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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일상성과 원환상징
강우식
1.
이제껏 시집을 내면서 몇 분에게 시해설을 부탁하여 말미에 단 적이 있다. 처음에는 평론가에게 청탁하었으나 시를 보는 눈이 별로 탐탁치 않았다. 그 후부터는 시를 쓰는 동업자가 더 좋을 거 같아 글을 받아 싣기도 하였다. 요즈음에는 시집의 말미에 여적이라 하여 내 스스로 몇 마디하거나 그마저도 안 싣고 만다. 시집은 군더더기 없이 시만 싣는 것이 깔끔 할 것 같아서다. 물론 나도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집의 해설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의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간혹 쓰고 싶은 시인의 작품이 올 때는 기꺼이 응하기도 했다. 작년 연말이다. 어느 젊은 시인들이 주축인 계간지의 망년회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에서 시집 해설을 그중 많이 하는 분을 만났었다. 나는 그분에게 시 해설을 좀 가려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마음에 드는 시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고 글을 쓰고 싶지 않은 시도 있지 않겠는가. 시의 선호가 각양각색일 텐데 신의 붓처럼 어떤 시든지 다 소화해내는 것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시 해설이 모든 시를 무불통지처럼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시를 어렵다고 한다. 사실이다. 다른 장르의 문학에 비해 시가 어려운 것은 틀림 없다. 해설은 더 힘들다. 그래서 시에 대한 글은 더욱 아꺼 써야 된다고 믿는다. 적어도 5,60년대에는 평론가들이 즐겨 시를 읽고 쓴 것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시에 대해 스스로 쓴 문장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다수가 문단에 등단하기 위한 글들이고 또 그 글의 집필자도 대학의 석박과정의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문학이 좋아서 석박과정을 밟지 않고도 평론을 하는 자생적인 분들을 보기 어렵다. 문학을 자유로운 정신으로 하기보다 학문으로 공부한 분들이 많다는 뜻이다. 나는 이런 점이 우리시단을 너무 도식적으로 이끌어가지 않는가 하는 우려를 하고 있다.
손옥자 시인이 시집을 낸다고 나에게 고맙게도 몇 자 부탁을 했다. 솔직히 늙어가면서 산문은 되도록 안 쓰려고 한다. 나 개인으로는 산문은 너무 힘에 부친다. 특히 시집의 해설은 시집을 내는 시인의 의도대로 편집된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허다한 것도 마땅치 않아서였다. 하지만 평소에 손옥자 시인의 시는 눈에 띠면 빼놓지 않고 읽어온 터라 어느 정도는 몇마디를 늘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응했다. 그러면서 시집을 내려고 작품을 간추리지 않은 채로의 시를 보내 달라고 하였다. 그것은 원시림 같은 상태의 시를 보고 싶어서였다. 시인의 시집 제목이 무엇이고 작품 경향이 주제별로 어떻게 묶어졌고 하는 일체의 것이 필요 없는 상태에서 그녀의 작품만을 보고 싶었다.
2.
손옥자 시의 특성은 크게 두 갈래다. 그 하나는 그녀의 시가 치유의 일상성상에 있다. 내가 아는 손옥자는 시 창작 강의로 몇 군데에 나가지만 매우 특이한 강의선생이다. 그녀는 여러해 전부터 어떤 인연이 닿아서인지 형을 살고 있는 재소자들을 상대로 시를 쓰게 하고 그들의 아픔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 시를 통한 이런 소통이 그녀의 시에 많은 영향을 주어선지 상처의 시들이 자주 눈에 띤다. 그녀가 계간지 <문학과 창작>에 연재하는 ‘담, 나를 가두고 나서야 세상이 넓게 보인다’라는 산문이 있다. 재소자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얻은 일화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담을 경계로 한 감옥이라는 일정한 틀에 갇힌 것이 세상을 더 넓게 보는 시야를 가진다는 의미다. 재소자의 입장에서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견자적 태도다. 굳이 재소자가 아니더라도 갇혀 있는 상태가 더 넓은 세상을 만나는 계기가 되는 것도 치유의 한 방식이리라.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다니는 것보다 때로는 갇힌 상태가 더 넓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나로서는 시치유라는 것의 효과를 반신반의 해오다가 그녀의 글을 통해서 실감한다. 그만큼 나에게 시치유의 공감성을 준 시인이 손옥자다. 그러므로 몸소 현장에서 체험한 경력을 가진 그녀의 시에 치유의 일상성이 깃들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금은 4월,
모든 메일이 지워져 있습니다.
천마총 둥근 궤도를 돌고 있는 배롱나무는
모든 기억을 지우고 축축하게 젖어 있습니다.
유난히 하얀 몸뚱이의 컴퓨터 화면, 속
지워진 메일
지난 계절,
푸르고 싱그러웠던 메시지들을 밀어내면서
배롱나무는 생각했겠지요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 많은, 아찔했던 기억들을 어쩌지 못해 불쑥 솟아오른
천마총 둥근 궤도를 돌면서
배롱나무는
홀가분해진 제 몸뚱이를 내려다봅니다.
유난히 희고 매끄러운 몸뚱이를 타고
무수한 시간들이 흘러갑니다.
오늘은
하루종일 비
이 차가운 빗물이 뿌리로 스며들면
배롱나무의 창도 밝아지겠지요
내일은 맑음.
-「천마총 배롱나무」전문
살아가면서 어느 누군들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어쩌면 상처투성이로 살아가는 우리들인지 모른다. 삶이란. 일상 속에 만나는 자연들도 계절의 순환과 더불어 비나 눈이 많이 와 산사태나 눈사태가 지고 때로는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가 일어 삶은 물론 자연도 황폐화된다. 어찌 그뿐이랴. 지진이나 화산폭발 등 그 수를 이루 헤릴 수 없는 자연재해가 난다. 우리가 접하는 사소한 일상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물에는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위험요소가 내재되어 있고 이들로 인한 사고와 상처도 항다반사다. 우리가 사는 삶의 일상성이 바로 상처다. 내가 ‘천마총 배롱나무’를 해설의 앞자리에 내세운 것은 이 시가 일상성 속의 상처와 치유를 내포하고 있고 또 천마총이라는 시간이 축적된 역사의 유적도 배롱나무를 통해 하나의 동일성적인 원환상징성을 띤 상징물화 되는 과정이 나타나 있어서다.
손옥자의 시는 치유의 일상성에 놓인다. 시적 소재로서의 일상성은. 평범한 일상성이 아니다. 한국시의 장점은 이야기시다. 이야기시는 그 바탕이 우리들 삶의 일상성에서 기인한다.근일 각종 문학지에 발표되는 시들이 글자 그대로 평범한 일상성으로 주저앉아 있고 심하게 말하면 시가 아닌 일상들로 채워진 작품들도 너무 많다 하면서도 언제부터 한국시단은 너무 관용해져 있다. 모든 비평은 주례사 비평에 젖어 흐물거리고 작품도 그에 따라 무감각 상태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일상성은 평범한 산문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천마총 배롱나무’는 제목부터가 생각하게 만든다. 천마총과 배롱나무는 전혀 연관성이나 유사성이 없는 개체들이다. 이것이 같은 자리에 있다. 동격적 동일성을 띤다. 시인은 천마총을 둘러싼 풍경을 이렇게 노래한다. “그 많은, 아찔했던 기억들을 어쩌지 못해 불쑥 솟아오른/천마총 둥근 궤도를 돌면서/배롱나무는/홀가분해진 제 몸뚱이를 봅니다”라고. 시에서 서로 이질적인 사물들이 조합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끌어내는 것은 은유다, 천마총의 둥근 무덤과 그 무덤을 둘러싼 배롱나무는 서로가 이질이면서 둥글게 닮아간다. 이질이 하나의 닮은꼴화 되고 있음은 은유적인 효과다. 이때 시적 화자는 천마총은 긴 긴 시간의 축적과 세월의 무늬 속에서 죽어 있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불쑥 솟아오른” 생생력적인 유물로 인정한다. 그 원인은 천마총을 둘러싼 배롱나무에 있다. 보통 나무는 흙 속 뿌리를 박고(천마총도 땽속에 묻혀 있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우리가 산신제를 지내거나 성황당 거목에 제사를 지내는 샤먼의식도 나무의 매개자 역할 때문이다. 배롱나무의 생명력이 천마총과 잇닿아 있다. 천마총과 배롱나무가 동일성의 원환상징을 띠는 생생력인 것도 서로 둥글게 닮아가고 같이 땅속에 묻혀 있는 유사성 때문이다.
시인의 시의 첫 구절은 “지금은 4월,/모든 메일이 지워져 있습니다”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에서 엘리옷의 ‘황무지’의 유명한 첫구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를 연상했다. 엘리옷의 ‘황무지’는 20세기가 가져온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을 읊었다면 손옥자의 이 구절은 20세기와는 너무도 다른 오늘의 문명을 노래하고 있다. 소위 인공지능이라고 하는 컴퓨터는 나날이 가 더욱 지능화되어가며 우리들 생활의 모든 정보가 내장된 휴대폰을 국민 대다수가 지니고 사는 시대다. 얼마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인간과 컴퓨터와의 대결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컴퓨터가 일상화되어 있고 모든 정보가 담겨 있는 칩이나 파일은 집단에게도 개인에게도 없어서는 안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순간에 지워질 위험성을 늘 내포하고 있다. 아마 손옥자의 컴퓨터에도 어느 날 바이러스가 침입하여 모든 자료들이 날아간 모양이다. 지워진 백지 상태의 컴퓨터에서는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사용자는 고장 이전에 본 영상을 기억한다. 그전에 보았던 천마총 영상의 복원이다. 잔상으로 남겨진 지워진 풍경은 자국을 남긴다. 자국은 텅빈 공간이며 남겨진 상처다. 이 시는 그런 상처에서 한 사물을 끄집어내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컴퓨터 자체는 복원되지 않았더라도 컴퓨터 사용자에게는 정상적인 컴퓨터에서 본 정보는 한 풍경이 남아 있다. 즉 천마총과 그것을 둘러싼 배롱나무는 남아 있는 것이다. 아마 기계와 인간의 차이라면 이런 기억이 아닐까. 천마총은 죽은 한시대전의 유물이 아니다. 생생력을 불어넣는 배롱나무가 있어서다. 일상성이 치유되는 그 진행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천마총을 돌고 있는 배롱나무는 모든 기억을 지우고 촉촉하게 젖어 있습니다” 배롱나무는 천마총을 배회함으로써 천마총과 같은 역사를 지닌 둥그런 원형이 되고 촉촉하게 젖는다는 것은 침윤이다. 한 개체의 본질에 스며듦이다. 스며들어 그것과 같은 것이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천마총이 역사의 뿌리이듯이 배롱나무도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창을 가지고 “오늘은/하루종일 비”이지만 “내일은 맑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하늘을 본다 이렇듯 손옥자의 시에는 상처에 대한 관심과 원환을 드러낸 시편들이 많다.
사랑의 열병이 도지면
제 살을 뚫고 나오는 가시연꽃
상처 위에 세워놓은 가시가
촉수를 곤두세우고
지나가는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마라
닻은 함부로 내리는 게 아니다
단단한 뼈들을 수직으로 세우고 가시연꽃은
날카롭게
날카롭게
사생아 같은 진보라 작은 꽃망울을
상처처럼 안고
자기 이름보다 먼저 가시를 내어미는
가시연꽃
-「궁남지 가시연꽃」전문
‘천마총 배롱나무’와 마찬가지로 ‘궁남지 가시연꽃’, ‘석굴암 가는 길’, ‘소쇄원’ 등의 작품에서 역사적인 유적지들을 일상성으로 보는 시각이 특이하다. 궁남지 가시연꽃은 치유되는, 치유되어야 하는 상처가 아니다. 상처가 고스란히 간직되어야하는 상처다. 상처(연꽃)가 있기에 그것을 지키는 가시를 묘사하고 있다. 모든 역사의 자국들은 폐허화된 유적들은 상처의 자국이다. 그 상처들은 잊혀져서는 안 되는 힘이다. 여기서 내가 상처를 힘으로 보는 까닭은 상처가 온전하지 못한 흠이어서 가능하다. 가령 문학의 상징에서 절름발이라든지 기형적인 존재들이 천대 받거나 소외되지 않고 절대의 힘이나 권력을 가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상처도 온전치 못하다는 점에서 같은 부류다. “상처 위에 가시를 세워놓은”은 바로 상처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상처의 자기보호다. 이때의 가시는 궁남지라는 연못의 원환성과 연꽃의 원환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연못이나 연못에 핀 연꽃은 생생력적인 힘이자 지켜야될 상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가시는 바로 이 상처를 지키는 원형의 변형된 모양이기도 하다. 가시는 궁남지연못(물 생생력)과 연꽃(자궁)이 자기보호를 위해 만든 자체방위 수단이다.
손옥자 시에 나타난 상처의 유형은 상처인 채로 있는 절대적으로 보호 받아야 할 상처 다음에는 치유되어야 할 상처, 그리고 마음속에 남아있는 풀어야 할 상처로 나뉜다. 그중 흔한 것은 보편적인 상처다. 어떤 충격이나 알력으로 생긴 치유되어야 할 상처다.
당신과 나를 엮어요
당신이 내 속에 내가 당신 속에 들어와
코를 맞춰가요
가끔은 무늬 속에 섞이면서
가끔은 대각선으로 마주보면서 우리는
다정하게 호흡을 맞춰요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이
슬그머니 발을 빼요.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당신을 기다려요
온종일이라도 괜찮아요
그러나 당신은 오지 않아요
일방적으로, 그래요 일방적으로
당신이 발을 뺀 자리에 구멍이 나고
그 구멍은 또 다른 허공을 불러와
가지런한 삶에 걷잡을 수 없는 또 다른 수포들이 생겨나요
이제는 당신과 나,
누구도 스스로는 건져 올릴 수 없는 커다란,
그래요 아주 커다란 홀이 생겼어요
차가운 허공을 움켜쥐고 있던
동그랗게 몸을 만 언어들의 약속들이
끝내 쉽게 풀어지고
당신과 내가 만들어 올린 구릉이 무너지고 숲이 무너지고
무너진 숲 속에서 수풀들이 수북하게 부풀어 올라요
구불구불 바람이 일어요
우리가 지나온 자리가 보이지 않아요
어떻게 우리는
길도 없는 저 곳을
뚫고 나온 걸까요?
-「뜨개질」전문
상처를 읊은 시들로는 위의 작품 말고도 많은 작품들이 있다. 그 작품들을 찾아가며 읽는 맛도 있을 것이다. 상처야말로 남이 아닌 자신과의 대면이다. 상처야말로 자신이 해결해야 될 아픔이다. 뜨개질은 문학작품 속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다. 아마 유명한 얘기로는 그리스신화 속의 페넬로페의 뜨개질이 아닐까 싶다. 페넬로페는 뜨개질하면서 수많은 남자들의 구혼으로부터 시간을 번다. 그 뜨개질은 시아버지의 수의로 낮에는 짜고 밤에는 푸는 작업을 계속하는 일화다. 이 얘기는 시간에의 연속성을 의미한다. 나로서는 시간을 벌려는 짜고 푸는 과정의 순환성이 이야기의 해피앤딩보다 중요하다고 여긴다. 결말보다 과정의 중요성이다. 모든 사람들은 완벽한 마무리로서의 결말을 바라지만 그 결과는 중도에 그치거나 불완전한 끝이 되고 만다. 마음속의 그리움이나 한이나 맺힌 응어리를 푸는 과정이 즉 뜨개질은 실로 짜는 마무리로 가는 작업만이 아니라 반대로 푸는 작업도 필요하다. 진정한 사랑의 완성이 없듯이 사랑도 지속성이 소중하다. 손옥자의 시는 사랑이든 무엇이든 역으로 푸는 맇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상처의 치유를 위하여 뜨개질하는 페넬로페의 일상이다. 일차적으로 상처는 “당신이 발을 뺀 자리에 구멍이 나고/그 구멍은 또 다른 허공을 불러와/가지런한 삶에 걷잡을 수 없는 수포들이 생겨나요”처럼 상처는 다른 이름으로 칭하면 구멍이고 허공이고 수포다. 이때의 허공은 처음의 상처가 도져서 낸 더 큰 상처다. 수포는 걷잡을 수 없는 연쇄성을 지닌 상처의 다른 이름이다. 이 시속에서 뜨개질은 당신과 내가 코를 맞대는 사랑이다. 사랑은 혼자만이 본능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뜨개질 하듯이 일상의 나날들을 한 코 한 코씩 맞춰 짜야한다. 사랑은 짜고 푸는 혼융이다. 당신과 내가 짜고 풀며 완성해 가야될 혼융이다.
너는 지금 내 손안에 있고
내가 너를
언제 구길지
언제 버릴지 모르는데
저 당당함이라니
속을 확 내보이며 종이컵은 말한다
내가 가진 건 뜨겁고 뜨거운 사랑
이게 전부야! 가져!
- 「사랑, 그 당당함에 대하여」부분
종이컵은 그 속에 물체가 담겨 있을 때만 그 완벽함을 유지한다. 손옥자는 일상적인 행위에서 무엇이 시가 되는지 아니 일상적인 행위를 어떻게 시로 만들 것인지 아는 시인이다. 일회용 종이컵에 커피가 담겼을 때 그 컵은 용도 폐기될 운명을 띠고 생겨났다. 언제 구겨질지 모르는 종이컵. 컵에는 운명에 따라야하는 순응이 있다. 구겨지고 버려질지 모르는 상처를 내재하고 태어난 종이컵이다. 그렇지만 당당하다. 왜 종이컵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만든 내용물 사랑이 들어 있어서다. 손옥자는 한 잔의 커피에서 상처받은 삶의 따뜻한 위로를 느낀다. 사랑의 치유효과를 본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자기헌신적인 사랑을 나탸낸 시다. 상처에 대한 시로서는 “어느 날 불현듯 내 인생에 끼어든/하찮게 여겨왔던 존재가/지금,/내 인생을 쥐나게 하고 있다”라는 상처로서의 쥐,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던 집에 문패를 달려고 친 못자국을 보면서 평생 매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보는 후회가 배인 ‘두 분의 이름 위에 못 친 자리가‘ 그리고 마침내는 작품 ‘노인은 걸음만 보면 알 수 있다’에서 ‘삶은/있으나 없으나 짐이다“라는 경구에 가까운 시구들, 손옥자는, 짐은 인생의 부담이요 누구나 가진 인생의 상처라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내보이고 있다.
3
손옥자의 시는 상처를 상처로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는다. 상처 자체를 리얼하게 내보이는 작업도 훌륭하다. 하지만 손옥자는 상처에의 치유까지도 염두에 둔 작품들이 많다. 나는 그 치유방법으로 원환상징적인 시가 많다는 데 주목한다. 원환상징은 시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반복하는 시계의 둥근판을 떠올리면 된다. 둥근 상징이다. 간혹 원형상징과 원환상징을 혼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다른 상징이다. 원환상징도 원형상징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생활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었다. 단지 이 이론화나 체계가 안 잡혀 왔을 뿐이다. 동양에서는 불교의 공(空)사상이나 원불교를 연상하면 무난하다. 단지 서구에서 먼저 이론화 했을 뿐이다. 서양에서는 거슬러 올라가면 니체의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 궤도 위에 놓인다는 회귀설이나 시간관과도 연관이 깊지만 바슐라르가 그 이론을 세우고 사용한 용어다. 바슐라르는 “모든 존재는 둥글다”(야스퍼스), “인생은 아마도 둥글 것이다”(반고호), “나는 인생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하는 것을 들었다. 아니다! 인생은 둥글다”(죠부스케), “호두는 나를 매우 둥글게 한다”(라 퐁테느) 등의 말을 참고삼아 원환상징이론을 세우고 있다. 바슐라르는 “원환의 이미지는 우리가 마음을 가다듬는데 도움을 주며, 스스로의 시초의 존재 성격을 되찾게 해주며 우리 존재가 내밀화하게 내적인 것을 증명해준다.”고 정의한다.
솔가지에 걸린 수많은 이름들이
형형색색의 소원들이
길따라
얽혔다 풀어지고
풀어졌다 얽히고
세상의 어둑한 굴을 벗어나는 일이
또 다른 굴을 찾아 입성하는 일이라고
줄지어 감았다 펴고
폈다가 다시 감는 설법 같은
아침 안개길
-「석굴암 가는 길」부분
둥근 원환의 완성은 쉽지 않다. 석굴암 가는 길과 같다. 길은 시간의 끝 없음과도 같다. 마치 시계바늘의 회전과도 같다. 시계는 원환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원환의 고리를 일정한 주기마다 자꾸 생산해낸다. 그 과정은 풀었다 얽히는 것이다. 페넬로페의 뜨개질과 같다. 풀렸다 얽히는 시간석에 혼융이 이루어진다. 혼융은 보통 한 사물과 다른 사물의 뒤섞임이다. 이 과정은 나름의 시련과 고통을 수반하는(석굴암을 가려며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오리무중의 “안개길”이다. 그래야만이 둥그런 석굴 속에 자리잡은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둥근 원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이 시에서 “줄지어 감았다가 피고/폈다가 다시 감는 설법 같은”의 줄지어 있는 것은 길이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말처럼 길은 설법과도 통하고 있다. 길과 줄이 가진 목표는 둥근 원환이고 그 과정을 위해 얽혔다 푸는 산고와 같은 지속성적인 과정을 겪는다. ‘소쇄원’에서 “추녀가 휘어질대로 휘어지는 밤이면/비릿한 기억을 어쩌지 못해/마디마디 스스로 끈을 묶어가는 대숲”에 나타난 휘어짐 끈도 원이 되기 위한 직선이 구부러지는 양상이다.
등을 바위 속에 묻어둔 서산 마애삼존불 앞에서 나는 갑자기 바위 속에 넣어놓은 삼존불의 등이 궁금했다. 수천 년 단단하게 굳은 삼존불의 등에는 어떤 글씨가 새겨져 있을까 죽어서야 비로소 살게 만든 사랑의 신호들을 바위 속 등에 저장하고 있을까(중략)
보이지 않는 등은 보이는데
보이는 등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또 앞과 뒤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불이문不二門을 나왔다
그런데 무심히 나오다가 돌아보니 불이不二
‘불이不二’라니!
앞과 뒤, 안과 밖이 명확하게 나뉘어져 있는 세상에서
마애삼존불 등 뒤로 해가 지는데
비낀 햇살 탓인지 삼존불이 묘하게 웃었다.
=「등」부분
원환의 깨달음은 그냥 오지 않는다. 손옥자의 시에는 그것은 삶의 일상 속에서 얽힌 것을 풀고 다시 감고 얽히는 과정에서 얻는다. ‘등’은 그 깨달음의 과정을 여실히 나타낸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자는 늘 시적화자에게서 등지고 앉는다. 시적화자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사랑하는 남자이길 바란다. 하지만 남자는 자꾸 옆길로 샌다. 수많은 남자 속에 섞여 찾을 수 없게 되고 다른 골목으로 빠지고 택시를 타고 도망을 다닌다. 이 남자가 가진 등은 여자에게는 배신의 상징이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나쁜 등이다 그런 사연을 가진 시적화자는 서산 마애삼존불을 가서 본다. 마애삼존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삼존불의 보이지 않는 등을 보고자 한다. 등을 보이지 않는 석불에서 왜 등을 보려고 할까. 배신당하지 않는 등을 만나고 싶어서다. 석불은 굳이 등을 보일 필요가 없는 불이다. 석불 자체가 원을 가지고 현신하신 불이기 때문이다. 즉 등이자 불이요 불이자 등이다. 시적화자는 마애삼존불을 보면서 자기에게 등을 돌리고 도망가려고만 하는 남자도 저 같았으면하고 소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적화자에게 인식 되어진 것이 아닐지라도 남자의 등은 이미 원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하나의 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등의 앞면과 뒷면도 필요하다. 곧장 같은 방향으로 가서는 원이 될 수 없다. 원의 이중성이다. 나쁜 등이 있으면 좋은 등도 있어야 한다. 원은 둥글다. 둥근 것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그리고 용서하고 치유한다. 각이져 있지 않은 원융무애의 바다다. 보이는 등과 보이지 않는 등에 대하여 앞과 뒤에 대하여 끊임없이 생각하며 불이문을 통과하는 시작 화자. 그녀는 이제까지의 선과 악이 분명한 이분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서 세상을 판단하고 살아가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는다. 보이는 등과 보이지 않는 등이 하나의 큰 원으로 합일되는 순간이다. 다른 시 ‘한 몸이 되기까지’에서도 “처음에 누가 누구를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지만/자기 몸 안에 다른 몸을 들이기까지 저들은/얼마나 많이 절망하고 스스로를 굴복시켰겠는가”의 표현도 원융이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상처에 대한 치유는 그 상처가 드러난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치유하기까지는 쉽지 않은 시간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나, 물러터진 모르타르였을 때
너, 내 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철근
쑤시고 할퀴고 우그리고
그래도 우리에게 격정의 여름이 있었고
눈보라 치는 겨울이 있었고……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팔을 풀지 않았지
물렁한 상처가 뾰족한 상처를 안으면서
우리는 얼마나 느리게 섞이어 왔던가
-「아직 공사중」부분
나와 너는 처음에는 서로 다른 개체요 존재였다. 그 표현이 나와 너에 쉼표를 찍은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시인의 의중이 쉼표 하나에서도 예민하게 드러난 예다. 이런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고 사랑을 한다. 이 시는 남녀의 성행위를 통하여 단순한 애정행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때로는 “할퀴고 쑤시고 우그리고“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어떻게 서로의 팔을 풀지 않으며 사는가를 읊고 있다. 이 시에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안으면서“, ”섞이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안는다는 행위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포용 한다는 뜻이고 섞인다는 것은 이질적인 남녀가 하나로서 혼융한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반드시 사랑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시인은 모든 상처에는 사랑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사랑이 있어야만이 모든 상처는 치유가 가능하다. 어떤 고난이 와도 ”서로의 팔을 풀지 않았지“의 의지로 끊기지 않는 사랑의 원을 만들 수 있다는 원환상징을 나타낸다.
만데빌라의 우물은 자궁과도 같아서
깊고 어둡다
나는 가끔
나를 낳은 것은
저 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헛손질하는 줄기가 그렇고
패인 상처 오래 가는 것이 그렇고
잘린 가지, 잎으로 발 빠르게
새 길을 내지 못하는 것이 그렇고
저렇게 붉으면서 제대로 된 열매 하나
내놓지 못하는 것이 그렇다.
그래도 만데빌라
부지런히 허공 살펴
실같이 가는 허리 쭉쭉 펴가며
저보다 큰 꽃
둥글게 매다는 것을 보면
실로 대견하고 고맙다
-「만데빌라」전문
나는 손옥자 시인의 ‘만데빌라’를 읽으며 우리는 아니 모든 사물은 원환상징의 요소를 지니고 존재한다는 생각에 젖어본다. 모든 사물은 근본적으로 응축하려는 경향이 있다. 응축이란 내밀화 되면서 궁극적으로 둥근 원이기 때문이다. 꽃은 둥근 형상만으로도 원환상징이다. 거기다 시인은 꽃은 우물이고 자궁과도 같다고 하였다. 우물이나 자궁은 생명의 씨앗을 기르는 물로 가득찬 장소다. 즉 만데빌라 꽃은 생명으로 충만한 원환성을 지닌 상징이다. 그리고 만데빌라는 이동하여 시적화자에게로 전이된다. 꽃과 내가 동일성을 띤다. 아니 나를 낳은 시원이 저 꽃이다. 그만큼 생명의 근본이 잠재되어 있다. 나와의 동일성인 꽃은 한편으로는 깊고 어둡다. 심연을 간직한 꽃이다. 보들레르는 ‘심연’이라는 작품에서 심연이란 추락과 상승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원형의 깊이로 보았다. 6개월은 열기 없는 태양 아래 있고 6개월은 달이 뜨는 밤으로 인식한 것 자체가 넓은 의미로는 이 세상이 바로 심연이며 이 심연을 극복하는 과정은 환상적인 염세주의를 극복한 뒤에 이상적인 낭만주의로 가는 길로 이해하고 있다.(우리 시문학사에서는 데카당스한 염세주의가 패배적 낭만주의인양 비치기도 했다.) 시적 화자도 만데빌라와 동일성을 띠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끝없는 심연 속으로 추락한 상처 투성이다. 가끔은 헛손질하는 환상과 잘린 가지를 가진 꽃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 모든 상처를 혼융시켜 “실같이 가는 허리를 쭉쭉 펴가며” 추락에서 상승으로 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보다 큰 꽃/ 둥글게 매다는” 원형상징의 꽃이 된다.
손옥자 시에 자주 나타나는 상처는 삶의 일상에서 생겼다. 이 상처의 치유를 위해 뜨개질하듯이 생명의 실을 감았다 풀었다 끝없이 반복하는 과정을 겪는다. 그 시간은 전혀 다른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 사는 것이며 사물과 사물끼리의 혼융이다. 이 혼융의 과정을 통해 모든 일상에의 상처가 치유(혼융)의 과정을 거치고 원환의 둥근형을 만든다. 이 원환은 모든 것을 끌어안고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이 바탕인 둥글고리다. 손옥자의 시에서 눈여겨 봐야할 점이 바로 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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