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사막 풍경은 정말 아름답고 황홀하게
그려진다. 만약, <아웃 오브 아프리카>- 우리나라에서 개봉할때
논란의 여지가 많은 제목이었지만, 영화를 실제로 보지 않고서는
그 의미를 정확히 우리말로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는 아직도 의문
이다- 라는 영화를 봤으면,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비행
기로 아프리카의 초원을 날아갈때의 그 장관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사막은 모래밖에 없지만-가끔 가다 야자수에 오아시스, 그리고 낙타를
타고 가는 터번 두른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막은 여전히 거칠은 모래와
전갈만이 엉금엉금 기어가는 황량한,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도 한밤중에 나타난 모래바람이 차와 사람을 모두 삼켜
버리는 장면이 있다. 사막도 ,모래바람도 항상 있는 그곳에 있지만,
우리네 인간은 그곳까지 기어 들어가서는 빼앗고, 탈선하고, 죽어
간다... 슬픈 일이다. 어쨌든 여인네의 몸매같은 에로틱하고도 신
비로운 모래곡선을 따라, 우리는 10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사하라로
떠나볼까한다...
아마존(인터넷서점 www.amazon.com )에서 이 영화의 원작자
Michael Ondaatje 를 찾아보니, 그는 소설과 시집을 몇권 낸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 영화는 영화만큼이나 소설도 읽어볼만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혹시나 종로서적에서 찾아보니, 역시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나와 있었다. 모르긴 해도, 킵으로 나오는 (인도인인지 스리랑카인인지..)
인물로 미루어 보아, 영국과 피식민지국가의 인물군이 하나의 갈등요소로
충분히 등장했으리라 본다. 시간나면, 읽어봐야지...
이 영화를 추석특선이랍시고 DCN에서 방영하기에 단단히 각오하고
보았다. 사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비디오로 볼 기회는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태 제대로 감상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건, 무슨
이유가 있었던지 있었겠지만....) 이 영화를 이제사 보고서야 때늦
은 후회마냥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아마, 오스카마저 석권하지 않았다면,
자신있게 나의 베스트무비로 꼽고 싶을 만큼 말이다. 베스트무비라고
꼭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더욱 이영화를 아끼는 영화의 목록에
감히 추가하고 싶은 것이다. 로맨스, 금지된 사랑, 이룰수 없는 약속,
끝없는 기다림, 죽음, 소외, 고독, 역사...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가
다 녹아들어간 영화이다. 게다가, 이국적인 음악과, 적절한 매력으로
뭉친 배우.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는 매력의 요소들이다.
만약 , 이 영화가, 그 당시의 제국주의, 혹은 전쟁의 광기, 이교도간의
사랑만으로 채워져 있었다면, 난 보다가 주저없이 꺼버렸을것이다. 다행히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적 욕심을 전혀 내지 않고 오직 "사랑의 여정"을 택했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요, 미덕이요, 장점이다.
영화는 회상씬과 현재 이야기가 차례로 이어진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너무나 관능적인 사막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며, 쌍발기 한대가
추락한다. 그리고, 원주민에 의해 거의 타버린 형체의 생존자가 이태리에
위치한 군인병원에 호송된다. 자기의 이름조차 기억못하는 이 남자는 이제
단지 "잉글리쉬 페이션트"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다. 회상과 플래쉬
백으로 뒤쫓아가는 이 남자의 과거는 이렇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헝가리 출신의 백작 알마시 (랄프 파인즈)이다.
그는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에서 영국지리학회 회원들과 함께 북부 아프
리카의 지도를 작성하는 작업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느 학회의 자금
이었는지, 영국정부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비밀스런 작업이었는지 간에 사막에
모인 이방인들은 자신들의 교양과 이국의 정취를 맘껏 향유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동료 Geoffrey Clifton (Colin Firth)의 아내 Katharine을 보는
순간 숨이 멈춰버릴것 같은 전율을 느끼게 된다.(음..과격한
표현인가?) 그리고, 둘은 이내 금지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둘을 잇는
어떠한 감정은 쉽게 설명되어질수 없다. 랄프 파인즈의 이미지는 차갑고,
이성적이며, 때로는 이기적으로 보이기까지한 냉정함을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지성과 미모와 함께 충분한 자제력을 가졌던 캐서린은 급격히 그에게
빠져든다. 사랑을 한후, 알마시 백작은 매력적인 대사를 남긴다. (여자의
인후부에서 쏘옥 들어간 특정부위를 가리키며) "여기가 어디지? 앞으로 알마시
해협으로 명명하도록 국왕께 보고하겠다.."라고.. 나중에 친구가 가르쳐주는
용어는 정말 멋없게도... "쇄골절흔"이란다... (외워뒀다가 써먹어야지...^^)
전신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은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담당한 캐나다군 소속
간호병 Hana (Juliette Binoche)는 약혼자를 이 전투에서 잃는다. 그리고,
부대이동중에는 가장 친한 친구가 눈앞에서 폭격으로 죽어갔고... 한나는 왠지
모르게, 모든 기억을 상실하고, 가끔가다 노래만 흥얼대고 있는 이 잉글리쉬
페이션트에 관심을 갖게 되고, 곧 죽어갈 이 환자를 끝까지 지키기로 한다. 그래
위험한 부대이동 대신 폐허가 된 수도원에 피난처를 마련하여 전쟁이 끝나기만을
아니면, 알마시가 죽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한나는 이곳에서, 지뢰제거
임무를 맡은 인도인 장교 Kip(Naveen Andrews)과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잉글리
페이션트의 회복을 기다리던 (=죽음을 기다리던) 어느날 이곳에 Caravaggio
(Willem Dafoe)가 나타난다. 이야기는 이제 알마시백작이 어떻게 죽음을 앞둔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되어버렸는지를 드려내기 시작한다.
친구의 아내 캐서린과의 사랑이 깊어가고, 밀회가 잦아질수록, 둘은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제프리는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아끼는
쌍발기에 캐서린을 태우고는 알마시에게 돌진한다. 그 사고로 제프리는 즉사
하고, 캐서린을 중상을 입는다. 사막 한가운데의 매력적인 그 "수영하는 사람들의
벽화가 있는" 동굴로 알마시는 캐서린을 옮긴다. 중상을 입은 그녀 - 꼼짝도 할
없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알마시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가
가까운 마을로 사흘 밤낮을 걸어간다. 하지만, 경우 도착한 영국군 진지에서 그
스파이라는 오해를 사고, 잡혀간다. 그는 기차에서 탈출한다. 사막의 동굴에서
죽어가는 캐서린을 위해, 그는 마지막으로 배반을 생각한다. 그가 그 동안 그린,
모아둔 사하라 일대의 지도를 독일군에게 넘겨주고, 쌍발기를 얻는다. (<라이언일
구하기>에선 한명을 위해 여덟명이 죽지만, 이 영화에선 전쟁과 전혀 상관없는 여
하나를 구하기 위해 수천명이 죽어야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서 비난하
않는다. 이른바 "파워 오브 러브"이기 때문이다....) 그가 허겁지겁 날아왔을때
이미 캐서린은 죽어 있었다. 그녀의 사늘한 시체 곁에는 그녀가 죽어가며 써내려
슬픈 사랑의 이야기만이 남아있을 뿐..... 알마시는 타고온 쌍발기에 캐서린을
앉히고는, 연합군쪽으로 날아와서는 추락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잉글리쉬 페이션
된 것이다.
카라바지오는 원래 영국의 스파이였고, 그는 알마시가 넘긴 사막지도 때문에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두 엄지손가락을 잘리웠고, 그 복수를 하고자 알마시를 찾아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알마시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은 카라바지오는 마침
내 복수를 포기하고 만다. 킵은 떠나가고, 한나는 끝까지 알마시의 곁에서 그의
최후를 지켜본다. 그의 격렬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그렇게 끝난다.
이 영화의 음악은 Gabriel Yared가 맡았다. <베티블루 37.2>의 음악이라면 아마
이 영화의 음악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바하의 Aria From
The Goldberg Variations는 영화를 더욱 크래식컬하게 만든다. 한나가 (지뢰가
설치되어있는줄도 모른체) 고물피아노로 연주하는 이 곡은 전쟁에서 피어난 한떨
장미같은 부조화와 알수없는 멈춰선 시간의 공간감을 표현하고 있다. 감독 밍겔
원래 뮤지션이었다고 하니, 그의 음악성도 짐작할 수 있을것이다.
이 영화는 전쟁에 핀 슬픈 사랑이야기이다. 비록, 불륜과 죽음, 반역과 배신이
얼룩진 이야기이지만, 충분히 남녀간 사랑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그들
의 처지와 선택을 이해하고, 동정의 시선을 보내게 된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무국적성을 띈다는 점도 새겨볼 만하다. 영국인환자는 결코 영국인이 아니
으며, 캐나다 간호원은 끝까지, 캐나다인임을 내세우지 않으며, 인도인은 영국군
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목숨을 걸고 지뢰를 제거하고 있지만 말이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더욱 절망적이며, 이해가는 도피의 수단처럼 느껴진다
곧, 데이비드 린감독의 <아라비아 로렌스 감독판>이 극장에서 상영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 작품을 극장에서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고도, 즐거운
새로 생긴 극장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진 몰라도 요즘의
대한극장의 스크린은 좀 어둡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동네극장 수준은 아니고 뭔가 약간 어둡고 상대적으로
답답한 느낌이어서 확실한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느낌은 오늘도 여전히 빅히트 예고편까지 계속 낮는
데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시작하자 그 상대적 어두움이
상대적 밝음으로 바뀌는것 아닌가?홍채가 이제야 열렸
나? 영사기의 밝기를 좀 밝게 했나? 아니면 스크린과 영
사기간의 거리가 워낙 멀어서 그런가? 아니면 요즘 영화
와 아라비아의 로렌스 시대의 영화와는 뭔가 다른점이
있단 말인가?
알리의 첫 등장장면은 아주아주 긴 롱테이크인것으로 머
리속에 각인되 있었는데 다시 보니까 별로 긴것같지 않
다.그리고 정확히 말해서 아주아주 긴 롱테이크도 아니
었다. 하지만 롱테이크가 꼭 필름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
를 말해야 하는건 아닌것 같다. 알리의 등장장면은 비록
군데군데 편집되긴 했어도 그 장면을 롱테이크가 아니라
고 여기지 않는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저~~~편 사막의
지평선에서 아지랑이속을 뚫고 점점 형체를 분명히 드러
내며 검은 의상의 알리가 등장하는 순간은 유일하게 기
억하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장면이었는데 알리도 알고
보니 그리 무서운 놈은 아니었다는게 새롭다면 새로울지
도 모르겠다. 근데 왜 난 알리가 무서운 놈이라고 기억
하고 있는걸까? 진짜 무서운놈은 로렌스인데..나이때문
인가? 10대초에는 알리=무서운놈, 로렌스=주인공. 20대
에는 알리=뚝심 마당쇠, 로렌스=개성이 강한놈, 그러니
까 좀 미쳤다고도 볼수 있는 놈?이라고 영화보는 눈이
바뀌는걸까? 아니 이미 바뀌지 않았나?
새로운 감상이 또 있다면 유난히 여자가 등장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떠나지 않았다는거다. 이 경우에는
알리와 로렌스의 경우와는 반대로 내가 생각해도 좀 능
글맞은듯도 하고 시간이 흐르는것과는 반대로 외부의 힘
에 의해 내 정신연령의 시간축이 퇴행하고는걸 바라보는
듯했다.아니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건가? 퇴행같지만 실
상은 퇴행이 아니라 적응인가? 터키의 뒷통수를 때리기
위해 떠나는 남자들을 바라보는 실루엣의 여자들은 그래
서 더욱 감칠맛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 상황에서
아랍의 공주, 또는 알리의 여동생? 등등이 폼나게 등장
하는건 로렌스의 약간 광기어린 이미지가 유들유들한 이
미지로 180도 전환될지도 모르니까 어쩔수 없는 선택이
었을거다.그러고 보니 3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이것저것
갖다 붙이지않고 일관성있는 이야기를 전개했음에도 불
구하고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은게 오히려 새롭다.오히려
새롭다?. 요즘 아라비아의 로렌스같은 영화가 헐리우드
에서 만들어질수 있을까? 아니 이런 질문은 위험하니까
..최근에 그런 영화에 대한 기억이 있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또 뭐가 있더라?기억력이 시원찮아서 잘 생각이
안난다.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아라비아의
로렌스라.. 뭔가 영퀴방의 문제감이 떠오를것 같지 않은
가? 그럼 뭘 문제삼으면 영퀴방에서 소문이 날까?1. 스
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가 신봉한 영화 감독(이렇게 내면
구로자와 아끼라? 신봉이 좀 걸린다 . 발음이 좀 바보같
다.)1. 스필버그가 부활시킨 70미리 영화!(70미리하면
그순간 우수수수 떨어질 아라비아!.. 상상할 필요도 없
이 영퀴방 수준 모독감?) 하지만 그렇다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공통점이라고 막연하게
헤집은 이야기의 단순성과 일관성을 3시간 가까이 유지
한점을 갖고 영퀴를 내기에는 좀 그렇지 않은가? 영퀴는
집어 치워야겠다.
우물이 군데군데 등장해서 그런진 몰라도 사막이 사막같
지 않다. 하긴 찔금찔금 흘러나오는 그런 우물마저 없다
면 사막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겠나? 이건 서부영화때문
인가? 선인장을 짜먹는 인디안의 신비스러운 생명력과
건조한 열기로 이어지는 사막의 이미지가 아라비아의 로
렌스와는 다르게 느껴진다.아니 이부분에선 분명 서부영
화의 사막보다 약하다. 그렇다면 난 나도 모르게 가학성
음란자?가 되버렸단 말인가? 좀더 강한 사막의 악마성을
보여다오!?
스펙타클? 사막을 보여줘서 스펙타클인가? 모래언덕의
곡선과 끝없는 지평선이 스펙타클한가? 혼자 패션쇼하는
장면이 아주 마음에 들긴하지만 그 장면을 두고 스펙타
클한 느낌이라는 감상을 하진 못하겠다. 아니 스펙타클
했나? 또 모르지.. 35미리로 찍었다면 로렌스의 나풀거
리는 하얀 아랍 의상이 그렇게 바람에 휘날리지 않았을
지 모르는것 아닌가!?~ 그리고 지평선과 소실점이 보이
는 그런 넓디넓은 구도의 장면들만 스펙타클하다고 할수
있는건 아니지 않은가? 아니면 이 경우에도 영화에 대한
평가의 역사적인 흐름을 염두해두어야 하는걸까? 역사적
인 흐름 ? 애라이 잘 모르겠다.!
세가지 꼭 말하고싶은게 있다면 첫째, 70m/m라는것은 말로 표현될수없다
둘째, 대작이란것은 뜻만으로 알수없다. 마지막으로 명작이라는것은 머리로만
알수는없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설날이나 추석특집으로 누구든지 한두번은 봐왔을법한
그런익숙한 영화이며 비단 보지못했을지언정 수없이 떠들어대는 영화잡지를
통해 내용과 줄거리, 명장면등을 기억할수있는 교과서적인 영화이다. 그러나
대부분 교과서에 실린시는 분석만 해대고는 진짜 감상은 하지않는 우리 교육
특성상 명작이라는, 또는 교과서에 실렸다는 이유로 시외우듯 읊어대는
대접에 이미 충분히 질릴만한 영화이기도하다. 대한극장이 드디어 망해 그
커다란 극장을 부시고 작은 3개관으로 재신축한다는 이유만으로 걸리게 된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그 동기야 어찌되었던 커다란 의미를 줄수밖에없는
관람"행위"이다.
한때 이천명이 동시관람한다는것이 대단한 자랑이였던 대한극장의 그 낡고
바람부는 허허극장에서 놀랍게도 아침 조조를 보기위해 사분의 일쯤 극장이
찬것도 신기했고, 아줌마 아저씨들과 연인들 심지어 아버지와 딸이 같이
이 영화를 보러오는것은 정말 대작이며 명작의힘이아닐까? 중간에 잠깐쉬는
휴식시간도 벤허이후 처음인듯 (현재로부터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면)
세시간 넘게 보여지는 한장한장 명화같은 장면들의 연속과, 은근히 꼭, 물속에
잉크가 퍼지듯 살살 보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의미전달도 기가막힐뿐만 아니라
진지할수 밖에 없었던 동성애까지 아우르는 재주를 보면 역시, 대작만드는
감독은 뭐가 달라도 다를듯. 젊어서보단 늙어서 좀 더 멋진 피터오툴할아버지와
은근한 애정의 안광을 마구 뿌려댔던 남성미의 대표선수 오마샤리프도 점수로
따지자면 구십삼점 오. 앤서니 퀸할아버지 코가 젊어서 그렇게 날카롭고
인상적이였는지 새로왔다는, 여자가 한명도나오지않아 구설수에 항상
빠지게하는 이 영화의 매력은 정말 넓디넓은 화면과 화면속에 지평선, 사막
그리고 낙타와 정말 제목 그대로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호준
- 비디오로 또는 티비로 봤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을 위한 한마디 조언,
비디오나 티비로 본 영화와는 아주 다른 영화이니 같은영화로 판단해선
안될것이며 내용을 다 아니 지루하겠지란 생각만큼은 절대 하지마시길,
사실 뭐 솔찍하게 말하자면 제목과 감독이름만 알고 사실 보지않은
영화베스트텐의 상위권랭크영화임에 분명.
로렌스는 피를 싫어하고 분쟁을 혐오하는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이상주의가 꽃을 피웠던 곳은
그의 고향이 아닌, 유럽땅이 아닌, 사막이었다.
사막, 그 순결한 토양만이 이상주의의 순결함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주의는 고귀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상주의는 대상을 통해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만큼이나
이상주의의 실천자 스스로에게 일체의 오점을 허락하지 않는 결벽,
바로 그 결벽에 대한 자기도취의 함정을 내포한다.
이같은 함정을 피해 가게 하는, 혹은 이같은 함정에서 빠져나가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정치다.
정치에 투항했더라면, 정치라는 그 유서깊은 해법을 수용했더라면
로렌스는 영웅이 된 후에 겪게 된 인지적 불일치,
즉 자기분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몽상가였을지언정
정치가가 아니었고 야심가가 아니었다.
그는 영웅이 돼 버린 자신에게 위기를 느꼈고
영웅주의라는 황음(荒淫)에 빠져든 자신을,
터키군 장교에게 더럽혀진 자신의 육체와 더불어 용서할 수 없었으며
대의(大義)가 아닌, 개인적 증오로 변질된 전투를 더이상 정당화할 수 없었다.
사막의 깨끗함을 사랑했던 그는 실은,
자신의 깨끗함을 사랑했던 것인데.. 이제 그는 깨끗하지 않다.
깨끗함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사막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연소되고 만다.
그는 더이상 사막에 있을 필요가 없다.
이 영화에서 매혹적으로 그려진 사막은
이같은 이상주의의 형이상학을 담는 빈 그릇.
어느 이상주의자의 신기루같은 연대기를 관통하는
거대한 맥거핀이었음이 분명하다.
사막이 아닌 곳,
이 오욕의 땅에서 살아가는/살아갈 우리에게
삶은 운명적으로 크고 작은 이상의 좌절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예 이상을 품기를 두려워한다.
패배가 예정된 게임에 누가 패를 던지겠는가.
하물며 이상주의자가 되는 모험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이상이 열매맺지 못하는 땅, 이상이 꽃피우지 못하는 땅,
이상이 발아조차 하지 못하는 땅, 이상주의자를 등신으로 몰아치는 땅에서
어쨌든 우리는 살고, 또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허울좋은 핑계 앞에 이상은 실종되고
이상이 실종된 자리는 정치가 점령해 버린다.
정치는 이상이나 이상주의라는 이름만을 살려놓고 그것을 이용해 먹는다.
어느덧 우리는 이상이나 이상주의, 혹은 이상주의자를 신뢰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상을 버렸다.
그대신 의심한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그것은 지혜롭다, 정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피로하다. 피로하고 피로하다.
그래서 사막을 꿈꾼다.
로렌스의 이상주의를 받아주었던 그 순결한 땅, 사막을..
또다시 사막은, 프레임 안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프레임 밖의 영화, 삶이라는 이 속속들이 정치적인 영화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미혹시키는,
장엄하고 황홀한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제 목:'아라비아의 로렌스',오렌스. 관련자료:없음 [22482]
보낸이:김용언 (이요 ) 1998-11-19 23:27 조회:275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면서 감사해했던 3가지 사항. 내가 이 영화를
70미리로 볼수있다는 것, 그리고 칼라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 마지막으
로 유성영화가 발명된 것.
T.E.로렌스. 영원한 타자. 아일랜드 아버지의 사생아. 게이 성향을 지
닌 남자. 자신이 태어난 영국보다 아라비아의 사막에 보다 향수를 느
끼는 사람. 아라비아 족장옷을 입은 백인.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고 피
를 두려워하는 군인. 영화는 이 타자로서의 괴짜 천재가 어떻게 그의
이상을 실현했으며 동시에 그의 광기가 어떻게 발현되는지 결국 그의
이상적인 야심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4시간여에 걸쳐 숨막힐 정도로
황홀하게 보여준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이영화를 극장 화면으로 보
지 못한 이들은, 정말 불행하다)
1. There isn't written. - 정해진건 없다. 운명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자기의 운명을 바꾸는 몇 안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로렌스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이들
의 운명까지 바꿔놓는다. 점점, 그는 자기를 향한 아랍 민족의 사랑(그
러나 대부분 그것은 지독하게 단순하고 맹목적인 애정이다)에 심취하
면서도 그것을 증오하고, 아랍 민족의 독립 전쟁 와중에 벌어지는 살
상 행위를 역겨워하면서도 그것을 '즐기게' 되고, 자기와 각별한 사이
의 동료들을 스스로 죽여야만 하고, 그렇게 자기모순과 분열의 광기에
점점 빠져든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을 가졌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쥔 그의 주변 사람들 역시 그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어쩔 수 없는 모
순의 세상사인데, 로렌스의 순결함은 그것에 치를 떨고 결국 자포자기
하게 된다.
2. 사막은, 그 모래결은, 사나운 모래바람은, 거대한 태양은, 맞닿아 있
는 새파란 색깔의 바다와 하늘은, 터벅거리는 낙타의 발걸음은, 그리고
그위로 흘러 나오는 모리스 자르의 주제가는 지독하게 관능적이다. 나
의 이 경탄에 찬 시각은 역시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 비평가들의 그것
과 동일한 건지도 모른다. 그저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아랍이라는 나
라에 대한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써만 발견할 수 있는 이국적인 매력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쩔수가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막의 풍경은,
그 뜨겁고 건조한 공기의 흐름은, 나른하게 감겨온다. 로렌스와 알리를
따르는 무리들의 현란한 옷색깔과 울긋불긋한 깃발 색깔, 낙타의 몸에
휘감긴 색색가지 실들, 건물벽의 이국적인 무늬들, 그리고 로렌스의 푸
른 눈동자는, 단조롭지만 눈부신 사막색과 선명하게 대비되며 보는이
의 엑조티즘을 자극한다.
3. 로렌스와 알리의 관계는 명백히 동성애적인 것으로 보인다. 여자가
단한명도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도 에로틱함을 느낄 수 있는 몇몇
장면은 그 둘이 한 프레임 안에 존재할 때이다. 로렌스를 바라보는 알
리의 눈빛의 강렬함, 또는 알리의 검은 옷과 로렌스의 흰옷의 선명한
대조, 같은 쿠션을 베고 한자리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둘의 모습, 지칠
대로 지친 로렌스를 위해 물병을 갖다주고 자신의 잠자리를 제공해주
는 알리의 배려. 인간에게 형벌일수도 있는 사막이라는 공간이, 기존의
사회관습에서 벗어나는 게이들을 위한 '타자의 공간'인 듯, 그 관능적
인 사막을 배경으로 둘의 관계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선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신뢰와 애정을 보여준다.
4. 사이즈가 중요하다고 했다. 정말 그렇다.
------------------------------------------------------------------------------
제 목:[아라비아의 로렌스] Who are you? 관련자료:없음 [22488]
보낸이:이보나 (hodopr ) 1998-11-20 19:31 조회:292
1962년에 만들어진 작품. 70mm 슈퍼파나비젼으로 제작. 그해 아카
데미 7개부문수상.
미국 AFI 선정, 미국1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작품 5위.
이것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달고 있는 명예의 훈장들이
다. 그리고 이 위대한 작품은 이 훈장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
가를 지녔다.
나는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복원시킨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동시에 이 영화를 수입배급한 율가필름과 대한극장에 무한히 감사
하는 바이다.
비록 퀴퀴한 냄새와 때묻은 스크린을 청소도 하지 않고 이 영화를
상영하는 대한극장의 무지가 정말 사람을 화나게도 하지만 말이다.
이 세상에는 수 없는 명작과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닌 작품들이 있
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자신이 평가받아야 하는 위치에 놓여있기
도 하다.
이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그 이름만큼이나 비평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작품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바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한 개인에게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
다.
아주 어렸을 때 TV에서 이 영화를 본 기억만이 내 머리 속에 남
아 있었다.
그 장면은 로렌스가 터키군에 잡혀 모욕을 당하는 장면이었는데 동
성에게 강간당하는 의미를 함축시킨 이 장면이 어린 내게도 꽤나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 이유는 누군가가 내게 단체관람권을
건내주었기 때문이었고 더불어 세계에서 명작이라 불리는 영화를,
그것도 반드시 70mm화면으로 보아야 제맛이 난다는 영화를 얼마
후면 다시 볼 수 없으리란 의무적 관람행위(누군가 이 말을 적었을
때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이기에 꼭 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나의 기억 속에 있던 그 장면이 어떤 부분이었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었다.
실존인물인 T.E.로렌스의 일대기 중 일부분을 그린 데이비드 린 감
독과 시나리오 작가인 알버트 볼트는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신뢰
하지 못하고 그 자신이 저술한 자서전인 "지혜의 일곱기둥"을 기초
로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얼마 전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비밀파
일들이 영국에 의해 밝혀졌을 때 로렌스라는 인물이 주장한 사실들
의 일부분은 허위임이 밝혀졌다. 물론 영화에 나오는 부분들은 사
실에 입각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은 데이비드 린 감독이 한 인물에
대해 전설을 써내려간 영화가 아닐까한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화의 내용은 제 1 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비롯한 제국들의 싸
움 속에서 로렌스라는 한 인물의 특출난 재능이 어떻게 발휘되고
어떻게 무너지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서사적이며 영웅적인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이끄는 매혹은
분명 영화 테크놀로지로서의 거대한 스펙터클만은 아니다.
일반인들이 지니지 못한 지적능력, 용기, 현명함, 강인함, 무엇보다
그것을 끄집어내는 카리스마를 가진 영웅의 모습을 보고 매력을 느
끼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는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그 뛰어난 영웅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며 쾌감을 느
끼기도 한다. (나만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본능을 끄집어내는 능력이며 그리하여
동정심과 쾌감 모두를 만족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지닐 수 있는 힘이고 데이비드 린은 그 힘
을 적절하게 사용했다.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그것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한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그는 분명 자신이 속한 사회
에서 평범성을 지니지 못한 인물이었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처
럼 각별한 개개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삶에 어느 부분을 우
리는 공감하고 지지하며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영화의 테크놀로지는 무한히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상야릇한 매체의 본질자체가 발전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점에
도달했을때에는 선뜻 긍정을 표하기 어렵지 않을까.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영화매체의 최고점에 이른 작품이라고 감
히 말하고 싶다. 만약 이 영화를 제대로 된 크기로 보지 않았다면
난 평생 내 자신도 알지 못하는 불행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다
행히 난 그 불행을 비켜났다. 그래서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극장에서 이 작품을 두 번 보았다. 이번 주로 상영이 끝난다는 얘
기에 쫓기는 마음으로 한 주에 두 번 이 영화를 본 것이다.(3시간
이 넘는 영화를 극장에서 여러번 보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
다행히도 11월 말까지 연장상영을 한다고 한다. 이 영화가 완전히
극장에서 내리는 날까지 몇 번을 더 볼 생각이다. 이건 아주 정상
적인 반응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사족. <아라비아 로렌스>에 감독인 데이비드 린이 까메오로 출연
한다. 아시는 분들도계시겠지만 혹 이 위대한 감독의 모습을 한번
도 못보신 분들은 주의깊게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로렌스가 아카바 함락 소식을 전하기 위해 떠나서 수에즈 운하에
도달했을 때 저 반대편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인물이 있
다. 그가 바로 이 영화의 감독, 데이비드 린이다. 근데 그가 하는
대사가 참으로 재밌다. 그는 아랍복장을 한 로렌스에게 이렇게 외
친다.
"Who are you? who are you?"
이건 진정으로 감독이 로렌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BAT or JOK
------------------------------------------------------------------------------
제 목:[아라비아의 로렌스] 사막을 사랑하여, 관련자료:없음 [23804]
보낸이:이주현 (infini ) 1999-02-14 00:32 조회:146
마지막 70mm라고, 필청음반 권하듯 하는 평들을 읽어가면서
3시간 35분이라는 엄청난 상영시간만큼 오랫동안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줄 듯한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봐야겠다고 결심만 몇 번 하다가
드디어 영화관에서 내린다는 날 마지막 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The End가 떴을 때, 다른 어느 영화보다도, 정말 내자신이 영화 안에서
그 모든 장면과 사건들을 보고 겪고 온 기분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영화 가장 처음에서 보여주었던, 오토바이를 꼼꼼히 점검하고 길을 달려가
는 장면에서, 옛날 사람들은 얼마나 긴박한 현장감을 느꼈을까.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그가 바로 로렌스였고, 그는 자전거를 탄 아이들을
피하려다 그렇게 한 순간 세상에서 꺼져 버렸다.
아픔을 생각하지 않으며 손 끝으로 지긋이 눌렀던 촛불처럼.
괴벽스러울만큼 확실히 발음하는 말투와 유난히 선이 고운 몸짓. 로렌스는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일반적인 인간으로 분류되어 한가하게 지도 그리는
일을 하며 지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진면목을 알아본
드라이튼은 적극 그를 추천해 아랍으로 가게 한다.
아랍의 파이잘 왕자는 나른한 표정 속에 현인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의 마음 속에 세워졌던 위대한 아랍제국을 상상한다. 무질서와 싸움이 주
를 이루는 황량한 부족들을 이끌어가 결국은 주저앉게 했던 로렌스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그렇게 하도록 이끈 충동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낙타를 타고 몇날며칠을 고생스럽게 여행하면서도 50여명의 남자들은 사막처럼
묵묵하다. 사막은 말이 없고, 물이 없고, 문명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사막을 견딜뿐 아니라 그 위에서 방향을 잡고 변화를 가져오는 푸른 눈의
외국인 로렌스를, 알리는 찬찬히 바라본다. 개인적으로 알리가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한 순간도 비열하거나 초라한 적이 없었던, 검은 표범같은
야생의 우아함을 지닌 인물이다.
로렌스는 수모를 당하고 절망에 빠지지만 그 바닥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 다가온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붙들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품은 꿈에서 우러나는 선제권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되는 선지자라 믿고 있었기에
사막의 모래 회오리바람 기둥을 보고 미소지었고, 터키 마을에 들어가선
철벅거리며 흙탕 위를 걸었다. 물 위를 걸은 것이다.
하지만 넘지 못할 한계점에서, 자신이 스스로 쓴다고 당당하게 부르짖었던
인생의 페이지들은 자신의 손으로도 어쩔 수 없는 바람에 넘어가게
그냥 남겨두고 사막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의 끝이다.
그저 아라비아의 사막을 사랑한 한 몽상가의 모험담이라기에는 그 속에서
빛을 내는 의지가 너무나 강렬하게 비추어진다. 그가 깊고 넓은 변화의
실마리를 당긴 후였기 때문에 파문이 일어나 퍼져갔던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로렌스를 정말 사랑스럽게 그렸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정말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실제 인물에 푹 빠졌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이 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