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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외 답사 스크랩 고구려, 발해역사의 보완(2)
김창집 추천 0 조회 68 11.09.09 08: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북녘의 문화유산 - 평양에서 온 국보들'을 보고

 

 

* 금동맞뚫음장식 - 고구려. 평양시 진파리 7호무덤. 길이 22cm. 국보

 

△ 고구려와 발해의 웅비(雄飛)

 

 광복 이후 북한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된 분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신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의 고구려, 발해사이다. 옛 영토에 자리했다는 입지적 조건과 '고조선 - 고구려 - 발해 - 고려'로 이어진다는 민족 정통성 계승의식 등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북한의 고구려 유적 조사는 1949년 6월 안악 고분군의 발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무덤에 집중되던 초기 연구는 1958년∼1961년까지 4년간에 걸친 안학궁과 대성산성에 대한 대규모 발굴 조사를 계기로 도성과 산성분야로 확대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무덤과 산성, 집자리는 물론 토성리 절터, 쌍계사 절터 등과 같은 곳의 발굴이 이루어져 유물의 종류가 보다 광범위해졌다.

 

 

* 돌사자 - 고구려. 평양시 중구역 영명사 터 출토. 높이 86cm, 83cm. 국보

 

 관련 기록이 많지 않은 발해사 연구는 고고학 조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1963년 중국학자들과 공동으로 '조중 공동 고고학 발굴대'를 조직하면서부터이다. 이 발굴대는 1965년 7월까지 만주 일대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유적을 공동으로 발굴하였다. 1980년대에는 북한 지역에 남아 있는 발해 유적을 찾는 작업을 활발히 추진하였고, 그 결과 함경남북도에서 상당수의 유적을 확인했다.

 

 북한에서의 고구려, 발해사 연구가 민족 정통성 계승 문제에 집중된 편향을 보이고 있지만, 고구려와 발해가 우리 민족사에서 정당한 위치를 가질 수 있도록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하겠다. 전시된 당시 유물을 보면, 고구려의 금동맞뚫음장식, '영강 7년'이라는 글이 새겨진 광배, 평양성 명문석, 돌사자상 등이고, 발해 것으로는 치미, 광배, 청동보살 등이다.

 

 

* 치미, 흑룡강성 제9절터, 발해 10세기, 높이 91㎝, 너비 91.5㎝, 두께 36㎝

 

▲ 치미의 화려함 

 

 치미는 절 지붕 용마루 끝을 마감하는 것으로,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내에 있는 제9절터에서 출토된 것이다. 발해의 절터에서 치미가 출토된 예는 다수가 있지만, 이 중 완전히 복원되는 것은 상경성 제1절터와 제9절터에서 출토된 것뿐이다. 이 치미는 진한 녹색의 유약을 바른 것으로, 두 날개에는 각각 17개의 돋을 선을 새겨 새의 깃을 표현하였다. 날개와 몸통 사이에 7개의 구멍을 뚫고, 거기에 머리가 꽃모양으로 생긴 장식을 맞추어 넣었는데, 가운데 꽃술 부분이 둥그스름하게 도드라졌고, 그 둘레에는 다수의 꽃잎을 새겨져 있다.

 

 몸체의 등 부분에는 작은 구멍들이 줄을 맞추어 가면서 수십 개나 뚫려있다.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면서 펼친 두 날개 사이로 주둥이를 쑥 내민 형상에 녹색 유약이 잘 조화되어 전반적으로 힘이 있고 세련된 느낌이다. 제1절터에서 출토된 치미는 형태가 약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양식이다. 안학궁에서 이와 동일한 대형의 치미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적 계승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 청자 국화무늬 병 - 고려 12세기 후반∼13세기 전반. 높이 40cm. 국보 

 

▲ 고려 미술작품의 아름다움

 

 후삼국이 혼란기를 극복한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국민을 통합하고 사회의 안정을 이루었다. 정치적으로는 후삼국의 호족을 대신하여 중앙귀족이 주인공이 된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불교적 색채를 띄면서도 화려하고 세련된 귀족 문화가 발달하였다. 고려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화려한 삶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즐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분야는 공예였다. 공예는 귀족들의 생활 도구와 불교의 식에 사용되는 불구(佛具)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도자 공예가 뛰어났다. 우선 금속 공예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 불교가 더욱 융성해지자 신앙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이 요구되고, 이에 불교의식과 규범에 의거한 다양한 공예품이 만들어졌다. 현재 전하는 불교 공예품으로는 범종(梵鐘), 쇠북, 향로, 정병(淨甁), 사리기, 보탑(寶塔), 석장(錫杖) 등이 있다.

 

 

* 청자 물가풍경무늬 대접 - 고려 13∼14세기. 높이 8cm. 준국보

 

 신라의 종을 계승한 범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양식과 세부의장이 다양하게 변화하였으며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소종(小鐘)도 많이 제작되었다. 향완(香 )과 정병(淨甁)은 기형의 아름다운 선과 더불어 표면에 홈을 파고 무늬를 장식하는 입사(入絲) 기법의 발달로 특히 세련된 감각의 조형미를 완성하였다. 사리 장엄구는 통일신라에 비해 좀더 간략화되고 규모가 작아졌다. 사리를 담는 내용기(內容器)는 수정제품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청ㄷ오합이나 은합 또는 청자합과 소형의 보탑형 사리기는 외용기로 사용되었다.

 

 전시된 고려의 금속공예 작품을 보면 우선 국보인 고려 태조상을 비롯하여 국보인 신계사 양완, 준국보인 쇠북, 국보인 화로, 역시 국보인 대자사(大慈寺) 범종, 국보인 지팡이 장식, 불일사 금동소탑, 은제 사리함, 준국보인 고려금속활자 등이다. 불교 조각으로 전기 불상은 전반적으로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단순하고 육중한 느낌이 강조되었고, 지방에 따라 특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후기에는 전기보다 세련되고 온화한 모습이 유행되었다. 작품으로는 국보인 관음사 관음보살, 준국보인 금동관음보살 등이 있다.

 

 

 

* 고려태조상(부분) - 고려. 개성시 현릉. 높이 138.3cm. 국보

 

△ 고려 태조 왕건상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상은 개성시 해선리 현릉에서 출토된 고려 10세기 말∼11세기초의 작품으로 국보이며 높이 143.5㎝이다. 1992년 고려 태조 왕건릉인 현릉(顯陵)의 보수 공사 중, 봉분 북쪽 약 5m 지점에서 출토되었다. 발견 초기에는 '청동불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연구 결과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임이 밝혀졌다. 이는 1429년(세종 11년) 태조 왕건의 주상(鑄像)을 능 옆에 묻었다는 '세종실록'등의 조선시대의 기록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왕건(877∼943)은 918년 고려를 세운 후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최초의 임금으로, 951년경 동상을 만들어 개성의 봉은사(奉恩寺)에 모셨다. 왕건 동상은 고려 왕실의 가장 신성한 상징물로서 국가적 의례에서 중심적인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 동상은 나신상이지만, 머리에는 중국 황제들이 쓰는 통천관을 쓰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발굴 당시 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금도금을 한 청동조각과 얇은 비단 천들이 붙어 있었는데, 이는 당초에는 몸에 도금(鍍金)을 하였으며, 비단으로 만든 옷을 걸쳤음을 보여준다.

 

 

* 불일사 금동소탑 - 고려. 개성시 불일사 내. 26cm, 18.5cm, 11.5cm, 국보
 
△ 공양탑의 단정한 아름다움 

 

 1960년 개성시 판문군 선죽리 불일사 절터에 있던 5층 석탑의 탑신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석탑 내부에서는 금동탑, 석제 소탑 등 20여점과 청자 사리합, 불경 등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금동 9층탑, 금동 5층탑, 금동 3층탑 등 3점이 이번 전시에 출품되었는데, 탑신과 기단부가 별도로 제작되어 조립되도록 되어 있다.

 

 금동 9층탑은 옥개석과 탑신의 세부 표현에서 목탑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금동 5층탑에는 옥개석에 매달린 풍경이 7점 현존하고 있으며, 상륜부의 장식도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한 금동 3층탑의 경우 도금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불일사는 고려 광종대인 951년 지은 절로,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5층석탑은 현재 개성시 고려박물관에 이전 복원되어 있다.

 

 

* 관음사 관음보살 - 고려. 개성시 산성이 관음사. 높이 113cm. 국보

 

▲ 화려하게 꾸민 관음사 관음보살

 

 여래의 자비심과 구제를 상징하는 관음보살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큰 인기를 누리며 변함 없이 신봉되어 왔다. 이 보살상은 원통형의 보관에 저부조로 화불을 새겨 넣었으며, 중국 원나라의 라마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아 온몸을 장신구로 매우 화려하게 꾸몄다.

 

 대리석임에도 각종 장식으로 꾸며진 신체를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으며 부분부분 맞뚫음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오른쪽 다리를 의자 아래로 내린 유희좌(遊戱座)를 취하고 있는데, 높은 보관과 더불어 고려시대 말에 크게 유행한 관음보살상 모습 중 하나이다.

 

 

* 금동보살 - 조선. 높이 49.5cm.

 

△ 아름다운 조선시대의 미술

 

 사대부를 중심으로 세워진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와는 다른 국가의 틀을 만들기 위해 숭유억불 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의 화려한 불교문화의 전승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문화 예술에 대한 미적 기준이 바뀌었다. 시대와 장르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조선의 공예, 회화, 조각, 건축 등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실용과 검소를 중시하는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미감이 잘 구현되어 있다.

 

 북한에서의 미술사 연구는 이여성의 선구적인 저서인 '조선미술사 개요'(1955)가 두드러지는데, 이 때 이미 근로 인민대중의 모습을 그린 김홍도, 윤두서, 김두신 등의 사실주의 적 미술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전통이 성립되었다. 1960∼1970년대에는 가시적인 성과가 크게 보이지 않다가, 1980년대 들어 조선미술가동맹이 '조선미술사'(1989)와 조인규 등의 공저로 나온 '조선미술사' 1, 2권이 나왔다.

 

 

* 선녀도 - 김홍도. 18∼19세기. 비단에 먹·담채, 19×13.2cm. 국보   

 

▲ 아름다운 단원 김홍도의 선녀도

 

 이 작품은 김홍도만의 활달하고 거침없는 필치가 절제된 묵법 및 담채와 잘 어울려 감칠 맛 나는 회화미를 보여주는 득의작(得意作)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오른편 하단에 '단원'이라는 묵서와 '사능'이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있다. 선녀를 다룬 유사한 소재로는 '생황을 부는 꼬마 신선(仙童吹笙圖)'과 '밤 피리 부는 신선(仙人夜笛圖)' 등이 소개되었지만,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화경(畵境)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김홍도의 50대 이후 후기 양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화면의 인물은 영지선녀이다. 선녀는 오른편 어깨에 괭이를 맨 채 고개를 돌려 왼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등에 진 바구니에 벌써 영지가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영지를 다 캐고 내려오는 길의 한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후덕한 얼굴에 띄워진 부드러운 미소와 자애로운 눈길은 과연 신선만의 영지를 인간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던 선녀의 고운 마음씨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 하며, 얼굴에 나타난 미묘한 색조의 담채(淡彩)에는 인간을 사랑한 선녀의 애틋한 감정이 묻어나는 듯하다.

 

 

* 금동아미타삼존불 - 조선. 강원도 내강리. 높이 19.cm. 국보

 

△ 금동 아미타삼존불의 단아한 모습

 

 본존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협시는 보관에 화불이 있는 관음보살이고, 우협시는 두건을 쓰고 석장과 보주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보좌하고 잇는 삼존불이다. 보선시대에는 주로 삼존불을 청동으로 만든 불감에 모셨는데, 이 삼존불 백자합에 모신 독특한 형식을 보인다. 불상 내부에서 '경태(景泰) 2년(1451)'이라는 글이 적혀 있는 발원문이 나왔다고 한다.

 

 

* 백자 매화무늬 병 - 조선 19세기. 높이 25cm. 국보

 

▲ 여백의 미를 존중하는 조선의 자기

 

 화려한 고려자기와는 달리, 조선 자기는 인공적인 면을 배격하고 여백의 미를 존중하는 특색을 띠고 있다. 분청사기가 15∼16세기에 만들어졌다면 백자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 특히 백자는 청자보다 깨끗하고 담백하며 순백의 고상함을 풍겨서 선비들의 취향과 어울렸기 때문에 널리 이용되었다.

 

 위 작품은 19세기 백자의 특징인 푸르스름한 백색을 띠고 있다. 목이 길게 뻗고 무게 중심이 몸체의 아래쪽에 놓인 안정감 있는 형태는 19세기 백자병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몸체에 매화꽃이 핀 매화가지가 양각되어 있는데, 솜씨가 단아하다. 백자의 청백색 바탕과 조화를 이룬 매화꽃은 마치 눈꽃 속에 피어난 매화를 보는 듯하다.

 

 

* 용 - 안견. 조선. 종이에 먹. 옅은 색, 25.5×36cm. 국보

 

△ 안견의 소박한 그림

 

 안견은 생몰년 미상으로 안평대군의 후원 아래 선인의 회화를 두루 통달한 끝에 특유의 문호를 개창하여 마침내 '동방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던 조선 초기의 화원 화가이다. 북송(北宋) 때의 화가 곽희(郭熙)의 화풍을 바탕으로 여러 화가의 장점을 절충, 많은 명작을 남겼는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고 초상화, 사군자, 의장도 등에도 능했으며, 그의 화풍은 일본의 수묵산수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명한 '몽유도원도', '사시팔경도', '소상팔경도', '적벽도(赤壁圖)' 등이 있다.

 

 위 작품은 화면 왼쪽 하단에 안견의 호와 관직명을 쓴 뒷사람이 묵서가 있어서 안견필 또는 안견파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짙은 구름을 뚫고 포효하고 있는 오조룡을 그렸는데, 전통시대에 있어서 용과 구름은 어진 군주와 현명한 신화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애호된 주제였다.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하는 전형적인 용의 모습과 달리 살짝 벌어진 입과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한 시선에서 절제된 감정 처리의 참신성이 돋보인다.

 

 

* 지팡이 장식 - 고려. 묘향사 보현사. 높이 29cm. 국보

 

▲ '북녘의 문화유산 - 평양에서 온 국보들'을 보고 

 

 친절한 설명의 글이 붙여 있고 시대별로 대표적인 유물과 미술 작품들이 전시돼 있어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바로 새로 꾸민 박물관에 들어가 발해까지 보고 나왔지만 너무 유물이 많아 지루한 느낌이 든 반면, 이곳은 다음에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오다 돌아가 다시 보기도 했다. 남북 교환 전시 형식으로 전시된 작품들은 처음으로 밖으로 대량 반출되었다는데, 입구에서는 유물을 골라 싸서 옮기고 전시하기까지의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생각하기를 유물 중에는 남쪽에서 보기 힘든 북쪽에 위치했던 나라인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유물을 집중적으로 가져 왔겠지 했는데, 그를 넘어 시대를 초월한 작품들을 골고루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위에 보이는 지팡이 장식이라든가 아래에 나오는 김진우의 현대 그림 '참대' 같은 아름다운 작품과 좀처럼 그 옆을 떠나기 힘들게 했던 '금동보살'의 미소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오늘까지 서울 전시를 끝내고 8월 28일부터 10월 26일까지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전시한다는데 한 번 가보기를 권한다.

 

 

* 참대 - 김진우. 1934년. 종이에 먹, 149.5×228cm(원작 6폭 병풍). 국보   

 

♬ 전쟁과 평화 중 - Natasha's Wal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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