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3,273m의 라반라타 산장에서 하룻밤 자며 적응을 한 덕분인지 고소증은 크게 오지 않았다. 새벽 2시30분 칠흑같이 깜깜한 밤이었는데 금세 어둠에 익숙해졌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세계 각국에서 온 지구인들이 희박한 산소와 가파른 오름길에서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까만 화강암반이 끝없이 이어진다. 굵은 밧줄이 바위에 누워 길을 안내하고 있다. 정상을 오르는 이들의 헤드랜턴이 가로등처럼 키나발루의 최고봉 로우봉(4,095m)을 향해 아주 길게 뻗어 있다. 마침내 동녘에서 아침 해가 솟는다. 여명의 새벽, 서쪽에 무지개가 선다. 한기를 느낄 새도 없이 두렵고 낯선 감동이 피어올랐다.
성요한봉(4,091m)이 봉화처럼 타오른다. 꼭대기부터 살아나는 불꽃처럼 적도의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났다. 억겁의 세월이 빚어낸 검은 화강암 덩어리가 장엄한 근육을 드러낸다. 구름은 이미 저 아래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고산족이 사는 마을이 점점이 보인다. 남중국해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여기가 동남아시아 최고봉 키나발루산이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 왕복 18㎞ 1박2일 코스
동남아시아 최고봉 키나발루산 산행은 꼬박 1박2일이 걸린다. 거리로 따지면 왕복 20㎞도 안되니 준족이라면 당일 산행도 가능할 것 같지만 고산에서는 금물이다. 반드시 하룻밤을 산장에서 지낸 뒤 올라가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
보통 메실라우 리조트나 키나발루 공원 본부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이번에 다녀온 코스는 해발 1,564m의 키나발루 공원 본부~팀포혼 게이트~라양라양 산장~라반라타 산장(1박)~사얏사얏 산장~키나발루 정상(로우봉)을 거쳐, 올라간 코스와 반대로 하산했다. 1박2일 동안 왕복 18㎞를 16시간30분에 걸쳐 걸었다.
코타 키나발루 수트라하버 리조트에서 키나발루 공원 본부까지 차로 2시간이 걸렸다. 공원 본부에서 등반을 위한 수속을 밟는다. 여기에서 현지 산악 가이드를 배정받는데 한참이 걸려서야 도착했다. 빨리 산행을 하고 싶은 조급증이 일었지만, 이곳에서는 느긋함을 배워야 했다.
공원에서 발급한 ID카드를 목에 걸고, 샌드위치 도시락을 받고서야 열대우림에 발을 들여놓았다.
셔틀버스로 4.5㎞를 이동해서 팀포혼 게이트에서 또 명단 확인을 받았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도 있겠지만 탐방객 관리가 엄격했다. 열어준 철문을 통과해 산행을 시작한다. 벌써 해발 1,866m이다. 지리산 높이에 거의 육박하고 있다.
오늘은 6㎞ 지점에 있는 라반라타 산장까지 가면 된다. 산장까지는 4~6시간 정도 걸리는데 우리 일행은 5시간20분 걸렸다. 첫날 산행은 그런대로 양호했다.
팀포혼 게이트를 지나 10분쯤 갔을까. 작은 폭포가 나온다. 카슨 폭포다. 물줄기는 15m 정도. 연중 그 정도의 수량이란다. 매일 비가 내려주기 때문이다.
칸디스 쉼터가 나왔다. 1㎞ 지점이다. 키나발루산 산행은 물 걱정과 화장실 걱정, 쓰레기 버릴 고민은 않아도 된다. 거의 500m에서 1㎞ 간격으로 쉼터나 산장이 잘 마련돼 있다. 쉼터에는 화장실과 식수, 그리고 배낭을 비울 수 있는 휴지통이 있다. 열대의 신기한 식물들이 자꾸 발목을 붙잡는다. 나무 하나에 깃든 생명체가 어림잡아도 10개 종은 넘는 것 같다. 오만한 난초는 나무 위에서 꽃을 피웠다. 메실라우 리조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라양라양까지 3시간10분이 걸렸다.
익숙한 말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한국인 부부이다. 근래에 산행에 재미를 붙여 휴가를 이곳까지 왔단다. 메실라우 코스는 오르내림이 있고, 라양라양까지 거리도 팀포혼 게이트보다 한 2㎞ 더 길었다고 한다. '정보 부족'이라며 깔깔 웃었다.
한국에서의 일반적인 산행은 1시간에 2㎞는 간다. 그런데 여기서는 좀체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계단과 직등 구간을 한땀 한땀 발걸음 하나로 고도를 높여가니 어쩔 수 없다.
적도 열대우림에 솟은 3,900m 이상 봉우리만 8개
라양라양 산장을 지나니 정상 봉우리들이 자주 보인다. 라반라타 산장도 그 아래 하얀 자태를 뽐내고 있다. 3,900m 이상인 고봉만 무려 8개. 멀리서 본 키나발루산이 마법의 성처럼 뾰족한 것은 이런 봉우리 때문이었다.
산장 앞 너른 공터엔 특이하게도 족구장이 마련돼 있었다. 희박한 산소에서도 야생화는 노란 꽃을 피웠다. 조금 쌀쌀했다.
산장의 뷔페식당은 인종 전시장이다. 호주 싱가포르 아이슬란드 캐나다 홍콩 한국 스페인 독일인들이 뒤섞여 있다. 키나발루산을 찾는 이들이 그만큼 많고 다양했다.
라반라타 산장에서 모두 3끼를 먹었다.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오전 2시부터 새벽참을 준단다. 정상에 갔다 돌아와서 아침을 먹는다.
이층 침대의 위 칸에서 자는데 새벽에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박이다. 잠을 살짝 깼다. 다행히 고산증은 오지 않았다. 무난한 산행이 될 것 같다.
오전 2시30분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선다. 정상까지 3㎞는 될 것 같다. 라반라타 산장은 6㎞ 지점이고 해발 4,000m 근처에 8.5㎞ 이정표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무려 3시간50분이나 걸렸다. 보통 3~4시간 정도 걸린단다. 적도라 일출 시간은 연중 똑 같다. 오전 6시15분에서 35분 사이에 해가 뜬다. 6시10분까지는 정상에 도착해야 한다.
정상에는 오전 6시30분에 도착했다. 여명은 제대로 봤고, 일출은 정상 바로 아래에서 맞아야 했다. 산장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사얏사얏 산장을 통과하면 흙 한 줌 없는 화강암이다. 정상까지 하얀 밧줄로 연결되어 있어 길잡이가 되었다. 발밑에서 뭔가 후다닥 지나간다. 고산쥐인 모양이다. 어둠 속이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둠을 밟고 올라 빛을 담았다. 남봉을 바라보며 정상으로 착각했으나 그 뒤에 성요한봉, 당나귀귀봉, 어글리시스터봉이 있고, 최고봉 로우봉이 있었다. 로우봉은 초등자 영국인 로우의 이름을 따서 붙었다.
정상에서 20분 동안 있었다. 어쩌면 다시 못 볼 풍광을 눈에 담느라 사실 바빴다. 우주선에서 지구를 보는 착각에 빠졌다. 푸른빛 도는 지구는 참 아름다웠다.
정상에서 산장까지는 2시간40분 만에 내려왔고, 산장에서 팀포혼 게이트까지는 4시간40분 만에 내려올 수 있었다.
|
첫댓글 많은 유혹 당부 드립니다. 아직은 침만 삼키고 있습니다.
입질중 입니다~~~ㅎㅎㅎ
앉아서 후회하는것 보다는 가보고 즐기는 것이 훨~ 좋을 겁니다 미지의 세계가 기다립니다
국장님!~~~
해외산행가면 진짜 만디까지 올라 갑니까?..
케블칸가 거거 타고 가는거 아잉교?..
가이드가 여잔데~~~ 말레이지아는 가이드가 업어준다는 야기도 있네요~~~"이건 진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