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인 산악회 열다섯 번째 구간은 큰덕골재에서 피재다. 영취산에서부터 계산하면 그렇다.
큰덕골재(290m) →2km→ 군치산(412m) →3.2km→ 숫개봉(496m) →2.2km → 봉미산(506m) →1.1km→ 웅치(290m) →2.9km→ 국사봉(499m) →1.6km→ 분기점(430 m) →1.2km→ 삼계봉(504m) →2.5km→ 가지산(510m) →3.2km→ 피재(200m)로 도상거리로는 19.9km다. 접근로와 도상거리에 대한 상수는 제외된 거리다. 날머리 피재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과 장평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다.
먼저 월간산의 이번 구간 소감이다.
「숫개봉을 지나 어른 키만 한 잡목을 헤치고 진행하면 폐 헬기장에 이른다. 이때쯤 웅치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미끄러지듯 내려오면 웅치다. 내장산 구간에서 영산 기맥 갈림길을 지났는데, 이번에는 또 하나의 기맥인 땅끝기맥 갈림봉을 지나게 되는 아주 의미 있는 구간이다.
엉터리이기는 하지만 이정표와 정상석도 이따금씩 만나면서 마루금은 다시 남진을 시작한다. 가지산 암봉에 이르러 앞으로 진행할 제암산 방향도 가늠하게 되면서 마루금 산행의 묘미도 만끽할 수 있다.
웅치에서 국사봉으로 가는 초입이 아주 중요하다. 즉 임도개설 공사로 인해 어수선한 길을 따르려다가는 마루금을 잃어버리게 되어 사면을 치고 올라가야 하는 등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여기서는 임도를 무시하고 바로 중앙의 마루금을 따라 진입하면 바로 길 흔적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야 잡목 숲에 간간이 달린 표지띠를 확인하며 진행할 수 있다.
깃대봉을 지나 운곡마을 고개를 지나면 헬기장에 표석이 박힌 게 보이는데 이곳이 땅끝기맥 갈림봉이다. 잘못 된 정상석과 이정표를 인식하여 진행하면서 가지산을 지나 ‘가지산 암봉’을 들르는 것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가지산 암봉에서 다시 되돌아 내려와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내려가기 시작해 왼쪽으로 경림마을을 보면서 진행하면 피재로 떨어진다.」
이번 구간은 계당 제암산 군으로 세 번째고 지역은 장흥군이다.
장흥군은 전라남도 남부에 위치하여 북방으로부터 동남방에 이르는 경계의 고지대로 화순군·보성군과 경계를 이루면서 득량만과 접하고, 안양·용산·관산·대덕·회진 등 5개 읍면은 해안선에 연해 있어 고흥군·완도군과 경계를 이룬다. 북부에서 서남방 경계는 산악지대로 영암군·강진군과 경계를 이룬다. 현재 행정구역은 3읍 7면에 294개리다. 작년 9월말 현재 19,994가구에 41,211명(남자 19,937명, 여자 21,211명)이 살고 있는 소도시다.
지난 구간 날머리부터 ‘군치산·숫개봉·봉미산·국사봉·깃대봉·노적봉’까지는 장평면과 화순 청풍면 경계에 있고, ‘삼계봉·가지산’부터 장흥군내(장평면과 유치면)로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이번 구간은 장흥군 장평면 단 1개 면을 걷는 특이한 경우가 된다. 장평면은 1,351가구에 2,450명이 거주하고 있다.
장흥군은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오랫동안 교통이 불편했다. 환경이 이래서 특별히 각광받을 만한 화려함은 없지만 전라도다운 정서를 가장 짙게 지니고 있다. 유물 유적을 구경하기보다 그곳 사람들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더 많은 것을 얻게 기대가 되는 곳이다.
장흥은 가사문학의 효시인 ‘관서별곡’을 쓴 백광홍과 그에 필적할 만한 시인이자 동생인 백광훈을 시작으로 귀향형소설의 전범인 이청준, 녹두장군의 작가 송기숙, 토굴에 거주하는 작가 한승원 등이 나고 자란 곳이다. 홈피를 보면 이곳에 태를 묻은 작가 100명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면적 대비 고급 승용차가 제일 많은 곳은 이천, 다방이 제일 많은 곳은 강화 이런 식으로 보면 장흥은 명실상부한 문향이다.
잘 알다시피 이청준 작품은 11개국 이상에서 번역되었고 한승원과 송기숙, 이승우, 김영남 등 작품도 해외에 소개되었다. 이렇듯 장흥문학은 세계로 발돋움하고 있다. 초중고 교과서에도 이들 작품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영연방 작은 나라 아일랜드에서 ‘제임스 조이스’ 등 문학의 거장들이 많이 태어났다. 장흥도 이럴 토양이 충분한 곳이라 생각된다.
이래선지 2008년 장흥에 전국 최초로 문학관광기행 특구가 조성되었다. 국비와 민자 286억 원이 들어가고 2개읍 1개면에 걸친 17만 5천 평 규모다. 문학현장 개발은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장흥군은 정남진이란 공인도 받았다. 군청에서도 이와 문학을 연결시켜 홈페이지에 탑재해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영세한 자치단체에서 보기 드문 발상이란 생각이 든다. 이 사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거듭 나서 지역과 문학 발전에 일조하길 기대해본다.
우연한 기회에 ‘이어령’ 선생님의 기러기로 상징되는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형의 새로운 정보사회가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돌아가는 기러기들을 보면서 나는 자유인 산악회 산우들과 종주중인 호남정맥 산행을 기러기 비행과 비유해 보는 엉뚱한 착상을 하게 된다.
선생이 책에다 이렇게 썼기에 더욱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기러기는 금은동의 서열로 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짐승처럼 한 마리의 보스가 지배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겨울이 되면 기러기는 V자 대형으로 남쪽으로 날아간다. 그들이 그런 대열로 날아가는 것은 앞에서 나는 새들이 날개를 저으면 뒤에서 따라오는 새를 위한 상승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 기러기 떼는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를 더 멀리 날 수 있게 된다. V자 대형으로 날면 길도 잃지 않고 힘도 아낄 수 있어 기러기들에게 있어서 그 모양은 그야말로 빅토리 사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가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금방 뒤따르던 기러기가 앞장선다.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러기의 대열에서는 앞장서려고 싸우는 법도 없고 꼴찌라고 하여 열등감을 갖는 일도 없다. 지도자를 뽑는 힘의 법칙이 아니라 순환하는 협력의 질서에 의해서 그들은 멀리 날 수 있는 것이다.
또 기러기가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대열에서 낙오가 되면 두 마리의 다른 기러기들이 그 기러기와 함께 대열에서 떨어져 그 기러기가 지상에 내려갈 때까지 도와주고 보호해준다. 같이 간 두 마리 기러기는 낙오된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함께 머문다. 그런 다음에다 두 마리의 기러기는 하늘로 날아올라 다른 기러기들의 대열에 합류하거나 자신들의 대열을 따라 잡는다.
탈락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평소의 기러기들은 서로의 힘을 북돋기 위해서 울음소리를 크게 낸다. 뒤에서 나는 기러기들은 앞서가는 기러기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기 위해서 큰 소리를 낸다. 이렇게 서로 돕는 슬기와 그 독특한 비행 기술이 없었더라면 기러기 떼는 매일 수백 킬로미터를 날면서 해마다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그 비행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기러기는 강화에서 원 없이 봤다. 간척지와 논이 많기 때문이다. 강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을 차면 바다에 빠질 정도로 적은 섬으로 알고 있기도 하나, 진도에 이어 네 번째로 큰 섬이다. 부속도서인 교동도 쌀만 가지고도 3년을 먹고 살고 살 정도로 농경지도 많다. 인삼을 비롯 화문석, 사자발 쑥, 순무, 벤댕이, 동어 등 특산물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거기다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마리산에서 뿜어나는 기(氣)는 한 사람의 운을 바꿀 정도다.
늦가을 강화 하점 뜰을 뒤덮은 기러기 떼를 해마다 일부러 찾아가 본다. 셀 수 없는 많은 수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끝없는 공간 무대에서 훈련하는 장면은 과히 장관이다. 2~3마리가 4~5마리 일(一) 자 대형으로 발전하고 이게 숙달되면 작은 사람 인(人)을 만든다. 하나 더 나가면 드디어 한 팀에 소속되기에 이른다. 교동도 뒤로 개성이 보이는 그곳에서 펼쳐지는 장중한 기러기 퍼포먼스를 한 번 이라도 느끼고 싶으면 올 가을 강화에 가보자. 강화도 시인 함민복은 기러기들을 이렇게 노래했다. 시인의 눈은 이랬다.
최제우/함민복
하늘에서 나무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어디로 가는 가 기러기 떼
八자 대형으로,
人자 대형으로
동학군의 혼령인 듯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 인자를 쓰며
人乃天
하늘을 자습自習하며 날아가는
기러기
저리 살아 우는 글자가 어디 또 있으랴
목을 턱 내밀고 날아가는 모습이 서늘하다
기러기가 떠난 요즘 내가 있는 평택시 안중읍 저녁 하늘은 온통 까마귀 세상이다. 오후 여섯 시 경이면 어김없이 수천 아니 수만 마리 까마귀가 공중을 덮는다. ‘펄벅’ 소설에서 메뚜기 급습 장면이나 태국 어느 도시 박쥐 수만 마리가 밤마다 동굴에서 나고 드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B29 지나간 흔적 같이 띠가 생긴다. 다른 점은 검은색이다. 그 띠가 머리가 핑 돌아 더 볼 수 없을 때까지 이어진다. 쉽게 보기 어려운 장관이다.
평택 쪽에서 오는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침에 그 까마귀 떼가 논밭을 덮고 있단다. 차로 다가가도 몇 마리 정도만 날 정도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많은 수의 까마귀들이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잘까가 요즘 머리를 아프게 한다. 강화에서 근무하던 시절, 주말마다 집으로 오면서 보던 김포 고촌 한강변 전깃줄이 끊어질 듯 앉아있던 까마귀 군보다도 몇 십 배 훌쩍 뛰어 넘는 숫자다.
까마귀는 한자로 오(烏)다. 자원(字源)을 보면 까마귀 형상을 본뜬 글자로 까마귀는 검어서 멀리서 눈이 보이지 않으므로 새(鳥)에서 한 획을 줄여 그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안중 인접 도시가 오산시(烏山市)이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산시 반경에서 ‘그건 너’ 이장희, ‘시인의 마을’ 정태춘 그리고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감동을 준 차두리 아버지 차범근이 태어났다. 오산에서 조금 떨어진 송산은 가왕 조용필의 고향이다. 까마귀가 노래를 잘 해서 그런가. 아니면 옛 화성군(華城郡) 출신들이니 모태 화성(和聲)인 들이라 그럴까.
#2.
이번엔 이형도 팀장의 안내 문자를 보고도 깜박해 지난 금요일에 겨우 참석을 알렸다. 전날 잠이 들기 전 문자가 들어왔다. 정상교 회장이 보낸 “영호 동지 이번 낙동 참석하시지.”다. 낙동 호남을 의심해 볼 틈 없이 “예”하고 답을 하고서야 알았다. 아침 일어나자마자 이 팀장에게 “미안 깜박 참석” 문자를 보내니 바로 답이 왔다. 좌석 없이 입석으로 갈 뻔 했다.
지난 밤 패트병 재활용은 절대 금하라는 텔레비전 건강 프로그램을 보게 된다. 지금껏 물은 2리터 패트병을 재활용해 왔다. 출발일 일찍 당산동 아웃도어에서 들러 물 병 하나와 술병 하나를 샀다. 바로 나오지 못하고 이곳저곳 기웃대다 결국 배낭 고정 주머니 하나를 더 샀다. 견물생심이다. 이러다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문 팀장 님이다. 어깨를 툭 쳤다. 순간 놀라면서 웃는다. 버스에서 물으니 옆에 계셨던 늘씬한 분은 사모님이란다. 이래서 문 팀장과는 하루에 두 번 만나게 된다.
보름에 한 번 정맥 나서는 날은 이상하게 여유가 없다. 간식 준비하고 그날 상황에 따른 짐 꾸리는 일 외에는 별로 하는 일 없이 시간이 흐른다. 볼일을 봐도 괜히 쫓기는 기분이다. 점심 식사 후 억지로 잠을 청하다 별 효과가 없어 옷을 갈아입고 낙원상가로 향했다. 평택에서 부탁한 기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자주 다니는 악기점에 들어서니 빈 안주접시와 병이 몇 개 놓여있다. 옆에서 이미 불콰한 두 분이 기타를 튕기고 있었다. 기분이 꽤들 좋아 보였다. 사장님과 동년배로 보이는 분들이다. 그러면 나보다 10여 년 선배님이다. 전에 같이 음악을 하던 이들이 길에서 우연히 만나 여기까지 왔단다.
얼떨결에 인사를 나눴다. 추가로 주문한 술과 안주가 온다면 무조건 앉으란다. 오른 분위기는 식을 줄 몰랐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던 노 군인의 말대로 곡목만 대면 즉각 연주를 한다. 5~60년 대 주옥같은 노래가 거침없이 나온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인다.
배달된 안주를 놓기도 전에 빈 잔이 온다. 종이컵에 소주를 하나 채워주기에 몇 시간 뒤 산에 간다는 사정을 말하고 막걸리를 가지고 왔다. 후래자지 삼배란 식으로 계속 따라준다. 거절할 분위기도 힘도 없었다. 아니 밤에 버스만 타지 않는다면 오히려 내가 그들을 붙잡고 싶을 정도로 정도 흥도 다 가지고 있는 분들이다.
빈 담뱃갑이 보이기에 슬그머니 일어나 한 갑을 사다 전하니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하면서도 앞에 반듯하게 놓는다. 그러고 나서 다시 기타를 잡더니 손가락이 더 빨라지고 곡목도 다양해진다. 제목만 알던 것도 여러 개 나왔다. 희한한 건 그들이 그런 노래들을 합창한다는 거다. 한 마디로 멋이 있었다.
나도 막걸리 병이 바닥나자 소주를 받기 시작했다. 눈은 연신 시계를 보면서. 5분만 더 10분 만 더 하다 결국 8시에 일어났다. 나를 따라 나오던 사장님이 옆 식당에다 계산을 하려한다. 얼른 다가가 지갑을 꺼내니 한사코 계산을 막는다. 실랑이 끝에 이러면 다시는 오지 않다는 억지를 부리며 낸 술값은 1,2차 다해서 만 육천 원이다.
이런 술자리가 요즘 나이든 사람들의 현 주소다. 문에 서있던 기타리스트가 말한다.
“아우, 다음에 시간 내시게.”
“예, 무슨 말인지”
“내가 한 수 가르쳐주려고.”
갑자기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했다. 30여 년 만에 다시 잡은 기타다. 차츰 손이 풀리면서 개인 교습도 알아보고 인터넷도 드나들고 있던 차에 기회가 이렇게 다가왔다. 만남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만남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미국에 가면 애들도 영어하고 홈리스도 양담배 핀다고 낙원동에서 만난 누구면 악기를 제 몸 다루듯 하나 보다.
산과 기타 선생님 등장 사이의 갈등이 행복했다. 이럴 땐 묘수를 부리면 안 된다. 정석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인사를 정중히 드리고 종로3가 3호선 지하철에 올랐다. 이번 토요일은 이런 만남으로 시간이 시속 100km로 지났다.
까치산역에서 신도림 간선으로 갈아탄 시간이 9시 20분이다. 내리다 장의규 님을 만났다. 서두르는 나와 달리 시간이 충분하다는 그에겐 늘 그런 여유가 있었다. 성격만 놓고 보면 나는 소양인이고 그는 태음인이다. 겉모습이 완전 바뀌었다. 오늘은 산에서 인연을 맺은 지인들과 우연한 만남이 두 차례고 기타선생님도 만났다. 로또 복권이라도 살걸 그랬다.
그러나 복은 한 번에 오지 않는 법이다.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오전까지 보기 드문 한파예보가 이럴 때 맞았다. 이번 겨울 산행은 이렇게 지나는 가 했더니 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음양오행을 봐도 두 가지가 한 번에 동시에 좋은 수가 없다. 간이 좋은 사람이 폐도 좋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다시 신도림역이다. 부지런한 몇 분이 벌써 자리하고 있다. 아직 시간이 남아 낙원동에서 산 담배를 만지작거리다 내렸다. 요즘은 대놓고 담배를 물기도 쉽지 않아 벽을 바라보며 몇 모금 빨았다. 이런 청승을 떨지 말자면서도 나도 모르게 이러고 있다. 이러는 내 뒤로 변 사또 님과 오키짱 님이 지나간다. 출발 전에 너와나 님이 택시에서 내린다. 그러면 갈 때가 된 거다. 자리를 잡았다. 대현 형이 조용히 옆으로 왔다.
“요번 건강진단에 당뇨가 나왔다.”
“뜻밖이다.”
“나도 놀랬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이런 결과가 나와 충격을 받았다. 한 대장은 동남아에 간 모양이다. 3월 14일 보기로 하자.”
추위가 예보되었음에도 낯익은 얼굴은 다 보인다. 제사를 지낸다는 블랙홀 대장이 보이지 않아 섭섭했지만 그게 우선이다. 거기다 그는 장손에 장남이니 더 그래야 한다. 잘 모셔야 복이 들어온다. 하늘 밖까지 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달리 동양 특히 유교에서는 내세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4대 다시 말해 한 120여 년 잘 모셨다 그 혼마저 보내드리는 게 유교적 세계관이다. 직설적인 어투로 듣는 이를 시원하게 하는 도올 선생의 제사관이다. 그에게 제자가 물었단다.
“선생님 내세를 어떻게 보세요.”
“야 이놈아, 지금 사는 것도 모르는 데 거기까지 어떻게 아냐.”
양재에 도착하면 이 팀장이 차에 올라 웃으며 한 바퀴 돈다. 그런 이 팀장이 버스에서 인사를 나누고 내리더니 전화 받는 표정이 굳어있다. 구정을 기해 담배를 끊기로 한 정상교 회장님과 서초구청 흡연구역에서 담배 한 대 피고 올 때까지도 그러고 있다.
“뭐가 그리 심각한가.”
“사당에서 회원 한 분이 차를 놓쳤단다.”
“기다릴 거 아닌가.”
“당연하다. 택시타고 오라고 했다.”
참석만 달랑하는 나는 이럴 때가 제일 미안하다. 단체에게 책임을 맡는다는 게 이런 저런 식으로 마음고생이 심하다. 그걸 알면서도 요즘 컨디션을 이유로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는 나도 솔직히 할 말은 없다. 다시 한 번 이 팀장을 포함 임원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이번에도 백양사 휴게소에서 생리조절에 실패했다. 아침 식사 전 자연스레 해결되는 게 왜 배낭만 지고 나오면 이런 건 지 누가 시원하게 말을 좀 해줬으면 한다. 아니면 다들 이래 그러려니 하며 지내는 건 지. 들머리에 내린 시간은 3시가 조금 넘었을 거다.
내리니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바로 옆으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다. 일출 전 지리산 천왕봉에 설 때마다 당당하게 받아들이던 강풍이 요즘엔 두려움으로 느껴지고 있다. 왜 일까. 완주에 대한 기대감도 반감된 지 오래다. 늙어간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건 매를 벌기 위해 스텝 밟는 거다.
지난 산행 때 자다가 차를 놓친 석규 님도 움츠리고 있다. 그 역시 건강진단 결과 무리하면 안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를 제외하곤 다들 태연하게 출발을 기다린다. 거센 바람이 멈출지를 모른다. 출발 전 이 팀장의 멘트가 생각나 석규 님에게 다가갔다.
“버스로 조금 더 가자.”
“그러자.”
“너와 나 님께도 말 하겠다.”
다시 버스로 올랐다. 스타일이 구겨져도 어쩔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미 내려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정 회장에게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너와나 님과도 잠정적인 대화를 마쳤다. 최귀철 대장이 진 짐을 어떻게 할까 고민 중에 석규 님이 결정하였는지 가겠다는 의사를 표한다.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리니 출발 중이다. 와중에 출정식도 마친 모양이다.
바람이 거센 길을 나섰다. 들머리까지는 임도다. 얼마 걷지 않아 앞서던 정 회장을 만났다. “바람이 엄청나다”니까 “바람도 숨을 쉬기에 태풍이 아니면 바람은 멈춘다.”고 한다. 그 말이 인상 깊었던 지 옆에 있던 너와나 님이 특유의 톤으로 동의를 한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추풍령 고비마다 한 많은 사연”
이번에도 구름과 바람을 바꿔서 정 회장이 노래를 시작한다. 뒤서던 일행 몇이 따라 부르니 발걸음이 가볍다. 노랫소리가 끝날 무렵 다시 ‘닥터 지바고’에 대해 말을 해 준다. 매서운 바람이 불러낸 모양이다. 야구에 관한한 컴퓨터보다 빠르다는 김성근 감독처럼 정 회장은 숲 속을 지날 때 머릿속에서 이런 식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걸 여러 번 봤다.
나는 이번 산행에서 새로 구입한 엘이티 헤드랜턴을 착용했다. 땅바닥 자갈 하나까지 대낮처럼 보인다. 등 하나가 몇 개를 능가할 정도로 밝아 오히려 부담이 느껴진다. 단잠에 든 산 짐승이나 식물들에게도 해가 미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던 게 두어 시간 정도 지나자 밝기가 반으로 떨어지니 여명 바로 전엔 무용지물이 되었다.
늘 두 개를 가지고 다니면서 만약을 대비하다 전기 소모가 적다는 엘이디를 그대로 믿고 하나만 가지고 온 대가를 톡톡히 받았다. 후기를 마치는 대로 구입처를 찾아가 따져봐야겠다. 하기사 조그만 시골 전기가게에서 산 나도 책임은 있다. 이게 컨디션에 비해 여명 전까지 뒤로 쳐졌던 변명 아닌 변명이다.
정 회장은 평소와 달리 맨 뒤에서 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아니라 심하면 기다릴 정도다. 몇 번을 이래도 말이 없다가 결국 왼쪽 눈을 불어달란다. 이유를 물어보니 나뭇가지에 눈 주위가 부딪치면서 작은 입자 하나가 들어갔단다. 어둠에도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었다. 이러니 이번 초반부는 대화할 시간이 없이 서로 간격을 두고 마냥 길만 줄여 나갔다.
군치산을 한참 지났다 싶어 오르는 봉우리마다 혹시 숫개봉(자동으로 수캐봉으로 변해 시간이 걸렸음)인 가 해도 그냥 무명봉이다. 박 박사가 준 고도표 대로 하나 오르면 하나 내리는 봉우리가 이번 구간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에 누가 이런 걸 빨래판 구간이라고 했었다. 이번 구간에서 개, 곰, 봉황새를 만났다. 봉황새를 맞으러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몰려오진 않았을까.
어느 봉우리 중턱에서 나무를 한 손으로 잡고 사정하는 이가 하늘비 님 이었다. 많이 지쳐 보였다. 지난 구간부터 힐링을 택하더니 이리 변해가나 했는데 나중에 보니 무리를 해서 이번 구간에 참석을 한 거였다. 얼마 가지 않아 정신없이 왔다는 너와나 님과도 만났다. 이런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에 내가 오히려 부끄러웠다. 다음부터는 좀 무리를 해서라도 앞에서 한 번 걸어봐야겠다. 매번 이런 식으로 기록을 남기기가 이젠 부끄럽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 달리기에 인간이다.
봉미산 정상에 오르니 구름 사이로 벌건 해가 보인다. 작은 표지에서 사진을 찍고 보니 너와나 님과 하늘비 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새 내려간 모양이다. 정 회장과 정상 언저리로 가니 산 아래 신비의 세계가 펼쳐져있다. 사람이 가슴으로 느끼는 만큼 그려내는 사진기가 있다면 하는 아쉬움을 주는 완벽한 회색 톤의 담채화다. 이래서 지체하는 시간이 좀 길어졌다.
곰치로 내리기 직전 앞서던 두 사람과 만나 식사를 하고 있는 비닐하우스로 들었다. 벌써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이들도 여럿 보였다. 내리는 눈이 세찬 바람과 만나 산행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날리는 각도가 땅과 평행을 이룰 정도다. 그들은 그 눈발 속을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고개만 숙였을 뿐 흔들림은 조금도 보기 어렵다.
농사철이 지나고 한겨울을 지낸 비닐하우스답게 입구가 휑하다. 쓸모를 다한 농사용품들도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다. 그 틈새를 찾아 삼삼오오 식사를 한 흔적이 그냥 남아있다. 개 두 마리가 새로 온 침입자들을 향해 떨어져 짖는다. 숫자를 보고 그러는지 옆에 오지 않고 소리도 크게 지르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출발 하려던 석규 님이 다시 들어온다. 추위에 오래 노출되다 보니 몸에서 슬슬 신호가 오는 모양이다. 권하는 술과 따뜻한 떡국도 손을 들어 마다한다. 후행들과 함께하거나 아니면 여기서 접었으면 하는 표정이다.
변 사또 일행이 떠나면서 요즘 구성된 힐링 팀만 남았다. 산행 중 어디선가 한 번은 이렇게 남는 것도 묘한 현상이다. 이번엔 아침 식사 자리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일차 요기를 마치고 후식으로 곡차를 들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친다는 말은 없기에 나도 식사는 뒤로하고 빈 잔을 내밀었다. 도라지 술은 이미 동난 모양이고 신작로 대장의 마가목주가 남아 있었다.
오기 전 새로 구입한 간이 술병에서 따른 술이 연보라색이다. 그러면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다 버리면서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등산 전문점에서 판매하는 걸 믿고 산 것이 이 모양이라 더 그랬다. 이 제품은 반품도 되지 않는 거다. 그래도 한 번은 따져보려고 다시 배낭에 넣었다. 헤드랜턴에 이어 두 번째다.
이번에도 강화에서 홍어 삭힌 게 왔다. 가운데 앉은 내 앞에 두고 두 편으로 나누다 땅에 흘렸다. 불고 선생이 추위에 손을 떨기도 했지만 1회용 도시락 뚜껑이 감당할 무게가 넘어섰기 때문이다. 아까워 흙이 조금 묻은걸 물에 헹구는데 정 회장이 그냥 두라한다.
너와 나 님이 꺼낸 돼지불고기를 익혀 남은 술을 비우며 간단히 속을 채웠다. 커피를 나누며 진행을 논했다. 요즘은 금강산도 식후경이 아니라 잘 먹고 나면 꾀가 나기 시작한다. 밖에는 아직도 세찬 바람이 불고 좁쌀만 한 눈보라가 시야를 가린다. 이러니 꼬리를 내리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도 언 듯 들린 거 같다.
증세가 심해진다는 석규 님이 혼자라도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니 너와나 님도 거기다 한 표 던진다. 이제 전반부를 마쳤으니 10여 km를 걸었다. 여기서 두어 명만 찬성하면 접을 수도 있다는 분위기로 흐르고 있었다. 모처럼 맞는 추위와 눈보라 탓이다. 서로 눈을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질 무렵 정 회장이 결심한 듯 말을 한다.
“너무 이르다. 땅끝기맥 분기점까지 일단 진행한다. 준비해라.”
이래서 저체온 증세까지 보이는 석규 님과 늘 준비된 너와나 님이 하산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 때 무전기에 “비닐하우스 주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는 말이 울렸다. 주인이 개인택시를 한다기에 대가가 자연스레 치러졌다. 겉돌던 강아지 두 마리에게도 남은 걸 치울 기회가 주어졌다. 이러려고 일부러 조금씩 남겨뒀다.
곰치에 있는 이정표에 가지산까지가 6km다. 이 이정표 숫자가 엉터리라 진행하면서 몇 번 당황했다. 이런 건 빠른 시간 내에 개선이 필요하다. 눈은 날리는 정도라 쌓이지 않았어도 낙엽이 덮인 길 아래는 얼음이 그대로 있어 가끔 혼이 났다. 날이 흐려 시야는 한정되고 잎새 하나 없는 도토리나무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능선을 다시 여러 번 오르고 내렸다.
“짐 언제 비워주실래요.”
하늘비 님이 몇 번 이 말을 했다. 처음에는 과일을 나누자는 말로들 이해하고 듣는 이들은 그저 고맙다는 말로 대신했다. 어느 쯤에서야 그게 족발인지 알았다. 그것도 큰 거였다. 나도 가끔 귀가 때 들고 다녀 무게를 알고 있는, 대식가 블랙홀 대장이 야식으로 즐겨 먹으며 양에 만족한다는 그 족발 크기다.
가만 그렇다면 그 무게가 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전날 피곤도 피곤이지만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 무게를 지고 왔으니 너무했다. 너와나 님처럼 요령 있게 흑기사를 부르지도 않고 이제까지 이런 말을 조심스럽게 되풀이 하는 걸 건성으로 듣던 소위 남자라는 친구들이 야속하기도 했을 거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 아니 소통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결국 노적봉(露積峰, 430m)까지 왔다. 정 회장이 2km 남짓 가면 된다던 그 노적봉이다. 감각으로 느끼기에도 그 거리는 훨씬 넘었을 거리다. 지금 지도를 다시 봐도 4km는 족히 되고도 남을 거다. 정상 언저리에 앙증맞은 화강암 표석이 있다. 눈의 피로도 있었지만 페인트가 떨어져간 글씨라 일부러 읽기가 싫었다. 와서 다른 자료를 보니 내용이 ‘호남정맥과 땅끝기맥과의 분기점, 이곳에서 해남 땅끝까지 도상 117km 시발점’였다, 2002년 12월 8일에 세웠다.
노적봉에서 정상주를 하기로 했었다. 또 하늘비 님의 수고도 여기서 덜기로 했기에 자리를 살피고 있을 무렵 “삼계봉 10분 지나면 묘지가 나온다. 거기에 칠면조 고기를 달아놓았다”는 무전이 왔다. 지도를 보니 삼계봉은 지척이다. 의견이 일치되었다. 누구 하나 아야 소리 못하고 다시 그 무거운 배낭을 들었다.
다시 출발하려는 순간 내 몸에 허기가 몰려왔다. 10분이라는 말에 긴장이 풀렸나 보다. ‘대연 형’이 긴장하고 있는 당뇨 증세가 나에게도 오는지 보통 허기가 아니었다. 다리가 휘청대고 속에서는 무엇을 급하게 원했다. 아침식사 자리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안주삼아 이거저거 몇 번 집은 게 다였다. 당뇨가 아니라 에너지 고갈로 판단하고 주머니에 있는 걸 모두 꺼내 구겨 넣었다.
순식간에 보충하니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 삼계봉을 지나고도 그 10분이 꽤 길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조금 멀다거나 서너 개란 표현유의 그 10분이 분명했다. 오죽하면 삼계탕 생각이 나면서 입에 침이 돌았을까.
앞서는 일행들을 빤히 보면서도 거리 차이는 점점 길어졌다. 앞으로도 분명히 이런 일이 또 생긴다. 장거리 산행을 시작하던 초심으로 돌아가 모든 걸 정석대로 해야겠다는 걸 곱씹으며 걷다보니 그 묘소에 비닐 천막을 치는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길었던 10분이었다.
산에 다니면서 벼라 별 묘소를 보았어도 이번은 또 다른 경우다. 능선에 묘를 썼다. 아무리 봐도 안정감이 없다. 진행형인 길에 있다. 거기다 들어오지 말라며 철선으로 경계까지 지었다. 그러면 후손이 다니고 있다는 말이다. 덕분에 비닐 치기는 좋았다. 철사에 매달린 칠면조를 내렸다. 생물로 알았고 족발도 데우려고 버너에 불을 붙이는 여유를 보였다.
드디어 족발이 나왔다. 거기다 야채, 동치미, 상추까지 평시 배달되는 포장 그대로다. 적은 배낭은 이거 하나만 다 차겠다. 주린 배도 배지만 빠진 기 보충을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러며 먹는 족발 맛을 누가 알까마는 손톱만한 조각까지 다 집어먹었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족발이란 단어를 잘 보자. 족은 다리 족이고 발도 다리의 일부다. 이중어법이고 중어법이다. 이를 ‘한자어가 8,9할 점령했던 시절에도 한국인들은 자신의 말을 일방적으로 내주지 않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동해라고 하면 이미 바다란 말이 들어가 있는데도 동해 바다라 하고, 초가에는 집 가(家)가 들어 있는데도 초가집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본말이 들어오면 ‘모찌’라고 하면 될 것을 ‘모찌떡’이라고 하고, 영어가 들어오면 일본처럼 ‘깡(캔)’이라고 하지 않고 통을 붙여 ‘깡통’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는 역전 앞, 라인 선상, 매교 다리 등 관심을 가지고 보면 얼마든지 있다.
불고 님이 꺼낸 막걸리가 비기도 전에 강화 님이 야구장 용 미니 소주를 꺼냈다. 안주삼아 다시 칠면조로 손이 갔다.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먹어 댔다. 강화 님은 산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마지못해 권하는 술 한 잔 정도 소화할 발전은 했지만, 내가 알기로는 이제껏 술 마신 일이 없는 사람이다. 너도 나도 배낭에 남은 게 다 나왔다.
커피가 없어 망정이었지 구실만 있으면 길게 머무르기 딱 좋은 분위기다. 추위는 이제 어느 안중에도 없을 정도였다. 다시 의견을 나눴다. 상황을 보니 완주까지는 시간이 부족했다. 아쉽지만 장고목재로 내리자고 했다. 무전을 날리니 가지산에 있단다. 머지않아 보이는 암봉이 가지산이다.
장고목재에 내리니 이정표가 복잡하다. 2km 남짓이 지금 산우들이 걸어가고 있을 가지산(迦智山)이다. 오기 전엔 가지산까지가 일차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여기서 접기로 해 미련을 버렸다. 대신 작년 9월호 월간산에 소개되어 있는 가지산을 요약하며 마음으로 걸어 본다.
「해발 510m에 불과한 장흥 가지산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남쪽 계곡에 깊숙이 자리 잡은 보림사(寶林寺)의 위상 때문이다. 지금은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전락해 옛 영화는 간데 없지만, 보림사는 8세기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된 천년 고찰로서 선종(禪宗)을 태동한 절이다.
보림사 대웅보전 앞에 있는 약수는 ‘한국의 명수’ 대접을 받는다. 절 관계자는 대웅보전 뒤에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150~300년 수령의 비자나무가 약수 맛에 영향을 준다고도 말한다.
보림사 역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전각이 불타고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어 큰 마당이 더욱 비어 보인다. 하지만 보림사는 ‘보물의 숲’이다. 보유 문화재로만 치자면 경주 불국사(국보 3점, 보물 5점, 도 유형문화재 1점)보다 더 많은 총 23점(국보 2점, 보물 8점, 도 유형문화재 13점)을 보유하고 있다.
정상 부근은 불꽃처럼 바위들이 솟아있는 1봉, 2봉, 3봉, 상봉이 나란히 도열해 있다. 그러나 정상석 위치에 대해 약간의 혼동이 있다. 장흥군에서 설치한 정상석은 ‘가지산 509.9m’로 되어 있고 정맥꾼들이 정상으로 인정하는 상봉에도 ‘가지산 정상(삼개봉) 515m’ 안내판이 있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정상 상황은 버스에서 설명해 준 우일신 님 소감과 같았다. 출발 전 나눠준 지도에도 가지산이 두 개였다. 이번 산행에서 이 산을 내려 보림사로 가려던 게 애초 생각이었다. 월간산에서 본 소감과 산우들의 소감은 차이가 있을까.
「상봉에 올라서면 ‘일망무제(一望無際)’란 단어를 실감하게 한다. 사방으로 막힘이 없어 북쪽으로 화학산을 비롯해 서쪽으로 월출산과 수인산, 남쪽으로 제암산 등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다. 날이 좋으면 지리산 천왕봉까지도 보인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온통 굴참나무 천지다. 9시 방향으로 완만하게 고도가 낮아지고 잡목이 울창한 숲으로 들어간다. 7부 능선까지 백설기를 버무린 것 같은 바위들이 계속 노출돼 있어 걷기에 조심스럽다. 산죽이 무성하고 미로 같은 숲길이 이어지지만 적절한 곳에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어 길 찾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장흥에는 섬진강·영산강과 함께 전라남도의 3대 강으로 꼽히는 탐진강이 흐르고 있다. 이 강은 가지산에서 시작되어 여러 물줄기를 합쳐 장흥읍을 지나면서 세력을 키우면서 서쪽으로 구부러져 강진만으로 흘러든다. 탐진강을 비롯한 크고 작은 하천 언저리의 평야와 남쪽 해안 지방의 간척지가 장흥 땅의 농사터다.
장고목재는 차가 다니는 넓은 도로였다. 고개에서 마을까지 거리는 지척이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걸으니 피로도 풀린다. 마침 버스도 왔다. 청색이라 멀리서도 눈에 확 띤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바로 아래 포장도로가 보이기에 가까이 가보니 완전 U자로 임도와 그 도로가 연결되어 있고 다시 산 아래에서 U자로 꺾인다. 속리산 말티재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직선 500미터 거리가 갑자기 세 배로 늘어났다. 이럴 땐 길을 더 걷는다는 걱정에 앞서 이런 멋진 길을 걷는다는 작은 환호가 들린다. 역시나 타고난 자연인들이다. 언덕을 가로 질러 내려가 보려고 잔머리를 굴리니 경가가 70도는 넘고 가시나무가 점령했다. 오죽하면 이 땅을 살아간 분들이 이런 길을 내고 살았을까. 그 시절엔 돌아가는 멋을 살필 겨를이 없던 시절인데도 이랬으니 오죽했겠나.
세찬 눈발이 다시 시작이다. 정겨운 시골길에 눈이 내리니 발걸음이 또 늦어진다. 이 그림을 놓치기 싫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레디 고’ 하면 한 명씩 내렸고 이를 한 자리에서 셔터를 네 번 누른 이는 물론 정 회장이었다. 이러고 나서야 버스에 올랐다.
빈 버스가 아니었다. 바람의 아들 우일신 님, 의규 님, 문 팀장님 옆에 다른 한 분이 더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오늘도 비켜가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제 이름을 잃어가고 있던 정상주가 이번엔 버스 안에서 나왔다. 이들의 노고를 축하하는 축하주로서 쓰였다. 이번엔 중국의 명주 수정방이다.
한 병에 50만 원을 호가한다는 게 전해들은 ‘석규 님’의 평가다. 술을 자제하는 우일신 님도 향기만 맡아보겠다고 잔을 받았다. 문 팀장 님에게는 두 잔이 돌아간 걸로 기억한다. 새로 모터맨 자리에 이름올린 아직은 낯선 분도 흔쾌히 한 잔을 마셨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한 잔 씩은 다 돌아갔다. 밤톨만한 치즈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이번 수정방은 내 공이 컸다. 언젠가 급한 설사로 그림의 떡이었던 그 술을 잊을 만하면 물었었던 것이다.
식당으로 이동한 시간은 불과 몇 분이다. 내가 그새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의규 님이 깨웠다. 옷을 갈아입은 ‘석규’ 님이 기분 좋은 얼굴에 혈기 왕성한 기운으로 맞는다. 불과 몇 시간 전의 그가 아니었다.
“몸이 살아났다.”
“장뚱이탕 먹으러 갔다가 그냥 왔다.”
“택시비는 얼마나”
“3만 5천 원씩 두 번 냈다. 몇 시간 보냈다.”
“사고를 쳐도 몇 번을 칠 시간이다.”
이러고도 마냥 좋단다. 이러는 그와 달리 너와나 님은 써빙에 여념이 없다. 더도 덜도 없이 자기 집에 손님을 초대한 주인 행동이다. 수단이 좋은 사람이 분명하다. 그가 나타나면 그 분위기는 그냥 그의 뜻대로 만들어 간다.
“술값이 모자라 알바하나.”
“그렇다”
이런 식으로 잘도 받아 넘긴다. 먼저 된장국이 끝내주었던 장흥 삼거리 식당은 반찬을 많이 먹어 이번에는 곤란하다고 해서 이 팀장이 고민 끝에 다시 찾아낸 식당이다. 고등어조림에 어리굴젓, 멸치 볶음, 배추김치에 된장국이 지친 입맛을 돌게 한다. 한 번에 다 들어갈 수 없어 세 자리로 나눌 정도로 작은 식당을 잘도 찾아냈다.
자리가 셋이니 건배사도 세 번 울렸다. 정 회장이 방을 다녀왔으나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두 가지는 이랬다. 이럴 땐 예행연습 없이도 한 목소리가 나온다. 연구 가치가 충분한 사람들이다. 이번 건배사에 너와나 님은 바빠서 빠졌다.
“봄이 오늘 길목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호남정맥
의리“
맥주 한잔에 다시 속이 편해졌다. 이 팀장과 풍댕이 님과 한잔씩 권하고 받았다. 그 자리엔 우리를 안전하게 책임지는 기사분도 있었다. 술을 한잔 따라주지 못해 미안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데 ‘대연 형’이 다가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하나만 달라고 한다. 산에서 다 비우고 내려왔기에 빈 갑뿐이었다. 마침 식당이 담배 집을 겸하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 담배를 집고 돈을 내려 해도 끝까지 만류하더니 라이터나 달라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이랬어도 내가 냈어야했다.
“담배는 끊어지는 게 아녀어. 남아 있는 거지이. 그래서 다시 펴보는 거여어. 담배 끊다 아주 간 사람도 봤어. 괜히 스트레스 받지 마아”
이걸 30초에 읽어 보자. 다시 옆으로 오더니 손에 무언가 쥐어 준다. 19 개피가 꽉찬 담배였다. 불 값을 너무 비싸게 받았다. 어차피 구정이면 끝낼 거니 그때까지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는 생각에 밖에 나와 식후 연초를 즐기는 데 “이 동지 이게 의리여” 하며 정 회장이 담배 한 개피를 건내 준다. 멋쟁이 베레모 님이 저 한편에서 웃으며 물고 있는 걸 보니 그에게 얻은 모양이다.
보통은 여기까지나 이번엔 하나가 더 남았다.
이 팀장이 협찬한 소주 세병에 인심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두 병을 더 주어 다섯 병으로 늘어난 소주에 골뱅이 무침이 있었다. 우연히 이 자리에 합석해 소득이 컸다. 그간 닉네임으로만 듣던 ‘한돌’ 님, ‘함박웃음’ 님 ‘강철’ 님 등과 대화를 나눈 거다. 멋쟁이 선배가 한돌 이었다. 그동안 함박 님은 여자로 알고 있었다. 남자에게 곱게 생겼다는 말로 결례를 범할 정도로 이름만큼이나 인상이 말끔했다.
“설송이란 이름이 좋다. 눈이 나빠 처음엔 구름과 소나무로 봤다.”
“어느 날 산에 오르니 눈 내린 소나무가 가슴에 닿았다. 별 뜻은 없다.”
내 Jkhigh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인터넷 처음 나올 때 만들었나 본데 지금은 기억이 없다. 원래 친구들은 달마라고 부른다.”
“고칠 수 있다. 이미지가 그런 거 같다.”
충북 증평이 고향이란 분과도 처음 술잔을 나눴다. 술을 권하기에 마시고 바로 주며 이게 내 스타일이라고 했다. 정말로 그런다고 하고도 얼마 뒤에 그걸 잊고 또 오기에 또 바로 돌려줬다. 뒤에 앉은 ‘대연 형’과는 남과 북이 다른 충청도 사나이다. 형이 준 이름은 기억 없는 순무 맛 나는 야채가 골뱅이보다 훨씬 좋았다. 변 사또 님이 가져온 사과를 안주 삼아 두어 잔 버티고, 함박 님이 준 귤로 두 번 버티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고 있었다. 2차 이후 안주는 이리 깔끔해야 한다. 그래서 주점에서 당근과 오이 몇 개 깎아 놓고 파는 3만 원 안주가 아직도 남아있는 거 아닐까.
“증평에서 신병 교육을 받았다.”
“37사단 잘 안다.”
앞자리에서 이 말을 듣던 ‘의규 님’이 고개를 돌리고 묻는다.
“나는 음성이다. 고향이 증평이냐.”
“아니다. 고향은 수원이다. 증평은 영장 받고 처음 갔다. 부대가 있던 연탄리 이름이 아직 기억에 있다.”
풍댕이 님이 맨 뒤에서 조는 시늉을 한다. 역시 술은 나이가 아니라 짬밥이다. 이 팀장이 와서 적응 훈련 뒤 한 잔이라 권하니 마지못해 받는다. 아침 식사 자리에 두고 온 간이 의자를 전해주며 물었다.
“풍뎅이가 맞는데 왜 풍댕이냐.”
“부르기 쉬우라고 일부러 그랬다.”
“배경음악이 대부, 엘콘도파사 이런 식으로 바뀌나 보다. 이번에도 기대가 된다.”
“이번에 뽕짝으로 할 생각이다.”
너와나 님이 뒤늦게 왔다. 후각이란 이런 거다. 끝나기 직전 와서 닉네임 정리를 해줬다. 11기에서 18기까지 다 통하는 말이 맞았다. 아쉬운 점 하나는 초고추장만 있었어도 오늘 아침 속이 편했을 것이다. 이 말은 아는 사람들만 안다. 왜 식당에서 추가로 어리굴젓을 시켰을 때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던 이들에게 한정된 것이기에.
#3.
‘바아바바 바암 바바바바바바’ 그 유명한 영화 닥터지바고 배경 음악이 십여 년 세월을 훌쩍 넘기고 다시 가슴으로 흐른다. 지금은 2월 9일 오후 3시 35분이고 창밖에는 눈이 날리고 있다. 후기를 정리하다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반복해 들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이 리듬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명곡답게 다시 가슴을 울렸다.
어제 산행 후반부도 쉽지는 않은 길이었다. 왔으니 걸어야 한다는 책임이 강했던 상황이었다. 그 세찬 바람이 부는 와중에도 산길엔 눈이 쌓여갔다. 양은 차치하더라도 빛바랜 갈색과 검은 색을 흰 눈이 덮어가고 있었다. 초록빛 산죽 위로도 흰 빛이 더해지니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하게 묘한 분위기로 변하고 있었다.
“여기가 장흥땅이다.”
“알고 있다.”
“이청준의 서편제 현장이다. 그들이 이 길을 걸었다. 닭 잡아먹고 혼나던 소릿재가 가깝다.”
“그 장면이 기억난다. 닭 주인에게 신나게 실컷 얻어터지는 걸로 닭 값을 치루면서도 소리꾼이 한 말이 ‘그 노인네 목청 좋다. 소리 했으면 좋겄네’다.”
이러니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조용한 숲속에 진도아리랑이 울리기 시작한다.
- 문전 새재는 몇 구빈가 구부야 구부구부야 눈물이 난다.
- 눈 내리는 장흥길을 내가 걸어간다. 호남정맥 따라서 내가 걸아간다.
시엄씨 죽으라고 물 떠놓고 빌었더니 친정 엄마 죽었다고 부고장이 왔네
앞산 딱따구리는 참나무 구멍도 뚫는데 우리 서방님은 옆에 구멍도 못뚫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몇 번 더 이런 식으로 부르며 걸었다. 앞뒤서 걸으며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는 늘 배려가 먼저다. 따뜻한 사람이다. 어제도 버스에서 뭘 슬그머니 넣어 주면서 걷다가 먹으란다. 매번 그와 걷기에 이런 투의 표현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빙산의 본 모습까지는 요원하다. 수면 위 얼음조차도 아직 멀었다.
이런 정상교 회장님과는 산에서 인연을 맺었다.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나 이 기간이 10년을 훨씬 넘었다는 착각을 하며 만나고 있다. 형 아니 회장님은 덤벙대고 즉흥적인 나와 달리 침착하고 깊다. 뒤늦게 멘토를 만났다.
속리산 천왕봉을 시작으로 한남금북정맥 횟수가 거듭되면서 일단 마음이 열렸다. 어느 날 양재동에서 자연스레 자리를 청했다. 더운 날이라 밖에서 생맥주를 마신 날로 기억된다. 지금도 그러지만 그는 차를 서초구청에 세운다. 그러면 그때도 대리 운전을 했다는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한 일이다. 구간에서 질마재를 지났을 거다. 내가 후기에다 미당 선생의 질마재 신화를 언급했나 보다.
“미당 선생을 좋아하는가.”
“그렇다.”
“내 주례 선생님이다.”
“뜻밖이다. 대단하다.”
“친구가 미당 조카다.”
하면서 전화를 바꿔준 미당 조카 분과도 통화를 했었다. 정 회장은 아마 그 무렵 사회생활을 접고 집으로 돌아와 있는 듯 했다. 양평에 지은 전원주택을 오간다는 말이 있었기에 지금도 그리 생각하고 있다. 그 때 후기 댓글에 미당 선생의 ‘푸르른 날’을 달았기에 오랜만에 해후한 절친한 친구 만난 듯 기뻐서 한 번 불러보기도 했었다.
완주 몇 구간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마침 그 무렵 자유인 홈피에 숲길체험지도자 자격증 교육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한문희 대장에게 조언을 구하니 두 말 없이 교육을 권하고 사무국장과 연결해줬다. 연유로 차를 갈아탔다. 그러면서 정 회장과 헤어지게 된다. 실습이 있던 어느 날 유명산에서 전화를 했다.
“멀지않은 곳에 있다.”
“친구들과 등산 중이다.”
“유명산에서 1박 할거다.”
“사정이 이렇다. 아무튼 반갑다.”
교육을 마칠 무렵 정맥 팀도 완주를 마치고 낙동정맥에 새롭게 도전장을 던졌다. 기다렸기에 참석을 알렸다. 함께 첫 구간을 마치고 무사 기원제를 지냈다. 아마 그날 제법 마신 기억이 있다. 신도림에서 살 때다. 다음날 1시가 넘었을 거다. 이러면 너와나 님도 공범이다.
이런 단어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지음(知音)을 만났다는 생각이 스치기 시작했다. 기록을 남기는 습관으로 다시 후기를 올렸다. 정 회장이 낙동 다큐멘터리를 기대하는 댓글을 달아주었다. 염화시중의 미소였다. 그러나 나는 그 약속을 또 지키지 못하고 두 번째 헤어지게 된다. 이러는 나를 이해해 줌이 더 미안했다.
음양오행에 더 다가가고 싶어서였다. 나는 내가 봐도 호기심이 많다. 평생 여기 저기 꽤 많이 기웃댔다. 명리학 교육은 주말 교육이고 비용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그 방면에 일가를 이룬 이와 연이 닿아 더 그랬다. 피차 다른 길을 가면서 나는 일정 지식을 얻었고 낙동 팀은 무사히 완주를 마쳤다.
어쩌다 서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 동지 뭐해’가 주 내용이다. 이러면 할 말이 없어 그저 ‘암쏘리’를 외쳤다. 긴 기간 이런 식의 연결 고리가 이어졌다. 그렇다고 일부러 시간 내서 만날 사정들은 아니었다. 와중 무조건 반사 식의 그리움은 있었다. 이러다 이형도 팀장이 ‘호남 시작’ 문자로 나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었다.
호남정맥 첫 구간 출발 전 서초구청 휴게소다. 멀리서 오는 그림자만으로도 직감적으로 알았다. 반가움에 다가갔다. 그가 이순에 들었다 했으나 모습은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양손에 무언가를 무겁게 들고 있었다.
“뭔가”
“이 팀장이 막걸리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모습이 그대로다.”
“변한 거 하나는 이순 기념으로 유럽 트레킹을 다녀온 거다.”
“축하한다. 힘들었겠다.”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코피가 한 번 났다.”
이랬다. 기흥휴게소에서 나눴다. 힘들여 가지고 온 막걸리는 호남정맥 출정식 제단의 곡차였다. 이형도, 최귀철, 김대군 3인이 봉사한다는 말도 들었다. 나이 몇 살 더 먹은 죄로 이 기회에 이름 한 번 불러 본다. 낯익은 이들 보다 낯선 이들이 훨씬 많았었다. 출정식에나 모습을 보이는 한 대장이 친밀하게 따라준 막걸리로 호가호위 했다.
“예향이다.”
“잘 알고 있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가겠다.”
“살아왔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보자.”
“기대가 크다. 진작부터 호남을 몸으로 알고 싶었다.”
“전주에서 막걸리 한잔하자.”
횟수가 거듭되고 있다. 갈수록 등반 능력이 예전과 다르다. 이래서 의도적으로 정 회장 뒤에 바짝 붙는다. 토박이가 해설을 준다. 불고, 박 박사, 강화, 너와나, 석규, 하늘비 님들이 교대로 앞뒤에 선다. 후미대장 ‘신 장로’ 아니 ‘신작로’ 님은 듬직한 벽이 되어준다.
집에 와서는 그날의 순간순간을 되짚어본다. 그러고 나서는 악착같이 자판을 두드린다. 평균 10시간이다. 이러고 나면 그 길이 피와 살로 남는다. 어제 산행을 되돌리다 브레이크 없이 아니 붓 가는 대로 이곳까지 왔다. 늘 자상한 형이 되어주고 어떤 때는 친구가 되어주는 정 회장이 ‘미친 놈’ 하겠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이다. 수필 자리에 뭘 넣어 읽어도 잘 읽힌다. 정 회장이 이거 저거 막 같다 붙이는 나 더러 또 병적 이라고 할까. 아니면 그저 홀로 아리랑이라 할까. 벌써 미친놈 하는 소리가 또 들리는 거 같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 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띄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여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귀한 물건이 내 손에 들어왔다. 지포(ZIPPO) 라이터다. 군대 가기 직전에 담배를 배웠다. 그땐 담배가 성인으로 가는 통과 의례였다. 산 꾼들이 명품 장비를 선호하듯 명품 라이터를 들고 다니면 누구나 쳐다보곤 했다. 특히 엄지손가락으로 뚜껑을 열 때 티잉 하며 전해지는 촉감과 귀 울림은 낚시꾼의 손맛이나 좋은 바둑판에 조개바둑알로 회심의 착점을 할 때 느껴지는 감촉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선호했던 라이터 하나는 디자인 수려한 ‘티잉’류고 또 하나가 이번에 받은 ‘지포라이터’다. 후자는 지프차 뒤에 놓고 달려도 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라 이를 일부러 보여주던 미군들의 회심의 미소가 아직도 생생하다. 탱크를 폭발시킬 때도 이 라이터가 날아갔다. 이런 장면은 영화에도 자주 등장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각양의 짝퉁이 많았다. 말 그대로 짝퉁이라 휘발유 냄새가 들어오고 훅 불면 꺼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연이 닿지는 않아 잊고 지냈고 그 무렵 일회용이 나오고 어쩌고 하다 나에게 지포는 이미 물 건너간 송아지였다.
그랬던 지포를 지금 손에 들고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2차 금연 성공 직전이다. 그러나 선물은 정표다. 담배와 이별은 이별이고 잘 간직하고 싶다. 아마 산에서 요긴하게 쓰일 거 같다. 이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다가 여기까지 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주역에서 괘(卦)가 모두 양(陽)으로만 구성된 걸 중천건(重天乾)이라 한다. 마음은 양에 속하고 몸은 음(陰)에 속한다. 양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이 괘는 마음을 중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마음의 요소가 하늘이므로 이 괘는 하늘을 상징하는 괘다. 만물은 하늘의 요소를 기본적으로 가지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 괘는 만물의 삶의 기본 원칙이다. 마음을 중시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국가는 한국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정서가 건괘에 속한다.
이러면 앞에서 말한 10년 세월을 넘나든다는 말은 이해가 쉽다. 반대로 모두 음으로 구성된 것을 중지곤(重地坤)이라 한다. 음이면 몸이다. 몸을 중시하면 사람들은 서로 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을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는 존재가 된다. 이 괘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나라는 일본이다.
참고로 한국은 양의 방향으로 가장 끝에 존재하고, 일본은 음의 방향으로 가장 끝에 존재하며, 다른 나라들은 그 사이에 존재한다. 중국은 한국과 일본의 중앙이라 보면 되고 중동 동남아시아는 양 쪽에 미국 유럽은 음 쪽에 포함된다. 음 쪽으로 포함되는 나라는 음으로 갈수록 개인주의 성향을 띠게 된다. 주역의 가르침이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본다. 양 인 사람 즉 한국인이 단체 여행을 갔다. 일과 후 자유 시간을 떠올려보자. 아침에 보면 배정된 방 몇 개가 비어 있다. 이유는 어디서 가지고 왔던 술 한 병씩 들고 한 방을 정해 모이기 때문이다. 자다 보면 다리가 배에 올라오고 머리에 올라오기도 한다.
그러나 음 인 사람들은 각기 자기 방에서 잔다. 그것도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잔다. 그러고도 불안하다. 나를 해치러 오지 않을 까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래서 그들은 협정을 한다. 나를 보살펴주면 네 ‘꼬붕’이 되겠다 던지 연합회를 결성한다. 이런 일본은 화(和)의 나라다. 이찌닌마에(一人前) 즉 내 몫이 따로 있다. 오래전 일을 기억해 봤다.
지난 구간 이 팀장이 뒤풀이에서 한 말이 새삼 떠오른다. 몇 구간 이 팀장이 말을 못했어도 그 활발한 성격의 사나이 속이 편치 않았을 거다. 만병의 주범인 스트레스를 왜 멀쩡하고 멋있는 이 팀장이 받아야 할 까. 이걸 받아들이는 이형도는 이랬다.
“회장님이 요즘 마음고생이 심하다. 줄 담배를 필 정도다.”
우리끼리 시비는 없다. 우리는 산이라는 주제를 놓고 풀어가는 사람들이다. 또 여기까지 왔다. 경사진 고개 오를 때처럼 이를 악물고서.
“문호리에서 보자.”
“외포리는 언제 오실껴.”
#.4
아침부터 줄곧 달려왔다. 오후 7시 25분이다. 기온이 뚝 떨어지고 거기다 웅웅 거리는 바람도 분다. 이게 어제였으면 제대로 꽃의 샘을 받을 뻔 했다. 핸드폰을 여니 이 팀장이 보내준 문자에 답을 한 문자까지 남아 있었다.
“추위와 어마어마한 강풍 고생 많으셨습니다. 2월은 구정 있어서 산행 한 번 밖에 없습니다. 구정명절 행복하게 보내세요! 3월 둘째 주 즐겁게 뵙겠습니다.”
“늘 수고 많시다. 설 잘 보내시겨.”
오늘은 비교적 손이 빨라 교정을 봤다. 이러다 보니 9시 30분이 훌쩍 넘는다. 오늘도 너무 길었다. 이것도 병이다.
첫댓글 정말 길었습니다
그것도 병입니다 수필로 함께하시니 ...ㅎㅎㅎ
정회장님과의 마음의 공간에 있어 애틋함을 보았네요
그 곁을 함께 서성이면서 공유했지요 참 오래 글을 읽었네요 읽다가 어깨가 시려서 모포 두르고
끝까지 인내 했다요
참말로 병입니다
오래 읽게 만드는 ...ㅎㅎㅎ
감사 합니다 수고로히 쓰신글 훔쳐갑니다 ^^
ㅎㅎ 저도 오래 읽었네요.
많은걸 읽고 느끼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휴 ~
나를 힘들게 하시는 JK님 ~
학창시절 공부하기 싫어 책을 회피 하였는데 ~
이나이에 긴글을 읽으려니 참으로 힘이듭니다 ~ 에휴
어제도 늦게 컴퓨터앞에 앉아 글을 읽는데 ~ 머리엔 안들어오고 ~ 꾸벅꾸벅 졸다보니 ~
마누라가 `` 왜 안하던짓 하셔 .. 하시네 ~ 에휴 ^^
JK님 집이 어디셔요 ? 산행후엔 찿아가서 술이라도 사드려야겠다 ~그러면 술먹는시간만큼 글이 좀 줄지 않을까 ^^ 하하
읽는데는 30분 ~ 쓰는데는 10시간 ~ 참 불평도 많네요 ~ 죄송해요 ^^
정말로 고생 많으셨어요 ~ 편한모습 자주자주 뵈어요 ~~ 감사합니다 ~~
정맥보다 더 힘든 산행기....
잘읽고 갑니다 수고많으셨어요.~^&^~
추위에 떨고 문필에 떨고 이리저리 떨었군요. 메리 설 보내세요. 저녁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했어요.
작가 李淸俊 문학의 배경인
장흥군과 보성군
그 경계를 그날
눈보라를 헤치며 함께 걸었습니다.
첩첩이 산이고 바다가 인접한 장흥과 보성땅은 많은 작가가 배출되기에 충분한
가난과 외로움과 이별의 슬픔이 존재할수있는 아련한 고을 이었습니다
곰치/백토재/바람재/장고목재/피재...
그날 마치 서편제의 영화내용처럼 소릿제들을 넘으며
진도아리랑을 소리쳐 불러도 보았습니다.
지금도 눈보라치는 소릿재 계곡에 퍼지는 동편제의 귀신소리 내는 판소리가 들리는듯합니다
생각나는데로 자유로운 영혼처럼
구애받지않고 후기를 써준 영호동지께
주는것도 없이
많은걸 받는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