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순종으로 많은 상을 받은 우리 가정
서석군 • 김인숙 가정
1 내 고향 봉정리, 2 통일교회 입교, 3 약혼 및 축복,
4 동원, 5 가정출발, 6 공적 활동, 7 자녀교육
주요 내용 : 김인숙 권사가 집필. 절대순종과 동원 및 기적체험, 많은 상을 받은 것, 3대가 같이 살며 교회의 리더로서 일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축복가정 등
1. 내 고향 봉정리
나(김인숙)는 1959년에 전남 보성군 문덕면 봉정리 반송 부락 615번지에서 2남 4녀 중에서 장녀로서 탄생했다. 반송부락은 문정공파 광산 김씨 마을이고, 다른 성씨는 두 가구만 살고 있다. 아버지 김재만(1933년)과 어머니 윤순례(1938년생)는 법이 없이도 살 사람으로서 칭송을 받았고, 그런 부모님의 슬하에서 자란 형제자매들도 착하게 성장하였다. 어린 나의 마음에도 칭찬받는 부모님이 자랑스러웠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우리 집은 마을 중간쯤에 있었는데, 마을 끝에 두레박 우물이 있었다. 수도(水道) 시설이 없던 때라서 새벽마다 물을 기르는 것이 큰 일과였다. 물동이에 물을 담고, 머리에 또아리를 하고, 집에 있는 큰물항아리에 담았다. 일기예보가 정확하지 않은 때라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게 되면 물을 긷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힘들게 물을 길어다 사용하였기에 물을 아껴서 사용하였다. 한번 쓴 물을 버리지 않고 걸레를 빨아서 쓰곤 했다.
밥을 지을 때도 가마솥에 나무를 때서 밥을 지었다. 석유로써 불을 켜는 곤로에 냄비를 얹고 반찬을 요리하였다. 가을이 되면 산에 가서 상수리나무나 소나무 잎을 모았다. 새끼줄 두 개를 바닥에 나란히 놓고, 그 위에 생솔나무 가지를 꺾어서 깔아서 잎들이 아래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잎들을 긁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다시 생솔나무가지로 덮어씌우고 새끼줄로 꽁꽁 묶어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집마다 산에 가서 낙엽을 긁어모으다 보니 산은 민둥산으로 변했고, 낙엽을 구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이었다. 연탄이 도입되고, 가스가 연료로 사용되면서 차츰 숲은 울창하게 변하였다.
마을이 보성강 바로 옆에 있어서 여름에는 강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다. 바닥에는 고동이 많아서 고동을 많이 잡아 솥에 넣고 된장을 풀고 삶았다. 탱자 나무가시로 고동 알맹이를 빼서 맛있게 먹었다. 강물이 맑아서 물위에 유리를 갖다 대면 바닥까지 훤하게 보여서 고동을 줍는 것이 재미도 있었다. 고동도 줍고 유희도 즐겼다. 공해라는 의식 자체도 없이 자연산 고동을 잡아서 먹었던 즐거움을 요즘은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아쉽다. 각종 문명 혜택으로 잘 살게 되었으나 생명 유지의 근본인 물이 공해로 흐려진 모순에 착잡한 심경이다. 빨리 본래의 청정한 자연 모습이 복귀되기를 바란다. 타락한 인간이 복귀되면 자연도 복귀가 될 것이다. 인간치유와 만물 치유가 병행되어야 할 시급한 상황이다.
그리고 여름에 장마가 지면 강물이 불어서 마을 입구까지 물이 밀고 들어왔다. 거센 강물에 돼지가 꿀꿀거리면서 떠내려가고, 각종 살림도구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구할 수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던 어른들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대비하여 힘들게 키운 돼지가 물결에 휩싸여 떠내려가는 주인의 심정은 터질 듯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렵게 구한 세간살이들이 사라지는 것 역시 주인의 가슴에 절망을 안겨다 주었을 것이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나약한 인간 실존의 모습을 체험하였다.
1968년 9살에 문덕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 위치가 우리 동네에서 3km나 걸어가야 하였다. 어릴 적에는 꽤 먼 거리였다. 동갑내기가 남자 6명과 여자 6명이 함께 등하교를 하였다. 계절 따라서 피어나는 꽃, 벌, 나비, 종달새 소리, 아지랑이, 보리가 자라고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 모내기를 한 벼가 황금색깔로 무르익어가는 모습 등 자연변화를 온 몸으로 확인하면서 우리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집에 오면 배가 무척 고팠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어머니께서 밥상을 차려주실 때까지 참아야 하였다. 어쩌다 삶은 감자나 고구마가 있으면 좋아서 함박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가난한 상태를 박정희대통령이 구제한 리더십을 나는 존경한다. 공동체 지도자는 경제적 곤경과 과학적 무지와 영적 무지를 극복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무탈하게 학교를 잘 다녀서 상을 많이 받은 추억은 지금도 내게 감미롭다. 2학년과 6학년 학기말에는 정근상을 받았고, 제 때에 졸업장을 받았다.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제적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한 친구가 있어서 가슴이 아팠다. 또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녀를 악착같이 공부시키려는 열정을 가신 우리 부모님께 감사하였다. 부모님의 배려로 무사히 중학교 과정을 마치면서 정근상도 받았다. 고등학교 진학은 가난으로 인하여 생각조차 못하였다. 중학교 졸업 후 4년 동안 서울 중곡동에서 섬유 회사에 취직하였다. 먼지가 풀썩거리는 환경에서 하루 종일 앉아서 옷을 라인별로 재봉틀로 주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었다.
2. 통일교회 입교
1975년 서울에서 직장에 다닐 때에, 같이 일하던 사람이 여의도 광장에 가자고 권유해서 6월 7일 <100만 구국 세계대회>에 참가하였다. 60개국에서 130만 여명이 참가하는 아주 큰 행사였다. 그 때는 통일교회를 모르고 행사에 갔다. 넓은 땅에 사람들의 수가 꽉 차서 앞으로 갈수도 없었고 뒤에 서서 참여했다.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하는 태도가 부족했고, 원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으니, 참부모님의 말씀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참관자, 방관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세계인류가 한데 모인 대형 집회라는 그 자체에 감탄하였다.
지나고 보니 그때부터 하늘은 나를 뜻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회사 일을 마치고 저녁에 집에 가는 길에 어느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란 노래가 들려오면 마음이 평안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늘은 죄악 혈통으로 불순한 내 마음을 찬송가로 정화시켜 주셨다. 재림주님으로 강림하신 참부모님을 영접하기 이전에 나도 모르는 가운데 하늘은 나 자신을 정결하게 해주셨다.
성가 35장을 보면 그 당시의 내 심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주여 오소서, 더러운 죄가 가득차 있는 내 맘에 주여 오소서. 불되신 주여 지금 오셔서 죄 태워 정결케 하옵소서. 주여 어서 오소서. 내 맘 속에 아멘!”
메시아는 죄인의 모습인 인간을 성령의 불길로 태워주시고 중생 부활의 은혜를 베풀어주려고 오신다. 하늘은 여의도 집회를 통하여 내 마음의 문을 열어주셨고, 서서히 진리의 서광이 내게 파고들었다. 하늘은 나를 통일교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하고자 육체적 고통을 주셨다. 갑자기 허리가 너무 아파서 퇴사하였다. 일을 빨리 못하므로 인하여 그 다음단계의 작업으로 연결이 안 되었고, 생산 능률이 저하되었고, 결국 내가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내가 회사 일을 하는 중에 부모님께서 이사를 가신 고흥 집을 주소를 보며 찾아 갔다. 서울을 벗어나서 시골로 향하는 나에게 슬픔이나 실망보다는 왠지 모를 잔잔한 기쁨이 있었다.
하루는 통일교회 목사님이 우리 집을 찾아오셔서 우리 가족 모두 가정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 “며칠 후에 3일 동안 부흥회가 있으니까 교회로 오세요.”라고 하였다. 나는 첫날은 의심이 생겨서 가지 못했고, 둘째 날에 갔다. 목사님은 ‘말세와 현세’ 란 제목으로 말씀하셨는데, 나는 교회를 다녀 보지 않은 입장이라서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셋째 날도 부흥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며칠 후에 통일교회 사모님이 찾아와서 부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나에게 “광주에 특별한 교육이 있으니 가보지 않겠니?”라고 제안하셨다. 엄마가 그 얘기를 듣고 수련비를 주면서 “친구도 사귈 겸해서 갔다 오라.”고 하셨다. 나는 남광주 교구에서 일주일 교육을 받았다. 알고 보니 통일교회 원리 교육 수련이었다. 원리 말씀 중에서도 타락론이 가장 은혜롭게 다가왔다. 천비로 전해져 온 죄악이 관영한 인간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되니까 기뻤고, 세상이 곧 선하게 변화될 것으로 믿었다. 수련생들이 돌아가면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였다. 나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남녀가 단체 수련을 받으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였고, 화기애애한 가족 분위기를 체험한 것은 영원히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고흥 통일교회 목사님은 조본환 1800가정이셨고, 아버지와 같은 고향 보성군 율어면 출생이어서 두 분은 친분 관계를 가지셨다. 그래서 자주 우리 집에 가정예배를 드리러 오셨다. 부모님께서 통일교회를 외면하거나 반대하지 않은 것을 보면, 부모님께서도 의인으로서 미리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계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1980년 7월에 전남 교구 제100회 일주일 원리 수련을 받았고, 8월 1일에 고흥 통일교회에서 입교하였다. 그 해 가을에 목사님이 고흥군 마을마다 승공운동을 위해 순회를 하면서, 한마을도 빠지지 않고 다니며 승공 강의를 하셨다. 나도 어깨에 승공연합 띠를 두르고 사모님과 다른 식구들과 함께 다녔다. 명단을 적고, 안내를 하고, 배를 타고 나로도 섬에 가서 목사님이 강의하실 때에도 봉사를 하였다. 마을 구석구석을 다 찾아다니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생활에 젖다보니 차츰 나의 신앙생활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마른 나무라도 불에 자꾸 조이면 마침내 불이 화르르 타오르듯이, 내 심경에도 성령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나는 새벽 기도회와 수요 예배에 참석했고, 원리강론을 자발적으로 공부했다. 교회에 머물면서 7일 금식을 하였다. 금식 3일째 때 엄마가 죽을 쑤어 오셨다. 엄마는 7일 금식의 의미를 잘 모르셔서 나에게 자꾸만 죽을 먹으라고 권유하였다. 자식이 굶고 있으니 엄마는 그저 안타까워하면서 내 입에 죽을 넣어주려고 하셨다. 나는 거절하기가 참 힘들었다.
마침내 7일째가 되었다. 7일째 낮에는 교회 밭에서 풀도 뽑으면서 거뜬하게 금식을 마쳤다. 대개 금식을 하면 육신이 힘들다고 하는데, 나는 금식 기간 중에 육신이 힘든 것을 느끼지 못했다. 금식을 마치고 죽을 먹는데, 하늘부모님께서 인류에게 너무도 귀한 만물을 주셨다는 것을 느끼며 감사한 마음이 충만하였다.
육신의 배는 고팠지만 나의 영인체는 밝게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육적 양식보다도 영적 양식이 더 귀한 것임을 실감하였다. 그 때에 나는 나의 신앙생활의 근력(根力)을 확립하였고, 지금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앙 성장에는 육신의 고통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사탄이 주관하는 육신을 쳐야 죄악의 속성이 성별된다.”는 참부모님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담고서 지금도 안락한 삶보다 가능한 고통스럽고 힘든 뜻길 일에 자진하여 참여하고 있다.
21일 수련회에도 참여하였다. 1981년 1월 8~28일까지 수택리 중앙수련소에서 이요한 목사님으로부터 특별한 심정훈련을 받았다.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말씀과 심정이 내 가슴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비로소 나에게는 정리되고 안정된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 약혼 및 축복
1981년 5월 선화예술학교에서 통일교회 전국 체전이 있었는데, 고흥 목사님 부부께서 같이 가자고 하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서울 중곡동에 있는 선화예술학교에 가서 운동회를 참석했다. 운동회를 마치고 목사님께서 구리 중앙수련소에 가자고 해서 함께 갔다. 구리 중앙수련소에서는 2차 6000가정 약혼을 하고 있었다. 약혼 서류도 제출하지 않았는데, 목사님이 나에게 들어가서 참석하라면서 등을 떠밀었다. 나는 그 때만해도 축복의 축(祝) 자도 모르고,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기에 약혼 장소에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때에 처음으로 참부모님을 뵈었다. 가슴이 설레는 시간이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지금 남편과 매칭을 해 주셨다. 그런데 남편이 나를 싫다고 해서 나는 약혼 장소에 다시 들어가지 않고 고흥으로 내려왔다. 1982년 10월초에 6000가정 3차 약혼이 구리 중앙수련소에서 있었다. 참아버님께서는 며칠 동안 축복에 대한 말씀을 쭉 해 주시고 나서 약혼 매칭을 하셨다. 처음에 매칭된 사람들은 잘 순종하였으나, 나중에는 싫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자 참아버님께서는 “그럼 너희들이 맞추어서 들어 와 봐.”라고 말씀하셨다. 고흥 목사님과 구례 목사님께서 나와 남편에게 “작년에 이미 참아버님께서 매칭을 해 주셨으니까 둘이 함께 들어가 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둘이 참부모님 앞으로 갔더니, 나에게 “이 남자하고 결혼 할래?” 하고 물으셨다. 나는 부끄러워서 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더니 “괜찮다. 나가 봐.” 라고 하셨다. 우리는 참부모님께 경배를 하고 나왔다. 남편은 “이렇게 두 번 만난 것도 천생연분인가 봅니다. 같이 축복을 받읍시다.”라고 말하면서 약혼에 순종하였다.
4. 동원
1982년 11월 24일, 6000가정 부인 동원령이 내렸다. 동원자에게는 세 가지 준수사항이 주어졌다. 첫째, 협회원리 시험을 합격해야 한다. 둘째, 월 1인 전도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 셋째, 공동생활을 하며 전도와 사업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충북 보은 교회로 임지 발령을 받았고, 한달 중에서 10일은 만물복귀를 하여 생활비를 교회에 내었고, 20일은 두명이 짝이 되어 임지에서 참부모님을 알리며 활동을 하였다. 대원들이 기동대 편성을 하여서 충북에 있는 전체 교회를 20일씩 순회하며 부흥회를 하였다. 21개월 전도 활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7차 사업대원으로 4개월동안 활동했다. 임지대원들이 청파동 구협회 본부에서 숙식하며 날마다 떡, 엿, 양말, 수세미 등을 가지고 나가 만물복귀를 하여 120만원을 협회에 납입하고 임지를 수료했다. 1983년 5월 7일자로 제83737호 수료증을 받을 때에는 “하늘 앞에 적지만 충효의 도리를 다했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이 잔잔한 파도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남편은 1973년 3월 1일에 이동한 목사님이 구례교회에 시무 하고 계실 때 전도가 되었다. 좀 다혈적인 기질을 가진 남편은 말씀을 듣고 성령의 은혜를 입어서 양손목 위에 초에 불을 붙여 팔목에 올려놓고 참부모님께 일편단심의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양손목에 흉터가 남아 있다. 총각 때는 아침마다 교회 앞에 길을 매일 쓸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통일교회 청소부인가 생각 할 정도로 뜻에 대한 신념이 강했다.
1년 뒤에는 부부가 다 임지를 나가라는 명을 받았다. 남편은 그때 가구점과 목공소를 하고 있었고 사업이 잘 되었다. 남편은 하늘의 임지 명령을 받아서 출가하는 것을 따라야 할지, 직장생활을 계속해야 할지를 두고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남편에게 “임지를 나가야지요.” 라고 말을 했다. 그랬더니 목공소 일을 미련 없이 중단하였다. 시작 한지 3년이 되어서 이제 막 사업이 잘 되려는 분위기라서 일거리도 많아지는 상황이었다. 구례 화엄사 절에서 1억이 넘는 일거리도 들어왔는데 취소시켰고, 목공소와 가구점을 운영하던 목공 기계와 나무들을 빨리 처분하려고 큰 손해를 보면서 다른 사람에게 다 팔았다. 멀쩡하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정리를 하고 가방을 챙기니까 시어머님께서는 크게 우셨다. 남편은 당당하게 임지인 서울 잠실 동원 교회로 갔다.
동원 기간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참부모님의 승공강연 순회에 동참한 것이다. 1983년 9월 1일에는 소련이 수호이 15전투기를 동원하여서 KAL007기를 공중에서 첩보활동 한다고 오해하여 사할린 상공에서 피격하였고, 269명이 즉사한 사건이 생겨서 세계를 경악하게 하였다. 10월 9일에는 미얀마 수도 양곤의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하여 테러사건이 발생하여 21명이 즉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기류가 극에 달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남북한의 긴장도 절정에 달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세계 적화 전략은 더욱 노골화되어 폭력테러와 만행은 끊임없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런 정세에서 참부모님께서는 <세계와 한민족의 결의!>라는 주제로 한국과 세계를 공산주의 마수로부터 지키기 위한 사자후(獅子吼)를 토하셨다. 12월 14일부터 23일까지 전국 8대 도시 승공궐기대회가 실시되었다. 12월 20일 11시 잠실종합실내체육관에는 18일 개최한 세계평화교수협의회 70개국 의장단이 동참하여 후원을 하였다. 국내최초로 멀티비디오 상영을 하며 참아버님께서 특별 강연을 하셨다. 세계 승공 활동 보고를 박보희 남북미 협조기구 연합총재께서 하셨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품격 높은 대중집회였다. 나는 서울 구본부 교회에서 사업팀으로 만물복귀 활동을 하다가 행사에 참석하여 참아버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 동참하여 은혜를 받은 것은 내가 동원이 되었기에 가능한 사건이었다. 동원의 고통에 비하여 더 큰 복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23일 전남 광주 실내체육관에서 대회가 시작되는 순간, 오전 11시 10분에 미국에서는 참부모님께서 사랑하시는 흥진님이 미국 포오킵시(Poughkeepsie) 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참부모님을 해치려는 사탄은 식구들이 참부모님을 모시는 정성이 지극한 까닭에 침범을 하지 못하고, 차선책으로 미국에서 흥진님을 제물로 데리고 간 것이었다. 한국을 북한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모든 식구들이 정성을 다하는 가운데 결국 미국에서 참자녀님이 희생당하셨다. 한반도 안보를 위해 참자녀님이 희생되셨다는 이런 사실을 속히 한민족이 알고서 회개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알려야 할 것이다.
참부모님과 사탄의 치열한 영적 투쟁을 실감하면서 더욱 전도대원으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전력을 투구하였다. 참가정에서 더 이상 희생을 당하는 분이 안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도대원활동에 불을 붙였다. 인천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원리 비디오 센터로 안내하였다. 원리강의 테이프를 듣는 동안에 나는 밖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아기를 낳는 산모의 심정으로 전도 대상자가 중생 부활하기를 바라면서 기도정성을 드렸다.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너무나 힘든 것임을 체험했다.
남편은 통일교회 재단에 속한 화학 회사가 있는 부천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지붕에 페인트칠이 벗겨져서 기동대원들 중 몸이 가벼운 사람 3명이 올라가게 되었는데, 남편이 몸집이 작아서 지붕에 올라갔다. 그런데 지붕 난간을 밟아서 지붕이 깨지면서 밑에 있는 기름 드럼통 안으로 뚝 떨어졌다. 온 몸에 기름이 묻었고, 통 안에 있는 파이프에 엉덩이를 부딪쳤다. 침도 맞고 용하다는데도 가보고 양약을 써 봐도 낫지를 않았다. 병원에 가 보았더니 허리디스크 진단이 나왔고, 몇 개월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결국 그 곳에서 임지 생활을 마무리하고 수료하였다.
남편은 1984년 4월 8일에 <天意奉從> 표창패(인천교구 84-4호)를 받았다. “위 사람은 6000가정 기동전도 대원으로 활동 기간 중 종합 실적이 우수하여 동원가정에 모범이 되므로 이에 표창패를 드립니다.”는 문구가 남편의 고생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5월 24일에 위의 내용과 동일한 <天意奉從> 표창패를 충북교구 이름으로 받았다. 또 7월 1일에는 충북교구 기동전도대원으로서 표창패(제84-18)를 받았다.
“귀하께서는 충북교구 기동전도대원으로서 평소 뜻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였으며 특히 1983년 6월 1일부터 1984년 7월 1일까지 전도활동과 세계 70.000만 승공 회원확보를 위하여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므로 이에 본 패를 드립니다.”
11월 10일에는 동원기간을 잘 마치고서 이재석 협회장님이 주시는 수료증(446호)을 받았다. 2년간의 기간이 결코 짧지만은 않았다. 고생, 기쁨, 감동, 감탄, 은혜 체험의 기간이었다.
“위 사람은 6000가정 축복을 받은 자로서 소정의 동원기간(1982.11.24 ~ 1984.11.10)을 수료 하였으므로 이에 본 증서를 수여함.”
그리고 충북교구로부터 제7차 협회사업대원 120일(1984.7.4~11.10) 과정 수료증(제7-30호)도 받았다. 이 수료증들은 우리 가문의 영광이고 보배로서 간직하고 있다. 자녀들에게도 부모가 최선을 다하여 천의봉종한 것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자녀들을 뜻길을 가도록 설득할 때에 이 수료증들이 백 마디 말보다도 더 효과가 있었다.
5. 가정출발
임지를 마친 후 1985년 초에 서울 보문동 교회 옥상에 방한칸을 빌려서 3일 행사를 치르고 가정출발을 했다. 호텔처럼 좋은 시설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행복했고 자랑스러웠다. 그로부터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키우면서 생활했다. 우리 부부는 1985년 4월 7일에 보문교회 집사로 임명을 받았고, 10월 1일에는 <가나안 정착을 위한 6구역 가정 교회장>으로서 총동원 임명장(제0071호)을 받았다. 남편은 1986년 7월 12일에 협회의 동원 기간(1982.12.1~1986.6.30)에 사명을 완수한 것에 대해 수료증(제831호)을 받았다. 부족하지만 우리 부부는 명령복종에 최선을 다했고, 수료하는 영광도 얻었다.
가정교회 운동 전진대회(1986.10.12. 본부교회)에도 참석하였다. 11월 9일 대회에서는 <가정교회장 선서문> 낭독이 있었다. 진정한 평화세계, 천국을 창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참가정이 회복되어야 한다. 참부모님께서 사생결단 전력투구의 자세로 싸워서 승리하신 가정교회의 승리기반을 큰 공적이 없이 상속을 받게 된 것은 영광이기도 하지만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지상천국 완성을 위하여 참부모님의 승리적인 터전을 상속 받아 파송된 구역에서 가정교회의 승리자가 될 것을 선서하나이다.”
서울 생활에 자립하고 적응하기 위하여 남편은 직업 훈련 기능사 양성과정을 수료 하였고 전기용접공이 되었다. 서이정과 서이선 딸 둘을 낳았다. 서울 생활이 친숙할 즈음, 1990년에 환고향 명령이 떨어졌고, 우리 부부는 이에 절대복종하여서 전남 구례로 귀향하기 위해 짐을 정리하였다. 내가 먼저 1991년 8월, 뜨거운 여름 햇살을 머리에 받으면서, 5살과 3살 된 두 딸을 등에 업고 앞에 안고, 셋째 아기를 임신한 모습으로 구례에 도착하였다. 외적으로 보면 초라했을 것이지만, 나는 당당했다. 시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지내고 있을 때, 남편은 12월에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남은 짐들을 화물차에 싣고 내려 왔다.
이사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하였는지, 1992년 3월 7일에 셋째가 8개월 만에 출생하였으나 곧 성화하고 말았다. 아기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할 말이 없었다. 가슴에 슬픔이 가득했다. 문득 자녀를 제물로 바쳤던 아브라함과 참부모님의 생애가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용기를 내었다. 청평에 알아보니 8개월 된 아기가 성화한 경우에도 영인체가 영계에 생존한다는 말을 듣고 아기 이름을 서이은이라고 지어주었다. 아마 이은이는 영계에서 잘 성장하여서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을 모시는 효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 하늘부모님성회 교리에 영계에 대한 확실한 가르침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실감했다.
남편은 구례 통일교회 길 건너편에 친척집을 빌려서 목공소를 차려 6년 정도 운영을 하다가 문을 닫았다. 왜냐하면 나무를 미리 사서 말려 놓아야 목수로서 그 나무들을 가공하여 필요한 목재로 재단을 할 수가 있는데 밑천이 없어서 나무를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일하는 건축 현장으로 다니며 열심히 일했다. 이처럼 구례로 내려온 이후로 변변한 내 집도 없이 살았지만, 오직 하늘 섭리에 맞추어 살려다 보니 뜻 안에 남아서 하늘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오직 참어머님과 하나 되어 효정의 심정으로 더 열심히 천일국 안착을 위해 열심히 살 것을 우리 부부는 다짐하였다.
6. 공적 활동
1992년 4월 10일 세계 평화 여성연합 창설대회 및 아시아 평화 여성연합 서울대회를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참어머님께서 기조연설을 하셨다. 세계 70여 개국의 여성대표들이 참석하였고, 한국 여성 등 15만명이 운집하였다. 이 대회에서 참어머님께서는 세계여성시대 도래를 선포하면서 앞으로 역사를 대전환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나는 구례 지부장으로서 여성들을 동원해서 버스 몇 대에 태우고, 딸을 업고 함께 대회에 참석하였다. 나의 그런 정성에 감동을 한 회원들이 여러 가지로 협조를 해 주어서 감사하였다. 우리들은 봉사 활동을 하며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북한에 아이들에게도 의복과 식료품을 전달하였다. 회원들이 CMS 자동이체 모금도 하고 있고 축제에서 모금활동도 적극적이었다. 지금도 그 맥을 잇고 있다.
1993년 4월 21일(음)에 셋째딸 이승을 출산했고, 1994년 12월 27일(음)에는 아들 현석이를 낳았다. 1996년 2월 10일에는 남편이 가정교회장으로서 인정을 받았다(제96346호). 5월 1일에는 내가 참가정 실천운동을 위하여 <순결한 가정 건강한 사회 캠페인의 실행위원>으로 위촉되었다. 미력하지만 창조본연의 아름답고 순결한 천국 창건에 기여하는 존재로 역사에 남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했다. 1997년 8월 3일에는 구례교역장으로부터 우리 부부가 종족적메시아 사명 완수 공로패를 받았다.
“귀 가정은 천명을 받들어 참부모님을 자랑하고 사랑하는 360만쌍 축복을 완수하며 종족적 메시아로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160가정 이상을 축복시켜 구례 3500쌍 축복 목표 달성에 크게 공헌하여 그 노고를 영원히 기리고자 본 패를 드립니다.”
이어서 1997년 9월 6일에는 협회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제4826호). 상복(賞福)이 한꺼번에 안겨왔다. 그 동안 수고한 추억들이 기쁜 모습으로 내 가슴과 머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위 가정은 360만쌍 축복 성취를 통한 천지부모천주안식권 선포에 이르기까지 섭리사에 길이 남을 160가정 축복 완료의 큰 실적을 세워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복귀섭리역사와 한국교회 발전에 크게 공헌 하였으므로 본 상을 드립니다.”
남편과 나는 1999년에 구례가정교회에서 장로(제99-6호)와 권사(제99-7호)의 직분을 부여받았다. 이는 더욱 모심과 섬김의 자세로서 살라는 하늘의 지시였다. 우리 부부는 더욱 더 열심을 내어서 교회의 각종 일들에 최선을 다하였다.
“위 사람은 본 연합에 입교하여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은사 속에 축복을 받고 축복가정으로서 절대 신앙, 절대 사랑, 절대 복종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뜻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본 교회의 장로(권사) 직분을 추대하오니 더욱 충효의 도리를 다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시길 기원하며 본 패를 드립니다.”
1999년 10월에는 통일당의 원리교실에서 실시하는 강사자격 시험에서 원리 전편 초급 강의에 합격하여 자격증을 받았다. 원리강사의 대중화를 통하여 새 진리이면서 궁극적 진리인 원리말씀이 널리 널리 확산되는데 일조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일찍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 외치리라”고 하시면서 새 시대를 맞이하여 복음을 전파하라고 지시하셨다. 그 말씀에 복종한 베드로는 학력이 전혀 없는 어부의 위지에서 수제자가 되었다. 그런 내용을 생각하면서, 나는 비록 학력이 부족하고 언변이 미천하지만, 내 입술로 참부모님께서 사생결단 승리하시어 찾으신 새 진리를 전파하는 것에 큰 보람과 긍지를 가졌다.
2000년 8월에 입적을 위한 40일 수련을 가족 전체의 도움으로 잘 받았다. 입적 수련을 받고 입적 임지를 강남 교구로 배정을 받았다.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남편에게 입적 임지를 가겠다고 하였다. 남편은 멀리 가지 말고 가까운데서 생활하라고 강권하였다. 마침 강남 교구 부인 식구가 곡성이 입적 임지이므로 나하고 서로 임지를 바꾸면 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나는 처음 임명받은 입적 임지로 가겠다고 뜻을 굳혔다. 며칠 동안 남편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일하러 갔다가 머리에 큰 나무토막이 머리에 떨어졌고 피가 흥건하게 흘렀다. 남편은 병원으로 가서 상처를 꿰매고 붕대를 감고 집에 왔다. 나를 부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일 기차표를 사 줄테니 당장에 임지인 강남 교구로 가세요.” 아마도 남편은 상처를 통하여서 하늘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입적 임지에서 2년 6개월 동안 있으면서 활동비와 숙식비를 충당하기 위해 강남 지하철 1번 출구에서 새벽에 김밥을 만들어 팔았다. 1개씩 호일에 싸서 아침 6시에 김밥을 아이스박스에 담아가지고 나와서 김밥 1개를 1000원에 팔았다. 잘 팔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어떤 남자 3명이 다가와서는 그 곳이 자기네 자리이므로 다른 곳으로 가라고 독촉하면서 김밥을 내동댕이쳤다. 정성들여서 만든 김밥이 쏟아져서 흩어졌다. 나는 그들에게 울면서 장사를 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랬더니 “내일 좋은 자리를 알려 줄 것이니 그리로 가서 장사를 하라”고 하였다.
그 날은 김밥을 몇 개 팔지도 못 하고 돌아와서 남은 김밥을 교구에 식구들과 나누어 먹었다. 다음날 김밥을 만들어 1번 출구에 나갔더니 어제의 그 아저씨들이 나와 있었는데 좋은 자리라고 알려주었다. 2번 출구에서 150m에 떨어진 곳에서 팔라고 하였다. 출구에서 멀어질수록 많이 팔지를 못하지만 부득이한 상황이라서 그 자리에서 김밥을 팔았다. 출근 전까지 50개 이상을 팔수 있어서 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 자리를 매일 지키니까 차츰 단골도 생겼다.
김밥을 파느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 자리에 서서 김밥 사갈 사람을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힘든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경험을 통하여 참아버님께서 범내골에 토담집을 지으시고 문밖에서 식구를 애타게 기다리시던 심정이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찾아오는 식구가 얼마나 그리웠을까?”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고된 김밥장사 경험으로 진리를 찾는 참인간, 참자녀를 찾고 기다리신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어서 아주 값진 기간이었다.
새벽에 김밥 장사를 끝내고 교회로 오면, 낮에는 전도 활동을 하고, 교구장님 사모님과 함께 식구 가정 심방도 하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마을 노인정에 가서 축복식도 진행했다. 하루가 매우 바쁜 일정으로 짜여졌다.
내가 임지에 동원되어 있는 동안에 남편은 자립경제를 위하여 분재관리사 1급을 땄다. 2001년 6월에 우리 부부는 푼푼히 모은 돈으로 한남동 공관 증축을 위하여 20만원을 헌금하였다. 참부모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센터로써 사용하시는 공관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원하였다. 2003년 1월에는 청파동 협회본부 건립을 위하여 40만원을 헌금하였다. 지금도 그곳에 갈 때면 적지만 우리 가정의 정성이 포함되어 있는 건물이라서 애착이 간다.
2004년 1월 6일(음)에는 참부모님 성탄일을 맞이하여서 ‘천일국 주인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지금도 우리 가문의 명예를 높이는 가보로 보존되고 있다
“위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참부모님을 모시고 복귀섭리의 길에 동참 하였습니다. 참부모님께서 세워 주신 탕감 복귀의 전통을 상속 받고, 절대 신앙 절대 사랑 절대 복종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참부모님께서 베풀어 주신 축복을 통해 참사랑 참생명 참혈통을 상속받고, 하나님의 속성인 절대사랑 유일사랑 불변사랑 영원사랑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일심일체일념의 자세로 일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승리하신 천지부모님의 전통을 중심하고 영계의 조상과 함께 종족을 복귀하여 하늘의 생활권을 실현하며. 효자 충신 성인 성자의 도리를 다하여 천일국을 봉헌하기로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이에 천일국 3년 참부모님의 탄신일. 특별히 참어머님의 화갑에 즈음하여 본 상장을 수여 합니다.”
2008년 6월에는 전남 교구장으로부터 우수 가정으로 선정되어서 표창패를 받았다. 뜻길을 따르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상과 상패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귀 가정은 평소 뜻에 대한 절대적 신앙심과 참사랑 아래 구례교회 및 전남교구 부흥 성장과 환고향 일족 복귀와 통반격파 활동 등 대사회적 기반을 통한 천일국 창건의 꿈을 이뤄 드리기 위해서, 그 동안 물심양면의 지극정성과 희생 봉사 헌신으로서 하늘 섭리에 큰 힘이 되고, 식구들에게 모범이 되었기에 본 교구장 이임에 즈음하여 치하와 감사의 뜻을 담아 본 패를 드립니다.
2009년에는 하와이 수련을 수료하였다. 참부모님의 부르심 덕분에 말로만 듣고,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낭만의 바닷가가 있는 하와이에 가서 수영도 하고 코나 커피도 마시면서 자랑스럽게 수료하였다. 경제사정으로 남편은 일을 하고 나 혼자서만 갔던 것이 아쉬웠다.
“상기인은 참부모님의 명에 의하여 천일국 8년 10월 10일 환태평양 섭리의 중심인 하와이 킹 앤 퀸가든에서 출발하여 한국 천정궁으로 연결 2009년 2월 20일까지 7일간 실시한 제5회 하나님 섭리사의 책임분담해방권 완성선포 교육의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였기에 본 수료증을 드립니다.”
2010년 1월 6일(음) 참부모님 성탄절을 맞이하여서 자서전 430권 보급 완료자로서 우수상을 받았다. 참부모님께서 주신 표창장 제2010-434호를 우리 부부가 받게 되었다. 이 땅에 재림메시아로 오신 참부모님의 행적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한 결과 표창장을 받게 되어 매우 기뻤다. ‘축 자서전 430권 책임 완수’라는 참부모님의 친필 사인이 있었다.
“위 사람은 만왕의 왕 천지인 참부모님의 명에 따라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430권을 보급하여 종족복귀와 통반격파에 앞장 선 공로가 크기에 그 공로를 치하함”
2011년 9월에는 구례목사님으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제2011-3호).
“위 김인숙은 평소 뜻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심과 참사랑 아래 광주전남 교구 및 구례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분위기를 화목하게 하였으며. 종족복귀와 천일국 창건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여한 공로가 크고 많은 실적을 세워 희생. 봉사. 헌신하며 식구들에게 모범이 되었으므로 그 뜻을 담아 본 상을 드립니다.”
2012년 2월에는 전남교구 특별전도사로 임명을 받았다.
“천지인 참부모님께서 하나님의 해방과 인류구원을 위한 섭리노정을 7사부활 8단완성의 참사랑으로 승리하시고 2013년 1월 13일을 기원절로 선포하셨습니다. 종족과 가인권을 찾아 참부모님과 함께 천일국 완성의 기원절을 승리하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을 결의하면서 흥진님과 대모님의 교구순회에 즈음하여 귀하를 천일국 완성을 위한 활동의 선봉장인 교구특별 전도사로 임명합니다.”
2012년 6월 15에는 내가 먼저 <기원절과 조국 광복을 위한 신종족 메시아 3600명 원리 본체론 30일 특별 교육>을 수료하였고(제3600-1889호), 이어서 남편도 8월 14일에 수료하였다(제212-1648호). 이 수료증을 하사하신 후에 참아버님께서는 성화하셨다. 그런 섭리적 아픔이 있는 수료증이라서 우리부부는 이 수료증을 소중히 간직하며, 볼 때마다 참아버님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추억 속에 되새겨본다.
“상기인은 참부모님의 특별 명에 의하여 기원절과 조국 광복을 위한 신종족 메시아 3600명 원리 본체론 30일 특별 교육을 천기 3년 천력 윤 3월 27일 (양 5.17일)부터 4월26일(양 6.15일)까지 교육 과정을 이수하였기에 본 수료증을 드립니다. 천기 3년 천력 4.26일(양 2012년 6.15일) 참부모님 문선명 한학자”
본체론 수련을 끝내고 귀가하니 여름 장마에 구례가정교회의 출입문 건물 한쪽이 태풍에 의해 지붕까지 날아가고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중환자실에 계신 참아버님 안위를 위해서 매일 밤 철야정성을 드리고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목사님께서 교회 건물 한쪽이 무너졌고, 성전의 피아노가 있는 지붕 위에 구멍이 뻥 뚫려서 비가 안으로 흐른다고 하셨다. 즉시 남편과 함께 교회를 가보았다. 이미 몇몇 식구들이 와서 피아노와 비를 맞은 물건들을 사택으로 옮기고 있었다.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을 모셔야 할 집이 일그러져서 하늘 앞에 송구스러웠다. 참아버님께서 중환자실에 계실 때에 목사님과 식구님들과 함께 성전에 모여 40일 동안 철야를 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 정성을 드렸다. 세계의 식구들이 우리와 동일한 심정으로 정성을 드렸다.
9월 3일(천7.17) 01시 54분 경기 가평 청심병원, 우리의 지극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참아버님께서 성화하셨다. 건강하신 참아버님이시었기에 오래 사시고, 반드시 이 세상에 천일국을 완성하고 영계로 가실 줄 알았는데, 우리의 기대와 염원과 달리 일찍 하늘나라로 가셨다. 식구들은 모두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태였다. <문선명 천지인 참부모 성화> 뉴스가 세계 톱기사로 연일 보도되었고, 15일까지 13일간 청심 평화 월드 센터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참배객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 가족도 참배를 하였고, 백합을 봉헌하였다. 나는 추모의 벽에 “참아버님 사랑합니다. 참아버님 감사합니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성가 7장 동산의 노래가 24시간 울려퍼졌다.
북한에서도 9월 5일에 조의를 표하면서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 무신론자들이지만 참부모님의 진정한 참사랑 정신에 감동을 받은 것이었다. 참사랑으로만이 남북통일과 동서통일이 가능하다는 참부모님의 말씀이 입증되었다.
“자주•평화통일•민족 대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민족의 자주권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애국 투쟁에서 특출한 공로를 세웠으므로 이 상장을 수여함.”
<문선명 천지인참부모 천주성화식>이 거행되었고, 참아버님은 천정궁 뒤편의 본향원에 모셔졌다. 평화월드센터에서 참부모님을 모신 차량이 천정궁 본향원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30년간 뜻길을 따라오면서 참부모님과 관련되는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2006년 천정궁 입궁식 대관식 때에 선포하신 ‘천일국 진성덕 황제 억조창생 만승군황 대평성대 억만세!’를 천일국이 안착되어서 온 세계인류가 참부모님을 모시고 목이 터지게 외쳐야 하는데, 그런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나 분통이 터졌다.
우리 가정은 참어머님을 모시고 더욱 천일국 완성을 위하여 정진하고자 노력하였다. 허술한 교회를 새로 짓기 위해 건축헌금을 하였다. 2014년 1월 2일에는 <구례 가정교회 헌당예배>를 드렸다. 참석한 분들에게 기념타올을 드릴 때에 나는 너무나 행복했고 보람을 느꼈다. 기원절 1주년을 맞이하여 2014년 2월 12일, 천일국 2년 1월 13일에 참부모님의 옥쇄가 찍힌 보자기 <천일국 기원절 천운 영새, 세가세본–0232 서석군 김인숙 가정>을 받았다. 너무나 기뻤다. 영계에 있는 조상들에게도 자랑했다. 지금도 우리 가정의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
나는 2016년에 <통일운동 참가정 구례읍 회장>으로 임명을 받아서 봉사를 하였다. 그리고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부설 <선문교역대학원>의 과정을 이수하여 <성화어린이 및 성화학생의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축복과 참가정 회원 확보를 위한 <430가정 승리>상을 받았다.
남편은 목조건축 분야에서 더욱 역량을 강화하면서 전문가로서 자질을 함양하였다. 그래서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리는 데에도 유익하지만 교회의 건축이나 수리 보수 등에서도 많은 봉사를 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우리 스스로 부단히 자기 계발을 하면서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고 헌신을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이 자녀들에게도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6년 4월 21일(천일국 4년 천3.15)에는 천일국 성물(聖物)을 하사받았다. 천일국 성염, 천일국 성주, 천일국 성토, 천일국 성초, 천일국 라이터가 담겨진 천일국 성물함을 받았다. 참석한 축복가정들은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우리 가정은 하늘 부모님의 창조이상인 인류 한가족 실현을 위해 천일국 3대 경전을 중심한 말씀 훈독의 생활화로 하늘의 심정문화를 계승, 발전시킨다.
우리 가정은 참부모님께서 세워 주신 천리천도의 전통과 위하여 사는 참사랑의 삶을 이웃과 사회에 실천한다.
우리 가정은 삼위기대 기반 위에 2020년까지 430가정 축복을 완료 하여 신종족메시아 사명을 완성한다.
우리 가정은 하늘부모님을 중심하고 3대가 훈독회를 함께 하며, 전통을 상속받으며, 다섯자녀의 절대성을 지키며, 참부모님의 축복을 받아 참가정을 이루며, 참생명 참사랑 참혈통으로 3대축복을 이룰 것을 다짐합니다.
2017년에는 통반격파를 위한 마을회관 훈독회장을 맡았다. 2018년에는 <가정행복 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교회를 위해 우리부부는 제직회장으로서 사명을 다하였다. 2019년에는 <미술심리상담사 2급>을 수료했고, 협회로부터 공로패(제11277호)를 받았다. 그 동안 노력하고 봉사 헌신을 위해 수고한 내용들을 총집합한 실적에 대한 상을 받게 되어서 우리 부부는 너무나 기뻤다.
“위 가정은 천지인 참부모님을 모시고, 하늘부모님의 창조이상 실현을 위한 비전2020 국가복귀섭리에 성심을 다해 왔으며, 신종족메시아로서 통반격파 활동과 훈독가정교회 활동을 모범적으로 실천하여 섭리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기에 본 패를 증정합니다.”
2020년 1월 21일에는 430가정을 위한 신종족메시아 종횡 사명 완수를 하고 확인증(제2020-757호)을 받았다.
“위 가정은 천지인 참부모님께서 천명 하신 신종족 메시아 사명 완수를 위해 종적으로 430대 조상 축복을 완료 하고. 횡적으로는 종족원 430가정 축복 완료 및 43가정 실세화를 추진하였기에 신한국 가정 연합 신종족 메시아 종횡 사명 조건을 충족한 가정임을 확인 합니다.”
2020년 10월 10일에는 참부모님 성혼 60주년을 맞이하여서 천보(天寶)대축제가 열렸다. 우리가정도 참어머님으로부터 천보가정 축복을 받았다. 담양 관광호텔에서 인근의 담양 장성 곡성 구례 4개 교회가 함께 천보 축복을 받았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청심 평화월드센터에서 참부모님 주관으로 영상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지방에서도 똑같이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천보는 하늘의 보배이다. 우리가정은 하늘 앞에 자랑스러운 보배가 되기 위하여 앞으로도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 날에 받은 천보패(KR01334)는 자랑스러운 가보로서 잘 모셔지고 있다.
“위 가정은 천지인 참부모님으로부터 상속받은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의 효정을 중심한 신앙 자세로 신종족 메시아 사명을 완수하여 하늘부모님과 천지인 참부모님께서 이상하시는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을 창건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천보로 등재된 축복가정으로 천일국 백성의 사명을 완성(天寶 登載 祝福家庭 天一國 百姓之 完成)하였기에 본 패를 하사함.
천일국 8년 8월 24일(2021.10.10.일) 문선명 한학자”
또한 이 날에 우리 부부는 참어머님 자서전 210권을 보급하여 표창장(제12815호)을 받았다. 참어머님의 생애와 사상을 인류가 배우고 모심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우리 부부는 자서전 보급을 서둘렀다. 우리 부부는 참아버님 자서전 보급에 이어서 참어머님 자서전 보급에도 전력투구하였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자서전을 읽고 감동을 받는 날이 속히 와야 할 것이다.
“위 사람은 독생녀 실체성신 참어머님의 명에 따라 자서전(《인류의 눈물을 닦아주는 평화의 어머니》) 210권을 보급하여 종족복귀와 통반격파에 앞장 선 공로가 크기에 그 공로를 치하함”
2021년 4월 20일에는 평화애원(平和愛員) 활동 우수자로서 표창장(제21-113호)을 받았다. 그리고 5월 10일에는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참어머님 자서전 430권을 보급한 102가정에 대해 참어머님께서 직접 표창장을 주셨다.
“위 가정은 신통일 한국 국가복귀와 천보섭리에 앞장서 참어머님 자서전 430권을 보급하여 신통일 한국 안착에 기여한 공로가 크므에 그 공로를 치하함”
5월 20일에는 내가 참부모님으로부터 평화대사 위촉장(제21-394호)을 받았다. 천주평화연합(UPF)의 창설자이신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위촉장이 주어졌다.
“천주평화연합은 인류의 보편적 윤리와 가치, 참가정의 실현, 초종교 초국가적 협력과 조화, 평화적인 통일 운동과 새로운 차원의 UN 갱신 운동을 통해 평화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범지구촌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평화대사의 사명은 인종, 국가, 종교의 장벽을 초월함으로써 인류의 오랜 염원인 평화세계를 실현하며,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에서 삶의 조화를 성취하여 사회 발전에 이바지 하는데 있습니다. 이에 천주평화연합은 신통일한국과 평화세계 건설의 동지가 되시는 귀하를 평화 대사에 위촉합니다.”
남편은 그 동안 목수로서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최근에는 은퇴를 하고, 시조(時調) 시인으로서 활동 중이다. 이미 2015년에 시인에 등단을 하였고, 시조 시인 333인이 시 한편씩을 쓴 것을 번역하여 스페인과 미국과 인도에 보급하였는데, 거기에 남편의 시 두 편이 시집 두 권에 게재되었다. 올해는 틈틈이 쓴 100편을 시집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7. 자녀 교육
자녀는 3녀 2남인데 큰딸이 초등 4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여름 및 겨울 방학이 되면 청평 21일 성화학생수련에 참석시켰다. 돈이 없을 때는 빌려서라도 보내서 하늘자녀로 뜻 안에서 살아가도록 지도하였다. 다섯자녀를 그렇게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한자녀도 빠지지 않고 수련을 보냈다. 어떤 방학 때는 세자녀가 함께 청평 수련을 가면, 그 경비만도 100만원 가까이 들었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하늘 앞에 맞는 자녀로 키우기 위해 수련을 보냈다. 첫째와 둘째가 청평 수련을 가니 동생들은 자동적으로 방학이 되면 청평 수련을 당연히 가는 것으로 인식을 하였다. 그래서 수련을 보내는데 것이 좀 쉬웠다.
자녀들이 20일 수련 및 40일 수련에 참여하게 하여서 신앙생활의 기준을 정립하니까 학교생활도 모범이 되었다. 이정이는 1999년 6학년 때에 교내 과학의 날 행사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여중학교 시절에는 성균관이 주최하고 구례 향교가 주관하는 하계 충효 예절 교실에 참여하여 풍부한 인성교육을 함양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들이 훌쩍 성장하여서 부모를 염려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2000년 8월에 입적 수련을 위하여 청평으로 갈 때에 맏딸 이정이가 편지와 소모품도 챙겨주면서 내 건강을 염려해 주었다. 40일 동안에 딸이 챙겨 준 빗, 크림, 지갑. 거울 있는 화장품 캡, 치약을 사용할 때마다 마음에 이는 따뜻한 자녀 사랑이 감동을 밀려와서 날마다 힘차고 밝게 수련을 받을 수 있었다. 가족 사랑의 힘을 새삼 체휼하였다. 내 혼자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40일 수련을 받은 효과가 있었다.
그 때에 큰딸 13살 중 1학년, 둘째딸 11살 초등 5학년, 셋째딸 7살 유치원, 넷째 큰아들 5살 유치원, 다섯째 막내아들 4살 유치원이었다. 학교 병설 유치원에 3명을 함께 넣어 다니게 하고 남편에게 다 맡기고 입적 수련을 받았고, 또 입적 임지를 향하여 갔다. 가사와 자녀 양육의 걱정을 모두 하늘 앞에 맡기고 내가 가야할 뜻길을 갔다. 놀랍게도 내가 뜻앞에 순종한 그 기간을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은혜와 보살핌으로 메꾸어 주셨다. 우리 가족과 동행하시는 은혜에 크게 감사했고, 지금도 감사하다. 그리고 우직하면서도 듬직하게 뜻길을 묵묵히 인내하면서 걸어온 남편에게도 너무나 감사한다.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교육의 범위와 질(質)도 달라졌다. 이정이는 2003년 하계 전국 성화 학생 STF 수련에 참가하였다. 이승이는 여름원리학교를 수료하였고, 자신감을 키웠다. 2005년에는 교회에서 실시한 웅변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였다. 학교에서의 <내 고장 자랑 발표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이선이는 구례군의 <민방위 표어, 포스터, 수필 현상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자녀들이 교회와 학교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발표도 잘하여서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막내 아들 현석이는 2006년 3월, 구례의 영어마을 콘테스트에서 발표를 잘 하여서 우수상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자녀들이 상을 받을 때마다 가족 축하파티를 벌였다. 승리를 한다는 것은 규모의 크고 작음을 초월하여서 수상자와 가족들에게 큰 기쁨을 제공해 주었다. 승리와 행복을 가족들이 공유하면서 우리들은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축복가정으로서 성숙해졌다.
이선이는 선문대학교 신학과 학생으로서 원리강의대회에 출전하여 수상하였고, 목회장학생에 선발되어서 미래가 촉망되는 여성 인재로서 상장하였다. 2007년에는 순결서약식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본인은 하나님이 주신 참된 혈통을 순결한 삶을 통해 지키어 후손 만대에 전수 할 것을 서약합니다.
나의 몸속에 있는 혈통이 역사적 결실체이며, 미래의 꿈이라는 것을 명심한다.
가정, 학교, 사회에서 모범적인 모습으로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도록 노력한다.
순결한 몸과 마음을 지키어 참부모님이 바라시는 순결한 가정을 이루는 초석을 다진다.”
이승이는 내가 하와이로 간 수련노정을 본받아서 하와이로 가서 수련을 받았다. 해외에서의 수련은 자연스럽게 자녀를 국제적 인물로 성장시키는 촉매역할을 하였다. 해외경험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신선한 자극을 주었고, 멋진 추억을 많이 제공하였다.
“상기 이승인은 참부모님의 명에 의하여 천일국 8년 10월10일 환태평양 섭리의 중심인 하와이 킹 & 퀀가든에서 출발하여 한국 천정궁으로 연결 천기 3년 천력 05월 07일(양 6.26일)부터 05월 11일(양6.30일) 5일간 실시한 제 204회 하나님 섭리사의 책임분담 해방권 완성선포교육의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였기에 본 수료증을 드립니다.
천기3년 천력 05월 11일(2012.06.30.일) 참부모님 문선명 한학자”
현준이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전남자연 과학고등학교 조경인테리어과에 진학하였고, 졸업하여 전문가가 되었다. 부모의 삶을 보면서 자녀는 자기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닮게 되는 것을 입증하였다. 하늘을 공경하며 사는 신앙생활도 그러하였다. 현석이가 성인이 되는 교육을 받고 <성인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을 보면서 뿌듯한 보람도 느꼈고,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선언처럼 미래의 훌륭한 천일국 지도자가 되기를 우리 부부는 소망한다.
“나는 하나님과 천지인 참부모님께서 소망하시는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절대성을 중심하고 나의 몸과 마음을 순결하게 지켜 하늘의 전통을 이어가는 천일국의 지도자가 될 것을 다짐합니다. 천기 3년 6월 16일(양력 2012년 8월 3일) 천주 청평 수련원”
이처럼 자녀들 모두가 건강하고 활달하게 친구들과 사귀면서 학교생활을 잘 지냈다. 다양한 종류의 상을 많이 받았고, 졸업에는 정근상이나 개근상을 받았고, 장학금도 받아왔다. 원모평애장학금도 받았다. 교회와 청평을 중심한 성화학생 활동을 비롯하여 3일, 7일, 14일, 40일 등의 수련과 각종 활동에서 자신감을 배양한 것이 학교생활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시절에 이르기까지 동료들과 어울리면서 심정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하였다. 참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형제자매들이 한데 어울려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게 공동생활 훈련이 되었고, 건강하고 성숙한 청년으로 자라는 데 아주 중요한 과정이었다. 이선이는 2015년 8월에 탑건수련도 받았고, 신학 및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이승이는 간호사가 되었다. 현준이는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아들은 군대를 제대하여 국방 의무를 다하였다.
어느덧 이정, 이선, 이승, 현준, 현석이가 성인이 되어서 축복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사위와 며느리를 맞이하고, 손주를 가지면서 하늘부모님의 오묘한 창조 신비를 체휼한다. 국제가정과 인연을 맺으면서 글로벌시대의 축복가정이 되었다. 국제적 차원에서 3대가 같이 살아야한다는 참부모님의 가르침의 중요성을 실감하며 감사한다.
어느덧 자녀들이 지도를 받는 입장에서 지도를 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대학원도 졸업하였고, 교육을 받는 피교육자에서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박사가 되기를 바란다. 자녀들이 어릴 적에는 가난하여서 고기를 충분히 먹이지도 못해서 미안했는데, 이제는 자녀들이 자라서 어버이날이면 가족이 모여서 고기파티를 벌인다. 그리고 아들 서현석과 며느리 김은지가정이 천보 등재를 승리 할 수 있어서 부모와 함께 천보가정이 되었다. 2022년 4월 12일에는 3세 자녀(손주)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서 바라셨던 3대권 축복가정을 온전히 이루게 되었다. 우리가정을 바라보시고서 기쁨을 얻으시기를 기원한다. 차녀 이선이는 선문대학교 통일신학과를 졸업하고, 선문대학원도 졸업했다. 지금은 3지구 UPF사무실에서 공직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빨리 축복가정을 이루고 손주를 낳아주기를 바란다.
큰아들이 2세 축복을 받아 주일 예배도 잘 드리고 있으며, 며느리가 성화교사도 하고, 2세 축복 가정으로서 부부가 함께 효정 증거도 하고, 성가대 찬양도 하며 교회 부인 식구와 홈그룹 활동도 잘 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가 뜻을 위해 충효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하다 보니 하늘이 자녀를 잘 길러주셨고 축복가정까지 이루어주셨다. 이런 인생 노정을 이후의 후손들도 본 받아서 따라주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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