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산물, 손목시계 - 오기환
새벽 6시에 폰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벽시계를 보니 6시 정각을 가리킨다. 그런데 손목시계는 03시를 가리킨다. 시계를 잡고 흔들어 본다. 초침이 움직이면서 살아있는 시계임을 알게 된다. 시계가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계는 자동시계이다. 흔들어 태엽이 감기게 되면 초침이 움직이면서 시각을 알려주는 것이다. 대체로 고급에 속하는 시계들은 자동이다. 그렇다고 고가의 명품 시계에 속하는 것은 못된다.
이 시계는 45년 전 아내와 결혼하면서 구입한 혼수품의 하나이다. 당시 수업하던 학급의 학생 어머니가 운영하는 상점이 있었다. 그 아이는 공부도 잘 했지만 인성이 좋아 여러 선생님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아이의 행동이나 언어로 가정교육이 짐작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미래가 기대되는 학생이었다.
그러던 차에 결혼을 앞두고 나의 경제적 사정, 결혼식 비용을 아껴야 하는 사정을 이야기하니 방문을 허락했고 기본적인 신랑 신부의 혼수품을 대략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그때 내가 바라던 것은 오직 이 시계뿐이었다. 당시 결혼하는 젊은 세대의 남자는 오메가 손목시계를 선택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것도 중 저가에 속하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이 시계는 명품에 들지 않았다. 명품은 대략 1백만 이상 호가를 했다. 그런데도 정품이 있는가 하면 가짜도 있었다. 지금처럼 수입 규제가 없었던 시대였다. 그래서 일반적인 문외한의 경우, 제품의 신뢰도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지금과 다른 시대였다. 그래서 이 상점을 선택했고 믿을 수 있는 신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입한 뒤로 한차례 고장도 없이 잘 지냈다. 그리고 오래 보관하여 온 셈이다. 당시 다른 사람들의 비슷한 제품은 고장인지 어찌 되었는지 소식이 없거나 손목에 차고 있는 제품을 보지 못하였다.
십수 년이 지나 80년대 후반을 맞으면서 전자시계가 대세를 이룬다. 자연히 이 시계 또한 장롱에서 잠자는 처지로 바뀐다. 전자시계는 여러 개로 늘어났다. 값싼 플라스틱 시계를 비롯하여 금장의 가짜 시계도 있다. 동료 중에 차고 있는 시계가 부러워 옥션에서 구입한 시계는 정품처럼 금빛을 반짝거리는 금장이다. 전자시계답게 정확성은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밧데리도 10년 주기로 교환을 하는 정도로 오래가는 제품이라 애지중지했다.
그러다가 80년대 말에 선물받은 론진 시계는 고상하면서 귀족의 품격과 티를 많이 냈다. 그런데 시계줄 교체가 어렵고 힘겨워 불편함이 드러났다. 그 뒤로 숱한 전자시계의 맛을 느껴보면서 손목에 찼지만 전자시계의 시각은 정확하여 별로 불만을 없었다.
45년이 지난 세월이지만 최근에 와서 이 시계를 다시 손목에 걸었다. 아주 충성스럽게 잘 간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한번씩 흔들어 주어야 제 궤도를 유지하는 것이 험이다. 하지만 45년이 지난 이 유물이 내게는 하나의 인생 역사로 보아야 하는 물품이 되었다.
중학교 2년 때이다. 아는 형이 손목시계를 내게 선물로 주었다. 물론 어머니가 그 댓가를 치루었다. 그 시계는 내게 몸살이 날 정도로 뒷 뚜껑을 열어 손을 보면서 괴롭혔다. 완전히 고장이 나서야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계수리소에 가서 문의하니 이제 이 시계는 수명이 다 되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 시계는 제법 고급 시계에 속하는 양 외모도 품위가 있고 또 믿음의 신표로 충성스럽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고 소중하게 다루게 되는지 모른다. 일설에는 이 시계에 대해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스위스를 여행하던 늙은 부부가 있었다. 이들도 결혼 때 이 시계를 서로 선물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나라를 여행 중에 갑자기 손목시계가 멈춘 것이다. 그래서 같은 상표가 있는 수리점을 찾았던 모양이다.
“시계가 고장입니다. 수리를 부탁합니다.” 시계 수리점 주인은 두분 여행객을 반갑게 맞아 편히 쉬게 하고는 차를 대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새로운 시계 케이스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 부부 여행객에게 내미는 것이다.
“저는 이 새 시계를 구입할 돈이 없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그냥 드리는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손님께서 우리 회사의 이 시계를 차고 수십년간 선전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선전비용으로는 좀 부족하지만 새 시계를 드리는 것입니다.”
상표의 중요성도 인정되지만 그 상품의 신뢰와 믿음과 기술력을 세계에 자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나라의 이미지와 국격으로도 인정받는 것이 아닐까. 한국에서도 상표의 오너나 주인이 언제쯤 이런 신뢰의 미덕과 미담을 보이는 날이 올련지 기다려진다.
또 하나 일화를 생각한다.
옛 전쟁터에서 유해를 발굴하던 중에 있었던 이야기다. 한 병사의 유해를 헤치다가 손목 쪽에서 시계를 발견한 것이다. 결혼 선물로 구입한 시계였던 모양이다. 고급시계에 속하는 때문이다. 이 젊은이는 불행하게도 이 전선에서 생을 마감한 셈이었다. 그는 생을 마쳤지만 녹이 쓴 채 온통 흙을 뒤집어 쓴 이 시계가 그의 영혼처럼 남아있었다. 발굴단이 흙을 털어내고 흔들어 보니 초침이 움직이는 것이다. 시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을 본다. 이 시계에서 제작사의 세계적인 기술력과 신뢰가 증명되는 순간이 아닌가.
오늘도 하루에 두어 번 정도 시계를 흔들기도 한다. 자고 나면 이 시계를 흔들면서 태엽을 감아주는 작업을 계속한다. 그리고 잠을 청할 때도 그리한다. 이 시계가 고장없이 지금도 힘차계, 그리고 한결같이 조용히 시각을 알리는 것이다. 45년 전, 그 당시 그 학생 어머니의 신뢰가 시계의 신뢰와 함께 45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고장 없는 시계로 스위스의 장인정신과 믿음을 고맙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나도 그 어머니처럼 주변의 사람들에게 신뢰와 믿음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인생으로 살아갔으면 하는 소망을 이 시계와 함께 기대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