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는 노동자들의 분신사고가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9월 11일 맥시코 칸쿤에서 wto각료회의 반대 시위 중 한농연 이경해 회장의 분신, 그리고 10월 17일 한진중공없의 노조위원장 김주익씨가 고공 크레인에서 129일 동안 시위하다 분신, 다시 지난 10월 26일 근로복지공단에서 비 정규직 철패를 위해 파업하던 이용석 광주 전남 본부장의 분신
연속되는 노동자들의 분신은 사회의 핫 이슈가 되었고,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분신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갔는가 생각하도록 합니다.
여기 故 이용석씨가 盧대통령에게 '쓰다만 편지' 내용을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노무현대통령님께
저는 목포에 사는 이용석입니다.
이글을 쓴 이유는 감히 제가 대통령에 또 한번의 근심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버지를 여윈 저에게는 대한민국의 아버지로써 감히 상담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며칠전까지만도 목포에서 공부방대표로 자원봉사를 하고있었습니다.
저희 공부방은 목포시에 거주하는 기초생활수급보호대상자 중학생자녀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공부방을 운영하고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편 부모나 조모들과 함께 생활하고, 생계문제로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주야로 일을 하거나 멀리 목포를 떠나 떠돌아 다니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직장생활을 하거나, 또는 주부 자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부방 운영 또한 일정의 후원금과 선생님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학생들의 생활이 경제적으로 부족하다지만, 여는 학생들 보다 꿈도 많고 활기차며 생각들도 대견합니다. 제가 그들을 가르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학생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현재 중1, 중2, 중3 해서 모두 30여명의 학생들이 있습니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여느 학생들처럼 학원은 가지 않지만, 항상공부방에 와서 선생님들과 같이 공부를 합니다. 그들이 학원에 가지못하는 경제력을 갖고 있고 물론 저희 선생님들 또한 전문 교사나 강사는 아니지만 학생들이 선생님을 위한 마음,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매우 돈독합니다. 그들의 친구로써 또한 보호자로써의 역할을 위해 항상 노력하는 선생님들께 너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지금 주어진 현실보다는 자기의 미래와 꿈과 앞으로의 자기를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전 학생들에게 항상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얘기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경제적인 차별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함께하는 기쁨과 슬픔을 무엇 보다도 중요하며 경제적인 차별에 대해 굴하면 안된다. 사람은 떳떳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학생은 순수해야한다. 경제적인 차이가 사람을 차별하지 못한다. 자기의 꿈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생활하는냐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자기의 꿈을 가지고 항상 생활해야 한다.
술취한 부모님들, 항상 냄새나는 할머니, 한칸방에서 자야되고, 어제까지만도 전화가되던 학생의 집전화가 연체로 인해 전화가 불통이되고, 어제였던 집이 또다시 이사해야하고, 그들에게는 정말 현실이며 이 삶자체가 절망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 학생들에게 항상 굴하지 않은 마음을 갖게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며칠전 전 그 공부방을 당분간 그만두기로 하였습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5월 한달간 정말로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나에게 이곳의 학생들의 사랑을 저버리고 제가 앞으로 해야할 일들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전 학생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배워왔습니다. 배우지 못해 중학생인데도 산수조차 못하는 학생들도 있고, 쉬운 영어 단어조차 모르는 학생들도 있지만, 우리학생들은 서로 사랑하며, 항상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것을 항상 저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제 자신도 차별에 대한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저에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는 근로복지공단 목포지사에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비정규직입니다.
2000년도부터 일용직으로 근무하다가 2002년 1월에 계약직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근로자를 위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무엇보다도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에 왔습니다.
물론 근무시간후에는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일이 많이 밀리는 경우 공부방 끝나고 다시 사무실에 와서 일을 하였습니다. 정말로 열심히 부지런히 일했고, 동료들도 모두 훌륭한 분들이며 하는 일도 맘에 들어 정말 좋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일입니다. 공단에서 일하는 동료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수술도 했고 무엇보다도 안정을 취해야 하며 치료도 덜 끝났는데 다시 사무실에 와 근무를 하였습니다. 수술한 부위에 붕대를 감고 .....
병가가 없어 월차를 사용하여야 하며 무급이라 어쩔수 없이 다시 출근하여야 했습니다. 이런일이 재작년에도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월차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경우가 저희는 46개지사 및 훈련원 어린이집등을 가지고 있어서 흔희 발생하는일입니다. 부단 목포에서 만의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몇 년이 흘러도 잘못된 것을 고칠려고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떠한 대책도 없고,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이라기 보다는 누구하나 관심이 없기때문입니다. 모두들 아파도 참아야 하고 출장이나 조퇴등을 빌미로 하여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아파서 병원에 가야하는데 규정에도 없는 걸 편법으로 사용해야 하기에 눈치도 많이 보입니다. 같은 직장에서 같은 업무를 하면서 이런 정당하지 못한 처우에 힘이 듭니다.
비정규직이라해서 일찍 퇴근하는 것도 아니고 늦게 출근하는것도 아닌데 근로조건이 모두 동일한데..... 제가 금전적이 차별 때문에 억울한 게 아닙니다. 같은 인간을 그것도 근로자를 위한 근로복지공단에서 최근 기업이미지에서 우리공단이 1등을 하였습니다. 자랑스러워 모든 지사에 프랭카드를 붙이고 자축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출근길에 그걸 바라본 제심정은 우울합니다.
저희 공단에는 천명이 넘는 비정규직이 있습니다. 정규직의 절반정도입니다. 정규직은 노동조합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임금협상을 하며 근로조건 개선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린 그걸 바라보면 언제쯤이나 우리의 이야기도 해주나 하고 기다렸지만, 허사였습니다.
사용자도 정규직노동조합도 돌보아주지 않은 우린 시대의 사생아란 말입니까? 우린 사업비예산에 재료비에 잡급으로 되어있습니다. 인건비가 아닌 잡급으로 그래서 사용자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유업무, 동일노동을 제공하고도 우린 마치 인간이 아닌 재료처럼, 필요한 기계로만 인식되어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전 부모님께 10만원을 드립니다. 회사에서 흔희 말하는 떡값으로 준 것이라고 하지만 제월급에서 준 것입니다. 명절이 차라리 없으면 합니다. 부끄러워서 가족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회사를 욕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 비정규직에는 가족을 모시고 또한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미혼이 저나 그 동료난 받는 혜택은 똑같습니다. 이 얼마나 평등합니까? 가족이 있는 직원에 대해 당장 생계를 유지해야하는 직원에 대한 아무런 혜택도 없으니까요.
노무현대통령님!
우리가 선택한 길이 그래서 우리의 일을 우리가 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3개월마다, 1년마다 계약을 해야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비정규직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제발 우리의 말도 좀 들어 주라고.
노동조합이 최선의 길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너무나 연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저희들은 열심히 일하며, 성실히 살아가면 우리를 알아주고 우리도 같은 동료들과 같이 웃고 행복해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아무도 우리의 얘기를 들어주지도 말해주지도 않습니다. 비정규직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많은 고심을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조합이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재계약이 안될 수도 있는 현실을 알면서도.
이제 우리는 말하고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근로자를 위한 근로복지공단이 내부 근로자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하지만 대화도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이사장을 만날려구해도 사용자가 아니라고 대화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비정규직관리세칙을 가지고 공단의 이사장이 아니라 지사장이라고.... 어찌 천명이 넘는 우리의 책임자가 이사장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럼 노동부장관인가요? 아님 정부입니까? 우린 사용자 주체도 없는 여기저기 사고팔리는 기계란 말입니까?
전 공부방을 갈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평등함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걸 가르쳐온 내가 이런 현실에 복종하여 참아왔습니다. 인간대접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어찌 학생들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을 가르치겠습니까?
노무현대통령님 제발 저의 고민을 들어주십시요.
현실을 참고 묵묵히 학생들에게 남아있어야 합니까? 아님 우리도 인간임을 외치며 우리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말해야 합니까?
전 학생들에게 돌아가고 싶습니다. 내 썰렁한 유머를 억지로 웃어주는 우리학생들에게.
옛말에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 열손가락에 들지도 못한다면.....
운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재계약이라는 악순환과 2회이상 근무평가시 하위권에 있으면
(끝)2003년 11월 3일 프레시안
여러분 이 내용을 들으시고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무엇이 그를 분신으로 몰고 갔을까요? - 사회적 모순, 불평등, 약자에 대한 무관심 - - -
물론 그들은 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일하고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계속된 편견과 고통과 탄압입니다.. 무관심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화나게 했고, 분신케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한가지를 더 생각했습니까?
만약 이용석씨가 당한 환경가운데 있다면 내가 있다면 나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만약 이용석씨가 당한 환경가운데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용석씨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이용석씨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본론 1:
우리 성경으로 가서 해답을 찾아 보겠습니다.
요 11: 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죽이기로 작정해 놓고, 어떻게 죽일까 계획하고 상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이 어떤 잘못이라도 저질렀을까요? 어떤 죽을 죄라도 저질렀을까요?
예수님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연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치료해주고 도와주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노력한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에게 돌아온 것은 그를 탄압하고 죽이려는 일들 뿐입니다.
사실 당시의 상황가운데로 가본다면 우리는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힘이 결코 것은 작은 힘이 아님을 발견합니다. 그 힘은 오늘날로 말하면 공권력입니다. 그 힘은 정치와 경제와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막강한 힘입니다.
그 힘은 군사를 움직일 수 있고, 재산을 강탈할 수도 있으며, 예수님과 제자들의 인권을 짓밟을 수 도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권력과 싸울수 있을까요? 싸울 수 없다면 분신해야 할까요? 자살해야 합니까?
아니면 어디 도망가서 숨어야 합니까?
자살하면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그 밖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도망가서 숨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요즘 사람들이 분신자살하는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물론 그들의 분신자살 주장은 합당하고 타당한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살하는 또 다른 숨겨진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사회적, 집단적 자살강요 현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살하는 자를 영웅시하고, 그에 속한 가족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고 그 일이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다는 무언의 요구들 말입니다.
여러분 만약 이용석씨가 그런 활동을 하다가 정부의 압력과 탄압 때문에 뒤로 물러서고 그 일을 포기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의 추종자들과 사람들은 그를 비겁한 사람으로, 매도했을 것입니다. 그의 주장과 그의 모든 삶이 거짓이라고 매도했을 것입니다. 결국 어느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까? 분신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예수님의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분신한다면 민중들과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그들은 예수님을 영웅시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신을 계기로 사회적 혁명이나 폭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그의 하는 일을 포기하고 도피하셨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겁자라고 매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주장과 가르침이 거짓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요 11: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리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그분은 물러나셨습니다. 유대를 물러나서 에브라임이라는 동리 근처의 빈들로 가셔서 거기 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은 무엇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분신을 선택하여 영웅이 되는 대신, 비굴하게 도피한 비겁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한 순간에 버리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비겁자의 길을 선택하신 것일까요?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론 2:
다시 54절을 보겠습니다.
여기 말씀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볼 두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빈들이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에브라임이라는 동리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는 에브라임이라는 곳으로 가셨을까요?
제가 4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행적을 추적해 보니 에브라임이라는 곳은 이전에 한번도 가신 적이 없고, 이후에도 한번도 가신 적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즉 유일하게 한번 예수님께서 방문하신 곳이 에브라임 동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상상을 해 봅시다. 왜 무엇 때문에 에브라임으로 갔을까?
유대의 지도자들이 모르는 곳으로 피하기 위해서 에브라임에 갔을까,? 그럴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유대 지도자들의 영향력 밖의 곳입니다. 에브라임은 유대지역이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 지역이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에브라임 동리 근처로 가셨을까?
저는 또 다른 이유를 찾던중 빈들이라는 단어에 주위를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구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성구를 검색해 보니 예수님께서 빈들에 거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14:13『[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여기도 예수님께서 요단 동편의 빈들로 가신 적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요단 동편의 빈들에 가셨는가?
14장 초반부를 읽어보면 침례 요한이 붙잡혔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침례 요한을 구해 주지도 않으시고 요단 동편의 빈들로 가셨습니다.
왜 가셨습니까? 헤롯과 헤로디아가 침례 요한 뿐만 아니라 예수님까지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은 헤롯과 헤로디아의 죄를 지적하거나 그들과 맛 서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상황과 동일하게 요단동편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마치 헤롯이 무서워 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읽어 본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왜 요단 동편의 빈들로 도망가셨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 14: 14-15,[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이 말씀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동편으로 가신 것은 요단동편의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왜 빈들로 가셨을까요? 이유가 있을까요?
막 1:42-45) 『[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여기 그 이유가 있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친후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건물도 예수님의 임재를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후로 예수님께서는 주로 마을 밖의 빈들이나, 동산, 또는 해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사역이 유대지역에서 막히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비겁하게 도망가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명의 완수를 위해서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역을 선택하시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전하지 못한 에브라임 지역을 선택하셔서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연거푸 기록된 이 기록은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무엇을 보십니까?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여기서 우리와 다른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다. 그분께서는 물러날때와 앞으로 나아갈 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물러남은 단순한 도피나 포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의 목적을 결코 포기하신 적이 없기 떄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더 큰 용기 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물러남은 용기없는 비겁한 행동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물러남은 2보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이며, 일 보의 후퇴도 단순한 물러남이 아닌 또다른 도전과 활동이며, 당신의 사역의 확대의 한 영역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론 3: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어떤 시대라고 생각되십니까? –
저는 물러설 줄을 모르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를 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평행선을 걷는 것 같습니다.
사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세대가 대결하고 이념이 대결하고 좌우가 대결하고 서로 물러설 줄을 모릅니다.
우리의 가정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부부들이 서로 물러 설줄을 모릅니다.
급기야 3가정 중 1가정이 물러설 줄 모르고 결국 이혼이라는 곳을 향해서 질주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물러설 줄 모릅니다. 오직 전진만 있습니다. 한번의뒤처짐도, 한번의 시험의 실 수도 인정되지 못하고,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모두 물러설 줄 모르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왜 이 사회는 이사회속에 속한 우리는 물러설 줄 모르고 앞으로 질주하기만 할까요? 왜?
그것은 물러서는 것은 용기없는 행동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영웅적 행동처럼 보입니다. 물러선다면 모든 것이 파멸하고, 모든 것이 망처지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러서는 것이 가장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승리할 수 있을까요? ”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추락할 것입니다. 분신할 것입니다.
만약 남편과 아내가 물러서지 않는 다면 그 가정은 파탄을 경험할 것입니다.
만약 이념과 이념이 물러서지 않는 다면 평화가 깨어질 것입니다.
만약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 물러 서지 않는 다면 그들은 모두 공멸할 일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물러설 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다 아프리카의 초원에 살고 있는 한 짐승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세링게티 평원의 누우때 - -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는 행진을 합니다.- 3000km 세링케티 평원에서 케냐의 빅토리아 호수 근처의 초원지대까지 달리고 또 달립니다.
그런데 그들의 실상은 어떤지 아십니까? 1년 안에 새끼들의 85%의 맹수의 밥이 된다고 합니다. 불과 15%많이 살아남는 다고 합니다.
예전에 양승백 장로님께서 저에게 자주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꽃을 피우기전에 꺾여 버릴 수 있다.
왜? 무슨 말인지 여러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나아가기만 한다면 결코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아가느냐 물러나느냐가 아니라, 목적을 이루고, 목표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왜 주님은 물러나셨습니까?
물러 설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행동은 복음입니다. 물러서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행동은 채찍입니다.
마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일할 넓은 분야가 있으므로 예수님께 대한 충성이 그것은 요구하지 않는 이상 주의 종들은 저희 생명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될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분신이 결코 마지막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이혼이 결코 마지막 선택이 될 수 없으며, 극한 투쟁과 주장만이 주님의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둘기 같이 순결하지만, 뱀 처럼 지혜가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이혼을 생각해 보자 – 이혼이 최후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과연 그 부부는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사용해 보았는가?
그것은 아님 –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최고의 노력을 경주해 보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이혼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환상이요, 착각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십니까?
어떤 사상을 가지고 계십니까?
막다른 곳에 이를 때까지, 갈때까지 가보자라고 생각합니까?
굴고 짧게살자고 생각합니까? 가늘고 길게사는 것은 수치입니까?
예수님이 바라는 삶, 그것은 굵고 길게 입니다. – 여기서 길게 라는 말은 그에게 맞겨 주신 시간의 양을 채울 책임이 각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이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필요없는 많은 투쟁을 겪지 않아도 되고, 많은 좌절을 격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요시야왕을 생각해 봅시다.
그가 몇에 죽었는지 아십니까? 39에 죽었습니다.
왜 죽었을까요? 물러설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대하 35:20--
당시의 국제정세 -
- 앗수르왕 앗수바니팔이 죽은 후 그의 계대를 잇는 아들들의 무능으로 앗수르 제국의 약화 (속국들에 대한- 지배력의 약화)
- 그때를 이용하여 신흥 바벨론이 새로운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고 일어서기 시작
- 바빌론과 메데의 앗수르 공격(614BC년 앗수르의 옛 수도였던 앗수르를 점령했고, 그후 2년후 수도인 나느웨 함락, 앗수르의 왕 피살(이미 20년전 선지자 나훔을 통한 예언, 나훔 3;1-7, 16-19)
- 앗수르의 반격 – 서북부 도성인 하란을 중심으로 전재, - 610년 다시 하란이 바빌론에 의해 함락, - 609년 다시 하란 탈환 시도(애굽과의 동맹)
- 앗수르를 돕고, 신흥 바빌론을 꺽기위해 애굽의 바로 느고가 출정
- 당시 유다는 반 앗수르적 입장 – 앗수르가 망하는 것이 유다 독립에 유익하다는 판단아래 요시야왕은 앗수르를 도우려는 애굽을 막기위해 므깃도에 진출 – 요시야왕의 전사( 므깃도에서 부상 – 왕국에서 죽음)
- 므깃도 전쟁으로 인하여 애굽은 앗수를 돕는 기회를 놓치고, 대신 수리아 지역을 점령
- 선지자들의 권면 – 또한 애굽왕 바로도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여러분 바울의 말년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왜 죄수로 고생하다가 죽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물러섬의 미학을 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가기전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행 21:7-14절 『[7]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결론:
타협과 물러섬은 다른 것, 우리는 앞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눈을 돌려 보면 좌도 우도 있고, 뒤도 있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
반대를 당할 때 양보하고 물러설줄 아는 미학이 필요합니다.
전진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전진이나 물러섬이 아니라 목표와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물러섬 또한 포기나 안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 큰 전진을 위한 새로운 활동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을 완전하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때문에 그분은 인류를 구하셨습니다. 성공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한 여행자가 말과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뻤으나 도중에 당나귀가 먼저 지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나귀는 동행하는 말에게 "견디기 힘이 드니 나의 짐을 조금만 덜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같이 친구삼아 가던 말은 당나귀의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힘에 지친 당나귀는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주인은 당나귀가 지고 가던 모든 짐과 죽은 당나귀의 털가죽까지도 벗겨 말의 등에 실었습니다. 결국 울상이 된 채 그 말은 그 모든 것을 지고 여행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 말 또한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지쳐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말이 한발 물러설 줄 알았더라면 어떠했을까? 그의 여행은 더 아름답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는 친구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의 여행의 목적지 까지 넉넉히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발 물러설줄 알아야 합니다.
그 물러섬은 타협이 아닙니다. 포기도 아닙니다.
물러섬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고, 새로운 사업이 있고, 새로운 일터도 있습니다. 새로운 삶도 있습니다.
교좀 나누자 - -
친구들 설교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첫댓글 좋은 말씀 감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목사님께서 우리집 심방(?)해 주심에 대해서는 무지무지 반가웠고 감사 했지~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