의 아버지이자 철종의 장인이다. 딸이 철종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을 지내고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자는 노부(魯夫), 시호는 충순(忠純), 본관은 ()안동이다. 영안부원군 풍고 김조순의 7촌조카이며, 이조판서 김수근의 아우이다. 별칭은 포물부원군이다.

헌종 때인 1841년 음서로 관직에 올라 선공감가감역이 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서 현감을 역임했다. 이어 철종 즉위 후, 1851년 그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자 국구(國舅)로서 정일품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영돈녕부사가 되고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었다. 그 뒤 금위대장·총융사·훈련대장 등의 측근을 맡아 철종을 보필하였고, 그 뒤 안동 김씨 세도의 새로운 중심인물로 떠올랐으며, 영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이때 안동 김씨 세력은 조야에 크게 떨쳤다. 사위 철종이 죽기 직전에 사망했다. 사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성균관관상감사에 증직되었다. 몸이 비대하여 포물부원군(包物府院君)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두황(李斗璜, 1858111~ 191639)

이두황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무신, 군인이자 을미사변(1895) 관련자이며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을미사변 당시 도성 훈련대 제1대대장으로 있었으며, 조선인 고위 협력자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본관은 인천(仁川)으로 자는 공칠(公七), 설악(雪嶽)이다.

아버지는 명흡(命洽)이고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2(고종 19) 임오군란 후 무과에 급제, 친군좌영초관(親軍左營哨官)이 되었다. 1883년 말단 무관직에서 시작하여 수문장 등의 무관직을 거쳐 1889년 흥해군수와 1891년 나주감목관을 거쳐, 장위영 참령관(3)에 임령 되는 등 능력을 인정 받았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는 진압 작전에 참가 초토영중군(剿討營中軍)으로 임명되고, 죽산부사 겸 양호도순무영우선봉(竹山府使兼兩湖都巡撫營右先鋒)으로 임명되어 동학 농민군과 교전하여 전투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다. 1894년 중반 동학의 북접(北接)들이 제3차 봉기에 참가하여 보은군 보은장내에 모였을 때 사전에 이들의 집회를 알아내 기습하여 크게 이겼다. , 충청남도로 올라오는 남접 김개남(金開南)의 동학군을 목천 세성산에서 격퇴하여, 역시 공주로 북상하던 전봉준의 동학군과 이들의 협공 계획을 무산시켰다. 다시 패퇴하는 김개남 동학군과 서인주 동학군을 추격하여 서산, 해미, 유구(維鳩), 노성(魯城), 논산 등지에서 많은 동학군과 교전하여 섬멸하고,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가 전주 관군을 도와 전주성에 재집결한 동학군을 대패시키고 전주를 탈환하도록 도왔다.

청일 전쟁에도 참여하여 평양에 있던 청군을 공격하려는 일본군에 파견되어 정찰수행과 정보제공을 하였고, 평양백성을 부역시켜 청나라군의 시체를 처리하기도 하였다. 청일 전쟁 때 일본군과 함께 평양에 진군한 것을 계기로 친일파 무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성립하면서 양주목사로 승진했고, 일본의 입김으로 창설된 훈련대의 제1대대장을 맡았다. 이 무렵 명성황후가 일본과 대립하면서 갑오개혁을 무력화시킨 뒤 친러파를 등용하면서 훈련대마저 해산하려 하자, 일본은 이를 계기로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이두황은 경복궁에서 벌어진 명성황후 살해에 우범선 등과 함께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담했다.

1895년 훈련대 제2대대의 대대장으로 유길준, 우범선, 이주회 등과 함께 일본 낭인들을 지원, 명성황후 제거에 가담하였으며 을미사변 전후로 그는 광화문경비를 담당하였다. 을미사변 후 왕비가 폐서인되었다가 다시 복권되면서 을미사변 가담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그는 아들 이진백(李鎭白) 등과 함께 일본 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을미사변 관련자 가운데 이주회와 박선 등은 사형 당했고, 이두황, 우범선, 구연수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 가운데 우범선은 자객에게 암살당했으며, 이두황과 구연수는 14년 동안의 망명 생활 동안 살아남아 1907년 대한제국 순종 즉위 후 귀국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아래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와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1910년부터 1915년경까지 전라북도 장관직에 있었다. 그밖에 각종 사회단체에도 참여하여 제국재향후원회 조선지회 전라북도부회장(帝國在鄕後援會朝鮮支會全羅北道部會長) 등을 맡아보기도 했다. 1916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도 서훈 받았다. 일본 체류 때부터 일본 불교를 믿게 되어 자기의 장례도 화장으로 치르게 하였으며, 장례식은 간소하게 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진압 중에 작성한 진중일기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가 발굴 되었다.


김문근은 이곳 망운감목관을 지내지 아니 하였는데도 영세불망비가 있어 그 약력을 찾아보았고 김두황은 이곳 감목관을 지낸 이후 바로 동학농민혁명당시 관군으로 참여 한다.

불과 두 주갑 전의 가까운 시일밖에 지나지 아니한 흔적 이지만 우리가 모르고 그냥 무심히 날마다 지나다니는 이곳 망운의 감목관아 터에는 이런 역사적 인물들의 흔적들이 숨어 있음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다음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방관들을 처벌하는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남아 있어 같이 적어 둔다.


또 의금사의 말로 아뢰기를,

고종 31년 갑오(1894) 825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규환(李圭桓)의 장계 내에, ‘공물(公物)을 지키지 못한 남도포 만호(南桃浦萬戶) 하달경(河達慶), 지도 만호(智島萬戶) 강석만(姜錫萬), 목포 만호(木浦萬戶) 송재수(宋在洙), 무안 현감(務安縣監) 이중익(李重益)의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는데, 이에 대해 계하 하셨습니다. 해도의 도신으로 하여금 관원을 보내어 압상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고종 31년 갑오(1894) 917(경인)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호남의 비도(匪徒)가 곳곳에서 소란을 피우는 통에 군기를 잃어버린 전임, 현임 읍재(邑宰)와 진장(鎭將)에 대해 도신의 계사에서 처벌을 청한 인원이 무려 29인이나 됩니다. 평상시에 엄히 단속하여 방어하였다면, 어찌 이럴 리가 있었겠습니까. 나라의 기강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차리리 말을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일일이 법대로 나감(拿勘)해야 할 일이지만, 온 도가 어수선한 지금 같은 때에 각읍(各邑)과 각진(各鎭)의 직무가 처벌할 동안 방치되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니,

임실 현감(任實縣監) 민충식(閔忠植),

임피 현령(臨陂縣令) 송순혁(宋淳爀),

동복 현감(同福縣監) 유치성(兪致誠),

무안 현감(務安縣監) 이중익(李重益),

옥과 현감(玉果縣監) 홍우석(洪祐奭),

흥양 현감(興陽縣監) 조시영(曺始永),

익산 군수(益山郡守) 정원성(鄭元成),

화순 현감(和順縣監) 민영석(閔泳奭),

용안 현감(龍安縣監) 민진호(閔進鎬),

법성 첨사(法聖僉使) 권인하(權寅夏),

격포 첨사(格浦僉使) 유협()에 대해서는 특별히 죄명을 지닌 채 거행하도록 하고,

우수사(右水使) 이규환(李圭桓)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문비(問備)하였으니, 지금 우선 처벌은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고종 32년 을미(1895) 81(기사) 맑음

법부가 석방한 죄인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향리에 방축(放逐)된 죄인 민응식(閔應植)이소영(李紹榮)김헌수(金?秀),

-촌민을 선동한 죄인 송병필(宋秉弼),

-군기(軍器)를 잃어버린 죄인

박용진(朴用鎭)김인수(金麟洙)안국량(安國良)전두규(田斗奎)도창현(都暢鉉)

김달관(金達寬)유계춘(劉桂春)오태영(吳台泳)길흥규(吉興奎)이명선(李鳴善)

채규영(蔡奎榮)김삼동(金三同)김오현(金五鉉)임태두(任泰斗)박원명(朴源明)

하달경(河達慶)강석만(姜錫萬)양성록(梁聖祿)어재윤(魚在潤)이능우(李能友)

백남두(白南斗)김학모(金學模)김봉기(金鳳基)김영호(金永昊)김성준(金聖俊)

최세철(崔世哲)백낙중(白樂重)송주헌(宋胄憲)윤병수(尹秉綬)우창배(禹昌培)

도수동(都壽東)권동진(權東鎭)임봉운(林奉雲),

-범장 죄인(犯贓罪人)

정춘기(鄭春基)장지영(張志永)유동근(柳東根)이용윤(李容允)이상협(李象協),

-부신(符信)을 찬 채로 도피한 죄인 이용덕(李容悳),

-병부(兵符)를 뺏긴 죄인 박기붕(朴基鵬),

-일본군과 청군이 국경을 넘어와도 보고하지 않은 죄인

서상욱(徐相郁)황철연(黃哲淵)김준근(金雋根),

-상납(上納)이 적체된 죄인

김사국(金思國)이주필(李周弼)이관직(李寬稙)정동기(鄭東箕)정선조(鄭選朝

등을 석방 한다는 죄인 명단에 임치 첨사였던 김영호가 들어 있어 동학농민운동과의 관련성을 생각 해 본다.


감목관들을 기리는 영세물망비를 보았다면 노거수들이 줄지어 담장처럼 둘러서 있는 곳을 걸어보자.

망운초등학교가 있는 곳을 지나 해제로 가는 큰길이 나오는 곳 까지는 공원으로 잘 보존 관리가 되고 있다.

갖가지 형상으로 자란 노거목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펴 가다보면 대운사 뒤쪽은 관리가 되지 아니한 곳이 보인다.

조그마한 샛길로 세멘트포장길을 따라 돌다보면 망운 성당이 나오는데 이곳이 감목관아자리라 한다.

심어진 나무 외에는 옛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망운 시가지로 내려와 우체국을 지나면 주차를 한 면사무소로 갈 수 있다.


다시 차량으로 이동을 하여 이제 일제 강점기가 남긴 유물 격납고와 방공포대를 둘러보자.

아직은 관심 밖에 있는 유물이라서 관리는 되지 않고 있지만 우리지역의 아픈 현대사의 한 단면을 고스라니 보여주는 유물이니만큼 보존과 연구가 선행 되어야 할 것 인데 걱정만 깊어간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망운과 현경에 두 군데의 비행장을 만들고 있었다.

비행기를 숨겨 둔 격납고 주변에는 나무로 모형 가짜비행기를 만들어 위장을 해두고 멀리서 두어 개의 폭탄을 싣고 온 연합군의 비행기로부터 공중에서 폭탄을 투하 하도록 유도하였다고 한다.

당시 동원 되어 비행장에 일을 하신 분들의 경험담을 들어 보면, 전국에서 징용으로 끌려와 지게와 포대, 괭이와 삽으로만 엄격하고 독살스러운 일본군의 관리 감독 하에 높은 언덕의 흙은 헐어 깊은 곳을 메우고, 평탄하게 하는 비행장 만드는 작업들을 했다.

임금은 한 푼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먹고 자는 일까지 각 징용 온 본인들 부담 이여서 멀리서 온 사람들은 가까이에 방을 얻어 놓고 밥을 해 먹으며 비행장 만드는 일에 동원 되었다.

비행장은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19458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중단 되었다.

그 와중에 이곳의 비행장은 연합군의 폭격을 받기도 하였고, 당시에 투하 된 폭탄 중 불발탄이 있어 그것을 한참을 방치하다 후에 미군이 처리한 것도 있었다.

주위의 감방산과 옹산 그리고 병산에는 비행장 호위용 방공호를 여러 군데 파거나 공사 중이었다. 지금도 병산이나 감방산, 옹산에는 그 흔적이 고스라니 남아 있다.

특히 지금은 6개만 남아 있는 군용비행기 격납고가 밭이나 들 가운데 방치 되어 있다. 닭장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폐기물이나 쓰레기 등이 널려 있어 쓰레기장으로 변하여 있다. 시급하게 관리가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6개 남아 있는 격납고지점과 방공포대 2자리의 위치를 적어 두고자 한다.


위 치

내 용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 산 195-7

국도24호선 현경입구 좌측

격납고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 산 203-1

국도24호선 현경입구 우측

격납고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 산 204

국도24호선 현경입구 우측

격납고

무안군 현경면 송정리 319-40

현경장례식장 옆

격납고

무안군 망운면 목동리 262-6

망운에서 해제가는길 우측

격납고

무안군 현경면 송정리 343-26

망운에서 해제가는길 좌측

격납고

무안군 현경면 외반리 산 88

포대1

포대 및 대공진지

무안군 현경면 동산리 169-24

포대2

포대 및 대공진지

 

8곳 모두를 둘러보기에는 아직 정비 되지 아니하여 어려움이 많다.

하여 가장 찾아가기가 쉬운 현경장례식장 옆에 있는 격납고와 조암동마을 입구에 있는 두 군데의 대공포대 및 진지로 추정 되는 곳만 둘러보기로 하자. 격납고는 다 완성하지 못하여 안에 채워 넣었던 흙을 다 밖으로 퍼내지 못한 흔적을 볼 수 있으며 후에 누군가 개조하여 사용한 흔적도 남아 있다. 길이 없어 밭이랑을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나와 무안읍 방향으로 조암동을 찾아 가다보면 조암동 마을입구에 전 석재공장자리가 있고 그 맞은편 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시멘트 구조물이 보인다.

바로 대공포대 진지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지하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여러 개의 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내부에는 한 개 분대 정도의 병력이 주둔 할 정도의 크기 이다. 아주 튼튼하고 견고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이러한 건물이 국제공항자리에도 두 개가 더 있었다고 하나 공항을 만들면서 그 것에 대한 어떤 논의나 대책 없이 그냥 없애버린 것 같다고 한다. 여기에는 한 쌍 두 개가 남아 있다.

무안국제비행장에서 시작을 하여 감목관아 터와 일제 강점기 비행장으로 사용을 하였던 흔적을 찾아보았다. 뭔가 이곳이 이미 오래전부터 교통 즉 운송을 담당 하였던 역사적인 땅으로 이용되고 있었음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세계를 향하여 웅비하는 지역이 될 것 이라는 희망을 보면서 오늘은 여기서 걸음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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