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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산행 후기 스크랩 안국사
외발자전거 추천 0 조회 48 08.01.08 12:5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극락전] 높게 쌓아 올린 축대를 한 걸음 올라서면 누각 위로 구름에 두둥실 떠 있는 듯한 안국사의 큰 법당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맞배건물로, 1991년 원행(圓行) 스님이 옛 안국사 터에서 옮겨지은 것이다. 잘 다듬어진 자연석 축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에는 꽃빗살문을 칸마다 설치하였다. 정면과 좌측은 4분합이나 우측은 2분합으로 협칸의 구조가 특이한 평면을 보여준다. 건물 외부는 정면과 배면에 다포계양식의 공포를 설치하였는데, 외부는 3출목으로 되어 있으나 내부는 4출목으로 쇠서는 연봉으로 장엄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 건물 외벽은 삼면에 심우도(尋牛圖)를 비롯하여 석가탄생도 등 다양한 설화적 도상을 표현하였으며, 단청은 얼금모로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엄하였으나, 극락전 우측창방 쪽에는 안국사의 설화를 입증하듯 딱 하루만큼 단청할 분량의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고, 우물반자 아래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은 족대 위에 3단으로 구획을 나누어 내부에 안상을 채색하고 있으며, 상부에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탱화로는 1994년 불모(佛母) 혜원(慧園)이 그린 아미타후불탱과 1965년 금어 남춘인(南春仁)이 그린 신중탱이 있으며, 1995년에 조성된 청동금고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외 불단 뒷벽에는 이 지역의 신앙물로 천재지변을 몰아낸다고 전해지는 1728년 조성의 보물 제1267호인 괘불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극락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하루]안국사의 누각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 맞배건물이다. 1990년대 적상호의 수몰로 인해 안국사 옛터에 있던 누각을 해체한 후 1992년에 복원한 것으로, 현재 불교용품점과 무주 33경의 비경을 엿볼 수 있는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외부는 이중구조로 누각 아래로 출입하며, 건물 내부에는 ‘석실비장(石室秘藏)’ㆍ‘청하루(淸霞樓)’ㆍ‘극락전(極樂殿)’ㆍ‘산신각(山神閣)’ 등 수몰되기 전 안국사에 있던 현판들이 걸려 있다. 특히 이 가운데 현판 ‘淸霞樓’는 송석(松石) 이도익(李都翼)의 글씨로 1859년에 쓴 것으로, 가로 165㎝, 세로 55㎝의 장방형 목판에 활달한 필체로 양각되어 있다.

 또한 현판 중 ‘石室秘藏’은 사고와 연관된 상훈(尙訓) 스님의 일화를 전해주는 글씨로서 안국사가 『조선왕조실록』 824책, 『선원록』 1천446책, 『의궤』 260책, 『잡서』 2천984책 등 5천514책의 장서를 얼마나 잘 지켰는지를 말해준다. 1627년(인조 5) 적상산성에 사고가 설치된 후 13년 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전쟁의 불길이 적상산까지 번져왔는데, 사고를 지키기에는 승병의 전투력이 역부족이어서 자칫 사고의 장서들이 모두 유실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상훈스님이 사고 안의 장서들을 모두 적상산 정상인 향로봉 아래 안렴대로 숨김으로써 전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는 한 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적은 기록들이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스님에 의해 지켜진 일화로, 1902년 안국사의 대규모 중수 때 승정원 비서원랑 유인철(柳寅哲)이 안국사를 방문해 상훈스님의 일화를 듣고 ‘'석실비장(石室秘藏)’이란 현판을 남긴 것이다

 

[천불전]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 극락전 우측 축대 아래에 있다. 1991년 옛 사고(史庫) 터에 있던 선원각을 옮겨 지은 것으로, 전란의 화마를 입지 않은 유일한 사고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건물은 중간에 가로로 방(枋)을 쳐서 중층의 구조를 가진 독특한 모습으로, 하부는 사고를 수장한 창고를 겸하며 상부는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어칸에는 4분합의 빗살문과 강암(剛菴) 선생이 쓴 ‘千佛殿’ 편액이 걸려 있으며, 좌우 측면에는 내부에 채광을 공급하는 특이한 교창이 있다. 건물 내부는 중앙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 보조단이 있으며, 1995년 합성수지로 만든 석가여래좌상과 문수ㆍ보현보살을 비롯하여 석고천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은 붉은 바탕에 금니로 출초한 홍탱으로 금어 남인식(南仁植)이 1969년에 조성한 것이다.

[삼성각]극락전 뒤편 언덕에 있는 삼성각은 1992년 원행(圓行) 스님이 지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이다. 건물외부는 주로 녹청을 사용하여 단청하였으며, 4분합의 어칸 띠살문 상부에는 소남(素南) 이규진(李圭鎭)이 쓴 ‘三聖閣’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내부는 불단 위로 1899년에 조성된 칠성탱과 근래 조성된 산신탱ㆍ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칠성탱은 금어 우송상수(友松爽洙) 스님이 1899년 김천 봉곡사(鳳谷寺) 극락암에서 조성한 것을 옮겨온 것으로, 장방형의 화폭에 중앙의 치성광여래와 좌우에 일광ㆍ월광보살 및 삼태육성과 이십팔수 등 여러 권속을 배치한 모습이다. 이 탱화는 인근 북고사에도 똑같은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어, 지리적으로 가까운 김천지방의 금어인 우송스님이 무주지역의 불화불사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장전] 1992년에 원행(圓行) 스님이 극락전 아래 세운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낮은 단층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얹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운 주심포계 건물로, 평방 없이 창방 위에 익공식 연화공포가 도출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2ㆍ4분합의 빗살창호와 4기의 주련이 걸려 있으며, 어칸 상부에는 일중거사(一中居士)가 쓴 지장전 편액이 양각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육엽연화문으로 단청된 우물천장과 불단으로 구성되며,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ㆍ무독귀왕 및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안국선원]성보박물관 아래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한 안국선원은 안국사의 별원인 선원(禪院)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목조 팔작건물로 전면 5칸은 수좌들의 요사채로, 전면 2칸은 선방으로 사용된다. 건물 외부는 녹청으로 단청되어 있으며, 1992년 세워진 안국사 요사와 같이 툇마루와 미닫이문으로 단장되어 있다. 또 건물 외부에는 2기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요사채 쪽에는 1994년 청화(淸華) 스님이 쓴 ‘안국선원(安國禪院)’이라는 편액이, 선방 쪽에는 1996년 여산(如山)이 쓴 ‘몽회각(夢會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범종각]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건물로 청하루 우측에 있다. 1994년 원행(圓行) 스님이 건립한 것으로, 안국사의 옛 범종과 대화합의 범종을 봉안하기 위한 것이다. 단층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얹고, 사면에 홍살을 세운 범종각은 청하루의 기왓골과 수평을 이루며 안국의 염원과 국민 대화합을 바라는 범음을 전하고 있다. 현재 어칸에 일중(一中) 거사가 쓴 편액과 1996년 조성한 대화합의 범종 및 운판이 있으며, 1788년(정조 12)에 조성된 안국사의 동종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안국사 동종은 높이 85㎝, 구경 78㎝의 대형 종으로 어깨에 범자(梵字)가 둘러져 있으며, 4개의 유곽과 종신에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 용뉴는 결실되었으나 종신에 ‘乾隆五十三年戊申三月日赤裳山安國寺大鍾’이라는 명문과 ‘改鑄重’이라는 시주질이 돋을새김되어 있어 18세기 후반 조선 종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성보박물관]정면 3칸 측면 7칸의 목조 팔작건물로, 1998년 세계 각국의 불상들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현재 측면 5칸은 성보박물관으로 활용되며, 내부에 중국ㆍ일본ㆍ네팔ㆍ티베트 등 동남아시아와 파키스탄ㆍ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시아에서 수집한 불상 및 다기류 300점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은 주지 원행(圓行) 스님이 15년간 전 세계의 불교국가를 다니며 수집한 것으로, 무주 유일의 보물인 괘불이 사진으로 모사되어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박물관의 측면 2칸은 안국사를 찾는 이들이 다도를 즐길 수 있는 찻집 ‘운상(雲裳)’으로 이용되고 있어, 지역민들의 문화휴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찻집에는 항상 구름이 걸려 있어 감미로운 차 한 잔을 들면 절로 마음의 안식을 얻는 것 같아, 이곳이 안국(安國)임을 되새기게 한다

 

 

 

 

 

 

 

 안국사의 관람은.. 안국사는 조선왕조실록의 사고수호 사찰로 전란의 화마를 피한 유일한 사찰이라고 합니다.천연의 요새로써 구비구비 험한 산길을 올라가야 하지만 올르고 난 후에 절경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정묘호란 때에도 사고의 장서들을 인근의 석굴로 모두 옮겨 보관함으로써 전쟁의 화마를 피할 수 있었으며, 1910년 서울의 규장각으로 장서를 옮겨갈 때까지 화재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의 사고로서, 안국사는 이러한 사고 수호사찰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산중의 별천지에 자리한 안국사는 무학대사가 예언한 천하의 길지로 안국사가 번창하면 나라가 번창하고, 안국사가 쇠하면 나라가 쇠한다는 비보를 지니며, 고찰의 옛 모습을 가꾸며 호국과 민안(民安)을 기원하던 옛 스승들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극락전은 무주에 발을 디뎌 붉은 퇴적암으로 둘러싸인 암산(巖山)의 수풀 속으로 들어가면, 어여쁜 새색시의 붉은 치맛자락과 같은 적상산의 자태가 드러난다. 적상산의 제일로 치는 가을단풍과 함께, 철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채 오묘한 절경을 드러내는 곳에 안국사는 자리잡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무주 산천편에는 그 이름을 ‘상산(裳山)’이라 하여 “사면으로 곧추선 암벽이 층층이 험하게 깎이어 마치 치마를 두른 것 같아 이름 하나니, 옛사람들이 그 험준함을 사서 성으로 삼았다. 두 갈래 길이 겨우 위로 열리지만 그 안은 평탄하고 넓어 시냇물이 사방에서 솟아난다. 참으로 천연의 요새다”라고 하여, 안국사로 오르는 길목의 험준함을 읊조리고 있다. 지금이야 1989년부터 진행된 무주 양수발전소의 댐공사로 인해 900m의 옛 적상산성 안까지 도로가 구불구불 올라가지만, 그 옛날에는 허리를 꺾고 두 손 두 발을 땅에 붙이지 않고서는 들어설 수 없는 천연의 요새이라고 합니다. 위로 난 두 길을 굽이돌며 가파른 걸음으로 향하는 길은 구도자의 고된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구름 속 미로를 통해 보이는 비경의 아늑함은 마치 신선이 된 듯한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합니다.    설명은 전통사찰종합정보에서 퍼온것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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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5.12 16:37

    첫댓글 외발 자전거님 절간이 넘 조용해서 말그대로 절간이군요?

  • 작성자 08.05.12 18:09

    네 한겨울에 갔으니 조용하지요.. 초원님의 아름다운 맘이 부처님이심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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