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 12권을 차례로 요약 정리하여 올립니다. 고병권님의 글이 워낙 깔끔하고 읽기 쉬우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 시리즈를 요약한다는게 오히려 작가의 글을 더 어지럽게 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서 후 정리라는 저의 작업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우려를 무릅쓰고 올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 6권 『공포의 집』 |
1. 권리 대 권리
돈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대부분 복잡성 안에 생겨난 틈을 이용
제도의 틈, 법의 틈, 시간의 틈, 계산의 틈을 파고듦
이런 틈마다 이른바 ‘전문가’가 둥지를 틀고 투기꾼이 자리를 폄
○ 노동일이란 무엇인가
‘필요노동+잉여노동=노동일’
마르크스는 특정 사회, 특정 시점에서 노동력의 가치는 어느 정도 폭은 있겠지만 평균값 형태로 정할 수가 있다며 대체로 ‘주어진 값’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봄
문제는 잉여노동시간, 6시간의 필요노동 이외에 노동자는 얼마나 더 일해야 할까
2시간을 더 일하면 1노동일은 8시간이, 4시간을 더 일하면 10시간이 될 것임
노동자는 더 줄이려 할 것이고, 자본가는 더 늘리려 할 것, 입장에 따라 다름
그래서 이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노동일은 불변적 크기가 아니라 가변적 크기다.” 필요노동이 주어졌다 해도 잉여노동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 1노동일이란 무엇인가
1노동일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합계 즉, 8시간, 10시간, 12시간 등 노동일의 길이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묻는 것
1노동일이란 자본가가 노동력을 하루 사용하는 시간, 그는 가능한 한 하루를 꽉 채워 사용하고 싶겠지만. 생명체가 하루 동안 지출할 수 있는 생명력에는 한계가 있음
자본가는 노동력의 ‘하루 사용권’을 구매했기 때문에 그 ‘하루’를 최대한 24시간에 가깝게 만들고자 함. 자본의 생존과 증식은 잉여노동의 흡수에 달렸기 때문
중요한 것은 이 충동에 내적 한계가 없다는 점, 외적 제약이 없다면 자본가가 잉여가치에 대한 충동을 제어하는 일은 없고, 언제나 ‘최대한’
○ 논변과 항변
노동일이란 무엇인가에서는 두 가지 입장
먼저 자본가-노동력은 내가 구매한 상품, 노동력의 사용가치란 가치를 증식시키는 것, 내가 구매한 상품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 다시 말해 가치증식을 위해 노동력을 최대한 짜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 그런데도 “만약 노동자가 나의 처분에 맡겨진 시간을 노동자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내 물건을 훔치는 것”
노동자-내가요구하는것은 딱하나 표준노동일(정상적 노동일, Normalarbeitstag), 상품을 판매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똑같다. 나는 내 상품의 값을 정확히 치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불하지 않은 것을 가져가서는 안 된다.
○ 마르크스의 몽타주 기법
마르크스가 자본가의 ‘말’을 논리 즉 로고스(logos)로 취급했다면 노동자의 ‘말’은 목소리 즉 포네(phōné)로 취급, 노동자의 경우 논리에 특별히 ‘음성’을 입힌 것
“나에 대해 당신이 대표하는(재현하는, repräsentierst) 그것은 가슴속에 심장을 갖고 있지 않다. 그곳에서 뛰는 것처럼 보이는(scheint) 것은 내 자신의 심장의 고동이다.” 말하자면 ‘자본’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살아 있는 게 아님
물론 이것은 주관적 착시가 아니라 역사적 사회형태에 따른 객관적, 집단적 착시임
○ 힘이 결정한다
어떤 상품이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구매자 소관이라는 자본가나, 노동력의 과도한 사용은 판매하지 않은 것을 강탈한 것이라고 말하는 노동자 모두 옳음
상품교환 법칙은 시장에서의 등가교환까지만 말해줌.
‘잉여노동시간’에 대해서는 둘의 말이 모두 성립한다는 것. 양쪽 모두가 정당성 즉 노모스를 갖추었음. 그런데 둘이 충돌함
“여기서는 권리 대 권리(Recht wider Recht)라는 이율배반(Antinomie)이 발생하는데, 이들 권리는 똑같이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서 보증되는 것들이다.”
자본가의 관심은 잉여가치를 늘리는 데 있고 노동자의 관심은 생명력을 지키는 것, 이름만 다를 뿐 잉여가치율을 높인다는 말과 착취도가 올라간다는 말은 같은 말.
“동등한 권리와 권리의 사이에서는 힘이 사태를 결정한다.”
노동일의 역사적 표준화(Normierung)는 과학과 논리를 통해 도출해낸 게 아님. 그것은 “총자본가 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자 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의 결과물임
2. 자본주의는 과로사회
○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
자본가의 ‘냉정’에 부합하는 이미지가 흡혈귀라면 ‘열정’에 부합하는 이미지가 좀비
생산의 목적이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인 곳에서는 잉여노동에 대한 욕망이 무제한적이지 않음-물욕과 치부욕의 차이, 세상 제일 부자도 만족을 모르는 게 치부욕
마르크스에 따르면 고대에도 “교환가치를 자립적 화폐형태로 얻으려는 곳”, 즉 금과 은의 생산지에서는 살인적 형태의 노동이 강요되었음. 물건들이 아니라 돈이 떠오른 곳, 다시 말해 치부욕이 전면화된 곳에서는 노동이 가혹했다는 것.
이는 노예노동이나 부역노동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자본주의에 편입된 사회에서 살인적 노동이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그렇게 되면 ‘야만적 잔학성’에 ‘문명화된 잔학성’ 즉 ‘과로’까지 덧씌워짐. 이익을 위해 자원을 탕진하듯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간생명을 탕진. 이것이 노예제와 자본주의가 만났을 때 일어난 일
○ 자본주의적 흡혈귀와 봉건주의적 흡혈귀
자본주의 공장에서의 노동일을 편의상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나누기는 하지만 특정 시간을 잉여노동시간으로 분리해서 말할 수는 없음
반면 봉건제에서 잉여노동은 ‘부역노동’의 형태를 취하므로 노동자가 감각적으로 알 수 있음, 봉건제에서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이 시간과 장소를 달리해서 이루어지니까
공장법이 제정된 배경에는 영국 노동운동의 성장이 있음, 그런데 마르크스는 공장법 제정이 자본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했다고 말함. 자본가의 탐욕을 제어하지 않으면 잉여가치의 기반인 노동자들의 생명력 자체가 고갈될 지경이었다는 것
경제적 관점, 그러니까 자본가를 위해서도 국가가 이윤을 향한 맹목적 충동을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 자본주의는 원리상 과로사회다
자본주의는 문명사회이면서 과로사회, ‘과로’란 일종의 ‘문명화된 잔학성’
과로는 자본주의가 발달한 곳에서 먼저 시작되고, 중심부에서 주변부 국가들로, 대기업에서 중소기업들로 이전됨. 상품생산의 사슬을 따라 주변부로, 아래로 떠넘겨짐
선진 자본주의사회로 넘어가면 과로가 사라지지도 않음, 과로는 자본주의의 원리
자본을 정의하는 잉여가치와 그 실체인 잉여노동에 이미 ‘과로’라는 뜻이 담겨 있음
과로가 자본주의의 원리라는 점은 그것이 호황이든 불황이든 상관없이 나타나며, 호황기보다 불황기의 과로가 더 심하다는 사실에서 확인됨
기계를 도입한 19세기 공장들에서 노동일이 더 늘어남, 기계를 놀릴 수 없으니까
게다가 기계에 투자한 비용을 빨리 뽑으려고 작업 속도를 올림(생산과정에 기계가 도입되면 작업 속도를 통제하기가 더 쉬워짐). 또 기계 조작에는 큰 힘이 들지 않기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로 노동이 확대됨. 공장에서 과로하는 인구층이 늘어나는 것.
‘과로’가 노동을 절약할 수단이 발명되지 않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는 점
버트런드 러셀 “현대의 생산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열어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왔다.”
과로를 없애려면 기계가 아니라 체제를 새로 발명해야
○ 시간 도둑질
마르크스는 자본가를 ‘인격화된 자본’이라고 불렀음
이런 시각에서 마르크스는 자본가에게 “노동자는 인격화된 노동시간일 뿐”
이미 19세기 공장에서 ‘풀타이머’(fulltimer),‘하프타이머’(halftimer)라는 말이 공공연히 사용. 우리 사회에서 1노동시간, 2노동시간, 3노동시간 등이 사람의 모습으로 곳곳에서 일하고 있음
3. 돈을 아끼고 생명은 낭비하다
○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위장이 아팠던 것
1850년대, 런던 시민들이 먹는 빵에 모래등 온갖 오물이 들어간다는 사실 폭로됨
진상조사위가 꾸려지고 1860년 ‘불량식품 제조 방지법’이 만들어졌으나,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할까 몸사리는 의회 의원들 때문에 법률이 효력를 발휘하지 못함
이물질이 들어갔음을 확인한 진상조사위가 ‘자유상업’에는 원래 ‘기교를 부린 물질’이 들어가기 마련이라는 태도를 보임, 그 자체가 기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기교를 부린’ 말, 이 말은‘sophisticated’인데, 기교를 부려 뭔가를 모호하게 만든걸 가리킴
자본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함. 노동일을 어길 수 없다면 시간의 한계를 갉아서 가루라도 떨어냄. 상품 제조에 대한 법적 규정을 야금야금 파고들고, 그렇게 만든 빵을 사람들이 먹어도 좋은지, 그렇게 만든 검댕이 비료를 밭에 뿌려도 좋은지는 ‘난 몰라. 규정에 저촉되지만 않는다면, 저촉 여부를 애매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심지어 저촉되더라도 들키지 않을 수만 있다면, 자본가는 과감하게 일을 벌임
이 점에서는 소비자들도 마찬가지. 런던 시민들이 과로에 시달리던 제빵 노동자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 것은 심장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위장 때문
○ 그들이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마르크스는 공장관리자인 스미스(Smith)가 즐겨 쓰는 단어 하나를 신랄하게 비난
“그가 우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uns)를 위해 노동하는 그의 ‘직공들’(Hände)이다.”
스미스가 말한 “밥도 못 먹고 일하는”‘우리’에는 스미스가 없음, 그들은 노동자들임
반면 “우리는 저녁6시전에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므로”에서‘우리’는 “바로 스미스”, 관리자인 ‘우리’가 노동력 사용을 멈추지 않으니 노동자들이 밥조차 먹을 수 없는 것
마르크스는 노동자들, 특히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우리’라는 허구적 공동체를 깨뜨림. 자본가가 ‘우리’라는 말로 자기 목소리를 모두의 목소리로 만드는 것을 막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강탈하거나 훔치는 걸 막음
‘우리’는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 될 수 없음. ‘너희’와 마주한 ‘우리’만이 있을 뿐. ‘우리’라는 허구적 동일성이 깨지고 계급투쟁의 심연이 열리는 것
○ 들리는 목소리와 들리지 않는 목소리
자본가가 자본이라는범주의 인격화인 것처럼 노동자도 노동력이라는범주의 인격화
하지만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자본의 한 형태인 가변자본이므로 자본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주체일 수 없음,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여기서 목소리의 주인공은 노동력을 담은 생체. 유통영역에서는 노동력의 판매자였고 생산과정에서 인격적 지위를 상실했다가 투쟁의 순간, 이를테면 파업의 순간 인격적 지위를 회복한 존재
다른 한편, 추상화된 노동자의 목소리는 현실 노동자의 목소리가 아님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은 자기 목소리를 쉽게 낼 수 없는 존재, 이들의 목소리는 파업 때 울려나온 노동조합의 목소리와 다름. 아이들은 초보적인 셈도 할 줄 모르고, 노동감독관의 질문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was ne jedge o’nothin)라고 답함
표준어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말이 언어로서 아무런 문제도 없고, 오히려 노동자들의 세계에서는 표준어로 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언어임. 마르크스는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인용함으로써 노동자가 자본가와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게 논리만의 문제가 아니며, 노동자의 말은 규범적 언어인 표준어를 쓰지 않고, 발음이 다르고 강세가 다르며 억양이 다름을 보임. 언어를 통해 계급이 드러나는 것
유념해야할 또다른 문제-아이들의 목소리는 목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는 존재의 목소리로 읽어야 함. 말을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 말이 들리지 않는 존재들이 있음. 아니, 그 이전에 자신들의 처지를 주어진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존재들이 있음
목소리를 낼수없는, 엄밀히는 목소리가 들리지않는, 더 엄밀히는 우리가 그목소리를 듣지않는 존재들이 있음. 그 소리를 다른 목소리와 동일시하면, ‘들리지 않는’ 상황은 “이중그늘”(doublyinshadow)로 악화됨. ‘그들은 말할수없다’는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가 아님. 문제는 그들의말,그들의 저항을 유효하게 해줄 제도적 배경이 없다는 것. 즉, 그들의 말을 들리지 않게 만드는 조건들에대한 물음이 필요. 소년들의 증언에서 옅은 음영만을 드리우는 소녀들과 여성들, 유럽 내 식민지인 아일랜드인들의 처지가 언급될 때 잠시 떠올리는 유럽 바깥의 식민지인들과 이주노동자들, 인간 노동자들의 처지나 노동력의 특성을 묘사할 때마다 비유로 등장하는 동물들이 그러함
그들은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그들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
‘우리는 들을 수 있는가’, ‘우리는 들으려 하는가’를 달리 표현한 것뿐
○ 살인자와 피살자
노동일이 무차별적으로 연장되는 곳의 노동자들은 빨리 늙고 일찍 죽고 많이 죽음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 노동자의 생명을 짜 넣는 일이라면 노동일의 무차별적 확장은 노동자의 생명에 대한 무차별적 착취. 생명에 대한 착취는 조금씩 일어나든 한꺼번에 일어나든 모두가 살인. 장시간 노동에 따른 과로사는 장시간 노동에 의한 살인
모든 노동은 ‘생명력의 소비’라는 점에서 살인적 속성을 가짐. 그러므로 어느 한계 이상으로 일을 시켜선 안 되며, 반드시 생명력을 복원할 자원과 시간을 제공해야 함
그렇게 하지 않은 노동은 모두 ‘살인적 노동’. 아니 그냥 ‘살인’이라고 불러도 무방
○ 24시간 노동일의 꿈
“가치증식과정의 시각에서 불변자본인 생산수단은 오직 노동을 빨아들이기 위해서, 노동 한 방울마다 거기에 비례하는 양의 잉여노동을 빨아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자본가의 24시간노동일충동을 자극하는 생산수단은 노동자에게는 생산물의 재료이고 수단이지만 자본가에게는 노동을 ‘빨아들이는’장치, 노동자가 쉬면 생산수단도 쉼
“생산수단은 이제 타인의 노동을 빨아들이는 수단으로 바뀐다. 더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하게 된다.…용광로나 작업장이 야간에 문을 닫고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들이지 못하면 그것은 ‘순전한 손실’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용광로나 작업장은 노동력의‘야간노동에대한 청구권’을 갖는다.”
야간노동이 끼치는 해악, 인간에게는 햇볕이 필요하고 아이들에게는 야간노동이 몹시 해롭다는 사실, 굳이 전문가의 입을 빌리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까지 지적해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 지적하지 않고 규제하지 않으면 자본가는 마치 몰랐다는 듯 혹은 ‘어떻든 불법은 아니지 않냐’라고 하면서 이를 강행함
자본가들과 정치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칭송하는 ‘절제’와 ‘금욕’, ‘절약’이 무엇에 대한 ‘낭비’인지는 말하지 않음. 용광로의 연료 낭비를 걱정하는 것은 그 대신 “노동자들 생명의 낭비”를 택한 것이고, 용광로 가열 시간의 낭비를 줄이겠다는 것은 “8세밖에 안 된 아이의 수면 시간의 손실”에서 이득을 보겠다는 심보
자본가는 연료를 아끼고 시간을 아끼고 임금을 아꼈으나 노동자들의 건강과 시간을 아낌없이 썼음. 한마디로 돈을 아끼고 생명을 낭비한 것
4. 공장의 탄생
○ 다시, 노동일이란 무엇인가
노동자가 노동력을 넘긴다는 것은 그것이 정상적(표준적) 조건에서 사용됨을 전제, 소유권이 아니라 사용권을 넘긴 것이므로 사용 후에는 동일한 건강 상태로 돌아와야
자본가가 생각하는 노동일 개념에서는 노동자의 모든 활동시간은 자본가의것, 자본가가 별수 없이 빼놔야 하는 휴식시간은 ‘생명체의 소생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시간’
“자본은 노동력의 수명을 문제삼지 않음” 바로 죽는건 문제지만 빨리 죽는건 문제가 아님. 새 노동자를 고용하면 됨. 자본의 관심사는 “사용 가능한 노동력의 최대치”
‘총자본가’ 즉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면 노동일을 적절히 규제하는 게 오히려 이익. “자본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도 표준노동일을 제정할 필요”
○ 식인자본은 너무 빨리 먹어치운다
표준노동일 제정이 이익이라는 것을 자본가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노동자를 저렴하게 쓸 수 있어 복원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것, 일회용품처럼 쓰고버리면 그만
노동일을 늘리면 노동자들의 생명력이 바닥날 거라고 경고해야 소용없음. 노동자가 되려는 사람은 널렸음. 런던 사람이 없다면 농촌에서 온 사람이 있고, 잉글랜드인이 없다면 아일랜드인이 있으며, 아일랜드인이 바닥나면 독일인이 있음
노동력의 가치란 한 사람의 능력을 사용하려면 그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문제
그런데 수요·공급이 급격히 변동하면 가치로부터 가격의 괴리가 커져,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가 애초 시장 상황에 달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듦.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노동력의 가치를 사람의 조달 비용 정도로만 생각. 그 사람이 그 능력을 생산하고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음
노동인구가 넘쳐난다고 노동시간이 줄지는 않음. 오히려 취업을 원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본가는 대신할 사람이 넘쳐나니까 노동자들을 더 혹독하게 부림. 그래서 19세기 초까지 노동일은 무한정 늘어났고, 그만큼 노동자 개인의 수명은 짧아졌음
1863년 영국 하원의원 윌리엄 페런드의 말 “면직 산업은 90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3세대가 지나는 동안 이 산업은 면직 노동자의 9세대를 삼켜버렸다.”
19세기 전반 내내 영국에서는 덩치가 커진 자본의 식욕을 감당하기 위해 교구별로 가난한사람들을 관리하던 구빈법위원회와 거래,구빈법위원회가 농업노동자의 명부를 넘기면 공장주가 사람을 선택하고, “이들 인간화물들은 일반화물과 마찬가지로 꼬리표를 단 채 짐마차로 송달”되었으며, 나중에는 “정규 상거래부문으로 발전”했을 정도
특히 산업자본주의초기 빈민,부랑인 수용시설인 구빈원은 노동력의 중요한 공급처. 역사학자 시드니 폴라드는, “근대적 산업, 특히 방적업이 큰 건물 내에서 행해지는 경우 그것이 감옥, 구빈원, 고아원 등과 결탁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말함
○ 뒷일은 나도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우리 시대만큼 사람들의 생명력을 낭비하는 시대도 없음. 자본가는 이렇게 가다가 “인류가 멸망할지 모른다”는 말에 꿈쩍하지 않음. 설령 “지구가 태양과 충돌해도” 그건 그의 문제가 아님. 오늘 나는 수익은 내몫이지만 내일 망하는 지구는 모두의문제
“모든 주식투기가 언젠가 한 번은 폭풍우를 맞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 폭풍우는 자신이 황금 빗물을 모아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에야 자기 이웃의 머리를 덮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뒷일은 난 몰라! 이것이 모든 자본가,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표어다.”
“자본은 사회가 강요하지않는한 노동자의 건강과수명에 전혀 관심을두지않는다.”
자본에게는 스스로의 증식운동을 억제할 내적 이유가 없고, 항상 최대한의 증식을 위해 움직임. 제약이 있다면 있는 한에서, 없다면 없는 한에서 항상 ‘최대한’임
이것은 자본가의 개인적 의지의 문제가 아님. 개인으로서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들과의 ‘경쟁’에 항상 쫓기고 있으며, 경쟁에서 지면 살아남을 수 없음
마르크스는 이를 ‘경쟁의 강제법칙’이라고 표현. “자유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적 법칙들을 개별 자본가들에 대해 외적 강제법칙으로 작용하게 만든다.”
개인으로서 자본가는 단지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 편법과 폭력을 쓰기도, 혁신을 단행하기도 하면서 그가 아는 건 경쟁자를 이겨야 한다는 것뿐, 법칙은 모름. 그런 행위를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적 법칙이 관철됨
○ 근대 노동윤리와 노동자의 탄생
19세기 이전 법령들에서 노동일을 강제로 늘리려 했던 이유, 아직 자본가에게 충분한힘이 없다는 뜻. “경제적 관계의 힘만으론 잉여노동을 충분히 흡수할수없어 국가권력의 도움을 받아야”했던 것. 자본가는‘죽기를 각오한 지원자들’이 몰려들때야 노동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수 있는데, 자본주의 맹아기에는 이런 일이 불가능
법으로 노동을 강제해야 했다는 건 노동자들이 노동에 거부감을 가졌다는 뜻. 먹고살아야 하니까 일을 하긴 하는데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 하고, 먹고살 것이 생기면 곧바로 그만둠. 틈만 나면 휴식하려 하고, 한마디로 노동규율이 잡혀 있지 않았음
법으로 노동을 강제하던 시절, 학문에서도, 종교에서도 노동의 가치를 설파하는 사람들이 나타남, 영국에서 대공업의 등장과 더불어 “노동일 연장의 태풍”이 몰아침
칼 폴라니의 표현을 빌리면, 바로 이때 “증기기관이 자유를 위해 아우성치고 기계가 인간의 손을 구하려고 절규”하기 시작. 주 6일씩 1년 내내 일하지 않는 태도를 질병으로 본 것. 이는 이 시기의 정치경제학자, 성직자, 철학자에게 널리 퍼진 생각
노동이야말로 부의 척도고 구원의 길이라는 생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음. 『국부론』(1776)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이 시기 인물이며, 그가 말하는 국부의 원천은 비옥한 땅도, 귀금속 광산도 아닌 사람들의 근면한 노동. 프로테스탄트교 목사들은 노동을 소명으로 간주했고 노동을 통해 얻은 현세적 부를 내세적 구원의 징표로 봄
가톨릭은 노동에 일정한 제한. 구체제(ancien régime)에서 프랑스 교회법은 노동자들에게 90일의 휴일(52일의 일요일과 38일의 공휴일)을 정하고,이 기간에 노동하면 범죄로 간주.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르주아들이 구교에 반기를 든 중요한 요인 중 하나
혁명때 집권한 부르주아들은 전통적 종교축일을 없애고,1주일을10일로 바꾸기까지
지그문트 바우만은 산업화초기 노동윤리의 설파자들이 타파하고자 했던‘병적 습관’ 중 하나가 “주어진 대로 만족하고 만족한 데서 더 바라지 않는 성향”이라고 봄
당시 노동자들에게는 “돈을 더 버는 것보다 일을 적게 하는 것이 더 매력적”,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게 아니고 사는 데 돈이 필요한 것, 노동은 딱 그만큼을 벌 정도만
당시 자본가들은 상품보다 먼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할 노동자, 자본가의 통제에 순응하고 공장의 규율을 엄수하는 노동자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을 깨달음
우선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앞다투어 노동자가 되려는 환경 조성, 그다음에는 일자리를 구해도 방심할 수 없게, 더 나아가 일을 잠시라도 쉬면 살기 어려워지도록 해야
전통적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평생을 허비하는 사람을 치료가 필요한 ‘도착증’ 환자로 봄. 그런데 이제 자신들이 나태와 방탕,인습에 물든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됨
○ 공장의 원형으로서 ‘구빈원’
“이 목적을 위해, ‘나태와 방탕 그리고 낭만적 자유의 몽상을 근절하기’ 위해, 또 ‘구빈세의 경감, 매뉴팩처에서 근면 정신의 장려와 노동가격의 인하를 위해’, 자본의 충직한 에카르트는 공적 자선에 의지하는 이런 노동자들,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을 ‘이상적 구빈원’(ideal Workhouse)에 집어넣자는 확실한 대책을 제안했다.”
커닝엄은 ‘완전한 치료’, 즉 제대로 된 노동자들을 만들어내려면 사람들을 구빈원에 집어넣어야 한다며, “이런 집은 ‘공포의 집’(HouseofTerror)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 ‘빈민’에 대한 구제책으로 ‘노동’을 ‘치료’수단으로 빈민과 노동, 치료가 결합된 곳
17세기 수용시설을 개편,아예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구호시설이나 노동을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교도소(houseofcorrection)와는 다른 수용시설이 만들어져, 노동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한 후 일을 시키는 강제 노역장(houseofindustry)이 생겨남
구빈원은 산업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인 17~18세기에 노동윤리의 이상이 투여된 곳, 노동을 통해 사람을 뜯어고치려 했던 강제수용소
커닝엄은 구빈원이 빈민들의 ‘피난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반전은 사람들의 심성을 뜯어고치겠다고 만들어놓은 18세기 ‘공포의 집’이 19세기 노동자들 편에서 보면 그다지 공포스럽지 않다는 것. 구빈원의 실제 노동일은 12시간이었는데, 19세기 노동자들로서는 이 정도의 노동일만 지켜져도 살 만했을 정도로 19세기 공장의 지옥 같은 현실은 18세기의 이상적 지옥을 이미 추월함
커닝엄이 ‘공포의 집’을 상상한 지 63년이 되던 1833년, 영국 의회는 4개의 공업부문에서 13~18세의 아이들만이라도 하루 12시간 이상은 일하지 못하게 하자고 제안하자, “영국 공업에 최후의 심판일이 닥친 것”처럼 난리 법석. 18세기의 ‘공포의 집’조차 아이들에게 허용하지 않으려 했던 것.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가 법정노동일을 뒤흔들 때 프랑스 노동자들이 제발 ‘12시간 노동일’만은 지켜달라고 절규. 1860년대에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은 청소년에 한해 노동을 12시간으로 단축하도록 규제
불과 몇 십 년 만에 과거의 지옥이 천국으로 보일 정도로 공포의집은 발전했던 것, 이것이 19세기 공장의 탄생. “자본의 영혼(Kapitalseele)이 그저 꿈만 꾸었던 1770년의 빈민들을 위한 ‘공포의 집’이 불과 몇 년 뒤에 매뉴팩처 노동자들을 위한 거대한 ‘구빈원’(Arebietshaus)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공장(Fabrik)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이 현실 앞에서 무색해지고 말았다.”
5. 시간을 둘러싼 전쟁
○ 역사가 말해주는 것
노동일이 12시간까지 오는 데는 수 세기가 걸렸지만 14, 16시간이 되는 것은 금방
“1760년대 대공업이 등장한 이후부터 눈사태처럼 무제한적인 노동일 연장의 태풍이 몰아침”, 그야말로 노동에 대한 자본의 ‘무절제한 향연’이 펼쳐진 것
노동자계급의 집단 저항으로 1833년 공장법에서 근대적 의미의 표준노동일이 제정, 그러나 제정과 동시에 그 개정을 둘러싼 계급투쟁, 힘겨루기의 대상이 됨
1833년 공장법은 노동일을 규제하기 위한 법이었음에도 아침 5시 반에서 저녁 8시 반까지 무려 15시간으로 규정! 식사시간 1.5시간을 제외해도 노동시간만 13시간 반
이 법의 청소년과 아동 노동에 대한 규제, 청소년(13~18세)은 12시간, 아동(9~13세)은 8시간 이상의 노동을 금지, 야간노동은 모두 금지
1833년 공장법 제정과 발효를 압박한 힘은 노동자들의 투쟁. 이는 1838년 ‘인민헌장’(People’s Charter)운동으로 발전. 여기서의 경제적 슬로건은 바로 ‘10시간 노동제’
중요한 것은 세력관계. 당시 자본가들은 ‘곡물법 폐지’ 문제로 지주들과 대립, 노동자들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자본은 ‘10시간 노동제’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피력, 자신들의 천년왕국을 위해 정치적으로 타협했던 것
1844년 공장법은 여성 노동을 법의 보호 대상으로 규정.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12시간 이상 노동과 야간노동을 금지. 13세 이하의 아동노동도 6시간 반으로 줄임. 성인 남성들의 작업 대부분이 이들과 협력했기 때문에 성인 남성 노동일도 사실상 12시간
공장법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힘’과 ‘정세’가 맞물리면서 1847년 공장법은 ‘10시간 노동제’ 입법화. 곡물법이 폐지되고 면화 등 원료에 대한 수입관세가 철폐되면서 자본가들의 “천년왕국”이 시작되자, 당시 지주 세력을 대변하던 토리당이 ‘10시간 노동제’를 발의해 통과시켜버림. 자본가계급에 대한 지주계급의 복수
1848년부터 ‘10시간 노동제’가 시행되었지만, 1848년 혁명은 지배계급의 모든 분파들을 “재산,종교,가족,사회를 구출하자는 공동의 구호 아래 뭉치게” 함. 공장주들은 1847년 공장법은 물론, 1844년과 1833년 법까지 “모든 법령들에 대해 공개적 반란”
사법 당국도 자본가 편, ‘재정법원’은 1844년 공장법을 위반한 공장주들의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판결. 법의 취지에 비추어 위법이지만 법조문 자체에 그 취지를 무색케 하는 문구가 있다는 이유. 이 판결로 ‘10시간 노동제’는 실질적 효력을 잃음
○ 내전 속에서 한 발짝 한 발짝
부르주아혁명사는 자신을 화려하게 내세운 역사지만, 화려한 불꽃처럼 수명이 짧음
반면 프롤레타리아혁명사는 패배하고 뒷걸음질치는 역사, 불완전함과허약함을 드러내는 역사, 한참 가다 멈추고, 완성된줄 알았는데 어느새 처음으로 돌아가 있는 역사
마르크스는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위대함이라고 생각. 패배함으로써 배우고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의 거리를 확보해간다는 것. 그러다 보면 언젠가 “어떤 반전도 있을 수 없는 상황”,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짐
1848년 혁명은 패배했지만 노동자들은 재반격, 어떻게든 살아내려면 10시간 노동제를 지켜내야 했음. 사법부의 판결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공격적 집회가 일어나, 결국 1850년에 공장법은 다시 개정됨. “공장주와 노동자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져, 결국 “모든 노동자의 노동일”에 대한 법적 규제장치가 마련됨
마르크스는 이 기나긴 전진과 후퇴, 중단, 회귀로 점철된 길이 사실은 승리의 길이었다고 적음. 자본가들이 ‘한발짝 한발짝’ 물러난 길은 노동자들이 ‘한발짝 한발짝’ 전진해간 길, 역사는 표준노동일 제정이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은폐된 ‘내전’의 산물임을 보여줌. 우리 눈에 나타난 것은 법조문을 만들고 바꾸는 일이지만 그 밑에는 힘 대 힘, 즉 계급투쟁이 있었다는 것
○ 노동일 단축과 자유시간
노동일 단축은 사회개혁의 첫 걸음, 아니 첫걸음을 떼려면 먼저 일어설 수 있어야 하니까 사회개혁보다도 우선해서 필요함. 타인에게 예속되지 않은 자유시간이 없다면 개혁도 혁명도 해방도 불가능. 자유시간은 일종의 예비조건.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갖지 못한 곳에서,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구상하고 시도할 자유를 갖지 못한 곳에서 사회개혁이나 해방은 불가능. 노동일 단축 투쟁이 단순한 권리 투쟁이 아닌 이유
○ 이것이 자본주의이며, 이것이 자본주의 정신이다
공장법의 역사는 우리에게 자본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줌.
‘자본의 정신’에서 ‘정신’은 의식이나 인식보다는 의지나 욕망, 충동에 가까운 말. 마르크스는 1847년 ‘10시간 노동제’를 둘러싼 논쟁을 보며 엥겔스의 표현을 빌려 이 “흡혈귀는 ‘아직 한 조각의 근육, 한 가닥의 힘줄,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씀. 이것이 자본주의이고, 이것이 자본의 정신
○ 노동자 곁에 있는 노동자
자본의 정신, 자본의 충동만 있는 게 아니라 저항의 본능, 투쟁의 본능이라는 것도 있음, 마르크스는 “본능적으로 생산관계 자체로부터 깨어난 노동운동”이라고 표현. 이 역시 인식 이전에 생겨나는, 과학적 해명 이전에 본능적 눈뜸 즉 각성이 있는 것
자본가와 노동자는 대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건 자본가의 술책. 대등하기 때문에 노동력 판매와 관련해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보호책을 제공할 필요는 없다는 식
노동력을, 일할 몸뚱이를 가졌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는 뜻. 그는 무언가를 가졌기에 그걸 팔기 위해 나온게 아니라 아무것도 갖지 못했기에 몸뚱이를 내놓은 것. 그게 아니라면 한번 붙잡으면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자신들을 놓아주지 않는 흡혈귀가 사는 끔찍한 공포의 집인 공장으로 다시 들어갈 이유가 없음. 그런데 노동자들은 지옥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일도 모레도 올 수밖에 없고, 들여보내달라고 필사적으로 간청하며, 심지어 어린 자식들까지 거기로 밀어 넣음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은 자기들을 괴롭히는 뱀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머리를 모으고 계급을 이루어, … 자신과 자신의 종족을 죽음과 노예 상태로 팔아넘기는 것을 막아줄 국가 법률을 제정하도록 강제해야만 했다.” 노동자의 연대가 힘의 원천
지배자들은 14세기부터 노동자들이 연대해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하고자하는 행위를 금지. 1799년과 1800년에는 노동자들의 조직 결성을 금하는 ‘단결금지법’ 제정. “노동자들의 단결은 14세기부터 이 법이 폐지된 1825년까지 중범죄로 취급되었”음
그러나 노동자들은 단결했고, 그 힘으로 1833년 처음으로 표준노동일을 제정.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한 시간, 즉 자본가 아래서 노동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 ‘언제 끝나는지’를 법적으로 확정한 것. 마르크스는“이로써‘양도할 수 없는 인권들’의 화려한 목록을 대신하는 … 소박한 마그나 카르타(bescheidne Magna Charta)”가 나타났다고 씀
주춤주춤 공장에 들어갈 때 노동자는 혼자인 줄 알았음. 공장에 자본가만 있는 줄 알았지만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봄. 그의 구원자는 그의 모습을 하고 그의 곁에 있었던 것. 자본가의 권리에 맞서는 권리, 자본가의 힘에 맞서는 힘이 ‘동료’의 모습을 하고 그의 곁에 있었던 것
6. 자본이 부딪힌 한계
○ 다시 나타난 스핑크스와 세 개의 법칙
마르크스는 현상을 보이는 대로 믿어버리면 진리는 언제나 역설에 봉착할 것이라고
잉여가치량이 더는 늘어날 수 없는 사회적 조건들이 나타나는 것. 하지만 자본가는 이 문제를 실천적 방식으로 해결. 그런데 그 겉모습이 우리가 아는 법칙과 충돌
어떻게 해서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더 늘리기 어려운 조건에 봉착하는지, 잉여가치량의 한계를 규정하는 세 개의 법칙을 제시
제1법칙“생산된 잉여가치량은 투하된 가변자본량에 잉여가치율을 곱한 것과 같다.”
전체 잉여가치량은 노동자 한 사람이 평균적으로 내놓는 잉여가치(m)에 노동자수(n)를 곱하면 나옴. 이때 노동자 한 사람이 내놓는 잉여가치(m)는 자본가가 한 사람의 노동력에 지불한 가치(v)와 잉여가치율(m/v)을 곱한 값. 전체 잉여가치량(M)은 잉여가치율(m/v)에다 한 사람의 노동력에 지불한 가치(v)를 곱하고 여기에 다시 노동자 수를 곱함. M=(m/v)×v×n. 자본가가 한 사람의 노동력에 지불한 가치(v)에 노동자 수(n)를 곱한 값은 자본가가 전체 노동력에 지불한 가치 즉 가변자본 총액(V)과 같음. 위 공식에서 ‘v×n’을 ‘V’로 바꾸어 쓰면 M=(m/v)×V
제1법칙이 의미하는 바는, 잉여가치량을 늘리고 싶으면 잉여가치율(m/v) 내지 착취도(a'/a)를 올리든지 고용(n)을 늘려야 한다는 것
제2법칙은 노동일의 절대적 한계에 관한 것. 아무리 고용 노동자 수나 가변자본 감소를 ‘노동일 연장’으로 보존하려 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 절대적 장벽의 존재는 자본으로 하여금 방향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게 함
제3법칙은 잉여가치율과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을 때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은 가변자본의 크기에 정비례한다는 것. 잉여가치량은 불변자본에 지출한 부분과는 관계가 없고, 오로지 가변자본의 크기와만 관계한다는 것
이 법칙들은 한결같이 잉여가치량의 한계를 암시. 자본이 언젠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장벽처럼 보임.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율’(착취도)과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졌다고 가정. 이것은 공장법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현실을 반영한 가정임. 공장법의 역사는 자연적·생물학적·수학적 한계만큼이나 정치적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줌
과연 자본은 이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까
○ 무지의 피난처
경험적으로 알듯이 자본은 살아남았음. 단지 살아남는 수준이 아니라 더욱 번성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것은 앞서 본 법칙과 반대 되는 양상
제3법칙에 따르면 잉여가치량은 가변자본에 정비례하는데 경험상으로는 노동자보다 기계에 돈을 더 많이 쓴 자본가가 돈을 더 버는 것
“이 법칙은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경험과 명백히 모순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 설명하는 일
스피노자는 현상을 우리에게 비친 이미지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함. 일출 때 태양이 커 보인다고 해서 아침에는 태양이 더 커진다고 말해버리면 안 된다는 것. 커 보이는 것은 이미지이고 이런 이미지를 따라 만들어진 지식은 상상에 불과함
왜 노동력을 많이 사용하는 곳의 이윤율이 더 높지 않은가?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함, “속류경제학은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서도 현상의 법칙을 무시하고 겉모습에만 집착하고 있다. 그들은 스피노자와는 반대로 ‘무지는 충분한 근거’라고 믿는다.” 스피노자가 신을 ‘무지의 피난처’로 쓰는 목적론자들을 비판하며 한 말을 염두에 둔 것
○ 출구 없는 벽 앞에서
도대체 자본은 어떻게 이 궁지를 벗어난 걸까
마르크스는 제3법칙에 대해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이 법칙은 지금까지 다뤄온 잉여가치의 형태에만 유효하다”고 함. 그러니까 다른 형태의 잉여가치가 있다는 이야기
마르크스는 헤겔의 『논리학』에 나오는 ‘양질 전환’을 언급하며, 양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질적 변화가 나타난다는 말이 옳다며, 곧이어 두 가지 이야기를 꺼냄
하나는 자본이 ‘노동에 대한 지휘권’으로, 또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생활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하도록 강요하는‘강제관계’로 발전했다는 것, 그러면서 “자본은, 타인의 노동을 만들어내고 잉여노동을 뽑아내고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모든 생산체계를 능가한다”고 말함. 다수 노동자들의 노동을 지휘하고 조직하는 것을 통해 노동시간을 동일하게 유지하면서도 잉여노동을 더 뽑아내는 방식
또 하나는 생산수단에 관한 것. 이제까지 생산수단은 수동적 대상이었던 것과 달리, 기계 등의 생산수단에 대해 “타인의 노동을 빨아들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함.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대상으로 삼아 노동을 적극적으로 빨아들인다는 것 “화폐가 생산과정의 대상적 요소 즉 생산수단으로 전환하기만 하면 그 생산수단은 타인의 노동과 잉여노동에 대한 권리증명과 강제권으로 전화된다.”
이제는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향해 피를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