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지동(草芝洞)
-초지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도 초지동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와리면(瓦里面) 초지리草芝里(또는 초지동草芝洞)와 포촌리浦村里(후에 元堂浦)였다가 1912년 2월 5일 초지동과 원당포를 합쳐 초지리(草芝里)라 하였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통합되었고, 4월 1일 와리면이 군자면(君子面)에 통합ㆍ개칭되어 시흥군 군자면 초지리가 되었다. 그 후 법률 제3798호에 따라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초지동(草芝洞)이 되었다.
조선 초에 초지량영(草芝梁營)을 설치하면서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배치하였다가 효종 7년(1656)에 초지량영이 강화도로 이전되었다. 초지량영의 근처에 있던 마을이라 그 이름을 따서 초지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초지동에는 포구인 원당포(元堂浦)가 있어 일찍이 어업이 번성했던 곳이나 신도시개발로 대부분의 마을이 폐동되어 반월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일부는 택지로 조성되어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 황새부리
황새부리처럼 가늘고 길어서 생긴 이름이다.
• 가나골
갯머리 위(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일명 웃말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작은 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이곳은 신도시개발 이전 초지동 주민들이 군자면사무소, 도일시장 등을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가나골은 우계이씨, 여흥민씨 등이 세거해 20여 호 살았으나 1979년에 폐동된 후 공업단지로 조성되었다.
• 갯머리
큰별망 북쪽에 있었던 취락으로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하여 ‘갯머리(또는 개머리)’라 불렀다. 어촌(漁村)이었던 이곳은 만선을 기원하는 장승놀이가 행해질 만큼 어업이 번성했었다. 갯머리는 우계이씨, 여흥민씨, 청송심씨, 강릉김씨 등이 세거했으며, 폐동 때(1979)에는 12호가 살았으나 신도시개발에 따라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광일염직·우성염직 등이 들어섰다.
• 더덕구지
옛 이름은 더덕고지라고 한다. 더덕은 초롱꽃과의 다년생 만초로 식용과 더불어 한방에서 거담이나 건위 등에 약재로 쓰이는 식물이다. 곶(串)은 바닷가에 뾰죽하게 내민 땅이니, 즉 더덕이 많이 자생하는 곶이므로 더덕고지라 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더덕구지’로 되었다 한다. 갯머리 동쪽에 위치해 있던 더덕구지는 홍해최씨를 비롯해 우계이씨, 남양홍씨, 여흥민씨 등이 세거해 모두 4집이 있었으나 1979년에 폐동된 후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오일섬유·세화섬유·(주)대농 등이 들어서 있다.
• 둔배미
큰백중 동북쪽에 위치해 있던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원당리(元堂里)라 칭했다. 이곳은 군사의 요새지여서 둔전[屯田(군량 또는 관아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국가가 지급한 토지))과 둔전병[屯田兵(군사상 중요지이거나 또는 군대들이 오래 머무는 곳에서 농사를 짓는 병졸)]이 농사짓는 논배미가 있었으므로 ‘둔배미’라 불렀다고 한다. 또 초지동에서 취락이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원당(元堂)’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또한 포구가 제일 먼저 생긴 곳이라 하여 ‘원포(元浦)’ 또는 ‘원당포(元堂浦)’라 칭하기도 하였다.
둔배미는 밀양박씨, 연일정씨, 천안전씨 등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서쪽지역을 양지쪽, 동쪽지역을 응달쪽이라 하였다. 폐동 때(1977)에는 80여 호의 대촌(大村)이었다. 신도시개발로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1989년 9월 9일 제6회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주민들(주로 어민)이 만선 취향을 기원하며 놀던 ‘안산둔배미놀이’를 재연하여 영예의 종합우수상을 수상하였다. 둔배미놀이는 2016년 안산시향토유적제 30호로 지정되었다.
• 벗둥지
소금(자염)을 굽던 자리를 벗둥지라고 하였다.
• 신촌(新村)
둔배미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본래 둔배미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한국전쟁 직후 황해도 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새로 취락을 형성되었다가 현재는 전원주택지로 변모하였다.
• 원초지(元草芝)
작은별망 북쪽에 위치한 바닷가로 조선시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鎭)을 설치했었는데, 이를 사곶영(沙串營) 또는 초지량영(草芝梁營)이라 불렀다. 이곳 초지진은 효종 7년(1656)에 강화도로 이속되었다. 원초지(元草芝)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마을로 남쪽지역은 아랫말, 북쪽지역은 웃말이라 불렀다. 여흥민씨가 배판한 이래 우계이씨 등 23호가 살다가 1979년 폐동되어 안산스마트허브로 조성된 후 동일제봉·유신염직·신진나염 등이 들어섰다.
• 작은백중
가나골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큰백중에 살던 주민들이 분가하면서 새로 건설한 마을이라고 한다.
• 작은별망
큰별망 아래(동남쪽)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작은별망(別望)’이라 불렀다. 이곳은 1950년대에 이르러 둔배미에 둑(제방)을 막으면서 염전(鹽田)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자 둔배미에서 어업활동을 하던 어민들이 정착하면서 점차 번성하기 시작했다. 폐동 때(1979)에는 15호 남짓 살았으나 신도시개발에 따라 안산스마트허브로 조성되었다.
• 작은주정
큰주정(舟井) 동쪽에 위치한 5호 남짓한 작은 마을로, 한국전쟁 직후 황해도 등지의 난민들이 정착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 장승거리
예전에 장승이 있었다. 둔배미마을 위쪽이다.
• 큰백중
구전에 따르면 작은백중 소재 방농장(사슴목장) 뒤에 1백 명의 중이 있었을 만큼 큰 절이 있었다고 하는 설과, 처음 마을이 이루어졌을 때 마을의 인구가 1백명[百衆]이므로 ‘백중’이라 불렀다고 한다는 설이 있다.. 작은백중 동쪽에 있는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으로, 신도시개발에 따라 신안산대학교가 들어섰다.
• 큰별망
큰별망(別望)은 경기도 기념물 제73호인 ‘별망성(別望城)’ 주변에 있던 마을이다. 이곳에 김씨란 어부가 살다가 1970년대 초에 내무부의 집단 마을화 시책에 따라 김씨가 작은별망으로 이주할 때 폐동되었다. 김씨가 살던 집터는 신도시개발 때 해안순환도로로 편입되었다. 별망성은 남양만에 걸쳐 해안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해안을 따라 두 작은 구릉 사이에 돌로 쌓은 해안산성이다. 별망은 초지진의 별망군(別望軍)들이 망을 보던 망루가 있었던 곳이어서 별망이라고 불렀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삼국시대 때 어느 어부의 아내가 바다로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이곳 산봉우리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풍랑을 만난 남편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러자 여인 또한 이곳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산을 별망산(別望山)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 또한 산명을 따서 ‘별망’ 또는 ‘별망뿌리’라 불렀다고 한다.
• 큰주정
큰주정[舟井]은 한국전쟁 후 대림산업에 의해 약 50정보의 염전을 설치해 1년 남짓 소금을 생산하다가 농림부에 의해 농지로 개간되었는데, 1954년에 황해도·평안도 등지의 난민 20여 호가 들어서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 그 후 작은주정 등지로 주민들이 이주하자 호수가 차차 줄어 폐동 때(1977)에는 7호에 불과하였다. 주정(舟井)이란 마을 명칭은 마을 초입에 샘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민가가 있기 전 뱃사람들이 식수로 이용했다 하여 ‘주정(舟井)’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도시개발로 경보주식회사·경성방직 등이 들어섰다.
• 한학골[閑鶴谷]
갯머리 서쪽에 위치해 있던 마을로, 삼태기처럼 오목한 곳에 자리잡은 마을로 흡사 학이 한가하게 놀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한학골[閑鶴谷]이라 하며, 연음되어 하나골이라고도 부른다. 여(呂)씨가 배판한 이래 여흥민씨, 강릉김씨 등이 세거해 온 8호 남짓한 작은 마을이었다. 신도시개발에 따라 1979년에 폐동된 후 반월공업단지로 조성되어 한독섬유·일신방직ㆍ선도전기 등이 들어섰다.
• 화랑유원지(花郞遊園地)
단원구청과 와스타디움 북쪽에 있는 유원지로 신도시 개발전에는 ‘화랑농장’으로 불리던 곳이다. 6·25 한국전쟁중인 1952년부터 휴전 후인 1955년까지 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 일대에 한국전쟁중에 부상당한 상이용사들이 자활원을 만들어 ‘화랑농장’이라고 했는데, 화랑농장의 화랑(花郞)은 신라 화랑도에서 따온 말로서, 나라를 구한 화랑의 정신을 뜻한 것이다. 이들 중 일부가(20여명) 1956년 안산 초지동(일부는 원곡동)으로 집단 이주하여 오면서 이곳이 ‘화랑농장’ ‘화랑저수지’ ‘화랑낚시터’ 등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1980년 안산신도시건설로 화랑농장의 30여 가구는 전국으로 흩어졌고, 1986년 안산시 승격 후 이 곳이 유원지 지역으로 도시계획 되어 지금의 ‘화랑유원지’로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