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의 건국세력 신진사대부 [27회 15번]
정답: ④
* 조선의 건국세력 신진사대부
고려 말 지방의 향리 자제들로, 무신 집권기 이래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리로 진출한 세력을 신진 사대부라 한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대부분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이들 중 정도전, 조준 등 급진파 사대부들은 이색, 정몽주 등의 온건파 사대부들을 제거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① 신라 말 중앙에서 진골 귀족들이 서로 다투는 동안,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온 호족들이 크게 성장하였다. 이들 호족 중에는 촌주 출신이 많았으나,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세력이나 해상 세력, 군사 세력도 있었다.
② 신라의 중앙 귀족 중 6두품은 진골 아래의 신분으로 6등급 아찬까지의 벼슬만 할 수 있었으므로 정치보다는 주로 학문과 종교 쪽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③ 고려 전기에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를 배출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 부른다. 문벌 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2) 위화도 회군(1388)을 단행한 이성계(조선 태조)의 업적 [17회 21번]
정답: ④
* 위화도 회군(1388)을 단행한 이성계(조선 태조)의 업적
고려 공민왕 때에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와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하기도 하였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어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남과 북의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우왕 때에 이르러 권문세족이 토지 겸병을 확대하자, 최영이 이성계를 위시한 사대부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마침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4불가론을 주장하며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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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4불가론
1. 소국이 대국을 거역함은 불가능하다.
2. 여름에 군사를 일으킴은 불가능하다.
3. 거국적으로 원정할 경우 왜구의 침입 우려가 있다.
4. 시기는 장마철이라 활이 녹고 대군이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어 불가하다.
---------------------------------- 이성계를 중심으로 모인 급진 개혁파(혁명파) 사대부 세력은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후,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사대부 세력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① 조선 후기 공납의 개혁인 대동법은 한백겸, 이원익 등에 의하여 광해군 때에 처음 경기도에서부터 실시되었다(1608).
② 조선 초 태종 때에 8도 지방 체제가 완성되었다(1413~1416).
③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 토벌은 고려 말 창왕 때(1389)에 박위의 토벌과, 조선 초 세종 때(1419)에 상왕 태종의 주도하에 이종무의 토벌이 있었다.
(3) 위화도의 위치 [25회 19번]
정답: ③
* 위화도
고려 공민왕 때에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와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하기도 하였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어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남과 북의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우왕 때에 이르러 권문세족이 토지 겸병을 확대하자, 최영이 이성계를 위시한 사대부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마침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4불가론을 주장하며 위화도(압록강 하류에 위치)에서 회군하여(1388)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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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4불가론
1. 소국이 대국을 거역함은 불가능하다.
2. 여름에 군사를 일으킴은 불가능하다.
3. 거국적으로 원정할 경우 왜구의 침입 우려가 있다.
4. 시기는 장마철이라 활이 녹고 대군이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어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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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를 중심으로 모인 급진 개혁파(혁명파) 사대부 세력은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후,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사대부 세력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4) 고려 최후의 충신 정몽주 [21회 17번]
정답: ②
* 고려 최후의 충신 정몽주
정몽주(1337~1392): 고려 말 대표적인 성리학자(동방이학의 원조).
신진사대부 중 온건파를 이끌며 급진파(혁명파)와 대립하다 이방원(태종)에 의해 개성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충신이다.
① 정도전(1342~1398): 정몽주와는 노선이 다른 급진 개혁파의 중심 인물로서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역성 혁명을 주장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한양 천도와 궁궐과 관아를 짓게 하고 여러 법전들을 만들어 국가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던 그는 왕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이방원(태종)에 의해 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되었다.
③ 최무선(1325~1395): 고려 말의 무기 제조가. 그는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에는 화약 무기의 사용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화약 제조 기술의 습득에 끈질긴 노력을 하여 화약 제조법을 터득하였다. 이에, 고려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중심으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1377). 화포와 같은 화약 무기의 제조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얼마 후에는 20종에 가까운 화약 무기가 만들어졌다. 최무선은 이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금강하구)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1380).
④ 최영(1316~1388): 공민왕 때에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과, 남쪽에서의 왜구의 침입을 무찌른 용장. 몸에 적의 화살을 맞고도 끝까지 부하들을 진두 지휘하여 왜구를 대파한 홍산 대첩(1376)이 유명하다. 요동 수복을 주도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위화도 회군으로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1388).
(5) 신진사대부 정도전과 정몽주 [29회 21번]
정답: ③
* 신진사대부 정도전과 정몽주
고려 말 지방의 향리 자제들로, 무신 집권기 이래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리로 진출한 세력을 신진 사대부라 한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사회 개혁을 하고자 하였다.
대부분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정도전이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를 비판한 것이 유명).
이들 중 정도전(1342~1398), 조준 등 급진파 사대부들은 이색, 정몽주(1337~1392) 등의 온건파 사대부들을 제거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 이후 우왕과 창왕을 잇달아 폐위시킨 신진사대부는 공양왕(1389~1392)을 추대한 후, 새로운 왕조를 일으키려는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파와 고려를 지킬려는 이색, 정몽주 등의 온건파 사대부로 분화되었다.
결국 이방원(조선 태종)에 의해 고려를 지킬려는 정몽주가 제거된 이후 공양왕은 폐위되고 이성계의 조선이 건국되었다(1392.7).
③ 조선 초에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를 편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성종 때에 동국통감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 통사로서, 서거정 등 이 편찬하였다(1485).
(6) 이방원(태종)과 정몽주 [15회 18번]
정답: ②
* 이방원(태종)과 정몽주
• 이성계(조선 태조)는 위화도 회군(1388)으로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다른 의견이 존재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대다수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역성 혁명을 주장하였다.
급진 개혁파는 창왕을 몰아 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1389). 이들은 역성 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이성계의 5째 아들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격살). 이로써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 두 차례(1398, 1400)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하여 개국 공신 세력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태종(1400~1418)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태종은 6 조 직계제를 채택하였으며,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였다. 또, 양전 사업과 호구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였고,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억울한 노비를 조사하여 해방시켰다. 아울러 사병을 없애 왕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친위 군사를 늘렸다.
③ 태조는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성을 쌓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을 건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다졌다(정도전의 설계).
④ 세종(1418~1450) 때에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최윤덕)과 6진(김종서)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