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문학은 예술의 한 장르요, 예술은 곧 미의 創造다. 즉, 자기의 思想과 感情을 글로 써 독자들에게 感動을 주고 理解(설득·동조)를 구하는 문자예술이다. 허나 결코 언어의 유희이거나 意識의 등가물(等價物)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의식과 形象을 複合體로 한 새로운 질서창조다. 과학은 질서를 위해 존재하지만 예술은 그 질서를 송두리째 파괴하고 새로운 미를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神性'이나 후자는 '人性'이다.
다만, 이 후자를 얼마나 신성에 가깝게 탁마(琢磨)하고 정제(整齊)하느냐가 위대한 예술성의 관건이다. 따라서 문학의 文學性 여부는 문학적 기준으로 판별되나, 그 위대성의 결정소(結晶沼)는 '위대한 정신적 지주'라고 한 TS 엘리엇의 충고를 나는 한국문학의 당면 에피그램이라고 생각한다.
2. 文學과 聖書
잠시 말을 돌려 기독교의 '성서'를 많이 읽어 보라 권하고 싶다. 왜? 성서가 곧 문학이요, 이처럼 좋은 스승이 또 없겠기에다. 아니 성서처럼 문학을 하라는 말이다.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 아가서 등은 세계문학의 白眉요, 4복음서를 비롯한 신구약 66권이 다 이를 토대로 한 훌륭한 文學書들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이자, 위대한 예술가시다. 더욱이 성서는 그의 말씀과 섭리를 무려 1600여 년에 걸쳐 마태 마가 누가를 비롯한 35명의 역대 유명작가들을 동원해 쓴 세계적 명저(名著)다. 보아라, 이처럼 흥미진진하고도 일관되게 '眞理'로 주제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이 세상 어디에 또 있는가? 그래서 나는 늘 좋은 글을 쓰려면 '성서'를 되도록 많이 읽으라 권하고 있다.
이런 배경하에 기독교문학은 태동됐고 이를 이해하라. 실제로 르네상스적 人本主義, 進化論的 思考의 逆機能이 빚은 이 시대 逆天的 문명사의 심층에서, 기독교문학의 선한 應戰은 문학 이상의 차원에서 요청돼온 召命이다. 그 핵심사명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그 '말씀'의 복원이다. 말씀, 곧 하나님을 훼손하는 역천적 언어와의 선한 싸움을 요구한다. 고로,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이은 인류문명사상 세 번째 큰 혁명기인 오늘날의 지식, 정보화사회에서 기독교문학의 사명이란 실로 막중하다.
21세기는 20세기말의 포스트모더니즘, M, 바흐친의 사회형식주의, 페미니즘 등에 이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기독교문학은 택일론 보다는 병합론, 실체론 보다는 관계론, 단일론 보다는 혼합론이 강조될 새 세기 상대주의적 多價値社會의 도전에 어떻게 대화하고 응전할 것인가를 심각히 고뇌해야 할 때이다.
2. 文學的 삶과 사랑
1. 왜 文學을 하는가?
인간은 표현의 욕구를 가진 존재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느낌이나 의지를 밖으로 드러내려 한다. 일상적인 어법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의지, 권유, 명령, 희노애락의 감정 등을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청자의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문자를 통한 표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면서 독자의 간접적인 정서의 변화와 대응을 일으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 표현의 욕구를 위해 존재하는 게 바로 말, 언어다. 언어란 사실 고독한 개체다. 다만 인간과 세계 그리고 타인 사이에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어 줌으로써 고독을 해소하고 연대감으로서 안정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최선의 기능이 된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정서, 정보, 명령, 친교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능을 활용하되 더 나아가서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 문인(시인)의 존재 이유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핑계와 이유를 머리에 이고 가슴에 안고 산다.
이래서 못한다, 저래서 안 하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환경과 여건을 아쉬워하며 자신이 도태됨을 합리화하면서 살아간다.
2. 문학은 곧 삶과 사랑의 實體(표현)다
그럼 당신은 왜 문학(시 쓰기)을 하려고 하는가?
한마디로 '살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문학은 곧 나의 삶을 보다 아름답고 진실 되고 윤택하고 향기 나게 하기 위해서다. 하여 비문인(일반인)들이 가지지 못하는 심리적 결핍상태 즉, 규정화된 세계에 대한 반발과 반성, 그리고 심미적 현상의 드러냄 등이 우리로 하여금 문학(시를 쓰게)을 하게 한다. 그러므로 문학적 삶은 아주 이상적 삶이요, 더 없이 순수하고 격조높은 지고지순한 사랑의 실천이라 하겠다.
문학은 크게 나누어 '운문학'과 '산문학'으로 구별할 수 있다. 삶과 사랑에도 똑같은 두 가지의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운문이 시적이고 낭만적이고 음악적인 삶(로만티즘- 서정적인)이라면 산문은 좀 회화적이고 철학적이고 사고적인 삶(드라마틱한- 소설적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문학을 하든 어떤 삶을 살든 그건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몫이다.
시(文學)는 나의 삶을 정화시키고 나아가 세계를 변혁시킨다. 그것은 점진적이고 내면적인 변화를 말한다. 이제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이 존경하는 시인(文學家)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이 시(文)로서 나타내고자 했던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인식, 그 시인(作家)이 살았던 행적들을 생각해 보라. 그 중에는 세인의 주목을 받고 세속적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평생을 음지에서 고독한 글쓰기를 계속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정치가,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과 정책결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들은 고도화된 정보를 움켜쥐고 세계를 이끌어 간다. 그 속에서 우리 문인들은 고독한 싸움을 펼친다. 조용히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씩을 문학을 통해 감동케 하고 변혁케 해야 한다. 말하잠 시인은 꿈을 실현시키려고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꿈을 심어주려고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 당신이 시나 산문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게 되거나 원고지와 펜을 준비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어떤 보이지 않는 세계,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미결정의 세계가 당신 앞에 도래되고 있음을 알라. 그 세계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나 통념으로는 코드화 되지 않는 고독한 세계이고 이제 그 세계를 탐색하는 임무가 시를 쓰고자 하는 당신에게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아래에 역설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시장에 가서 옷을 한 벌 삽니다. 고르고 골라서 나름대로 내게 어울릴 듯한 새로운 걸 샀습니다. 유행이란 무엇입니까? 흘러가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 유행에 따라갑니다. 왜일까요? 고독해지지 않으려는, 타인과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양식이지요. 그 다음날 나는 새옷을 입고 출근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옷을 입고 왔습니다. 순간 내 기분은 어떨까요? 안 좋을 겁니다. 나와 생각이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또 있다는 불쾌감이 엄습하지요."
예술의 본질은 새로운 眞善美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나만의 독특한 창조(창작)이어야 한다. "문학이 말합니다. "이리로 오시오! 이미 구성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라 아주 다른 새 세계가 있다. 이곳으로 오라!"고- 누군가 묻습니다. 당신은 왜 시(문학)를 쓰게 되었습니까?" 이때 바로 이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그저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 묘사에 치중하며 시작을 할 것이다. 사실은 저도 그러다 어느 새 40년 세월을 보내 이제 문단 40년 교단 40년이 되었습니다. 근데 재미있게도 부부의 연까지도 40년을 맞게 되네요!
만약 다른 사람이 자신을 탐색하고, 확고한 세계인식을 바탕으로 일상적 세계의 또 다른 의미를 드러내는 성과를 거두었다면 나는 오로지 이 시 쓰기를 통하여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가 있음을, 그리고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각을 열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외람되지만 그것이 곧 삶이요 내 사랑이었음을 자신 있게 고백한다.
3. 삶이 곧 사랑이어라!
고로 문인의 삶은 곧 사랑 그 자체이어야 한다. 되도록 "나부터 먼저 모두에게 사랑을 주어라. 그래야 한다. 그게 참 시인이요, 참 문인이다. 문학은 바로 제2의 성서를 쓰는 일이기 때문에다. 보상을 바라지 말고 무조건 주고 베풀라! 신앙적으로 주라! 성서는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것도 빚지지 말라 하였다. 사랑의 빛은 돈이 들지 않는다.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갚을 수가 있다. 우리 문인들부터가 먼저 서로 사랑을 나누며 베풀라. 서로간에 이해와 화해의 관계가 되라.
*그럼 잠깐 여기서 내 첫사랑부터 조금만 얘기해볼까요!-(생략)
"인식한 만큼, 느낀 것만큼 써라!" 이것이 곧 나의 시 쓰기의 철칙이다.
훌륭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인식 방법의 새로움과 범위의 확장이 우선되어야 하고 성찰이 요구된다. 관찰과 깊은 사색이 없이는 좋은 글을 생산해내기 어렵다.
다시 여기서 잠깐 미당(서정주)님의 '신부(新婦)라는 시 한편을 감상해보자.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누곤 '고 신부 년 발(망)칙하니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 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시 시대에 살고 있다. 시의 형식에 제한을 가하고 언어사용에 압운, 각운 등의 규칙성을 부여하는 것이 정형시라면 자유시에는 그런 제한이 없기 때문에 "과연 이것이 시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겨날 수도 있다. 시적인 것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산문의 특성을 살펴보면 시(적)의 특성이 잘 드러날 수도 있다. 위의 '신부'는 산문시이다. 근래에 들어 산문시, 더 나아가서 이야기 시에 대한 실험과 관심을 가진 시인들이 많다. 그런데 아직 산문시에 대한 정확한 이론 정립은 되지 않은 상태다.
"나는 맨발로 계단을 오른다. 붉은 닭들이 몰려온다. 그렇게 고이는 시간의 연기 꿈의 힘 때문에 나는 다시 내려온다. 내려오면 난파하는 귀 하나가 맴돌고 맴돌다 죽는다. 그래서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의 안개, 하얀 식물의 등불, 나는 무서워 곧장 또 뛰어 내려온다. 내 정신의 폐가 바람 속에 맴돌고 맴돌다 죽으면 또 죽은 기억이 맨발로 계단을 오른다. 아아 더럽다 오르지 못하고 곧장 올라간 것처럼 생각하면서 굴러 떨어지는 내 두개골은 아마 내일 아침엔 다시 맨발로 계단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시는 운문이고 수필은 산문이다. 그러나 산문시와 산문은 다르다. 산문의 문장 서술은 계기적 즉 사건의 시작부터 종결까지 원인- 결과의 고리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시(산문시)는 비유와 상징을 사용함으로서 사실의 전달이 아닌 聯想의 심층을 고려하게 한다.
위의 시는 여필종부의 전통적 관습과 기다림의 승화, 또 다른 면에서는 인간들의 오해에서 비롯되는 비극적 삶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면서 결국 우리에게 슬픔의 정조를 환기시켜 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연상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잠깐 길을 돌려서 철학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자. 영국의 근세 철학자 흄 (D.Hume, 1711∼1776)은 우리가 지각하는 내용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누고 있는데, 인상이란 우리의 내적 감정이나 외적 감각에 최초로 나타나는 생생한 표현이고, 관념은 이 인상들을 마음속에 재현시킬 때 의식되는 덜 생생한 지각을 말한다.
우리의 지식은 관념들의 연합에서 비롯하게 되는데 단순관념에서 복합관념으로, 복합관념에서 체계화된 지식으로 연관지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관념연합의 법칙(연상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유사, 시공에서의 인접 및 인과의 법칙이 있다. 어떤 그림을 보면 그 실물을 연상하게 되고, 유사한 관념끼리, 인접한 관념끼리 결합되어 가는 과정이 우리의 관념을 형성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시를 읽을 때 단어나 문장이 지시하는 표면에서 발생하는 2차적인 정조와 분위기 그리고 비유에 의해서 새로운 연상을 탄생시키고 있다.
다시 한 번 시와 산문의 차이점을 요약 설명해본다.
1. 사고의 단위가 산문은 문장이고 시의 경우에는 행(line)이다. (시의 리듬감)
2. 산문은 객관적 정보 전달과 실용적 가치에 우선을 두지만 시는 심리적 반응을 요구한다.
3. 산문은 사고의 단위가 연대기적이며 시는 연상적 기법을 따른다.
4. 산문에는 리듬이 없지만 시는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
5. 산문은 의미의 확산을 시는 압축을 생명으로 한다.
3. 結(Epilogue)
현세는 정보혁명의 시대다. 패러다임과 가치관 변혁의 파란이 예상된다. 소품종 다량생산 체제가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바뀌듯이, 체제와 가치관의 변혁이 일어날 때다. 통일된 한 목소리보다 다양한 불협화음이 찬양받는 시대다. 말하잠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시대상이 그 한 예이다. 이것은 새 세기의 문명사가 자유와 다양성의 극한을 구가하는 상대주의의 향연으로 장식될 징조를 의미한다.
개성과 자유와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는 찬양 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자유사회가 추구하여 마지않는 불멸의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관의 일률성(Einheit)이 완전히 붕괴된 사회는 자기 통제력을 잃고 파멸될 수밖에 없다. 가치관의 아나키즘은 인간을 원색적 이기주의자, 그런 아인(亞人, subhuman))으로 전락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삶과 역사의 수평적 행진만으로 그 영광을 수확할 수 없다.
또 하나, 문학은 소통이다. 서랍 속에 있는 그리고 가슴 안에 있는 글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은 서로 통해야 하는 것이다. 글로 내놓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읽고 감동하고 서로 통해야 비로소 문학이 완성된다. 그리고, 내 마음의 행복을 노래하기보다는 내 마음의 상실을 풀어 헤치라! 누추함, 단점, 보이기 싫은 치부, 열등감, 이 모든 허점들을 미련 없이 드러내 보일 때 참 진실과 생명이 싹트게 된다.
생각과 말, 행동, 이 삼위일체를 지금(현재)에 주력하라. 현재를 기준으로 최대한의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라.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알아주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길이고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라!다.
끝으로 시인은 마음 밭을 가꾸는 사람들이다. 사명감, 책임감을 가지고 시를 쓰라. "詩"란 최대한 함축된 서정적 언어로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감동적으로 전달하는 문학의 한 장르다. 흔히 시(詩)를 언어(言語)의 사원(寺院)이라고 말한다. 그만치 거룩하고 경건되어야 한다. 고로, "좋은시란" 시혼(詩魂)과 인혼(人魂)의 입마춤이어야 한다. 하니 님들도 부디 생각을 바꾸라!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삶이 바뀌어지며 그 사람의 운명까지도 바뀌게 된다. 하여 모쪼록 새로운 사람, 새로운 새 삶을 살으라!-
*강사(金南雄)소개
*1943년 평택출생, 호는 心夕. 평택중·고, 동국대, 경기대대학원 졸업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박목월, 박두진, 서정주 추천), 시인, 수필가, 소설가
*광명문협·광명예총 회장, 경기도문인협회 회장, 세계시문학연구회 명예회장 역임
*월간 '문예사조', '문학21' 주간 역임. 현재는 '지구문학' 편집인, '백두산문학' 고문
*현재 광명 안서중학교 교장을 거쳐 충현고등학교 교장 및 한국민족문학회장
*시집: '내 잔이 넘치나이다' 등 5권, 수필집: '네 신을 벗어라' 등 4권,
소설집: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등 3권, 평론집: '만해 한용운론' 등 3권
*수상: 경기도문화상, 경기문학대상, 경기예술대상, 경기인대상, 경기신지식인대상,
경기도민대상. 광명시민대상, 한국자유시인협회대상, 김시습문학대상, 세계시문학
대상(왕관상) 등 20여 문학상 수상