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번호 - 사적 제190호
시 대 - 서기 838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산 40
지 정 일 - 1970년 2월 6일
지정면적 - 11,302m²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능 남쪽 가까이에 희강왕릉(僖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2.5m, 높이 3.8m이다. 이 왕릉은 광복 이전에 두 차례나 도굴(盜掘)당하였고, 1981년에도 도굴 미수사건이 있었다. 1984년 9월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봉분과 주변을 발굴조사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의 밑부분에는 가공석으로 호석을 축조하였는데, 밑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가공한 장대석으로 3단으로 쌓아올린 다음 갑석(甲石)을 덮었다. 이 호석(護石)에는 또 두께 35cm, 길이 100-130cm의 단면 5각형으로 가공한 지주석 20개를 봉분의 둘레를 따라 190-290cm 간격으로 받쳤는데, 조사 결과 이는 후에 보강한 것이었다. 능 전방에는 장방형 판석 2매로 조립한 작은 상석(床石)이 놓여 있다.
봉분 주변에 대한 조사결과 봉분 밑둘레 외곽으로 깊이 13cm, 지름 25cm 크기의 구멍 12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파고 납석제(臘石製)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하나씩 묻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십이지신상은 높이 10cm 내외의 작은 것으로 무덤의 바깥쪽을 향하게 놓여졌다. 조사 당시에는 쥐·소·닭·돼지상 등 4가지 상만 발견되었는데, 나머지는 호석 받침석이 세워질 때 파손되고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능 주변에서 능이 축조된 뒤에 매장된 골호(骨壺)가 발견되었는데 뚜껑에 '원화십년(元和十年)'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중국 당(唐)나라 때의 연호(年號)로서 서기 815년에 해당한다.
신라 제44대 민애왕(閔哀王, 敏哀王이라고도 한다. 재위 838-839)은 본명이 김명(金明)이고,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이다. 비(妃)는 김씨는 윤용왕후(允容王后). 이홍(利弘)과 더불어 희강왕(僖康王)을 협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도 역시 곧 피살되었다. 재위기간은 왕위쟁탈전의 혼란한 시기였으며, 별다른 치적도 남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의 피살사건과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는 사실만 전할 뿐 장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또한 원화 십년명 골호가 이 능이 조성된 뒤에 묻혀, 이 능은 서기 815년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민애왕의 연대와는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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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애왕 왕능
(삼국사기)
민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이다. 그는 원성대왕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관직을 거쳐 상대등이 되었던 바, 시중 이홍과 함께 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추존하여 선강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귀보부인은 선의태후라 하고, 아내 김씨를 윤용왕후라 하였으며, 이찬 김 귀를 상대등으로, 그리고 아찬 헌숭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2월, 김 양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났다. 아찬 우징은 청해진에서 김 명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말했다.
"김 명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은 임금과 아비를 함부로 살해하였으니, 그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 원컨대 장군의 군사를 빌려,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궁복은 "옛사람의 말에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용기 없는 자'라고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에 따르겠다"라고 대답하고, 마침내 군사 5천을 그의 친구인 정 년에게 주면서 "자네가 아니면 이 화란을 평정하지 못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겨울 12월, 김 양이 평동장군이 되어 염 장·장 변·정 년·낙 금·장 건영·이 순행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 철야현에 도착하였다. 왕은 대감 김 민주로 하여금 군사를 출동시켜 싸우게 하였다. 이에 김 양이 낙 금과 이 순행에게 기병 3천을 주어 돌격케 하여, 거의 모두를 섬멸하였다.
2년 봄 윤정월, 김 양의 군사가 주야로 행군하여, 19일에 달벌에 도착하였다. 왕은 김 양의 군사가 도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 대흔과 대아찬 윤린·의훈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김 양의 군사가 다시 한번 싸워 대승하였다. 왕의 군사 중에는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 때 왕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다가,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게되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월유택으로 도주하였다. 군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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