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요즘은 학교에서 가야금, 뮤지컬, 비보이, 필라테스도 가르쳐 준다고요?” “방과후 학교면 영어나 수학 같은 학교 공부만 가르쳐 주는 거 아니었나요?”
지난 16일, 부산시 교육청이 주최한 부산 방과후학교 교육활동 성과발표회에서 팸플릿을 건네받은 학부모들은 대체로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부산광역시 교육청은 이날 부산교육대학교 교수학습지원관에서 부산 초·중학교의 방과 후 교육활동 성과를 전시하고,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이는 성과발표회를 가졌다.
16일부산교육대학교 교수학습지원관에서 열린 부산 초·중학교 방과후교육 성과전시회
전시와 공연 분야로 나뉘어 진행된 이번 발표회에서 전시 영역에는 오전 9시~오후 5시까지 20개교의 작품이 전시됐는데, 그 내용이 이채롭다. 라떼아트, 수학 자기주도적 학습 조형물, 과학교실 작품들, 네일 아트, 애니메이션, 브레인창작 공예, 사진 교실, 창작 공예 등 정규 교과에서는 만나보기 어려운 것들이 주를 이뤘다. 처음 방과후학교가 시작했을 때 단순히 학교 공부 위주의 보충형식으로만 진행했던 수업들이 최근에는 학습 외적인 활동들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후 2시~4시까지 2시간에 걸쳐 진행된 공연 영역 역시 다채로운 활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타악기, UCC 동영상, 필라테스부터 가야금 병창, 오케스트라, 영화 제작, 치어 리더, 한국 무용, 비보이, 합창까지 학생들의 흥미와 특기를 살릴 수 있는 다양한 분야가 선보였다.
부산시 교육청창의인성복지과 박정옥 과장은 “이번 행사를 통해 예체능 강사들에게는 자긍심과 교육 가족으로서의 소속감을 진작시고, 학생들에게는 무대 경험을 통해 얻는 자신감과 희열감을 만끽하게 함으로써 잠재적 자아 존중감을 심어주고자 했다.”며 이번 ㅎㅇ사이 취지를 설명했다.
실제로 부산은 전국에서 사교육 의존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이면서도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 수준은 낮은 아이러니한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렇다보니 학생들은 무조건 사교육만을 고집했고, 공교육은 사교육에 비해 밀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사교육을 줄이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방과후학교 역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임혜경 부산 교육감은 취임 직후 방과후학교를 대대적으로 개편, 방과후학교 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사교육 없는 학교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한 학교가 방과후교실 성과 발표회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런 노력은 부산 시내 612개 전 초·중·고등학교에서 총 47,020 강좌에 달하는 방과후학교가 개설돼 69.3%의 학생이 참여하는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부산시교육청은 이런 양적 팽창에 따른 교육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방과후학교 강사 연수시스템 개발, 지역단체와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방과후학교 육성에 매진해왔다. 그 결과, 부산 방과후학교 지원센터는 지난 9월, 한국교육개발원이 주관하는 전국 시도교육청 방과 후 학교 지원센터 공모에서 최우수 센터로 지정받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방과후학교 시범 학교로 선정된 부산 광일초등학교의 경우 방과후학교 개설 뒤 사교육비가 1인당 월평균 22만 5000원에서 11만 4000원으로 약 49%가 절감됐고, 학생의 공교육 만족도 역시 74.8에서 80.6%로 약 6%로 증가했다.
특히, 이번 성과발표회에서 크게 주목 받은 것 중 하나는 방과 후 학교가 유일한 사교육이 될 수밖에 없는 농아학교인 부산배화학교 학생들의 사진 작품이었다.
부산 배화학교 장서원 교장은 “일반적으로 장애인들의 경우 수화통역이 없는 경우 학원에 다니는 것에 한계가 있고, 설사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더라도 학원 측에서 먼저 거부하기도 한다.”며 “방과후학교를 개설하면서 학교에 수화통역이 가능한 선생님들을 함께 배치해 학생들에게 다양한 분야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배화학교 학생회장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사진을 촬여하고 있다.
이번 발표회에 약 20점 가량의 작품을 출품한 배화학교 사진교실 지도교사 김미정 씨는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고, 말이 필요 없기 때문에 뇌성마비, 정신지체 아동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분야”라며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실제로 출품된 작품들 중에는 하교하는 학생들의 뒷머리로 전기줄을 지나가게 함으로써 학생들의 과도한 스트레스를 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처럼 장애인 학생들의 뛰어난 창의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부산 배화학교의 한 학생은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고 댓글로 일반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며 “친구들과 수학여행에 가서 누가 더 멋진 사진을 많이 찍는지 내기하는 재미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공연 행사장에서는 ‘필라테스’ 발표회가 사람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필라테스는 최근 다이어트에 좋다는 이유로 여성들 사이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운동이지만, 서울이나 수도권에 비해 부산지역에서는 개인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 한정돼 있는 데다, 실제로 필라테스를 방과후학교에서 운영하는 곳은 주원초등학교 단 한 곳뿐이어서 더 눈길이 갔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한 눈에 받은 필라테스 발표 무대
실제로 필라테스를 무료로 가르치고 있는 주원초등학교의 김경한 교사와 용문중 심미금 교사는 “필라테스가 다이어트 운동이기 이전에 몸매를 바로잡고, 몸의 균형을 찾는 운동으로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도 무료로 가르쳐 주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우리 두 사람이 필라테스를 전문적으로 마스터했을 뿐만 아니라 스포츠 댄스 등 다양한 장르의 운동을 통해 축적된 경험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만큼 제대로된 교육을 해보고 싶지만, 공간이 부족해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필라테스를 3년 정도 배웠다는 조은비(중1·여)양은 “방과후학교에 흥미로운 과목이 있는 걸 보고 취미로 시작한 운동인데, 스포츠 댄스와 접목해서 계속 배우다보니 여러 대회에서 수상까지 하게 됐다.”며 “이제는 전문적으로 필라테스를 배워서 그쪽 분야로 진출하고 싶다.”는 바람도 전했다.
자녀가 가야금 무대에 섰다는 한 주부는 “악기를 배운다고 하면 돈이 많이 든다고만 생각해 처음에는 반대했었다.”며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가야금 교실을 시켜줬는데 계속 한 곳에 앉아서 연주해야 하는 악기인 만큼 집중력도 많이 늘었고, 이제는 연주도 제법 수준급이어서 음대 쪽 입시로 진로를 변경할까 고민중”이라고 말했다.
가야금처럼 배우기 힘든 악기도 방과후교실의 한 교과로 편성돼있다.
한 학생은 ”학원 수업은 학교 수업과 별반 차이가 없어 재미가 없지만, 학원에 안 다니면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게 사실”이라며 “방과후학교 수학 심화교실로 옮기고 난 뒤부터 오히려 수학 성적이 올랐다.”고 귀띔했다. 그는 “학원에서는 시험 잘 치는 요령만을 가르쳐 주는 반면 방과후학교에서는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법을 알려줘 배우고 나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부산시교육청이 방과후학교를 중점적으로 육성한 이후, 부산시내 학교 주변 학원들 중 몇 곳은 방과후학교의 인기에 못 이겨 문을 닫는 경우도 생겼다고 한다. 또 방과후학교에 대한 의구시을 가지던 학부모들도 이제 하나둘 마음의 문을 열고 아이들을 방과 후 학교 교실에 보내며 학습 성취도를 지켜보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학원을 안 다니면 불안하다는 학생들. 이건 결코 한 두명의 학생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필요한 사교육 열기를 잠재우고 있는 방과후학교가 교육시장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